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 아카데미 11월 컴퓨터 교육과정

KCM 11월 아카데미 교육일정
 

1. 어도비 포토샵 기초
2. 소규모네트워크 구성
3. MS Office 기초
4. PHP 기초
5. PC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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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M] MIR 27기 IT 선교훈련생 모집

IT선교사, 세계선교정보연구원 모집

이제는 복음 전파를 위해 IT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요소가 되었습니다.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IT기술 활용의 필요를 느끼시는 분 및 이미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분들의 IT 재교육을 위하여, 선교지에서 필요한 핵심적인 내용만을 엄선하여 정보선교에 관한 이론강의 및 IT 기술훈련 과정을 마련하였습니다.  (더 보기…)

자녀에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신 31:13)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무서운 게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아기가 울면 달래냐고 밖에 호랑이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기가 더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곶감 줄게 울지마 그랬더니 울음을 그쳤습니다. 밖에서 듣고 있던 호랑이는 나보다 더 무서운 게 있구나 하고 도망을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범죄는 누가 저지르기 쉽습니까? 배고 푼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는 빵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이 저지르는 죄는 유형이 다릅니다.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자기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예수님 때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저지르기 쉬운 제일 큰 죄가 무엇입니까? 우월주의입니다. 특권의식입니다. 배고프고 못 배운 자에게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층에게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가진 자에게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중의 하나가 ‘경외’(arey::야레)입니다. ‘야레’는 ‘두렵다, 두려워하다’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버릇없는 아이는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릇없는 사람은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알면 교육이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왕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부모는 무서워하겠습니까?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사람이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금방 죽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루살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두고 제일 많이 표현한 단어가 있습니다. ‘반석’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위’입니다. 이사야도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삼하 22:47) 하였습니다. 다윗의 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부른 노래입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삼하 22:32, 시 18:31)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하나님을 왜 바위라고 가르치십니까? 왜 다윗은 그렇게 찬양했습니까? 하나님만이 흔들리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요동치지만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흔들리지 아니하십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반석이신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흔들립니다. 세상을 의지하면 흔들립니다. 자신의 건강을 의지하면 흔들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영원할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출 18:18에서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각 부장들을 세워 일을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못합니다. 지금은 하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후계자를 세워야 합니다. 자손을 세워야 합니다. 일의 성공의 여부는 사람을 세우는데 달려 있습니다.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크게 키워줄 수 있는 조직이나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본을 가르쳐라.
모든 원리가 기본에 있습니다. 기본이 충실하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세상을 미끼로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과 싸움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의 삶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도 스님이나 신부처럼 세상을 떠나서 홀가분하게 살면서 영적 수양을 하는 것이 더 성직자의 모습이 아니겠냐고 합니다. 목사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성자처럼 살아야 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누가 더 쉽겠습니까? 목사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과 똑 같이 가정을 책임지면서 그 고통과 어려움을 똑같이 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회가 점점 전원교회 비슷하게 산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있지만 영적인 사람을 키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도 하나님의 일도 다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고 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세상이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덕과 정의 정도는 세상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인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원리를 가르쳐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시 119:33)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했는지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길, 그 길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길에 성공이 있습니다. 그 길에 좋은 것이 다 있습니다. 모든 원리가 어디에 들어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다 들어있습니다. 잘 살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자녀교육을 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다 들어 있습니다.
욥은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욥 26:7)라고 했습니다. 욥은 성경시대 중에서 족장시대로 제일 오래된 지금부터 3,500년 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 때 이미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잡은 고기를 주지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것이 유대인 교육의 핵심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잠 16:16)
성경을 살아있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성경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분이 살아 계셔서 그것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빌 2:16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라고 말합니다.

마취제를 발견한 심프슨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2)라는 말씀을 읽고 마취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1847년 마취제 클로로포름(Chloroform)을 발견했습니다.

습관을 가르쳐라
자녀에게 미치는 부모의 유전적 요인은 두 가지입니다. 생물학적인 유전자를 물려준 것도 있지만 그 다음이 습관입니다. 자녀는 부모처럼 행동하고 부모처럼 삽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는데 나중에 보면 그렇습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대로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은 다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몸에 배운 사람은 자기를 잘 다스립니다. 이것 하나만 잘해도 인생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택민이처럼 번개맨을 하든 화 푸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방법, 일찍 일어나기, 회사에 30분 출근하기, 바른 자세 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이 성공을 부르는 것입니다. 습관은 절대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라고 합니다. 기도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입니다. 아버지를 찾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5)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유럽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은 모이기를 패하여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성막을 만드시고 그곳에 모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천지창조을 하실 때 운행한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입니다.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엄청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을 다음세대에 전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전달에 실패입니다. 멀리 가서 이방사람 구하는 것 다 중요하지만 먼저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우리집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만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거기 가고 안가는 문제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록펠러는 50대 중반에 죽을병이 걸렸습니다. 당시 록펠러는 미국 석유업의 95%까지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록펠러에게 1년도 살기 힘들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맨주먹으로 독립을 하고 30대에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했습니다. 40대에는 철도회사를 병합시켰으며 미국 정유능력의 90%이상을 지배하는 대기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되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고용인과 거래처를 무자비하게 착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했으나 존경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남은 1년의 시간을 남을 위해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원망하지 않고 늦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가는 곳마다 고아원을 세우고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자신이 모아온 그 모든 돈을 후손들을 위해 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는 선교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미국 YMCA도 그의 지원 하에 뻗어나갔습니다. 우리나라도 그의 지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98세에 죽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이런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도전의 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사람은 다 불쌍합니다. 제 친구 중에 제법 잘 나가는 친구가 있습니다. 몇 일 전에 한국에 왔습니다. 저는 성경타자 하냐고 바빠서 못 나갔습니다. 그 친구는 에어버스 전용기를 타고 왔습니다. 왜 제가 정말 친구냐고요. 준혁이에게 물어보세요. 나이가 같으면 다 친구지요. 전용기 한 대만 온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보조로 비행기 두 대가 더 따라 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타고 다닐 자동차도 따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자동차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보통사람은 줘도 기름 값 너무 들어서 못 탑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자기가 속한 민주당이 대패했습니다. 힘이 다 빠져있는 상태에서 한국에 온 겁니다. G20 서울회의와 한미 FTA의 해결을 위해서 시간도 정하고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열면서 타결 소식을 기다렸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기자회견 때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미국민들 입장에서 봐도 실망입니다. 먹이를 구해 가지고 가지 못하는 사자처럼 되었습니다.
거기다 G20 첫날 저녁 만찬을 하는데 각 국 정상들이 늦게 오는 바람에 20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각 국 정상들이 자기가 맨 나중에 들어오려고 일부러 늦게 도착한 겁니다. 미, 중은 특히 기 싸움이 대단합니다. 일부러 10분 늦게 출발을 하고 도착해서도 보이지 않게 서로 나중에 들어오려고 기 싸움을 하다가 20분이 늦어졌습니다. 원래는 대통령이 제임 기간이 제일 긴 브라질 대통령이 제일 나중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데 미국, 중국 정상이 안 오니까 먼저 들어온 겁니다. 그 때부터 다 꼬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최근(2010.11.8)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한국을 “아시아의 기적”으로 표현하며 발전상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30년 전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멕시코보다 가난했다”면서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이 말레이시아나 멕시코의 두 배를 웃도는 1만7000달러로 급증했고 올해 예상 GDP 성장률이 6%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실례로 삼성과 LG전자의 LCD 텔레비전 시장 지배, 4G 휴대전화 기술 선도, 현대자동차의 약진, 온라인 게임 및 대중음악과 같은 신(新)산업 성장동력 부상 등을 꼽았습니다.
이 잡지는 더불어 “세계화가 한국 경제 기적의 엔진 역할을 했다”며 1997년 금융위기 후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경영진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장벽과 편견을 없애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체제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라며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외국의 영향을 경계하고, 직장에서 여성에 차별적이다”라고 꼬집었습니다.
타임지는 나아가 복잡한 기업 규제와 경직된 교육 시스템, 북한의 위협 등 장애 요소가 있지만 “한국은 도전에 맞서온 나라”였다면서 한국의 미래상을 낙관적으로 내다봤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어지면 완벽해지고 좋아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나라란 없습니다. 미국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 움들을 극복해 가면서 성장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인종차별이었습니다. 흑백갈등입니다.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볼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달러를 너무 많이 풀어 세계 환율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임지가 말한 것처럼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도전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이 땅에서 많은 것입니다.

