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십자가(고린도전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기록 목적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뒤에도 고린도 교회의 생활과 성장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고후 11:28). 또한 복음의 씨를 뿌리기만 하고 돌보지 않아도 아무 장애 없이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던 것도 물론 아닙니다(고전 3:6).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 에베소에 머물면서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 끊임없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였습니다(고전 1:4, 빌 1:4, 골 1:3, 살전 1:2). (더 보기…)

십자가 언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지난 26일 미시령 울산바위 전망대 인근 내리막길에서 단풍 관광객들을 태우고 가던 관광 버스가 긴급 제동시설 옆 비탈면을 들이받아 1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오래 전 스위스에서 어떤 분이 관광버스를 몰고 내려가다가 관광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습니다. 내려가는데 어린 아이가 도로 가운데서 놀고 있었습니다. 안에 있는 분들도 놀랍니다. 이 운전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두 말도 못하고 정말 우리 모두가 죽느냐? 저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긴박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 때 운전기사는 방향을 트는 대로 이쪽으로 가면 이쪽 다 죽습니다. 낭떠러지에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아이 있는 쪽으로 가서 아이를 치고 그 아래에 내려가서 섰습니다. 버스 승객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었습니다. 모두 너무 놀랐지만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하나도 안 우는데 운전기사가 우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비통에 빠졌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자기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치고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자가 때문에 살았습니다. 십자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나 욥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보았을까요? 보지 못했을까요? 예!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출애굽의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을까요?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욥보다 그 다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눅 10:11)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보다는 자꾸만 어떤 증거를 더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고 했습니다. 십자가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것 가운데 이 십자가를 오페라로 말하면 크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춥니다. 그래서 우리가 슈퍼스타나 좋은 기독교의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면 모두 어디에 맞추느냐? 포인트가 어디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문제를 천만가지 억만 가지 많고 많은 인간의 고민과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법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미국의 법은 많은 내용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에는 어떤 법이 있느냐 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것이 설령 지나가는 말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했다가 손해를 보았다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책입니다. 약속의 책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받았던 십계명을 담았던 궤의 이름은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말합니다. 신학용어 중에는 계약신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내지는 특별한 은사를 사모하는 경향이 많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못 믿을 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런 증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그 증거를 더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이스라엘 출애굽 백성이 있었습니다.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어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그러한 광경입니까? 지금이라면 비디오로, 사진으로 찍어놨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정말 대단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한 백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 때도 사람들은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남자만 오천명이 넘게 먹은 오병이어의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수만 명이 먹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다 뒷걸음질 쳤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향해 그분의 죄는 없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 소리만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아무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을 때 이 한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75세면 살만큼 살았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이사를 갑니까? 새 땅은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있었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여기 잘 보세요? 하나님의 증거가 먼저 아브라함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양털시험을 한 것과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같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에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 어떤 증거를 보여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욥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영혼에 선악을 알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사람의 양심은 속일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다른 사람 다 속여도 자기는 속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속이지 못합니다. 사람의 깊은 곳 ‘양심, 영혼’을 알고 게십니다.

반도체가 요즘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아십니까? 나노(nano)시대입니다. 하도 어려워서 쉽게 말하면 머리털 하나로 천 개를 나누는 것이 나노라합니다.
밀리(milli)가 천 분의 일이고, 마이크로(micro)가 백만 분의 일입니다. 그 다음이 나노(nano)입니다. 십억 분의 일을 말합니다. 머리털 하나로 10만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1초의 1/10억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나노는 세계에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 비슷하게 가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우리가 대단히 앞서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컴퓨터는 우리가 한 30년 늦게 시작했지만 나노는 지금 같이 가고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사람도 나노를 만듭니다. 지금은 머리카락 같은 것 하나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불과 30년 전 방만한 컴퓨터였습니다. 이것이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시대가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지금은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이 율법시대이면 지금은 십자가 시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무리 깊은 것도, 아무리 어려운 것도 모두 풀어주고, 모두 대답해주며, 모두 해결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 승리합니다. 어떤 문제에서도 승리합니다.

동물에게 본능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바닷가 모래언덕에 올라와 알을 낳습니다. 알에서 막 깨어난 새끼는 물이 있는 바다로 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서 바다로 갑니다. 연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이 정직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습니까?

