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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11. Só) / Texto : Lucas 4:24-30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오래 전에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오르간은 펌프질을 해서 연주를 해야됩니다. 그런데 오르간에 펌프질을 할 사람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이 그 펌프질을 하겠노라고 자원했습니다. 왜 그런 보잘것없고 천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작곡가는 “음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결코 보잘것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봉사의 일이라면 가장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모두 뜻 깊은 것입니다.

Vostede! 우리 주앙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만 주일날 설교하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좀 아시는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설교하는 저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본문 4장 18절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고 4장 22절에 그 반응이 나옵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은혜로웠습니다. 요즘 설교학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이쯤해서 예수님의 설교는 마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흥미와 관심이 고조되었고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치시지 않고 더 하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부분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얻으셨던 관심과 은혜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떨러지에서 예수님을 밀쳐 내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 배워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인기나 얻으려고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말씀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것은 받으면 생명이요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생명의 말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절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6번만 나옵니다(12:37, 18:17, 29, 21:31, 23:43). 그만큼 이 말씀의 중요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전 엘리야 때에 있었던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때에 있었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엘리야와 사렙다의 한 과부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몇 년(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요단강 동편 그릿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며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날아다 주는 빵과 고기를 먹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비가 내리지 않자 그릿 시내도 말라버렸습니다. 이 때 다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8Sección). 시돈 근처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머물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밧에 성문에 머물러 있는데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자의 사정은 알지도 못한 체 불러서 물 한 컵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자가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할 때 염치없게 이왕이면 빵도 한 조각 갔다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과부인 여자가 대답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나에게는 빵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밀가루 한 움큼과 약간의 기름뿐입니다. 지금 나무를 줍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 내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이 음식을 마지막으로 굶어죽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엘리야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고 먼저 그것으로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아들하고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와 아들이 먹을 마지막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차피 이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이 칭찬하신 과부의 헌금하고 어찌나 똑같은 지요(Só 12:42-44).

엘리사와 나아만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이 이야기는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왕국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전쟁에 나가서 이스라엘 소녀하나를 잡아온 것입니다. 이 소녀를 나아만은 자기 집의 시중으로 있게 했습니다. 이 소녀가 나아만 장군에게 병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선지자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왕에게 고하고 왕은 은 십 달란트(340킬로그램)와 금 육 천 개(약 68킬로그램) 의복 열 벌과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찌 나병을 고칠 수 있겠냐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미를 찾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이 옷을 찢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라고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전차와 식솔들을 데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나아만은 나와 보지도 않고 문 앞에 서있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며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그 집 대문을 떠나며 말하기를 자기가 사는 지역 다메섹에도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 있는데 이 강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더 나은 강이라고 하면서 그곳에서도 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부하가 말하기를 ‘만일 선지자가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더 어려운 부탁을 해도 장군은 병을 낫기 위해서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단강에 몸 일곱 번 담그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다시 돌이켜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리고 나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음을 알았나이다.’(Reis 5:15)”고 고백합니다.
나아만 장군도 믿음 없이는 못할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상당히 쉬워 보이는 일인데도 못합니다. 설마 하면서 안 합니다. Vostede! 평생 살면서 주일 만 이라도 성실하게 지켜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선지자의 이야기를 하신 것인데 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까요? 이미 구약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지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본문을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본문에서 두 절에 똑같이 ‘오직’이라는 말과 ‘뿐이다’라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바로 이 말씀 때문입니다. 두 내용 모두 오직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사렙다에 사는 과부도 이방인이며 나아만 역시 이방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복음이 이방인을 위해서 선포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이방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뿐이다’라는 말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방인인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해서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말도 하지 않고 이방인을 위해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심으로 자신 또한 이와 같이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 뿐이다.”, “너를 얻기 위해서 내가 왔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살던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하기를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란다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 오직 예수님 뿐이다.