미션(Miss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참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미션이라는 단어를 ‘도전, 힘, 교육’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본문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고 했습니다. biavzetai, kai; biastai;(비아조(침노를 당함) 카이 비아스테스(침노하는))입니다. 비아는 힘입니다. 지식적 머리가 아닙니다. “힘으로도 못 가요”라고 노래했지만 사실은 무슨 힘을 말한 것이냐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힘으로 천국을 공략해야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 힘은 무엇이며 그 이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 힘은 외면적 힘이 아니라 내면적 힘입니다. 하드파워가 아니라 소프트 파워입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힙입니다. 무력적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질문을 하고 말미에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7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왕궁의 힘이 아닙니다. 이 세상 왕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힘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보처럼 보였지만 사람을 살리는 영혼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힘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에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올해의 최고 뉴스는 칠레 광부들이 살아서 올라온 것일 것입니다. 지하갱도에 622m지점에 갇힌 지 69일 만입니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감동을 안겼던 주인공들을 맞이하려 전 세계 1,700여명 취재진이 전 세계에 생중계 했습니다. 사고 발생 17일만에 처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최초에 사고 발생 17일까지는 광부들이 갖고있던 비상식량 이틀치를 가지고 48시간마다 1인당 참치 두스푼, 과자 반조각, 우유 반컵을 먹으면서 버텼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감동의 드라마였습니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더 감격적이었습니다. 무슨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무슨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구촌은 감동했습니다. 죽을 뻔한 생명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쇠사슬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아주 강한 귀신이 들어간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 귀신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구하여 예수님께서 허락 하셔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은 낭떨어지로 떨어져 다 죽었습니다. 이 일로 온 마을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거라사인 지방에서 쫓겨나셨습니다(마 8:30-31, 눅 8:32). 귀신이 나간 한 영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입장만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도전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교육은 인격변화, 인간변화에 치중하셨습니다.
지식전달 위주가 아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 없이 지식을 담는 것은 청소하지 않은 물통에 물만 넣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을 집어넣어도 더럽습니다. 그릇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1-22)
바울은 선언합니다.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고 뭘 해도 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셋째, 인격적 관계형성을 통한 교육입니다. 부단한 접촉입니다. 예수님은 삼 년 합숙하셨습니다. 도제훈련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오랜 시간 교실에 앉아 있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을 한번 같이 가보면 압니다.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오래 교육해도 머리로 하는 교육은 머리만 키울 뿐입니다. 가정 교육이 왜 중요하냐 하면, 가정에서 인격적 관계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인격이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집니다.

넷째, 현장 중심으로 교육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팀을 구성하실 때, 예루살렘의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갈릴리 어부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운동, 복음 사업이란 우리의 머리나, 우리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었느냐, 회개하고 복음을 믿느냐 하는 조건들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탈락하게 되는데, 한가지 다른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가 지나치게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 것 때문에 그 대열에서 이탈하게됩니다. 그럼 어떻게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주간에 호산나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른 사람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왕이 다 되신 것처럼 흥분해 있었지만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권력자들과 대결할 것이고, 우리가 이길 승산은 1%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는 뭐했냐하면 누가 우리 중에 크냐,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까지도 다른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순진하게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룟유다입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다 모르는데 가롯유다만 압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길을 찾아 권력이 있는 쪽에 붙은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배반한 것입니다. 그 만큼 가룟유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처럼 선생을 미리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머리도, 재주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지나치게 앞서가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려고 선생을 판 것은 분명 너무 앞서간 것입니다. 사람의 수가 너무 빨랐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우리에게도 온다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으로 미리 피해보아야 안됩니다. 피해도 정도를 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장점만 가지고는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핵심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헌신한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특징을 보면 원리를 가르치시고 방법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무식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제가 가끔 그런 표현 잘 씁니다, 무식한 게 통한다고요.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는 관념적인 이론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침노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힘’이지만 사실 ‘싸움’을 말합니다.
이삭이 60세에 쌍둥이를 나았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창 25:26). 그 형 에서는 용맹하고 사냥을 잘하나 야곱은 대조적으로 유순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야곱을 편애하였습니다(창 25:27-28).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샀습니다(창 25:20-34). 그 후 야곱은 축복을 빼앗긴 형의 분노를 받아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부모를 이별하고 1천 8백리 되는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간 도망가서 타향살이를 합니다.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야곱의 소원은 고향에 돌아가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형의 마음도 누그러졌겠지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최대의 경칭 어인 ‘주’라 부르고 자신은 ‘종’이라고 낮추면서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창 32:5)라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이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전략을 바꿉니다. 이번에는 선물공세를 펴는 것입니다. 또 야곱은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나머지 한 떼는 피하라는 작전도 세웠습니다.
야곱의 이름에 “속이는 자, 간사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이름처럼 모든 수단을 다 강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야곱이 이것 때문에, 자신의 계책 때문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형에게 줄 선물은 미리 보내고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2-28) 고 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악착같음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 천사가 나타났을 때 씨름을 하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에게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애 프로그램인 1박 2일인가에서 강호동이 하고 이만기가 씨름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서로 장난하면서 이만기는 20년 만에 처음 삿바를 잡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씨름 선수는 삿바를 잡아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감이 온답니다. 야곱도 감이 왔습니다. “이 사람(천사)은 나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알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기회입니다.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얍복강의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의 얍복강이 어디입니까? 주앙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천사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베드로의 이 대답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가 비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지만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베드로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 보다, 많이 아는 것 보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새언약의 일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6)