사탄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사탄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초의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은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모두 거짓입니다.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할 때도 다 거짓입니다. 거짓으로 유혹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12)

사탄의 거짓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회개치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고 했습니다.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도 혹시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무슨 영혼이 있어?’ 그러면 큰일납니다. 세상축복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득이 되는지 해를 입히는지 알고 세상의 축복을 말해야 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팔다리 끊고, 세상의 것을 버려서라도 영혼을 구하라고 말하십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 16:17)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저 거짓말 안 시키고 정직히 사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정직히 사는 것만으로 안 됩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정직한 것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표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하셨습니다. 그 표준을 정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막8:3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 날은 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불꺼진 십자가는 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을 때 불이 들어옵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십자가를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말하고 보여주면 사탄은 벌벌 떱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진실이 어디에 있습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십자가에 계십니다.

본문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를 전하니” 이것이 참 소망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유대인처럼 표적만 구해서는 안됩니다. 헬라인은 지혜만 찾습니다. 다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먼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십자가와 바꿀 수 없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 주님과 함께 십자가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우리 기독교인이 가장 잘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은혜’입니다. 은혜 없는 기독교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씀으로 보고도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일을 경험하면서도 은혜 받았습니다. 그럽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마칩니다. 내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다 피해집니까? 몇 개는 피하겠지요.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세상에 모든 것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뽑았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왜 감사의 삶을 살아갑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불평의 삶이 아닙니다. 감사의 삶입니다.

눈이 따가워 안과에 가면 인공 눈물을 줍니다. 의사 선생님이 “하루에 네 번씩 넣으세요.” 그럽니다. 어떤 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루에 네 번씩 울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울려고 하니까 눈물이 잘 안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돌아와 하루에 네 번씩 눈물을 흘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참 잘 웁니다. 남이 볼까봐 화장실에 가서 웁니다. 혼자 있을 때 웁니다. 교회에서 주님과 함께 웁니다. 은혜 받으면 잘 웁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하면서 웁니다.

성경 적인 이름으로 제일 많은 것이 남자는 ‘다윗’, 여자는 ‘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21일(목)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학생 아들 이모군(13)이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할머니 일가족 4명이 숨졌습니다. 이군은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다”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자식을 두고는 언제나 자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식의 문제는 부모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식을 다 욕할 수 있어도 부모는 못합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아는 아이로 키워야합니다. 은혜를 알면 사람이 됩니다. 은혜를 알면 다 됩니다. 잘못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이 은혜를 배웁니까? 어디 가서 이 은혜를 받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 와야 됩니다. 교회는 노력해서, 우리가 도 닦아서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함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되면 교만만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보세요. 겸손해 집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아직도 국가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가 아작 덜 변했다는 것입니다. 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말 그대로 국경을 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북한 탈북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돕고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 없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북한으로 망명하려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의사 신모씨 등 3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난 2월 스웨덴에 거주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려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을 감사하지 못하면 어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에게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 이민가신 분들이 자녀가 두 가지 말 배우는 것 때문에 고생하니까 한국말을 잘 안 가르치고 영어나 제대로 하라고 해서 지금 부모 자식간에 말도 잘 안 통하는 가정이 많다는 겁니다. 자식하고 깊은 대화를 못하니 자식도 아니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미국 오바마 대령은 어떤 때는 일주일에 공개석상에서 몇 번씩 한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미정상회담 때는 이병박 대통령에게 한국의 교육을 배우려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잘 살게되니까 한국어가 인기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한류 붐이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 남미까지 일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해야 합니다. 한국말을 해야 한국사람입니다. 은혜를 알아야,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에스라는 노예가 되어 타국에서 살았지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에 9:9) 노예가 되었던 것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해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미래를 봅니다. 과거에 매여 원망만 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세요.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을 만날 천국을 생각해 보세요.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은혜가 있으면 봉사합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모 교회 김 권사님은 93세의 고령에도 교회 강단 청소를 사명으로 알고 매주일 예배 1시간 전에 오셔서 기쁨으로 찬송하며 닦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너무 힘드신 것 같아 그만 하시라고 하니 “하나님의 사명은 은퇴가 없어요.”하시면서 기쁨으로 봉사했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이 내 몸에 있다면, 우리는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병원에서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암 환자로 누워 있으면서도 편지를 써서 ‘예수를 믿으세요. 구원을 얻습니다.’ 하고 창 밖으로 하나씩 던졌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래도 예수 믿어 구원함을 얻도록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항상 궂은일에 솔선하기로 유명하였다합니다. 남강 선생께서 오산학교를 세웠을 때이다. 선생은 남들이 꺼리는 화장실청소를 하곤 했습니다. 화장실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강이 그쪽으로 가면, “서쪽, 서쪽!”하면서 학생들은 웃으며 따라갔습니다. 추운 겨울날 남강은 도끼로 얼어붙은 똥 덩이를 깨고 있었습니다. 또 후에 선생께서 3.1운동으로 옥중에 있을 때에도 변기를 맡아 청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이 “선생님이 그렇게 하셔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그것을 자기의 십자가로 알았습니다.

