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종교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115. 껍데기 종교) / Téacs : T 20:29-34

“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홈런을 쳐 본 선수는 배트에 와 닿는 공의 느낌으로 담장을 넘길 만큼의 비() 거리를 알아챌 수 있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정미함과 완전함은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실존적으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늘 설교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귀가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의 소리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삶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소경입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래는 가리워 져 있고 내일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우리 삶의 방향타를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라야 합니다.

누에나 애벌레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쏙 빠져나와 집은 버리고 자신은 나비가 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빠져나온 집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껍데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껍데기를 버리고 나온 나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Ar a dtugtar. 우리가 과거에 매여 있고 형식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새것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껍데기 종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그리고 두 소경과 무리가 나옵니다. 같은 본문이 마가복음 10:46-52절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한 소경의 이름은 바디매오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소경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소경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31절에 무리라고 소개된 사람들 속에는 제자들이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Just a 10:46)라고 나옵니다.
마태는 왜 소경들이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무리(제자)가 금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명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본문이 마치는 시점에서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마 21장, 막 11장).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병자와 환자들이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아오는 것도 금하는 제자들을 호통치신 적이 있습니다(T 19:14). 지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게 되지만 지금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이 한마디로 충분히 민심을 얻으신 것이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왕이 되실 예수님께서 이제 미천한 소경 따위에 신경 쓰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전처럼 예수님께 아무나 나아오는 것을 금지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냄새나고 역겹고 성가신 자들일 뿐 예수가 왕이 되실 분인데 예의범절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는 그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하고 무능한 자에게 관심을 두실 틈이 없다면, 품위 없는 자들에 대해서 박대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또한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주변에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은 텅빈 공허한 종교, 껍데기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도 생겼습니다. 제1년 후배가 아시아 00나라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초, , 고 사립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후원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후원해 주던 교회인데 목사님과 장로님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그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안에서 두 그룹으로 갈라져서 서로 주일 오전 예배 때 강대상을 차지하려고 몸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런 모습은 절대 교회에서 일어나면 안 됩니다. 결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재판을 담당한 분은 또 다른 교회 집사님 이었습니다. 그 앞에 장로님 목사님이 선 것입니다.

그 교단은 보수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예전에 미국의 선교사님 한 분이 비행기 타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잠시 공항에 마중을 나간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단으로부터 탈퇴를 당했습니다. 좀더 지혜로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다른 분을 대신 나가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기겠지요. 목사님은 안되고 집사님은 나가도 되는지이런 일을 가지고 토론을 하면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한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은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꼭 만나할 소경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가려는 소경의 길을 막고있지는 않나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전에 남왕국(유다) 13대왕인 종교개혁을 실시한 히스기야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짓 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 왕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유월절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유월절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조차 우상 숭배를 했었기 때문에 유월절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첫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히스기야기 백성을 소집한 달은 둘째 달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은 부정한 자들에 의해서 한달 늦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8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19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비록 방법은 빈약했지만 동기가 순수한 경우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대하 30:20)Tá ard-.

세상에서 제일 쉽고도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가 제일 쉬운 것 같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사단이 제일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를 왜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기도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뿐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를 위해서 배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음악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박자와 음정은 모두 엉망입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부릅니다. 아빠는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모든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위해서는 충분히 준비하고 정결케하여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소경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그 엉터리 같은 의식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하는 아이에게그만 됐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경과 히스기야 어린아이는 모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Jer. 29:13)