이모(18)군은 1992년 2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90년도에 유행했던 원정출산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98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주로 한국에서 살다가 1992년 1월부터 3개월 동안만 미국에 머문 뒤 아들과 함께 귀국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한·미 복수국적자가 된 이군은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한국 국적을 이탈하고 싶으면 먼저 병역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생은 미국에서 했지만 살지 않았고 국적만 취득해 갔고 있다가 군대갈 때가 되니까 대한민국 국적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혜택은 누렸지만 의무는 안 지겠다는 겁니다.

KBS1 일일극 ‘바람불어 좋은 날’에 보면 오복이는 아이가 있는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친 엄마 미란이가 나타나 결혼생활을 방해합니다. 아이만 나 놓고 미국으로 떠났던 미란이를 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엄마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버리고, 아무 책임은 가지지 않고 천국만 가려고 한다면 양심 없는 이중 국적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신 것을 약속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책임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구약에서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도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로 주신 것입니다(창 9:16-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하나님은 나타나셨다하면 사람하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사람하고 약속을 하신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만들어 가지고 올라갔던 궤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박스입니다. 그 약속의 궤가 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과 개인은 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건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이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이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21)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목적은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 가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바로 이 증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실 약속은 우리가 여겼는데 하나님은 먼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의 피입니다. 피로서 새우신 언약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갑자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뭐가 있었지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까? ‘예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입니다. 이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힘은 세상 적인 힘이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학교는 병원은 큰 곳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세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있지만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할 것은 보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꾼이 일할 때 약속하지 않고 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다 약속이 있는 겁니다. 얼마큼 일할 태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ㅣ22)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못 믿지만 예수가 보증입니다.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일꾼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역사는 한가지 큰 원리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인간은 어느 한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인간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시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자기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이 자신만을 위한 복음이었다면 신약을 남을 위한 복음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민족 복음이었다면 신약은 이방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본문에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인 무익합니다. 육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다른 것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은 엉망인데, 영혼은 죽었는데 다른 것이 잘되면 뭐합니까? 영혼을 위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교육학사전에서 교육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능력과 행동을 발달시키는 전체 과정, 그리고 사회적 경쟁과 성장을 이루게 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육의 출발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어디서 오게되는지는 모르고 인간의 소질만 개발시키고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 축은 소외시키고 주변 기능과 유능성을 함양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게된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지혜 있는 악마를 만들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일 짧은 시간에 성경을 다 가르칠 수 없지만 성경을 요약해서 다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운동경기도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육디스로피협회를 만든 분이 계십니다. 일명 근육병입니다. 이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근육병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격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 영역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첫째, 예수 믿은 것이고, 둘째, 교회에서 집사가 된 것이고, 셋째 하비타드를 세워서 남을 위해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시고 할 때 한가지를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약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우리는 지금 이런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엘리사 시대가 아닙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1-56)
좀 돌아가면 됩니다. 길 가로막았다고 다 죽여버리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마리아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원수지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저주하시고 원수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밤에 가룟유다하고 군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고 나섰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1)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군병들에게 초라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죽여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방법을 쓰는 겁니다. 미란이 아버지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안주십니다. 주시면 그 능력을 다 죽이는데 결국 사용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여버릴 것입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잘못을 저질러 태형을 때리지만 그러나 40대 이상 때리면 안됩니다. 자꾸 때리다 보면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못이 있어 때려야 하지만 무시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회개하고 다시 잘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살면 잘됩니다. 지금 왜 매를 때립니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나라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까지 자랄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흘렀는데도 기사는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느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성질 급한 한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기사님, 이 똥차 언제 출발해요?” 버스 기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네 손님, 똥이 다 차면 출발합니다.”
우리 속담에 “내가 똥 눈 우물물을 내가 다시 먹는다”고 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봅니다. 마치 고기가 “물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서 모르는 겁니다. 내가 지금 호흡하는 것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하실 일을 대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는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던 방법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살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노라고 그 방향을 변경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입으로 한 회개를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의 제자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다른 제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면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성경교육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기 위하여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성경을 보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주일학교 운동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그 목적은 어린이를 위한 성경 학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자연적으로 흘러내리지만 흘러내린 바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반드시 손이 가야합니다. 잡아 당겨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바지가 흘러내리기는 하지만 절대로 저절로 혼자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흘러 내려갔던 바지를 올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멀어져 간 것을 다시 찾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인간에게 죄 성이 있어서 마치 바지가 저절로 흘러 내려가듯이 내려가기는 하지만, 저절로 올라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른 기독교교육을 통해서만 흘러 내려갔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중국 병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은 물에 큰 고기 없고, 마음 적은 사람 큰 성공 없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물가로 가야합니다. 크게 키우려면 큰물로 보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큰 교육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제일 크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마 12:41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절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제일 크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신 예수를 작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큰 것인지, 오늘날 우리 교육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바른 방향을 잡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근대에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제일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1952년 미국교회협의회 안에 기독교교육부 특별위원회에서 5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58년 다음과 같은 기독교 교육목적을 발표하였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지상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고, 기독교적 공동체와의 생동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여러 방법으로 이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음과 같은 것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각 발달 단계에서, 신적 창조물인 자신의 높은 잠재력을 깨닫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여 그리스도인들로서 성숙을 향해 성장해 가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책임적인 역할을 취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대상으로 보면서 저들의 가족, 교회, 그리고 다른 개인과 단체들과 더불어 기독교적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는 보다 나은 이해와 각성을 얻도록 하여 그 가치들을 보존하고 하나님과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 활용하는 책임을 수락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증진시켜서,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할 수 있도록 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유산들 속에 있는 다른 요소들을 인식하고 효과적으로 이를 활용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국내외 선교에 성실히 참여함을 통하여 기독교적 친교 속에서 책임적인 역할들을 발견하고 수행 할 수 있게 할 것.