나를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일은 내가 안 해도 누가 하겠지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나만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이 엉뚱한 데로 가면 안됩니다. 어떤 교인이 차를 타고 가다가 남의 집을 들이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차는 하나도 망가지지 않고 그 집만 망가졌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인은 하루종일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할렐루야가 아니라 망언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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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10.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Texto : Lucas 7:24-30, 렘 1장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주앙교회에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올해(2005Ano) 명절은 추석이 주일이고 크리스마스가 주일입니다. 그리고 2006년 신년이 주일입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상당히 억울해 하십니다. 쉬는 날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가야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쉬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주님이 하신 질문으로 할까요. “무엇을 보려고 오셨습니까?”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지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께 두 제자를 통해서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리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Lucas 7:20)질문하게 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24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자문자답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심리를 다 읽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도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그와 같은 말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를 많이 질문 하셨습니다. 모세를 택하실 때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시면서 손에 든 지팡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아모스, 스가랴 선자들에게도 “무엇을 보고 있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네가 무엇을 보느냐?”(Jer. 1:11-12)고 먼저 질문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왜 먼저 보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파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30평 아파트입니까? 로또 복권입니까? 어떤 목사님이 20억 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교회를 짓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것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와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곧 시대를 바라볼 줄 아는 영적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 말로 솨켓트 인데 이 뜻은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삼국유사에 보면 살구꽃을 보고 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살구나무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나무로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살구나무는 겨울 추위와 가뭄에도 잘 견디며 100년 이상 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예레미야 1:7-9 “7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모두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을 분명하게 믿는다는 증거로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당시에 북 이스라엘은 B. C 721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였고, 강력한 앗수르는 바벨론이 멸망시키고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더욱 악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지식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은 세상에 보이는 세계를 구별하고 인식하며 보게 하는 눈입니다. 지식의 눈은 배움과 경험으로 살아가는 눈입니다. 영안의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계시록에는 본다는 의미의 말이 72번이나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는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 듣고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 똑똑히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만이 영안이 열리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선포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두 번째끓는 가마를 보았나이다”(Jer. 1:13)Foi chamado.
그런데 이 끓는 가마가 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 유다가 당할 심판을 끓는 가마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었다는 것은 북방에서 오는 세력에 의해서 심판을 당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세력이 누구입니까? 바벨론 입니다.
남 유다가 왜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우상을 만들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3.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3차에 걸쳐 공격을 받고 B. C 586년 비참하게 멸망당하여 70년간 바벨론 포로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긴다면 재앙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인데도 미련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이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라고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예레미야처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멋있게 대답하면 좋겠지만 여러분에게 그것을 부탁드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고 쉽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레미야 것을 우리 식으로 조금 벤치마킹하자면개나리를 보나이다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개나리는 살구꽃과 마찬가지로 입이 나기 전에 꽃이 피며 봄에 제일먼저 피는 꽃입니다. 개나리는 추위와 공해에도 잘 견디며 씨로 번식하기도 하고 꺾꽂이해도 잘 자랍니다. “개나리처럼 빨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잘 번식하며 추위와 공해 속에서도 잘 자라겠습니다.

본 자만이, 깨달은 자만이, 비밀을 아는 자만이 이 놀라운 사실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깨닫지 못하는데 무엇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비밀을 모르는데 무슨 비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옷 입은 사람을 구경하려고 간 것도 아닙니다. 선지자를 보려고 갔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Prensa 4:16, Catro 1:24, Jer. 1:15).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왜 주앙교회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보기 위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 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라고 생각하는 철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26절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Descubriu que. 여기서 “나은”(페릿소테로스) 비교급으로 “더욱 풍성한, 더 많은”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뜻을 좀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요한이 직접적으로 물은 “당신이 오실 메시야 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모호하게 대답하셨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메시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야(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Vostede! 예수님이 메시야 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왕도 되시며, 선지자도 되시며, 대제사장도 되십니다. 단순한 메시야 하고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올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례요한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봅니다. 어떠한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의 주님의 바라봅니다. 아멘
 