제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집 뒤에 일본으로 시집가서 살고있는 여자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에서 친정 집에 오는데 동네 사람들 선물까지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리 집도 가깝게 지냈으니 당연히 선물이 왔습니다. 큰 박스가 하나 도착했는데 밥통이 왔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전기밥통은 꽤 인기가 많았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고 어머님은 꼭 같고 싶어하시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잘못 왔다면서 라면 두세 개와 바꿔 갔습니다. 전달한 사람이 잘못 전달한 것입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몹시 민망하고 황당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선물이라고 하면 겁이 납니다. 저는 그 때 빨리 돈 벌어서 어머님 밥통을 먼저 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11:29). 하나님은 배달사고가 없으신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것을 자랑으로 바꿔 주십니다.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를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깡총 깡총 뛰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무리와 함께 향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Ar a dtugtar. 3년이 넘게 함께 지낸 제자들이 이제 일주일이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르칠 시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앞서서 예수님께 나오는 소경의 앞을 막았다는 것이 예수님을 민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출퇴근하는 목사님께서 늘 다니시던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측은한 생각과 마음의 영적 충동이 생겨 그의 주위를 서성거렸습니다. 마침 오고 가는 행인들이 뜸하여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형제님,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형제님의 영육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기도하겠으니 눈을 감으세요!”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걸하면서 먹고살도록 저를 그냥 이대로 놔두세요. 그리고 은과 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혹시 사모님 몰래 숨겨둔 것이 있으시면 다음에라도 좀 주시겠어요?” 이분은 목사님을 참 민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얼마나 민망하게 만들어 드렸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 주님 앞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지는 않은 지요? 기독교가 이슬람에 비해서 왜 전파가 느린지 한가지 단서는 기독교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알맹이를 잃어버리는 껍데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무시해 버려야 하는 세상 왕은 하나님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T 20:28)
 

Féin-mhachnaimh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114. Féin-mhachnaimh) / Téacs : Just a 7:15-16

“15 Ní dhéanfaidh aon ní a théann amach neunghi ó dhuine go duine a fháil mothadoe salach 16 Beidh daoine a bhfuil daoine ag teacht salach sé a bheith i do”

Chuala mé cheana an tuarascáil teideal(Féach ar)Féadfaidh duine nach bhfuil chomh mhaith. Má tá M scéal suimiúil go leor a insint a gcuid scéalta, ní bheidh tú ag iarraidh a. Más amhlaidh, i bhfad ó machnamh féin-. Chuala mé an focal baint leis, le do thoil.
Táimid Níor chóir dúinn féin a bheith ró-. “Is é an Tiarna a rá mar sin Nora. Bith ag duine chun a chreidiúint go fuil samgo cumhacht ó chroí leis an Tiarna ar chlé, beidh sé damned”(Jer. 17:5)Tá ard-. Tá muid peacaigh toisc go raibh an bunaidh a ghlanadh, is féidir linn a rá, mar gheall ar dhaoine. Ní deich míle agus ceann féin aon scratches nó más rud é go mbeidh sé glan luath is bréag.. 우리나라 3대 거짓말은 나이 드신 분들이 ‘빨리 죽어야지두 번째 처녀가 ‘시집 안 간다세 번째는 ‘물건 밑지고 파는 거야’랍니다. 3대 거짓말 다음으로는 중국집에 전화하면 ‘방금 출발했어요~ ‘, 정치가들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교장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옷가게 주인이 ‘어머! 언니한테 딱이야~ ‘, 간호사가 ‘이 주사는 하나도 안 아파요’인데 제가 맞아봤는데 엄청 아픕니다. Ach nach bhfuil i ndáiríre a bheidh ann a deir.
Easpa againn tuiscint chuimsitheach ar na cuimhne agus a bheith beagán fainiciúil díobh siúd a chaill sé luath agus a bhí i réim. Tá muid ró-aineolach agus ní ró-obair i gceart féin-mhachnaimh. Dá bharr sin tiomantas atrocities agus éasca, Hadaga leithscéal duit féin as peaca níos measa a deulgon. Uaireanta, an paisean inár(Díograis)De dhroim gníomhaíochta, Bealtaine fiú a bheith mícheart a cheapann go bhfuil paisean a thagann ó.
Táimid ag daoine eile an milleán ach ná féach ar bith de chuid botún mór(T 7;3). I cúpla bliain ó shin, an Caitliceach “Ceithre locht,”Cruthaigh mana don chleachtas seo bhí ag iarraidh a bhogadh. Mar sin féin, gluaisteáin a chur móide beidh siúd atá ag freastal i láthair ag gabháil leis an charr taobh thiar de ghloine. Cé a dhéanann tú ag féachaint go? Feicfidh mé a fheiceáil cad a leanas an carr. Cé eile a tatipnikka?
Maslaí ó dhaoine eile, is dóigh linn go cúramach, ach tá an eolas acu, tá siad go héasca, Táimid ag déanamh do dhaoine eile a bhfuil insult, ní bhíonn tú cúramach. Má táimid ag gníomhú ar a gcuid féin a bheith in ann a mheas go cothrom agus go ciúin le daoine eile a áireamh nach mbeidh rá fánach.