여기에 보면 각 항목의 끝나는 말에 모두 “도와 줄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나만 잘되려고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말합니다. 자기만 도와 달라는 기도, 자기만을 위한 축복 언제까지 이런 교육적 틀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어른이 되면 어린이를, 노약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고 했습니다. 도와 주라고 만든 거예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업어주기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이 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했던지 “나, 무겁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는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 주라.” 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이에 미안한 할아버지가 “나, 무겁지?”하면 자기를 따라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럼 가볍지!”라며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도우며 사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구(Life Way Research)에서 “미국 교회 외형 확장을 통한 부흥 실패”라는 결론을 내 놓았습니다. 한 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많은 중소규모의 교회들이 위축이 된다면 전체적인 성장은 실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데 빼앗아 온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갖지만 선교회는 여러 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하기 이전에 먼저 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앙교회 또한 늘 개인과 교회, 선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교회는 안됩니다. 우리 집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축복은 안 됩니다. 혼자서 선교 다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 용어 중에는 모달리티와 소달리티가 있습니다. 모달리티가 교회라면 소달리티는 선교회입니다. 전방과 후방, 보수와 진보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성장과 축복이라는 단어에 파묻혀 협력을 잊어버렸습니다. 성장과 축복은 협력 가운데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본문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북 유럽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빼째르부르크에서 육로로 핀란드로 넘어갔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얼굴이 굳어 있었고 사진 찍기가 겁납니다. 그리고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핀란드, 스웨덴 사람은 다른 거예요. 사진 찍으라고 웃어주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호텔에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아니 튀어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 유럽 사람들은 절대 필요 없이 빨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여자들이 먼저 나가고 차근차근 남자들이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온 나는 뭐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 나온 게 아니잖아요. 뛰어나와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기 미안해서 그 사람들의 시아에서 사라지기 위해 어디론가 계속 뛰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저 자신을 기억합니다.

본문 14절 하반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속도를 뜻하는 speed는 본래 성공과 부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남보다 빨리 뛰어야 산다는 서양 철학입니다. 우리말에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속도의 중요성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이 원래 빨리빨리는 아닙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비가와도 그 비를 맞을 지언정 경고망동하고 촐삭 맞게 뛰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지배자인 일본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조급하게 걸어 다니는데 오히려 한국인들은 대로 한 복판을 유유히 걸어다니고 있어 과연 누가 식민지인인지 모르겠다”는 술회도 있습니다. 빨리빨 리 문화가 오늘날 한국을 이끌고 있다고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빠른 것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은 인터넷 속도, 컴퓨터 속도, 핸드폰을 6개월만 바꾸는 나라라고 미국 교과서에 기록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심리학자에 따르면 속도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리적 속도, 사회적 속도, 개인적 속도입니다. 개인적인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조상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할수록 돌라가라”, “아는 길도 물어가라”,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귀에 실을 넣어야 바느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얼마나 급해졌는지는 애국가를 들을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대개는 “길이 보전하세”의 끝 소절이 끝나기 전에 다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애국가가 길이 보전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국가마다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하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움직이지 않을 때 뒤에 있는 차가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동경의 경우 4.5초 기다려 준답니다. 서울의 경우 1초 기다려 줄까요? 어떤 사람은 신호등이 지금 막 바뀌었는데 크락션을 누르더라구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하는 이유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지 않으려고 것입니다. “요동치”로 번역된 ‘클뤼도니조메노’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자꾸만 흔들립니까? 반석(바위)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장하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래요. 성경은 교회를 여자로 말합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계신다면 도울 일, 하실 일,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복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제발 복권을 사라!’ 복권을 사는 것 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나님이 당첨되게 해 주실 수 있는 겁니다. 혹시 다 복권을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행동을 해야 됩니다. 하다 못해 사과나무 밑에 가서 입이라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떨어지는 것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을 여세요. 움직이세요.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2008년을 보내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1-3)

철 좀 듭시다.