서울에 사무실이 있을 때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못되었는지 사무실 앞에 차를 세워두면 늘 망가집니다. 백미러를 펴서 발로 차서 달랑 달랑 매달려있기가 일수입니다. 한번은 누가 계단에다가 큼지막한 똥을 싸고 갔습니다. 주인이 그 위층에 사시는데 그분도 교회 집사님 입니다. 그런데 그 똥을 못 치우고 피해 가시더라 구요. 결국 우리 집사람이 치웠습니다.

속담에 “하루 은혜 백 날에 갚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기는 쉬워도 갚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전 6:1)고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봉사의 책임이 더 커짐을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보기 드문 선한 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 가지 오점을 남겼는데 그것이 대하 32:24-26에 나옵니다.
“24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위급한 상황에 처한 히스기야를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마다 구해 주셨습니다. 그의 통치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히스기야의 유다는 강성해졌고 이웃 나라로부터 부러움과 경계를 동시에 받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벨론까지도 유다에 사자를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선물을 바치고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으로 말미암아 히스기야는 도리어 교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듭된 은혜를 입고 보니 모든 일들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되었고, 그러자 스스로 자신감이 생기고 자부심이 생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보다 그 문제가 해결된 후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면서 감사의 고백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과 외국의 왕으로부터 많은 보물과 존경을 받았으나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섬기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인색한 마음은 성도의 신앙을 좀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색한 봉사나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인색한 연보에 대해 말하기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9:7).

참 사람이 간사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아니라, 인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 27:13)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시 30:7) 라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 기도하셔야 합니까? 주의 얼굴이 가리우시면 큰일입니다. 내가 보기 싫어지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이 피하시는데 마지막 날이라고 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르짖어야 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희돈 장로님은 3년 정도의 스케줄이 다 짜여있는 분입니다.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러나 매일 새벽에 교회에 가서 3시간 이상 기도하고 출근합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기도하는데 들어와서 “장로님 정말 기도하면 이루어집니까?”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면서 한마디만 하셨답니다. “제가 바보처럼 보이십니까?” 그랬더니 그분도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은혜를 받고 봉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8-29) 일하지 않는 일꾼의 달란트는 빼앗아 일할 수 있는 사람에 주십니다.

바울은 솔선수범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무리 보아도 은혜로운 말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새언약의 일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6)

이모(18)군은 1992년 2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90년도에 유행했던 원정출산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98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주로 한국에서 살다가 1992년 1월부터 3개월 동안만 미국에 머문 뒤 아들과 함께 귀국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한·미 복수국적자가 된 이군은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한국 국적을 이탈하고 싶으면 먼저 병역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생은 미국에서 했지만 살지 않았고 국적만 취득해 갔고 있다가 군대갈 때가 되니까 대한민국 국적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혜택은 누렸지만 의무는 안 지겠다는 겁니다.