1. Revelation Dé ionainn

Is é seo an scéal.
Nuair a chruthaigh Dia an domhan a bhí an chéad shíochánta a bhí sé a thiomáint. Choinnigh sí gearán ar a chéile, ach is fuath pheaca daonna agus ar fud an domhain mar tá sé mearbhall ar. Ath-chruthú saol álainn agus síochánta le haghaidh an ruin na fear, chinn Dia sikigiro. Ach bhí i gcoinne na haingil a.
“Gutaeyeo ag iarraidh a scrios an duine Ní gá go mbeadh. Beorimyeon ní hamháin mhaith linn iad a fhágáil.” Dia leis an aingeal iarradh.. “Mar sin, bheadh ​​ina bhfuil tú ag dul?”
“Cén fáth nach bhfuil muid ag dul chomh hard leis an sliabh is airde?” Dia a cheann jeoeot cothrománach.
“Níl a fhios agat go fóill.. Cé go bhfuil ar dhaoine a conquer an sliabh is airde gonna deireadh.”
Agus deir aingeal eile. “Cad é a bheadh ​​ag dul go dtí an ghealach raibh?”
“Fir le gruaig maith go bhfuil teacht ag dul i ndiaidh mhí”
Bhí aingeal dtost ansin go dtí go raibh oscail a bhéal.
“Beimid i bhfolach i ndaoine. A théann siad wandering amach chun a fháil amach gach rud, Indifferent ar a saol féin istigh agus taobh istigh riamh ag lorg duit féin agus go ciúin, ní bheidh ann a bheith ina gcónaí.. Ó ann, ní mór dúinn teacht ar dócha nach mbeidh post.”
Bhí sé díreach nodding do cheann.. Dia is charraig é, fiú lann féir ghleoite sa leabhar beag trí-scéal. Is é Dia liom ag an am céanna tá tú ag roghnú leabhar scéal.

Is é seo an fhianaise ar Zechariah. “Focal an Tiarna a bhaineann Iosrael, an Tiarna neimhe agus talún pyeosimyeo gyeonggora teoreul a bhunú laistigh de thy spiorad a dhéanamh, ag daoine ag rá,”(Zechariah 12:1)Ar a dtugtar. “Ye sa lá sin, mo athair i dom go bhfuil mé i agat, beidh a fhios ye”(John 14:20)Fuarthas amach go. Inniu, is gá dúinn a fhios sin le hÍosa. Íosa, tá sé curtha in ár.

2. De réir an dlí, ní gá duit teacht ar a gcuid ceannairí reiligiúnacha

An aimsir Íosa, ceannairí reiligiúnacha nach raibh in ann teacht ar a chuid. Íosa béim ar an dlisteanacht a gcuid gníomhartha bhfuil ach. Sean-Tiomna, Leviticus 11 agus Deotranaimí 14:3-21Beithigh Glan agus neamhghlan ainmhithe alt seo, tá an t-idirdhealú a. I ré Íosa sa Sean-Tiomna a cinneadh, a choinneáil ar Chomh maith le neartú sikyeoseo. Fadhbanna trí na bianna a ithimid an Dia naofa de Iosrael, a bheidh an chéad uair a l'd déanta mícheart le bioráin eitneach ar leith. Is é cuspóir Dé go simplí a ithe bhia sin, seachas ag idirdhealú idir iad ag Dia tríd an beidh na daoine a iarracht a dhéanamh idirdhealú a dhéanamh idir. Mar sin féin, ní fhéadfadh an bhrí fíor de phobal Dé i eolmaeyige dlí nach bhfuil curtha in ann teacht ar intinn bunaidh Dé a úsáid mar. Téarmaí éadaí, riail dea-ordóg a tarraing ar ais tríd an taobh istigh de an duine a chur ar aird níos mó ar cibé acu atá nó conas a ghlanadh éadaí agus sucking iad a chreidtear a bheith mar go bhfuil sé taobh amuigh de intinn an dlí.
Na daoine seo ag déanamh tagairt do “An scríobhaithe agus na Fairisínigh, hypocrites iteuljjinjeo hearts Máirt glan an taobh amuigh de cupán agus mhias, ach taobh istigh go bhfuil sé lán de saint agus debauchery Toda”(T 23:25)Tá sé ag iarraidh orainn. Uimh bia níos mó a bheadh ​​ionas gur mí-úsáid ar an dlí nach bhfuil aon bhrí go bhfuil tagtha chun bheith. Mar sin, an comhlacht ar an Teampaill Chríost 15-16 “Beidh nach bhfuil aon rud a théann amach neunghi ó dhuine go duine salach, fear salach, a thagann faoi dhaoine mothadoe a bheith ar an”Agus beidh a.