“빛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고 소리를 들으려면 귀가 있어야 돼. 그런데 시간을 느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 그래, 그건 마음이야 마음이란 것이 없어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시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이것은 미카엘 엔데의 동화 《모모》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 말을 한마디로 줄여 놓은 우리말이 있습니다. ‘철’ 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외국어를 몰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말의 ‘철’이라는 말보다 더 사색적이거나 아름다운 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철’을 굳이 영어로 번역한다면 계절(Season)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철’이 마음을 담은 언어로 사용되었을 때는 단순히 계절을 뜻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당한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철’은 외국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입니다. ‘철’은 단순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들을 때 ‘철 좀 들어라’ 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칭찬을 들을 때는 “철 들었구나”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일이 기억합니다. 겨울이 오고 봄이 와서 꽃이 피고 땀이 나는 여름을 지나 추수의 계절 가을이 돌아온다고 철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머릿속에 모세혈관과도 같은 핏줄 속으로 철이 오고 철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말마다 모두 사색적이거나 시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말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해외 여행갈 때 비행기에서 지켜야할 에티켓으로 스튜어디스에게 주스 달라, 물 달라 할 때 이것을 외국어로 익히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저는 비행기 타고 천연덕스럽게 외국 항공사 비행기 타고 스튜어디스에게 “물 주세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주위의 사람들이 그것도 한국 사람들이 저를 다 처다 보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물 주세요” 일본 비행기라 그냥 ‘미즈’ 하면 됩니다. 일본말의 ‘미’ 도 한국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우리말의 ‘미 나물’, ‘미 더덕’ 이 있는데 여기서 ‘미’ 는 물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비행기 띄우면 그것도 스튜어디스정도라면 그 정도 한국말은 배워서 서비스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한국말을 국제적으로 나가서 쓰지 않으니까 그분들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말을 배우고 전하려고 하지 않고 외국어만 배우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철없는 백성’ 일 것입니다. 저는 더 원치 않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려는 열심만큼이나 한국어를 배우고 전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국어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말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몇 일전 전화국에 전화를 하더니 “우리 집 전화 먹통이 되었어요.” 그러는 겁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 집 전화선이 끊어 졌나 봐요 또는 우리 집 전화가 연결이 안되네요.”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먹통이 됐어요” 그래도 다 알아듣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선교사가 와서 우리말을 배우는데 어찌 표현이 다양하고 어려운지 한번은 길 가다가 죽은 척 했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말이 다 다르답니다. 발로 한번 차고는 “죽었네.” 어떤 사람은 “갔어!” 또 어떤 사람은 “소천 하셨네” 등 그 표현이 다 다르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시간을 밖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그저 흘러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을 마치 향기로운 과일을 먹듯이 우리는 시간과 나이를 먹었습니다. 시간이 나의 마음속에 살과 피 속에 파고 들어가 영원히 기억되게 남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나이를 “헛 먹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몸무게가 두개입니다. 저울로 달 수 있는 몸무게와 마음을 다는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풍부하고 인격이 쌓여 가는 사람에게 “그 사람 무게가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제레미 콜리어는 “지식은 세월이 흐른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요, 많은 날들은 지혜를 가르치기에 적절하다.” 고 했습니다. 2008년도 우리는 먹었습니다. 먹었으면 그 만큼 무게가 있고 철이 들기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더 이상 슬프게 만들어 드리지 맙시다. 호세아는 본문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두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세월이 간다고 철이 간다고 철들지 않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 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회색 어두움이 있다. 첫째는 공허감이요, 둘째는 죄책감이요, 셋째는 불안, 공포감” 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갈등은 다른 그 무엇으로는 해결 될 길이 없는 겁니다. 죄의 문제를 무엇으로 해결하겠습니까?
심리학자 ‘칼 리밍거’ 박사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경험한 바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만 줄 수 있다면
그 중에 75%가 그 다음날로 퇴원하게 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가는 교육

기독교의 정신 가운데 하나는 가르치는 것, 교육입니다. 사람에게 교육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은 무지하게 되어 선과 악도 구분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나라도 엉망이 됩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세계지도 펼쳐놓고 보면 이요 가톨릭 식민지화되었던 나라들이 못사는 것 알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식민지화 할 때 그들을 통치하기 쉽게 남자들 교육을 안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뿌리가 너무 깊어서 그 나라들이 잘 회복이 안됩니다. 중국 공산당은 사람이 감성이 풍부해 지면 낭만주의가 되어서 공산주의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음악이나 미술, 예술 계통을 안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산정권이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강조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가르치라” 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출 18:20) 라고 하셨습니다. 가르치고 보여주지 않으면 교육이 안됩니다.
러시아 000에서 선교하는 000선교사가 계십니다. 그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교회 건물 공간이 이상하고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교회건축을 하는데 러시아 사람에게 맡기고 급한 일이 있어서 한국에 다녀갔는데 교회를 정교회 같이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사람이 본 교회의 모습은 정교회만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회는 정교회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누구를 보고 무엇을 배우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 143:10) 주님께 배우세요. 하나님을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을 보세요. 그 이야기가 모두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우리가 배우고 보는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2) 산상복음(8복)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고 마지막 당부를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자기를 아는 것이요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 이 두 가지 지식은 결코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근심을 더해 갈 것이며 하나님 없이 얻은 물질은 자신을 멸망케 할 것이고 하나님 없이 가진 권력은 자기와 백성을 다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요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여기에 내 문제의 해결도 있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고, 세계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습니다.

우리말의 머리가락(카락)은 머리에서 갈라진 것, 손가락은 손에서 잘라진 것, 발가락은 발에서 갈라진 것입니다. 영어의 헤드와 헤어, 핸드와 핑거는 아무리 보아도 서로 연관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몸을 하나의 구조체로 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논밭을 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마음 밭(心田)이라고 합니다.
분문의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메마른 땅에 비를 주어 적셔야 합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세상에 굳어져 있는 마음을 갈아엎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정관념이나 타성에 젖은 마음에 새 공기가 들어가게 해서 새 생명, 세 소망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아주 오래된 나라이며 전 세계 여기 저기를 식민지화 시켰던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왜 미국에게 밀렸느냐, 19세기 영국이 기독교가 쇠퇴해간 이유는 제때 밭을 갈아주지 못한 교육 때문이라고 봅니다. 19세기에 영국이 세계 제일의 공업국이었지만 그 당시 영국 국민의 3분의 2가 문맹이었습니다. 지금도 보통 사람은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대학을 많이 나온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그에 비해 뒤쫓아오던 미국의 공업 중심지인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95퍼센트의 성인들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았습니다.
서양의 교육은 젖 먹이기보다는 젖떼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심을 키워주고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젖떼기가 아니라 새 흙을 북돋우는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북돋아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틀이나 삼일은 영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날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속이 우리를 살려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기간입니다. 우리를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어 가는 심령을 소생시켜 주시고 부활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를 직역하면 “그의 얼굴 앞에서”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먼 산을 넘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다아트’ 는 하나님을 떠난 마음에서 돌아서라는 강한 열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알자:라다프’ 는 ‘추적하다, 뒤따르다’ 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열심히 쫓아가는 것입니다. 한눈 팔 수 없어요. 잘못하면 잊어버립니다. 눈을 부릅뜨고 마음과 뜻을 모아 쫓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나아 오십니다. 본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는 히브리어 ‘야차’ 라는 단어인데 ‘야차’ 는 창 19:23, 시 19:5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순간 하나님의 태양이 우리 위에 떠오르십니다. 이것은 생명입니다. 새로움입니다. 땅을 적시는 생명의 늦은 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남달리 금식을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의 삶을 살고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하루에 무려 일곱 번이나,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기록에는 하루에 스무 번이나 되었다고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있었던 곳은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그토록 지었겠습니까?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딱히 그렇게 죄지을만한 사건이 없는데도, 루터는 죄로 말미암아 고민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가 짓는 죄란, 전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의심하는 죄, 절망하는 죄, 시기 질투하는 죄, 마음의 일어나는 분노 등, 전부 이런 죄 때문에 루터는 고민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해성사를 많이 했는지, 그 신부님이 이런 말까지 합니다. “루터야! 죄를 좀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지고 오너라!”
그러던 그가 27세가 되던 1511년에 로마를 방문합니다. 로마를 방문하면 의래히 「라터라노(Lateran)」대성당을 찾아갑니다. 거기에는 28계의 ‘성 계단’ 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재판 받으러 오르셨던 빌라도 법정에 있었던 계단입니다. 그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가 왕의 권위를 빌려, 로마로 뜯어 옮기고, 거기에 성당을 지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서 다 닳아버린 대리석 계단이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에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통회자복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루터도 계단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면서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에 대한 고뇌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죄 사함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행을 계속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강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게 많이 읽던 말씀이요, 묵상하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 순간 깨달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렇다! 이 계단을 기어오르는 고행이 나를 여기서 자유케 하는 게 아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2008년도 이러한 은혜를 하나님께 입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행복한 어린이로 키우려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5. 행복한 어린이로 키우려면) / 본문 :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가 저술한 『에밀』에 등장하는 한 구절입니다.

