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지혜(디모데후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 디모데후서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4-16)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서신으로서 디모데전서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개인적인 서신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내용에 있어서도 수신자인 디모데 개인에 대한 격려와 개인적인 간증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전도자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적 지침서’라는 평가를 받는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로마 감옥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나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에베소 교회에 있는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바울 자신이 알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서신의 특징은 바울이 마지막으로 기록한 만큼 시기적으로도 사도시대교회의 막바지입니다. 본 목회서신은 교회가 이제 개척기를 지나 제도적인 교회가 출현할 때까지 공백기의 과도적인 교회 생활에 관해 이해할 수 있는, 현존하는 자료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자료입니다.

디모데후서를 통하여 당시 이단들의 활동과 성장으로 인해 생겨나는 초대교회의 위기를 알게됩니다. 사실 바울서신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부류들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고린도전서는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언급하였고,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자를, 골로새서는 일부 철학적인 이단 사상을 언급하였지만 매우 간헐적이고 지엽적인 경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의 대두에 대해 교회가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는 권면은 바울서신에 나오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디모데후서는 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만큼 이단의 활동이 난무 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지역교회를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더구나 로마 감옥에 갇혀서 오래동안 있다보니까 초대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이단이 생겨났습니다.

본 서신은 디모데후서가 기록된 시기와 초대교회 후반에 교회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디모데후서에서는 보다 체계화된 신조가 나타나는데, 이는 신앙을 분명한 말로 기록하기 시작한 교회의 사회가 조직으로서 스스로 성장해 가던 시기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성직자 계층이나 기계적인 조직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는 조직과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당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본 서신과 같은 지침서는 박해와 이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계속 성장해 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백조의 노래’라고도 불립니다. 아마도 이 별칭은 백조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에 기초한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본 서신은 바울의 유서와 같은 서신으로서 함께 죽고 함께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에 대한 참여를 약속하는 신앙의 노래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선포는 ‘위임된 보화’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그는 이 복음을 성실하게 전해야 할 의무를 가졌으며, 따라서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가 복음을 전승 보존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게 위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내가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나와 같이 복음을 전달할 제자를 만들고 죽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사도적 소명의 계승에 관한 분명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복음 선포의 올바른 성격을 보전해야 하는 일련의 전승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즉 그는 복음 선포의 승계를 위하여 합법적인 행위, 곧 안수를 전제하고 안수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하였습니다. 바울은 안수 받은 사람이 항상 새롭게 활동하도록 하는 은사를 갖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딤후 1:6). 따라서 바울이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 바는 위탁된 은혜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자신의 활동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과 전력을 다한 복음 선포가 그들을 복음 전도자로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의 이와 같은 성격은 이후 바울의 사도권이 누구에게 계승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한계와 범위를 규정하였다 할 것이며, 실제로 속사도 시대에 있어서 사도권 계승 문제의 척도가 됩니다.
안수가 초기에는 성령을 받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나중에는 사도권을 잇는 위탁된 복음 명령 자에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고 그 받은 성령의 역사를 지속시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문헌들에서 ‘구주’란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종말론적인 의미를 내포하는가 하면 전쟁에서의 조력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신비주의적인 문헌들에서는 새 생명의 창시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표현들에서는 분명히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 용어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용어를 사용하게 만드는 사상적인 연관성까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구주’라는 용어의 사용은 초대교회, 특히 목회서신 언어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구주’란 말은 헬라적인 전문 용어의 성격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이 용어를 분명히 종말론적인 의미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구주는 구원자와 동일시되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첫 번째 증거를 빌 3:20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물론 여기에서도 분명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시합니다. 빌 3:20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빌 3:19)와는 달리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한 구절을 더 언급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하늘로부터 오실 그리스도, 곧 구주를 기대합니다.
두 번째 증거로서 살전 1:10을 보면 마지막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등 종말론적인 문제들이 다루어집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따라서 초대교회에서 ‘구주’라는 말이 사용될 때 그것은 헬라 사상과는 별도로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에는 바울이 두 가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평생을 복음 전도에 바친 노사도의 위엄과 자애로운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이 때는 디모데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 입니다.
바울의 말년은 매우 외로운 상태였던 듯 합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떠났고(딤후 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합니다(딤후 4:10).
비록 임무 수행 차 떠났지만 그레스게와 디도, 그리고 두기고 등도 그의 곁에 없었으며(딤후 4:10-12), 누가 만이 그의 곁에 남아 있었습다(딤후 4:11). 더구나 바울의 2차 투옥은 모든 자유가 박탈된 채 사슬에 묶여 다른 일반 죄수들과 똑같이 취급받았습니다(딤후 1:16; 2:9). 따라서 바울의 동역자들 조차도 그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딤후 1:17). 바울은 이제 더 이상 풀려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는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디모데에게 자신을 위하여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딤후 1:4; 4:9, 21).
진짜 친구는 외로울 때, 힘이 없을 때 함께 할 친구입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의 가르침을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특별히 거짓 사도들과 그들의 유혹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실제로 목회서신 내에서는 여러 가지 유형의 대적자들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도 디모데후서에 나타난 대적자들은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도로 조직된 종파를 형성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의 전체 성격은 영지주의적인 사상 체계와 유사하지만 그들은 영지주의와 연결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추세는 초기 영지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하겠습니다.
그들의 교훈은 독신 생활을 강요하고 육식을 금하는 등 부당한 금욕주의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즉 그들은 종교 생활의 내면적인 능력의 결핍을 외적인 제도와 고행 등으로 보상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딤후 3:1).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들은 도덕적인 방종의 경향도 보입니다. 그러나 금욕주의나 방종은 모두 종교 생활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개종자들에게는 큰 유혹이 되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금욕주의나 방종이 교회 내에서 갈등을 일으켰으며 급기야 그리스도교 2세기를 향한 교회에 심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후에 영지주의로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거하라’의 원문 ‘메네’(mevne)는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무르라’는 말입니다. 영지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말씀을 굳게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이 왜 필요하며, 위대한 것이냐 하는 것을 이 본문 한 절이 다 말해줍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힘써서 전하고 죽기까지 전해야 하는 것이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 19:7)라고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 1:19) 빌립보 교회에게도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 외에 다른 방법인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dia;)는 ‘통하여’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나는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ㅅ흡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세상에 이보다 귀한 일은 없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전수하는 일임을 믿으시고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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