3. Seo féin-machnamh ar an náisiúin ar Iosrael a bhogadh

Iosrael a bhí an náisiúin soghluaiste is mó ar fud an dá ag. Tá sé an chéad slaves éalaigh ó na hÉigiptigh a thaispeáint. Ina áit sin, bhí an ceannaire Maoise, thionscain Dia an dlí trí Mhaois. Iosrael agus an Giúdach namwangguk dara bukwangguk Nebuchadnezzar de Babylon do na síos agus amach ar an sclábhaíocht gabhadh 70 bliain d'aois RC hadaga Cyrus. 539I mí Dheireadh Fómhair na bliana seo a leanas conquered Babylon, RC. 538Tagairt do cheadú ar ais na Giúdaigh i Íochtarach. Agus is léir trí huaire an tuairisceán.

I Eaxodus a tharlaíonn, próiseas oibre den chéad Dé a lán. Mar sin féin, nach bhfuil fhios agat go fóill, leanann Dia a dhoirteadh, daoine a léiríonn gearán a dhéanamh. Easpa uisce, uisce trioblóide.(민 20:13, 24). Eaxodus thug ar fud an gcruinniú(출 16:33). 만나만 먹다가 고기가 Daoine싶다고 해서 메추라기를 주십니다(출 16:13). A cheilt ar an solas ghrian te i rith an lae mar cholún den tine san oíche i scamall(민 14:14) India. Mar sin féin, theip orthu ar deireadh thiar chun a chreidiúint i nDia.. Uimhreacha 14:1Féach ar an talamh Canaan a bhrath agus tuairisciú a dhéanamh nuair a thagann siad ar ais le daoine spiaireacht míleata cried gach oíche..
Na gníomhaíochtaí seo go dtí seo san India thug Dia díomá go hiomlán. Díspeagadh dom go dtí go Dia do Mhaois, a mbeidh an, An bhfuil nach gcreideann tú dom(Daoine 14:10)Roghnaigh sé.