갖고 싶은 것은 ‘언제든, 무엇이든’ 갖게 하는 것이 왜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 언뜻 모순처럼 들리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루소가 말하는 것에 공감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쉽게 손에 넣으면 인내나 노력이라는 소중한 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무엇을 가져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에 행복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 무엇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의정, 좌의정자리를 탐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것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건물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이 고난을 당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줄 것인가를 다시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자녀에게 물질을 남겨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부모만큼 자녀를 잘 못 키우는 부모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재물이 많으니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기도 어렵고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을 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물질은 하나님을 따라가게 하는데 제일 방해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물질을 자녀에게 남기려고 합니까?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남겨서는 안됩니다.

부족함이 없이 자란 아이는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
통계청이 발표한(2007.5.2)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5-19세 청소년은 하루 평균 60.1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수업 중 문자를 보내는 학생도 46%(정보문화진흥원 조사 결과)에 달할 만큼 중·고교생의 휴대폰 중독 현상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 떼를 쓰지 않는 아이가 착한 아이는 아닙니다.
아이가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서 이것이 갖고 싶다, 저것이 갖고싶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을 꾸짖습니다. 아이들이 불만스런 얼굴을 하면 엄마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그렇게 퉁퉁 부어있으면 다시는 백화점에 안 데려올 거야.” 이런 유형은 가정교육이 엄격한 엄마입니다.
좀 무른 엄마는 “내참. 그럼 작은 장난감으로 골라야 돼.”하고 사줍니다.
누가 더 현명한 엄마일까요?
어떤 엄마가 아이의 건전한 욕망을 길러줄 수 있을까요?
대답은 후자입니다. 후자 엄마의 경우 최선은 아니었지만 전자의 엄마보다는 후자 쪽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전자의 엄마는 아이의 요구를 차단했을 뿐 아니라, 아이가 물건을 갖고싶어하는 사실마저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욕망은 조금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욕망을 쉽게 충족시켜주거나 앞서서 채워주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갖고 싶다고 느낄 때 아이는 참을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 주실 때 그냥 고쳐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최소한 예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믿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왔을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 자녀에게 힘쓰는 일을 많이 시켜라. 엄살을 많이 부려야 합니다.
“내가 없으면 엄마가 힘들 거야!”라는 생각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엄마에게 자녀가 꼭 필요한 존재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키워라
. 믿음이 없이 자꾸만 아이를 의심하면 아이는 어떻게 해도 부모님은 믿어주지 않는다는 불신에 빠집니다. 부모님이 먼저 믿어 주어여 합니다.
. 아이의 물건은 아이가 처분하게 하라.
. 용돈도 아이와 상의해서 정하라.
. 물질보다 값진 상은 ‘참 잘했어요.’
. “어른 다 됐네”라는 말에 아이는 성장한다.
임종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내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어린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라”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아이를 어린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어리신 분’이라는 존경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이는 희망의 동의어입니다.

참는 것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 ‘먹다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본인의 상징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일본인들은 먹다가 거의 남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고, 먹는 것 자체가 양이 작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서양인에 비해 많이 남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말이 ‘먹다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본인의 상징이다.’라는 말입니다.

환경부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2005년) 우리나라의 1일 발생되는 음식물류 폐기물의 양은
약 11,397톤(8톤 트럭 1,400여대 분) 1,880+344=2,324
음식물 쓰레기에 의한 경제적 손실가치는
· 국민 전체 1일 약 404억원
· 국민 전체 1년 간 15조원
· 1인당 연간 314,700원
· 1가구당(3.6인 기준) 연간 1,133,000원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남자 어른만 계수 한 숫자가 5,000명이 넘었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포함하면 최소 15,000명은 됩니다. 오병이어로 이 사람들을 다 먹이시고 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나누어 주다보니 남은 것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먹고 남은 음식을 잘 거두었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시골의 작고 오래된 교회에 젊은 전도사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첫 목회를 시작하는 전도사님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첫 설교로 오병이어의 기적의 내용으로 설교하게 되었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그만 “예수님께서 떡 5,000개와 물고기2,000마리로 다섯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기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하여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말씀을 듣고있던 그 교회 장로님이 하는 말이 “그 정도라면 나도 하겠다”라며 전도사님에게 들릴 정도로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얼굴이 홍당무같이 달아오른 전도사님은 그 다음주에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실수한 것을 인정하고 “제가 실수하여 잘못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 가득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이래도 하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장로님 왈 “지난주에 먹다 남은 거 있잖아!”

아이의 행복에 필요한 것
앞의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엄마가 “돈 없어!”라고 딱 짤랐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이가 생각하기를 “돈만 있으면 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또 엄마가 돈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엄마가 없다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에게 속고 있구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는 그 돈을 손에 넣으려고만 할 것입니다. 엄마가 돈을 잘 관리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일본 황족만 다니는 황태자 학교가 있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야구가 일반학교 학생들과 열리는데 말이 야구지 아이들끼리 노는 것인데, 일반학교 아이들은 야구 유니폼을 다 입고 왔는데 정작 황태자만이 유니폼이 없었다고 합니다. 황태자가 “저도 입고 싶어요.”하니까 황후인 미치코 왕비가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렴.” 그리고 3개월이 지나서 유니폼을 갖도록 했다는 겁니다.
제가 전에 협동목사로 있던 일산에 벧엘교회가 있습니다. 특별 40일 새벽예배가 있었는데 집사님 아들이 초등학생인데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더니 새벽기도 40일 다니면 컴퓨터 새것으로 사주기로 했답니다. 아이에게 아무 노력과 기다림 없이 갖게 하는 것은 아이늘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 어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갖은 방법을 적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로부터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값없이…”란 말에 너무 소중함을 모르고 받으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7:6)고 말씀하셨다.
. 모든 것을 가진 아이는 양보를 배우지 못합니다.
. 부족함이 없이 자란 아이는 친구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 학용품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 아이는 공부도 잘 할 수 없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아빠는 낚싯대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요리를 좋아하는 엄마는 주방기구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일수록 학용품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 가족이 함께 무언가에 열중해 보십시오.