네 부모를 공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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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9. 네 부모를 공경하라) / Texto : Mateo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탈무드에는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한 청년이 자기 아버지에게 닭을 잡아서 요리해 드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궁금하여 닭을 어디서 구해 왔냐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걱정 마시고 많이 잡수시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청년은 물레방앗간에서 아버지를 도와 밀을 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방앗꾼을 불러모으는 징집령이 내렸습니다. 이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들이 징집에 나갔습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탈무드]는 두 아들 중에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떨어질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 대답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징집에 나간 아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징집에 나간 아들은 힘든 노동과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간 아들은 앍을 잡아드린 아들인데, 그는 아버지의 물음에 정중하게 대답하지 않아 순종이 부족한 것이라는 겁니다.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부모님을 잘 봉양하거나, 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은 효도도 공경도,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입니다. 그러나 전에는 효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효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가끔은 믿기 싫지만 자녀가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죽인 일도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그만 이라는 식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공부를 해야하느냐 하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생각이 사회에 만연하고 우리 자신도 부정하기 힘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마치 교회에 다니면 효를 무시하거나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유교나 불교에 비해서 부모에 대한 효가 덜 강조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교나 불교는 정확하게 말하면 신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 효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는 우주가 자연 생성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고 우주를 형성하는 오행(五行: , , , . )을 인간계에 적용시킨 것입니다. 이로서 유가(儒家)에서는 오륜(五倫)과 오상(五常:, , , , )의 사상을 체계화했습니다. 논어에는 ‘먼저 오륜 가운데 효는 그 으뜸으로 가르쳐 왔다. 오륜은 하늘이 편 법전이요, 사람의 도리로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바니라. 사람의 행실은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나, 오직 효도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되느니라

아버지 사랑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8. 아버지 사랑) / Texto : Lucas 6:27-36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하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어느 날 외아들이 살고 있는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도둑은 물건을 훔치려고 귀중품을 주섬주섬 챙겼습니다. 그런데 예쁜 아기가 새근새근 자고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둑은 갑자기 생각이 달라져 물건을 놔두고 그 아이를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기가 깰까봐 조용히 아기를 이불에 덮어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잠에서 깬 아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일어나 도둑과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위기를 직감한 아버지는 도둑의 칼 앞에 멈춰서 있었습니다. 도둑은 점잖게 주인에게 이 아이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도둑이었습니다. 그 때 그 아버지는 도둑을 향하여 “그 아이만은 안됩니다, 돈을 다 가져가세요. 그리고 통장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만은 안됩니다.” 그런데 도둑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아버지는 나가려는 도둑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습니다. “우리 집 모든 것은 가져갈 수 있어도 그 아이만은 안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미국은 사상 최악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가 31일 루이지애나주 인구 130만 여명의 뉴올리언스는 거의 전 지역이 침수된 가운데 곳곳에서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루이지애나․미시시피․앨라배마주는 사망자만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미국도 자연의 힘 앞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을 봅니다. 6m정도까지 물이 찼다니까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홍수가 나면 제일 흔한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먹을 물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 홍수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TV를 켜도 또 뮤직 앨범을 들어도, 영화를 보아도 이 사랑 이라는 주제가 넘쳐흐르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배용준씨의 인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외출’이라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난리도 아닙니다. 타이완에서는 70된 할머니가 배용준을 좋아하여 암도 이기고 새 삶을 산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니까 병 걸린 것도 이긴 것 같습니다. 배용준이 묵고있는 호텔 바깥에서 방송사 차들이 밤을 새워가며 생방송을 했습니다. 타이완기자들은 대통령이 와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9월 11일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일본 언론들은 “배용준의 방문으로 총선 열기 잠재웠다”는 제목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콘서트 장에는 3만여 명이 모이고 6개 지역에 위성으로 생 중계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총선으로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해 정치인들 사진이 곳곳에 붙어있는데 그곳에는 관심이 없고 욘사마 사진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팔려나간 배용준 사진을 비롯해 관련 용품이 우리 돈으로 약 10억 원 이랍니다. 한국사람이라 기분은 좋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들은 사랑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 까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사랑, 참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그 당시에는 소위 희랍문화 권 안에서는 로마, 그리스 문화권 안에서 그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가지 그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에로스라든지 휠리아, 스토르게이런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의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에로스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여지지 않습니다. 휠리아, 스토르게는 조금씩 나옵니다.