Versus raibh an dara ghluaiseacht náisiúnta a thabhairt ar ais ó Babylon. Bheadh ​​Cyrus basawang stair láidir ar Dhia le eagla ar na Giúdaigh ar ais, agus síos chomh maith leis an teistíochtaí na “Cyrus rí na Persia ar fud an domhain, a rá, an Tiarna Dia na bhflaitheas tugtha dom ag na náisiúin ar Judah, tairiscint dom a dhéanamh ar fhoirgneamh gach uile in Iarúsailéim jeoneul”(Suas 1:2)Mar a thóg sé go tapa ar an teampall Dé, mé bhí dul. Agus tá Dia ag iarraidh a fheiceáil stair an hasimeul.
2Iad siúd a ais le Ezra carr “Moladh leis an Tiarna, Dia ár n-aithreacha an méid a Rhoda”(Suas 7:27)Moladh Dia, agus Ezra 8:21An “Ah, agus nuair a fasted mé ag an abhainn, agus muid féin a fhógairt do Dhia agus ar dúinn agus ár dhá cailíní beag, agus a chéile a iarraidh air go léir ar an mbealach Tá siad faoi úinéireacht an árasán le haghaidh”Glaodh.
Eaxodus ó na daoine a dhéanann gearán nuair Táim go hiomlán difriúil.. Ina ionad sin, a bhí ag filleadh ó Babylon dóibh, díreach mar an tréigean stair osnádúrtha Dé. Ach Mhol siad Dia agus chuaigh sé go tapa, chomh maith le scaipeadh. Nuair a bheidh an exodus de go leor gearán faoi dhaoine a bheadh ​​sé ag ithe, ach tá siad sách tapa, agus Ezra agus chuaigh mé hamkkehan. Suas 8:21Go “Féin-Comhcheangailte”Is é an focal. 이 말은 히브리어 ‘t/N['T]Luc]:레히트아노트’인데 ‘괴로움을 당하다, Íochtarach, 고통’의 뜻이 있는 ‘hn:[:Ana’ Deir an chuideachta ó. Ciallaíonn sé seo umhal da pointí bhuail féin a chur Sikkim deir, mar sunjongjeok iomlán. An chéad chuirfeadh deireadh, tá ag fágáil an mbealach céanna nuair a fuair muid leis an tuairisceán ó Babylon Féach éagsúla.

Ní féidir Má aistríonn tú a bheith dislodged. Kari Is ceart. Mar sin, tá na liricí. “Téigh go caoin ar maidin, i ngaoth fuar go bhfuil tú ag múinteoir áit a géanna cártaí poist, bain úsáid as bhileog amháin” Géanna i ndeisceart gheimhridh na heitilte V-V-ghlóthach a fhoirmiú sciathán n-éan, stirred mé roimh a tharlaíonn rud éigin a thagann ó taobh thiar do na héin toisc updrafts a cruthaíodh nuair a bheidh an ghé ag eitilt ar fad ina n-aonar le leat ná an 71% itdapnida uaidh ag eitilt. Ina theannta sin, beidh an bonn ar chúl an os comhair na géanna ag eitilt ar ais chuig an luaidhe go luath tar éis na géanna agus téann leanúna. Dá bhrí sin, géanna tréad ar thaobh tosaigh an céimeanna chun troid dlíthe seoryeogo nach bhfuil caite, rud ar bith nach bhfuil tú ag tuiscint ar inferiority. Kari ag titim amach freisin na céimeanna nuair a bheidh an ghalraithe nó gortaithe agus dhá géanna eile amach as a gcuid céimnigh géanna fiáine lena go descend ar an domhan go dtí go mbeidh na géanna a chosaint. Gé ae, de réir mar is féidir leo eitilt arís go dtí an, Nó d'fhan le chéile go dtí a bhás dapnida. Ina theannta sin, an neart a chéile, caoin do ionann cúnamh suntasach. Comhoibriú féin gan a fhios agam go bhfuil sé dodhéanta. An duine amháin ar féidir leo i láthair féin, gan aon duine ar an domhain.

Íosa, Luke 17:21Alt “Agus is é go bhfuil anseo an ríocht Dé beidh aige ar airde amháin seasamh i do”Tá sé ag iarraidh orainn.
Anois táimid ar an gceist Ní mór dalrajyeoya fís. Cinnte a bhaint as an blessings Dia fear atá ag teastáil.. “Tú a bheith maith, olc mar a bheadh ​​acu maidir le leanbh a fhios cé mhéad níos mó do nAthair neamhaí bronntanais níos maith a thabhairt dóibh siúd a iarrann sé ...”(T 7:11)

Meiriceá Láir, tá Oileáin Mhuir Chairib siar. Ach na hIndiacha Thiar, Oileáin Mhuir Chairib(HIndiacha Thiar)An bhfuil uaireanta dá ngairtear. ‘서인도 제도’라는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인도에 도착했다고 오해한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Ba é an tuiscint atá agam nach raibh an India mheas a bheadh ​​sé ina mór-roinn nua. Daoine a cheapann go bhfuil sé an teorainn amháin go bhfuil an.