아버지 집에서 키우라
목사만 목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기르는 것이야말로 목회다’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에게 제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님입니다.

시 한편 소개 드립니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을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 다이아나 루먼스 -

재물을 남기는 부모가 아니라 믿음을 남기는 부모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환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3. 환경) / 본문 : 마 6:30-34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콩을 밭에다 심으로면 콩 나무가 되지만 방 안 시루에다 심으면 콩 나물이 됩니다. 같은 콩이지만 자라나는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게 하는 요소를 ‘ 유전 환경 개성’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란 유전인자 속에서 태어나고 환경에서 자라서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일생을 통해서 가장 깊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환경입니다.

한 가정에 천사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순진하고 애교 넘치는 딸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딸에게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얼굴은 사나워지고 말투는 표독스러워졌으며 행실은 나빠졌습니다.
부모는 딸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연히 딸의 책가방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요괴인간이 잔뜩 그려진 책받침과 불량만화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딸은 공부할 때마다 책받침에 그려진 끔찍한 요괴를 바라보며 그 이미지를 마음 속에 키웠던 것입니다. 딸의 마음은 어느새 파괴적인 성격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딸에게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책받침과 위인들의 명상록을 선물했습니다. 이때부터 소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예전의 착한 딸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듭니다.

환경이란 둘러싸고 있는 것과 영향이 미치는 것으로서 자연환경, 인문환경, 물리적 환경, 정신적 환경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크게 사회적 환경(인간 환경)과 물리적 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왜 변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래도 살려면 이 변함을 무시할 수 없고 그 변하는 환경에 맞추어 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 맞춤을 적응이라고 부릅니다.
생물학에서 보면 ‘적자생존’의 법칙이 있어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할 수 있지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은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정신건강에 있어서 적응하는데 성공한다면 정신건강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좋은 인격을 형성하게 되지만 실패한다면 나약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환경과 관련하여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것은 맹자의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시장에서 살았는데 상인들의 장사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기 때문에 맹자의 어머니는 조용한 산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번에는 공동묘지 옆이라서 곡하고 사람 파묻고 하는 것을 흉내냈습니다. 그래서 또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학자들이 사는 마을에 살았더니 공부하는 모습을 흉내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AP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 10개국 중 최고로 5명중 4명인 81%가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고사하고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환경을 극복하고 역경을 넘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해결 받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믿음만을 이야기한다면 여러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믿어 나만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요즘 펀드식 주식이라고 하나요. 내가 잘 모르니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은행이 나의 재산을 알아서 관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인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나 자신이 관리하시고 나 자신이 고민하며 해결해 나가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자신의 모든 일을 맡길 것을 권면하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왕 맡겨드리는 것 다 맡기세요. 얼마나 편안합니까. 주님이 내 일을 다 알아서 관리해 주시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일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설계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염려한들 키를 한자도 키울 수가 없고 머리털 하나도 검고 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 삶을 맡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왜 나옵니까? 맡겼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한 사람은 순종할 것이 없습니다.
좋은 예를 우리는 창세기 37-50장에 걸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이 17세에 형들이 미워해서 애굽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 후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 생활을 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 되면 성격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릴 것입니다. 사회와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에 대해서 원한과 증오가 싸일 것입니다. 그러나 총리에 오른 요셉의 고백은 창 45:5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창 50:20에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팔릴 때, 모함을 당할 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어진 그 환경에 적응하며 신실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제 신앙의 좌우명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라”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일생을 맡기시고 순종하세요. 이것이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환경을 만들고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과 구별된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12:1-2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스토익 윤리(Stoic Ethics)에서는 욕망과 감정을 제어하는 것을 자기의지로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부한 사람은 가장 적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스스로 만족(self-sufficient)하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입니다. 아마 불교의 철학도 스토아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수용하고 자기가 거기에 적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정신 세계에서 실제는 없는데 있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정신으로 속여 스스로 만족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헛된 욕망에 빠져서 증오를 품고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마치 공산주의 사상처럼 인간을 스스로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골 1:18-19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말하는 ‘자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족으로 스스로 속이는 정신적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성령의 충만한 만족입니다.

셋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환경의 적응을 넘어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라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그 품에서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잠 27:8)고 했습니다.
고향의 품에 가면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뜻함이 있습니다. 함께 나눌 눈물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이 품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서 이 땅의 고향도 잃어버리고 있고, 영원한 본향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갈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히 11:16). 신앙은 새로운 고향, 즉 진정한 내 나라를 발견한 기쁨이자, 그곳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아브라함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지시하신 땅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평안과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7:13-14). 우리는 그 본향에 빈손으로 갈 것이 아니라, 조국 나라와 민족을 예수 사랑으로 섬겨서 풍성한 사랑과 섬김의 열매를 갖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자들은 하도 율법이 많아 늘 연구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일로 결론을 내린 것이 부모의 장래였습니다. 부모의 장래가 나면 율법을 강론하다가도 가야합니다. 한마디로 만사를 제쳐놓고 부모의 장래를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일 먼저 해야할 우선 순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우선 순위는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9:59-60에 보면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전파는 부모의 장사보다 더 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해야 되는 일이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제자운동의 교육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중에서 진정 제일 중요한 것을 복음전파에 놓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환경에 지배를 받고만 있지 않습니다. 환경의 인도자 되시고 운행자 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34절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사람들은 때때로 환경과 팔자를 탓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우화를 전합니다. 어느 날 회색 털을 가진 늑대가 양 을 마구 잡아먹자 농부들이 늑대를 잡아 두들겨 팼습니다. 늑대는 소리쳤습니다.『나를 이렇게 때려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거다. 내 털이 회색인 것은 내가 알 바 아냐.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지』그러자 사람들은 더 세게 두들기며 말했습니다.『네 놈의 털이 회색이니까 두들기는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양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두들기는 것이다』