KBS1 일일극 ‘바람불어 좋은 날’에 보면 오복이는 아이가 있는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친 엄마 미란이가 나타나 결혼생활을 방해합니다. 아이만 나 놓고 미국으로 떠났던 미란이를 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엄마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버리고, 아무 책임은 가지지 않고 천국만 가려고 한다면 양심 없는 이중 국적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신 것을 약속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책임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구약에서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도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로 주신 것입니다(창 9:16-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하나님은 나타나셨다하면 사람하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사람하고 약속을 하신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만들어 가지고 올라갔던 궤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박스입니다. 그 약속의 궤가 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과 개인은 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건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이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이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21)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목적은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 가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바로 이 증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실 약속은 우리가 여겼는데 하나님은 먼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의 피입니다. 피로서 새우신 언약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갑자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뭐가 있었지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까? ‘예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입니다. 이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힘은 세상 적인 힘이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학교는 병원은 큰 곳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세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있지만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할 것은 보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꾼이 일할 때 약속하지 않고 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다 약속이 있는 겁니다. 얼마큼 일할 태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ㅣ22)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못 믿지만 예수가 보증입니다.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일꾼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역사는 한가지 큰 원리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인간은 어느 한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인간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시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자기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이 자신만을 위한 복음이었다면 신약을 남을 위한 복음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민족 복음이었다면 신약은 이방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본문에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인 무익합니다. 육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다른 것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은 엉망인데, 영혼은 죽었는데 다른 것이 잘되면 뭐합니까? 영혼을 위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교육학사전에서 교육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능력과 행동을 발달시키는 전체 과정, 그리고 사회적 경쟁과 성장을 이루게 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육의 출발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어디서 오게되는지는 모르고 인간의 소질만 개발시키고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 축은 소외시키고 주변 기능과 유능성을 함양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게된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지혜 있는 악마를 만들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일 짧은 시간에 성경을 다 가르칠 수 없지만 성경을 요약해서 다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운동경기도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육디스로피협회를 만든 분이 계십니다. 일명 근육병입니다. 이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근육병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격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 영역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첫째, 예수 믿은 것이고, 둘째, 교회에서 집사가 된 것이고, 셋째 하비타드를 세워서 남을 위해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시고 할 때 한가지를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약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우리는 지금 이런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엘리사 시대가 아닙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1-56)
좀 돌아가면 됩니다. 길 가로막았다고 다 죽여버리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마리아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원수지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저주하시고 원수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밤에 가룟유다하고 군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고 나섰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1)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군병들에게 초라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죽여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방법을 쓰는 겁니다. 미란이 아버지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안주십니다. 주시면 그 능력을 다 죽이는데 결국 사용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여버릴 것입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잘못을 저질러 태형을 때리지만 그러나 40대 이상 때리면 안됩니다. 자꾸 때리다 보면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못이 있어 때려야 하지만 무시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회개하고 다시 잘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살면 잘됩니다. 지금 왜 매를 때립니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나라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증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2-15)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10년 3월 31일에 서해 상에서 발생한 우리나라 초개함(천안함)의 침몰된 배의 구조를 바라보다,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 앞서 일부 참모들에게 “직접 가봐야겠다”며 준비를 지시했다는 후문입니다.
특히 이 대통령은 “내가 국군통수권자다. 더욱이 실종된 장병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국민일 뿐 아니라 내 자식, 내 부하와 같은 사람들 아니냐” 면서 “더 이상 앉아서만 볼 수 없다”고 말하고 백령도를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천사를 보내시고 왕과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전달되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이 땅에 가봐야겠다고 결정하시고 오셨습니다. 더 이상 하늘에서만 보고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무작정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실 계획을 함께 마련하시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는 것은 부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식을 하는데 세례를 왜 받습니까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는 ‘메시야’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증거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성경에 못 믿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못 믿을 사건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성경이 다 믿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믿어지면 성경이 다 안 믿어집니다. 제가 몇 가지로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바른 증거를 한다고 해도 믿지 못할 분은 믿지 못한다는 것을요. 많이 배웠다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나 권세가 있다고 부활이 믿어집니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신비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기독교는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동정녀 마리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시겠다는 말씀이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학문을 통해서 모두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신비적 경험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를 우리는 경계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비조차 외면하는 이성주의가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앙의 모습도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와 다르게 신앙이 자라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치우쳐 있었지만 일본은 지나치게 이성주의 였습니다. 신비주의도 문제이지만 이성주의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신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는 신비를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최고의 신비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본문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사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만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고 전파한 제자들 역시 처음에 부활을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눅 24:11)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마태복음 맨 마지막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7) 고 했습니다. 예수님 승천이 임박해 있는 이 때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이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정도면 오늘날 우리들이야 얼마나 의심이 가겠습니까