A cheapann muid gur chóir a athrú. Ba chóir go bhfaighidh mé Dia san iarracht a dhéanamh leanúint. Revelation Dé i na cruinne, ach ag an am céanna in aon áit sa teideal agus gur chóir go mbeadh a fhios agam. Hand fáil amach cad a fear a pathetic atá níos fearr ná iad siúd a? Féin i láthair an Spiorad Naomh, a bheidh a fhios.
Chun a bheith níos duine spioradálta “Eascraíonn ach Dia ó Dhia a chur le brainse eile seachas, nó aon rud iontach uasal, nó spraoi, tú féin nó déan cinnte go bhfuil aon rud foirfe.”Thomas deir sé ahkempiseuneun.

Le linn an turas de bheirt chairde a bhfuil bhuail béar mór. Go tapa suas crann in aice le Guy chlúdaíonn gieoolraga. Ní dhéanann an duine eile a fháil ar an marc, ainmhithe marbha agus ar an capall a ligean síos agus spraoi marbh Bhí mé ag cuimhneamh reoite. Eopeuryeo iompróidh agus chuaigh an fear a chluas Cad a dhéanann tú i gceist, imithe haleumyeo.
Cé a tháinig anuas ó na crainn iompróidh d'iarr orm níos luaithe más rud é go raibh mé ag caint faoi casadh.
“Cuir i mbaol ag rith amach ina n-aonar chuig cara agus inis cara liom é nach bhfuil a iompar mar”

Paul i Filipigh “Gabh mo leithscéal, go bhfuil Dia ag déanamh i gceist agat sásta tú leis a mhian a fhágáil mar a tháinig tú haenghage a dhéanamh”(빌 2:13)Glaodh. Chomh maith leis sin “An bhfuil Intinne a chur i gcuimhne duit ar Íosa Críost pumeura”(빌 2:5)Ar An Bille umtugtar. Dúirt mé aon muinín tú féin i stair an chuid ama chun éisteacht leis an nguth ar an Spiorad Naomh, le do thoil.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113.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 Téacs : 14: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은 영성에 있습니다. 영성 그러니까 마치 환상이나 꿈을 꾸고 거품을 토하면서 방언기도를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은 물질, 성공, 출세, 명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는 개신교 목회자와 비교해 볼 때 독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세상의 가치에 덜 얽매어 있습니다. 한 사회학자 연구에 따르면 직업인의 정직 윤리 수준 평가에서 신부가 1위, 승려가 3위, 목사는 5위로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도덕성에 있어서 신부나 승려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에 대한 평가는 교회에 대한 평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전국 감리교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영성, 도덕성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말로는 영성을 위치지만 실상은 영성을 잃어가고 세상 적인 가치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2005년 8월 25일에 인천 국제 공항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향하던 항공기가 이륙 한 지 10분만에 5살 난 ‘제시카’라는 여자 어린아이가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쳤고 승무원들이 달려왔습니다. 승무원들은 아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해열 좌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있는지 확인을 했더니 의사 단체가 탑승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10여분간의 소생술 끝에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그동안 딸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인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 재미교포 의사는기압 차이로 인해서 아이의 감기 증상이 갑자기 악화돼 고열과 경련이 발생했다아이가 LA까지 12시간의 비행을 견디기는 무리라고 소견을 밝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기장은 곧 바로 회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항공기는 승용차가 아니기 때문에 회항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는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100t에 가까운 충격이 더해진다고 합니다. 항공기 안전을 위해 중량을 최대한 줄여야 하고, 이에 따라 모든 항공기는 공항에 이착륙할 수 있는 무게 제한이 있습니다.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에 투입되는 기종인 보잉 747의 최대 이륙 중량은 388.7t이지만 최대 착륙 중량은 285.7t이어서, 착륙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기장은 고심 끝에 항공유를 버리기로 하고 인천 앞 바다 부근에 있는 항공유 방출구역에 약 16만 8000파운드(약 72.6t)의 기름을 쏟아 부었습니다. 착륙무게를 맞춘 항공기는 인천 국제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는 대기 중이던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회복된 후 귀가했습니다. 그리고 항공기는 재급유 후에, 처음 출발 시간보다 3시간 늦게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향했습니다. 이 날 항공회사는 기름 값으로 4,000만원, 이착륙료, 연결 승객 관련 경비로 1,000만원 등 모두 5,000만원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한 생명은 5,000만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가던 비행기가 되돌아 온 것처럼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방향을 예수께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손실이 있어도 감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일러 주시는 참된 기독교의 가치관과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누가복음 14장 1절에서부터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바리새인들이 따라다니며 엿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창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주 민감하게 생각하는 안식일 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사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바리새인)과는 달라야 된 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초대했습니다. 무언중에 이들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저 아래 어느 한쪽에 앉아 계시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예수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까지는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잔치자리는 디귿 자 형태로 되어있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Just a 12:38, 39).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윗자리에서 보면 내려다 보게됩니다. 전체를 다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는 뉴스를 보다가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깜도 안 된다.자꾸만 그런 말을 하는데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국어 지식이 깊지는 못하지만 국어를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인데 이 말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통령 때문에 이 말을 그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알았습니다. 높은데 계시니까깜도 안되겠지요.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멀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보일랑 말랑해서 자연스럽게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높은 자리는 영적인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낮은 자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그 자리가 겸손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게 해 주며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과 지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으면 가난한 사람,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윗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은 낮은 자리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신 모습입니다.
집회서 10:12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데서 시작되고 사람의 마음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질 때 생긴다”Tá ard-. 15절에서는주님께서는 오만한 민족을 뿌리째 뽑아내시고 그 자리에 겸손한 자들을 심으신다고 하셨으며 18절에서는오만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Glaodh.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다.