마음은 살 수도, 팔 수도 없지만 줄 수는 있습니다. 서로 나눌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환경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극복하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주위사람 다 무시하고 전해지는 것입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마음을 줄 때 상대편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먼저 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먼저”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먼저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철학자 …는 “당신이 평생에 한 사람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어도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한사람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행하며 가르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 행하며 가르치라) / 본문 : 마태복음 5:18-19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971년 이탈리아 영화제작자 피에르 파올로 파솔로니(Pier Paolo Pasolini) 때문에 영화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사람은 동성연애자요 막시스트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감독한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때문입니다. 개봉되기 전까지는 화면에 예수님이 나온다는 정도로만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존 그 어떤 영화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파솔리는 영화가 완성되자 이 영화를 교황 요한 23세에게 헌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황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탈리아 플로렌스 지방에 여행할 때 교황이 행차하자 엄청난 교통체증이 발행했습니다. 그 여파로 오도 가도 못하게된 파솔로니는 호텔 방에 갇혀 무료함을 달래느라, 탁자 옆에 비치된 신약성경을 집어들고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어가던 그는 뭔가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대본 없이 마태복음을 유일하게 대본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파솔로니는 이 영화를 이탈리아 남부에서 빠듯한 예산으로 예수님이 살았던 팔레스타인과 같은 지역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며 잿빛 풍경들을 연출하며 찍었습니다. 파솔리니의 이 영화는 평화와 사랑의 정신이 담긴 영화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따르던지 따르지 않던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반대한다고 뒤집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선택권은 내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파솔리니가 성경을 자세히 보게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깨닫습니다. 자기가 이전에 알고 있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다시 봅시다. 자세히 봅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함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는 영적으로만 계시던 하나님이 신약에서 육체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오신 것은 행함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침없이 합니다. 욥기 10:4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욥이 살던 구약시대까지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육체를 입고 사람처럼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할말을 찾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시험이 있습니다.

욥의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 당하실 때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볼 때 예수님은 분명 보통 사람하고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분명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능력이 있다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사단이 그런 시험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얼마 있다가 오병이어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것을 이미 사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모습으로 능력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단의 시험에 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시험으로 사단의 모습은 드러났고 예수님의 모습은 감춰졌습니다. 예수님이 완벽하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십자가 없이도 면류관을 주겠다는 제의였습니다. 거짓 복음서가 있는데 위경 복음서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로부터 거짓문서로 판단을 받은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린 예수가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어 숨을 쉬어 생명을 부여하고, 말라비틀어진 물고기를 물에 던져 넣어 기적적으로 헤엄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친구들을 염소로 둔갑시키기도 합니다. 만화책에나 나올만한 그런 “슈퍼소년”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때로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십자가에 무참히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굳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천사나 보내고 구약시대처럼 직접 능력을 일으키시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그 자체로 좋아하셔야 합니다. 부모님이 멀리 여행 갔다고 돌아오시는데 자식이 반갑게 뛰어나옵니다. 처음에 부모님은 나를 만나려고 저처럼 기쁘게 뛰어오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품에 안길 줄 알고 팔을 넓게 벌리려는데 자식은 부모님 손에 있는 선물꾸러미를 낚아채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손에 있는 선물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와 같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시험은 안 하지만 비슷한 시험을 합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가느냐?”, “집에서 얼마든지 혼자도 신앙생활 할 수 있지 않느냐?”, “바쁜데 오늘은 쉬어라?”, “너 쓸것도 모자라는데 네가 아니어도 교회에 부자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감사헌금은 안 해도 된다“ 등 수 없는 유혹을 오늘도 해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내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유혹도 그렇습니다. 아담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나라도 자신만을 위해서 땅 투기, 집 투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 망합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

행하며 가르치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가르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가르치지 않아 당신을 명령을 잊어버릴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천국에서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이 있습니다. 자신이 실천하면서 했는지 아니면 입으로만 했는지에 따라서 등급이 구분됩니다. 우리모두는 천국에 안가 보았으니까 이 등급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와 “크다”라는 말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 차이는 상당한 것입니다. 진짜 상급에 욕심이 있다면 천국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 땅에서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저는 “과연 이 시대에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 그런 분을 찾으려면 신앙영웅에 관한 책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흔히 축복을 받아 잘 산다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제일 큰 부자들 중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일 오래 사는 사람들 역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누구일까?”를 찾다가 선교사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영웅시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여 선교사님 중에는 남편을 잃고 선교지로 가신 분, 선교지에서 남편을 잃고 자식들과 함께 선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낮선 환경으로 한때는 고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한철 몇 일 덥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년365일 30도를 넘는 선교지역이 태반입니다. 아니면 극동 시베리아에서 추위와 싸우며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통해서 “미션매거진”이라는 매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선교사가 왜 다릅니까? 이분들은 자기만 잘 살겠다고 가신 분들이 아닙니다. 때로는 노 부모님을 한국에 그냥 두고 가신 분, 자식들은 아무 것도 모르지만 부모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선교사님들이 주님의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내 욕심을 가진 분들은 선교 못합니다. 자기 욕심이 있는 분들은 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우리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다 선교지에 가있지는 않지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방법을 선택하셨는데 그것은 포기와 유사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처럼 “하나님은 나치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지를 통해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러한 길을 스스로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기 이틀 전까지 본회퍼의 설교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결국 지도자는 그릇된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내보냈던 방송사는 히틀러의 세력으로부터 폐쇄 당했습니다. 본회퍼는 인쇄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군중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강제로 중단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저서들은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진정한 사도가 되라(The Cost of Discipledhip)』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살아야 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1939년 본회퍼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만약 이 순간의 시련을 독일 국민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독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의 잘못된 점을 늘 지적하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수감자들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사야서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올라 처형되었습니다.

일본 기독교사에 보면 1552년부터 1616년까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 기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놀랍게도 20,0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점점 기독교가 왕성해가자 일본 왕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622년에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하여 기독교인들은 지오미오 섬에 있는 시니아바라 도시로 피난 가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하며 싸우다 결국 3개월을 버티다 일본군에 의해 20,000여명이 대학살 당했습니다.
이 모든 순교자들이 행하며 가르친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존 번연이 읽고 『천로역정』을 썼다는 『기독교 순교사화』(Martyrs)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의 책 뒤에 보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으나 세상을 넘어선 사람들,
부귀영화보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 사람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했던 사람들!

고문도, 옥에 갇힘도, 배고픔도, 단두대도, 화형도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빼앗지는 못했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우리로 주님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게 한다!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