그래서 음모론이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워터게이터 사건 이후 음모에 가담했던 척 콜슨(Chuck Colson)은 음모가 성립하려면 “가담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확신을 보이고 또 재능도 있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꾸밀 정도로 제자들은 여유가 있지 못했습니다. 일을 꾸미려면 주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보통 이런 일을 주도하려면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주도면밀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죽었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챙기기도 바빠 습니다. 완전히 실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다음에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1세기에 누군가 날조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유대 법정은 여인들의 증언은 증언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머리를 써서 꾸몄다면 최소한 여인을 첫 증인으로 내세우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베드로나 요한 아니면 니고데모라도 증인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 손을 대려면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A.D. 90년 이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런 요한마저도 똑 같이 기록합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큼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마 28: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고 부활의 충격을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저도 과거에 부활을 못 믿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던 것이 부활입니다. 중학생이 못 믿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실 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부활에 인생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성령의 역사로 처음에 저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난 뒤 지금은이요 그 때 그 강력한 성령의 경험을 통해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이 간증식으로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이요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 찾아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성도들이 흩어졌는데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북쪽의 다메섹에 제일 많이 도망갔었습니다. 바울도 지독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거기까지 찾아갑니까 자기가 밝힙니다. “멸절”시키려고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씨를 말리려고 헸던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 길에서 빛이 바울을 두르고요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니까요 바울이 “주여 누구시나이까 ” 그 때 주님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이 한마디에 사울은 무너졌습니다. 그때부터요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 계시지 않았다면 바울에게 이런 음성을 어찌 들려주시겠습니까 거짓말하나를 지키려면 수 없는 거짓말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활은 반대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해야 합니다. 본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짓 증인은 용서될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to; khvrugma:토 케뤼그마)를 말합니다. 이 말은 전파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내용(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헛것이며” 는 앞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라고 했는데 앞의 것은 kenh;(케논)입니다. 케논은 ‘실제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한 공허한 것’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도 헛것이며” 의 헛것은 mataiva(마타이아)입니다. 마타이아는 “실제적인 것을 획득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을 말합니다. 캐논은 ‘할 수 없어서 공허한 것이고’ 마타이아는 ‘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 입니다. 나중 것이 더 강한 의미입니다. 전파하는 것이 헛것 인 것보다는 믿음이 헛것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늘 그랬듯이 부활도 각기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인생의 변화를 체험했고 희망과 용기로 가득 차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 부부가 싸우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제일 문제가 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싸우면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입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왜 예수님이 부르셨다고 보십니까 그의 열심입니다.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것을 믿을 준비도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그런데 아주 무관심한 사람은 대책이 없습니다.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도 안 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먹고사는데 만 정신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잔치를 벌이면서도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의심이 많았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오늘날 우리가 복된 줄 믿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성도 여러분이 부활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40. 부활의 믿음) / 본문 : 고전 15:12-20

“12 (eij:만일-원문에 있음-앞절 전파하는 것이 헛됨을 말함)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eij:만일-원문에 있음)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a[ra:아라-의문의 여지없이,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은 2008년 부활절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재물포항에 예수 복음을 들고 첫발을 디딘 날입니다. 불과 123년 전입니다. 123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는 약 5만여 교회와 1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약 18,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23년 전 이 땅에 처음 발을 내 디딘 아펜젤러 선교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기도를 하고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 참석 차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선박충돌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온지 17년만입니다. 그는 비록 17년의 짧은 기간동안에 이 땅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이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어느 날 헬렌켈러는 “가장 불쌍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련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옛 성인의 말에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 아무 문제없이 아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비전의 종교입니다. 소망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을 다 말하고도 결국은 다 같은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53: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주님을 믿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예수의 부활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가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안 오시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나보고 똑똑히 보고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믿음의 기초입니다(고전 15:12-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십니다. ‘만일’ 이라는 단어가 짧은 글 속에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13, 14, 15, 16, 19절). ‘만일(eij:에이)는 조건문으로 앞 절에서 제시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 이 곧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임을 말합니다. 원문에 이 단어는 7번이 나타나며 17절에도 들어있습니다. 또한 12-19절까지 모든 절에 나오는데 18절만 안나옵니다. 그러나 18절은 ‘또한’ 이라는 단어가 대신 나옵니다. 이 단어는 ‘a[ra:아라’ 인데 “의문의 여지없이, 진실로”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일’이라는 말을 더 강조한 단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문의 ‘다시 살아나셨다’는 에게게르타이(ejghvgertai)는 완료 시제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 이미 성취된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에이)’ 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지닌 절대성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에 빠져 사망한 자들로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삶이 인생의 전부라면, 세상에서 부활 신앙을 갖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는 없는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 나의 부활(고전 15:20-28).
부활은 모든 믿는 자에게 소망입니다. 앞서 ‘만일’ 이라는 단어로 있을 수 없는 일을 가정하던 사도 바울은 이제(20절) ‘그러나’ 라는 단어로 앞서 거론한 모든 가정을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중에 맨 처음 살아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앞서 가정한 모든 것은 한꺼번에 힘을 잃고 맙니다.
본문 20절 ‘그러나 이제(Nuni; de;:뉘니 데)’ 로 ‘뉘니’는 ‘지금 당장’ 데는 ‘그리고’입니다. ‘Nuni;:뉘니’는 nu’n(뉜)은 ‘현재’인데 뉘니는 바로 현재를 강조하기 연장형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뉘니’를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오늘 그 사실을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간증>
부활은 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분들이 말하는 것은

