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즐겁게 하심(에스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스 6:21-22)

에스라의 명칭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원래 이 두 책은 한 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라틴어 번역 성경인 벌게잇에서는 에스라서를 제1 에스드라스라고 하고 느헤미야서를 제2 에스드라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이 두 책은 정경상의 위치도 다릅니다.
즉 한글 성경에는 역대하 다음에 있는데 히브리 원전에는 성문서집 중에서 다니엘 다음에 있습니다(히브리 원전 중에도 팔레스틴 계통의 원전). (더 보기…)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다니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9)

다니엘의 명칭
다니엘은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 또는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성경명칭 중에 사사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사기는 ‘샤파트’ ‘재판하다’라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표현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비록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기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신다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더 보기…)

새언약의 일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6)

이모(18)군은 1992년 2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90년도에 유행했던 원정출산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98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주로 한국에서 살다가 1992년 1월부터 3개월 동안만 미국에 머문 뒤 아들과 함께 귀국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한·미 복수국적자가 된 이군은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한국 국적을 이탈하고 싶으면 먼저 병역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생은 미국에서 했지만 살지 않았고 국적만 취득해 갔고 있다가 군대갈 때가 되니까 대한민국 국적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혜택은 누렸지만 의무는 안 지겠다는 겁니다.

KBS1 일일극 ‘바람불어 좋은 날’에 보면 오복이는 아이가 있는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친 엄마 미란이가 나타나 결혼생활을 방해합니다. 아이만 나 놓고 미국으로 떠났던 미란이를 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엄마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버리고, 아무 책임은 가지지 않고 천국만 가려고 한다면 양심 없는 이중 국적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신 것을 약속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책임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구약에서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도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로 주신 것입니다(창 9:16-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하나님은 나타나셨다하면 사람하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사람하고 약속을 하신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만들어 가지고 올라갔던 궤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박스입니다. 그 약속의 궤가 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과 개인은 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건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이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이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21)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목적은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 가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바로 이 증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실 약속은 우리가 여겼는데 하나님은 먼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의 피입니다. 피로서 새우신 언약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갑자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뭐가 있었지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까? ‘예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입니다. 이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힘은 세상 적인 힘이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학교는 병원은 큰 곳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세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있지만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할 것은 보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꾼이 일할 때 약속하지 않고 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다 약속이 있는 겁니다. 얼마큼 일할 태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ㅣ22)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못 믿지만 예수가 보증입니다.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일꾼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역사는 한가지 큰 원리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인간은 어느 한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인간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시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자기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이 자신만을 위한 복음이었다면 신약을 남을 위한 복음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민족 복음이었다면 신약은 이방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본문에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인 무익합니다. 육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다른 것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은 엉망인데, 영혼은 죽었는데 다른 것이 잘되면 뭐합니까? 영혼을 위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교육학사전에서 교육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능력과 행동을 발달시키는 전체 과정, 그리고 사회적 경쟁과 성장을 이루게 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육의 출발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어디서 오게되는지는 모르고 인간의 소질만 개발시키고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 축은 소외시키고 주변 기능과 유능성을 함양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게된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지혜 있는 악마를 만들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일 짧은 시간에 성경을 다 가르칠 수 없지만 성경을 요약해서 다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운동경기도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육디스로피협회를 만든 분이 계십니다. 일명 근육병입니다. 이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근육병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격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 영역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첫째, 예수 믿은 것이고, 둘째, 교회에서 집사가 된 것이고, 셋째 하비타드를 세워서 남을 위해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시고 할 때 한가지를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약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우리는 지금 이런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엘리사 시대가 아닙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1-56)