T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진정한 높고 낮음

본문 11절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Fuarthas amach go. 이 말씀은 눅 18: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와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가 나옵니다. “낮아지고”(will be humbled, NIV)높아지리라”(will be exalted, NIV)의 문장은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높고 낮아짐이 인간의 편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높아진 것이 아니며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낮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그리고 사울은 이 일 후에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Glaodh.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여인들의 말을 듣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은 나누어 집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유다에는 20명의 왕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1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고, 유다에만 8명의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선한 왕으로 보는 유다 8대왕 요아스는 말년에 우상을 섬겼으며(대하 24:1-27), 10대왕 웃시야는 자기가 제단에 분향하려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대하 26:16-23). 왕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만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상좌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통전적 선교

통전적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에 응답하는 선교입니다. 통전적 선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처럼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가 무엇인지 PMI(무슬림이 사는 지역에서 사회 봉사하는 미국의 선교단체. www.pmi-usa.org)의 사이트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통전적 선교란복음의 말씀과 행위로 선언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만이 선교적 명령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이러한 모습을 예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선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의 축복과, 경제적 축복, 민주 자유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현재 에리트리아에는 목사와 성도들 포함하여 약 2천명이 불법 구금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작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4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올해) 9월 5일 미그치 하일레(33, ) 자매가 웨아 군사훈련기지에 수감되어 가혹행위를 장기간 당한 끝에 사망했습니다. 하일레는 예수를 부정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여 장기간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었습니다.

우리가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출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남에게 다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뿐인 생명도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제입니다.

Na focail Íosa(111. 믿음이 주제입니다.) / Téacs : Just a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저의 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집에 오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셨습니다만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보통의 한국 여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놀라운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전부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무당의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님이나 듣는 저의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함 그 자체입니다. 점술가가 점괘를 말할 때 허튼 짓하고 한 눈을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집중을 해서 무슨 말일까 하고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무당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무당이 하는 말을 듣는 그 이상의 진지한 예배태도가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아주 진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굿을 잘할까? 그 굿을 하기 위한 각종 절차, 준비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준비를 합니다. 또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보다 훨씬 더 부적을 더 잘 간수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부적은 간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끄집어내어 쓰다듬으면서 위로 받고 만지면서 위로 받습니다. 잘 때는 배게 밑에 넣고 잡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더 마음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보고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미신을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학문적으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돈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An bhfuil. 그러니까 자기는 변하지 않고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게 좋도록 하는 게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달래서 내게 좋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미신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인의 무속적 믿음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찼습니다.