1) 가사설(假死說)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고 운명 후 로마 군인이 옆구리에 창을 절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죽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무덤에 장사한 것입니다. 로마 병정도 죽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시체를 내어 준 것이고, 제자들 역시 예수의 죽음이 확인되어 흩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2) 도거설(盜去說)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해 가고는 돈을 주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훔쳐 갔으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과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찾아갔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는데 어떻게 접근했겠습니까? 나아가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부활의 주님을 증거 했겠습니까? 도리어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훔쳐 갔다고 거짓 증거 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외에 환상설과 유령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야고보 외에도 500명이나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기독교회가 세상에 끼친 영향으로도 증거하고도 남으며, 교회확장과 박해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변하며,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볼테르는 50년 후에는 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하면서 무신론과 성경을 반박하는 책을 많이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50년 후에 교회는 없어지기는커녕, 신기하게도 그 무신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소가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가 되었고, 마루에서 천장까지 성경책으로 꽉 찼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1) 역사적 사실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들의 말은 대개가 확인이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내가 다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역사적으로 그 시대에 살고있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미 확인한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6.25를 체험한 분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마리아가 무덤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여인들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거짓말을 시키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10번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부활을 부정하려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모든 말씀을 부정해야 되고,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들의 이야기를 부정해야 되고, 제자들의 경험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같이 바울 사도의 부활의 증거를 부정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2) 증거들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이야기들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들어있습니다(마28장, 막16장, 눅24장, 요20장). 복음서 기자마다 특징 있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과 천사가 증거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증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10여 차례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3) 오감에 의지하여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오감이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도 이제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안 끼면 여러분들이 다 안보입니다. 지금 안경을 꼈지만 다 안보입니다. 멀리 보이는 안경을 끼면 가까이에 있는 글씨가 안보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보이는 안경을 낀 것입니다. 눈은 너무 멀리 있어도 안보이고, 너무 가까이에 있어도 안 보이고, 너무 캄캄해도 안보이고, 너무 밝아도 안보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다른 감각기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청년이 결혼을 하루 앞두고 약혼자가 수영을 하다가 익사를 합니다. 이 사람은 정신이 돌게 됩니다. 강팍해지고. 하늘을 원망하고. 욕하고 인생을 비관하고. 되는 대로 파괴하고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캐나다로 가게 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구주고. 왕으로 영접한 이 사람은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절망하고 서럽던 것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새로운 용기가 넘치는 새로운 능력이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지은 찬송가가. 우리가 많이 부르는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모든 괴롬 우리 주님께 맡기세…” 맡길 곳이 없어서. 맡을 자가 없어서. 몸부림을 치다가. 주님께 맡기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새롭게 할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짐을 져주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토벤도 몸은 병들고 정신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겉잡을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렸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많이 하고. 새 사람이 되어 변화 받았습니다. 이 때 지은 노래가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D단조 작품125 ‘합창’ 입니다. ‘환희’ 놀라운 변화를 경험해서 만든 노래입니다. 교향곡 최초로 합창을 도입한 곡입니다. 4악장에는 합창이 들어가는데 가사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따왔습니다. 우리 찬송가의 13장에 일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찾아보세요. 작곡자 1824년 베토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베토벤은 완전히 귀머거리였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단지 음악적인 감각으로만 작곡한 곡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베토벤의 최대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곡입니다. 인류 역사에 이런 장엄하고 멋있는 곡이 없습니다. 이 곡은 2003년 세계 국제기관인 유네스코에서 음악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대의 명 걸작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