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생애(3. 내 사랑하는 아들) /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3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제가 몇 일전 육군본부에 있는 군인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계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대한민국 군대에서 일년에 병사 2십만 정도에게 세례를 준답니다. 어마어마한 인원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군대에서 이렇게 세례를 베풀어 사회로 내 보내는데 지역교회에서는 왜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고 그렇게 전도를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군 제대한 병사들만 모아도 교회가 부흥하는 것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언 듯 이해하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안됩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원해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회개를 말하는데 이들이 정말 회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다른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분이 군에 있을 때에 연병장에 모이라고 해서 모였는데 갑자기 소방 호수로 물을 뿌리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 친구에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 보았더니 “응! 세례 주는 거야”하더랍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까지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근래에 군대가서 세례주신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가끔 “저는 세례 받았는데요.”라고 고백하는 군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려고 세례 받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세례 주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반대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제일 기쁜 날일 있다면 그것은 세례를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고, 구원의 확신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예수님의 세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본문 13절에 “이 때에” 이 시간 접속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3:23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정확하게 때를 따라 계획적으로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2:4에 어머니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4:23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30세가 되어야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참고 민4:3). 요셉은 30세에 애굽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41:46).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4). 이제 예수님께도 때가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는 30세이지만 창기부터 구원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실로 오래 동안 기다린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는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잊혀져가고 메시야에 대해서 잊어갈 즈음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 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죄인의 몸을 입고 있는 요한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어떻게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는 말씀으로 보아 성경은 단순하게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좀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인 요한이 하나님인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을 요한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바로 이분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경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교만을 통해서 눈을 멀게 합니다. 교만하면 앞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단의 꾀임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문자쓰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교회에는 목사가 저 한 사람인데 원로 목사님 모시고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설교가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만 계셔도 젊은 목사는 교수님 앞에선 학생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5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의 설득에 요한은 순종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주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은 그가 광야로 나가서 하는 일을 구경거리로 삼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어떤 빌미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할 때는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요 13장).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교훈하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단순한 ‘겸손’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인 요한에게 자처하여 세례를 받으시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그냥 사람들에게 “그분 참 겸손하시다.”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아지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습니까? 세례 역시 죄인 가운데 오셔서 죄인인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해야 살길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몸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심으로 세례요한의 세례가 끝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 그것이 예수께서 받으셔야할 마지막 세례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자기의 신분을 높이려고 찾아가시는 분들도 있나 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여러분 절대로 하면 안될 것이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작은 예수가 되어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루시고 했던 “의”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면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구분을 잘해야 합니다. 겸손과 사단에게 무릎꿇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교회의 화목과 화평을 위해서라면,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협력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겸손을 가지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아버지인 하나님과 성령님이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육체의 제한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의 한계를 가진 우리와 또 2000년 전에 육체를 입고 오셨던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예수님과 늘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태로는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타나십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서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늘이 열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닫히면 암흑 세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쫓겨난 다음에 닫혀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 때마다 몇 번을 이 동산 근처에 서성거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 문을 연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와 말씀하신 하나님도 완전히 하늘 문을 여신 것은 아닙니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나 왕들에게도 하늘 문을 여신 적은 없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빛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이문은 종교 철학으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아 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열 수 있습니다. 이제 그분을 통해서 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10:20에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미친 사람들이라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사람 이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이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성령의 상징으로 보인 것입니다. 비둘기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비둘기 깨끗합니다. 겨울에 잡은 비둘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더러운 것도 먹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한 것이 노아의 홍수 때입니다. 홍수 후 40일이 지났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처음 날려보낸 새가 무엇입니까?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방주에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8:7). 땅이 마르기까지 왕래했다고 했습니다. 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먹을 것이 많으니까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각종 시체 썩은 것이 물위에 널려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냈습니다( 8:8).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10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8:9-12)고 했습니다. 까마귀는 방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더러운 것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을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방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합니다.
둘째, 제사에 드려진 제물입니다.
날 짐승 중에 제일 깨끗한 것이 비둘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나타난 성령의 모습 속에 비친 비둘기를 보고 모여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 생각보다는 하나님께 드린 제물중의 하나라는 것이 더 연상되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소,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드러나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위로의 성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드려질 제물이라는 것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도, 성경을 잃고도 무감각한 분은 병원에 가봐야 합니다. 저는 전율이 왔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대하면서 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흔히 자식을 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 비슷한말이 있는데 “눈에 밟힌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에게 물어 보았는데 70%정도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했답니다. 어머님이 자식이나 손자를 보고 싶을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런 말이 외국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 좋은 말입니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이지만 지켜가야 할 우리말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전교생들이 초콜릿을 먹으면서 울고있는 것입니다. 내용인 즉은 식당에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식탁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암에 걸려 얼마 더 살지 못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식당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학교에서는 8월에 그만두어야 하는 이분에게 10월 달까지 계약하신 분이라 미리 월급을 당겨서 두 달치 더 지급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스스로 저금통을 모아 퇴직하시는 이분에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금한 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아줌마는 학교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백 만원을 내 놓으시면서 학생들 초콜릿을 사주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제가 이 땅에서 할 수 마지막 일인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셔서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바로 이 아주머니의 돈으로 초콜릿을 먹으며 학생들은 고마운 마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 은혜, 이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 힘차게 살 수 있으며, 선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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