물은 차면 넘치게 마련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4:4)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후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가 마치기 전에 야곱을 통해서 예언하십니다. Fuinneog 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10 홀이 유다를 떠나를 아니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십니다. 그리고 십계명과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길은 보여진 것입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Preas 24:7)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6:6-7),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27:10)Fuarthas amach go.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 이후에 더욱 타락의 길로 빠집니다. 하나님은 여러 제사장들과 사사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사들이 먼저 죄에 빠지는 참담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손을 피해 10년을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유다지역에서 먼저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지내다가 이스라엘과 통일되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1장에서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 우리아도 죽입니다. 간통죄에 살인죄까지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급기야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삼하 12). 다윗은 회개했지만 이 죄의 대가로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반역이 일어나서 모두 죽고 솔로몬만 살아남았습니다.
왕위는 솔로몬에게 넘어갔고 솔로몬은 1천 번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여 그 어느 왕국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는 1000명의 이방 여인들 때문에 우상숭배로 죄에 빠집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남왕국(유다)과 북왕국(Iosrael)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죄로 10지파를 이스라엘로(왕상 11:31, 35) 한 지파만을 유다로 남겨두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6).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의 12왕과 20명의 유다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는 왕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윗을 표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왕상 11:4, 33, 15:3, 왕하 14:3)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오랫동안 품으셨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42:1-3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로서 오랜 바램이었던 유다지파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T 1: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당시 기존의 제사 입장을 뒤집는 일대 개혁이었다고 지난주 말씀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제물이 있어야 했는데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조차도 살 수 없어 제사를 드리기 곤란해 졌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런 제물이 필요 없는 세례를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세례(침례:벱티스트)보다 더 강력한 세례를 주실 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세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것인데 아무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22:17) 단 한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 시대는 자신들이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직접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우리는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7:18)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9)
하나님께 가는 방법이 구약은 제사였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지역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T 8:5-13). 로마 군인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뛰어나왔습니다. 순간 아마 제자들은 적지아니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루살렘에서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을 통해서 감시하고 있는데 이제 로마군까지? 군장과 계급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군인으로 수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 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수하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데 직접 가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Glaodh.

이와는 비교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왔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입니다. 병이 들어 있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가셔서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재 있는 곳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인 요단강 저편(요 10:40)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아마도 강을 건너 유대(베다니)로 가시면 다시 이곳에 오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병자들과 하실 일들을 정리하시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입장에서는 답답합니다. 길도 먼데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는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32)Glaodh.

이에 비해서 백부장은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T 8:10) “기이히 여겨의 원문 qaumavzw(다우마조)는 ‘놀라다, 감탄하다, 이상히 여기다’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깜짝 놀라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신 것으로 보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나 헬라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미안하며 예수님께 수고를 끼쳐 드리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사건이 있습니다.
T 15:21-27절에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일입니다. 두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건축자제를 나르던 곳입니다(삼하 5:11, 왕상 5:7). 시돈은 여기서 북쭉으로 40Km위치에 있는 두 곳 모두 유명한 항구도시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T 15:22)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막 7:26에서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고 하여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 이었음을 말합니다. 당시 여자가 자기 딸이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창피해서 숨겨놓고 지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워서 제자들이 듣다못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그리고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 15:24) 여자는 오자마자 예수께 넙죽절을 하며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T라고 하셨는데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이 여자도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원문에는 ‘여자야앞에 ‘오(!’W)’라는 호격의 감탄사가 있습니다. 그냥 ‘여자’라고 부른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놀라움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만 받으며 자라나는 자녀는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결손 가정이라고 말하는 가정의 아이들이 더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도 무조건 구원받을 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첫 부분은 교리편이고 다음 부분이 윤리편인데, 거기서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는 것입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란 사람은 그의 제자가 묻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 응답으로 꼭 한가지만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는데 당신은 어찌하렵니까 하니겸손을 구하지.한가지 더 주시다면? “또 겸손이지.한가지를 더 주신다면? “또 겸손을 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겸손으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대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제가 설교할 때 우리집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뭐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많이 하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들은 그보다 더한 것도 솔직히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당연히 될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예수 믿어야 될 집안에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목사가 될 자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