성경은 새로운 단어들을 많이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단어로는 설명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성경이 말하는 유일신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적절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면 기존에 동양사상에서도 ‘하늘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구분이 안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을 제일 잘 나타내는 용어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사랑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 당시에 사장되어 있던 단어 하나를 찾아냅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쓰지 않던 죽어있었던 사어라고 할 수 있었던 단어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재생시켰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아가페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가페(ajgapavw)는 27절에 1번 그리고 32절에 4번, 35절에 1번 모두 6번 동사형으로 나타납니다. 아가페 사랑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을 넘어서는 사랑, 타산이 없는 따지지 않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할 때 상대방 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이것이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모두 이 사랑을 접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그런 사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했던 이 사랑은 그냥 정지된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22절에 보시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사랑과 희락과 화평과…)”하고 제일 먼저 강조된 것이 뭡니까? 사랑이죠 그런데 바로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페입니다.

참 사랑이 아닌 것

본문에서 ‘아가페’적이지 못한 사랑에 대해서 지적해 주십니다. 바로 ‘무엇이뇨’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1.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한마디로 남들 다하는 사랑만 하는 것은 칭찬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소용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자녀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상이, 칭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믿지 못할 일이 있기는 합니다.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싫어하여 구박하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지요.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죄인들도 이 정도의 사랑은 다 한다는 것입니다.

2.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누구든지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욘사마를 좋아하는 것처럼 몰려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좋아하는데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사랑한다는 것은 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3.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이 말씀은 사랑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챙기려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고”란 돈을 빌려주는 목적이 이자를 받기 위해서 라면 칭찬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수히 받고자”는 그대로 돌려 받기를 바라는 계산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가페 사랑은 그냥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5절에 사용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의 원수(ejcqrou;”:에크드로스)는 구약성경(70인역)에서는 계약관계를 깨뜨린 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사기죄에 해당하는 죄를 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만 조금 다녀본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겠습니까? 적도 많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스탠톤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링컨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가 한 말은 유명합니다. “링컨은 교활한 어릿광대, 오리지날 고릴라이다. 고릴라를 구경하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주 스텐필드로 가라. 거기에 가면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것이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각을 조직할 때, 그 스탠톤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도 당신을 비난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여유 있게 대답합니다. “그 자리는 그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사명감이 분명하거든요. 그런고로 다 극복할 수 있어요.” 1865년 4월 에이브러햄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암살 당했을 때에 가장 슬피 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강합니까? 이 여유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링컨은 철저한 사명의 사람이기에 평생 자기를 비난하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유언을 잘 따랐기 때문입니다.

링컨이야기를 좀더 하겠습니다. 링컨이 9세 때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 때 유언과 함께 물러 받은 것이 낡은 성경 한 권 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이 성경 한 권으로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일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 낸시는 죽으면서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이 성경책은 나의 부모님께 받은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낡았지만 우리 집의 값진 보배다. 내가 너에게 100에이커(12만평의 땅)를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너는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그리고 링컨은 말하기를 “나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경의 보화를 캐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묵상했습니다. 이 성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값진 보화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주님을 믿고 따르지만 내 의지 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순교’입니다. 내가 순교하고 싶다고 순교할 수 없는 것처럼 저는 이 사랑의 문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힘든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해결 받아야 합니다. 정말로 원수를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T 6:12)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완료형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반드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구요 두 번째로 기도하면 용서해 주시는 것을 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용서가 안되시거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세요. “주님 내 힘으론 안됩니다. 생각으론 되지만 마음으로 안됩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들어주실 까요, 안 들어주실 까요?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는 의미로 “사하여 준 것 같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랑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