좀 돌아가면 됩니다. 길 가로막았다고 다 죽여버리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마리아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원수지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저주하시고 원수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밤에 가룟유다하고 군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고 나섰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1)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군병들에게 초라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죽여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방법을 쓰는 겁니다. 미란이 아버지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안주십니다. 주시면 그 능력을 다 죽이는데 결국 사용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여버릴 것입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잘못을 저질러 태형을 때리지만 그러나 40대 이상 때리면 안됩니다. 자꾸 때리다 보면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못이 있어 때려야 하지만 무시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회개하고 다시 잘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살면 잘됩니다. 지금 왜 매를 때립니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나라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별과 같이 빛나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1-3)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 관한 모든 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마지막 일도 알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엄중하고도 신비스러운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거나 들어보지도 못한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참 신기한 것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지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국이 있다는 것은 별로 안 믿습니다. 귀신이 있다는 것은 잘 믿는데 천사가 있다는 것은 잘 안 믿습니다. 귀신을 달래려고는 생각하는데 천사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마지막 날에 별과 같이 빛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대하여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고 하셨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고 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는 그냥 땅에만 물을 덮었습니다. 그것도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하늘이 무너집니다. 해가 빛을 잃습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아무도 이 마지막 환난에서 피할 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의 유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하셨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 식구들만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가족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다른 사람은 듣지 않았습니다. 살려주고 싶어도 도무지 믿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나 노아는 산 중턱에서 배를 만듭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거듭니다. “아버지 미쳤어, 해가 이렇게 뜨겁고 구름 한 점 없는데 비가 언제와 그리고 이렇게 많은 비가 온 적이 없는데…” 이렇게 말한 노아의 자식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배를 만드는 겁니다. 지금은 참 걱정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믿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의 식구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순종을 가르칠 수 있다면 다 가르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소돔성의 멸망입니다. 한 도시를 멸하신 사건입니다,
성경에 롯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아브라함과 함께 생활합니다.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제공되는 겁니다. 롯의 아버지 하란은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고아가 된 롯을 삼촌인 아브라함이 떠맡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롯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도 아브라함은 롯을 함께 데리고 갑니다. 그러니까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떠나는 것을 알고있을 것입니다.
한번은 롯이 소돔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아 재산을 모두 잃고 노예로 끌려가게 되자 아브라함은 318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롯을 구출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키시려고 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은 롯을 생각하여 6번이나 같은 부탁을 하나님께 합니다. 하나님은 소돔성에 의인들이 있다면 그 성을 멸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 성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멸하시지 않습니다. 그 성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아브라함 혼자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수를 자꾸만 줄입니다. 하나님 의인이 50명만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멸하지 않겠다. 그러면 40명 이면이요, 30명 이면이요, 20명이면 안됩니까 10명 이면이요.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이 성에 의인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기도하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3장 7절에 보면 롯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종들과 다투게 됩니다. 그 이유는 롯의 소유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롯은 삼촌과 노골적으로 다툽니다. 아브라함이 기가 막히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해라 그럽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다 줍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네가 우하리라.”(창 13:9)
이때 그는 아브라함의 조언이나 권면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선택의 우선권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주 재빠르게 눈에 보이는 기름지고 푸른 초목이 무성한 멋있는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롯은 이 인생의 가장 귀중한 선택의 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당장 좋아 보이는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멸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멸하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롯의 가족과 생명은 구하시려고 했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신뢰를 잃었으면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깁니까. 또한 이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감정이 상하는 사람, 남편의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 부모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직장 상사의 말을 듣겠습니까 듣는 척 할 뿐입니다. 뒤에서 꿍얼꿍얼합니다. 욕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제대로 성장 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큰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도 안 듣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결과는 “19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5-26) 고 했습니다. 사람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민족적인 구원이 있었던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월입니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자를 죽이는 심판이 그냥 넘어가는 집은 이스라엘 사람의 집입니다. 애굽의 장자는 모두 죽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집은 넘어갑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표시를 해야 하나님이 이 표시를 보고 넘어갑니다. 여러분! 솔직히 하나님이 양의 피 안 발라 놓는다고 그 집이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때와 같이 순종하나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어린양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어린양의 피 없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린양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1)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본문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고 하십니다.
여기 ‘책’은 ‘생명 책’을 의미합니다(출 32:32, 계 3:5, 20:12). 책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갑자기 “너는 못 생겼으니까, 너는 선하게 생기지 않았으니까 저리가”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살던 마석에서 조금 더가면 청평에 한얼산 기도원이 있습니다. 이 기도원을 세우신 분이 이천석 목사님이십니다. 이 목사님은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인천 경기도 일대에서 이름난 깡패였습니다. 생긴 것도 우락부락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예수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서웠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얼굴을 뜯어 고쳐 주시든지 무슨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그냥 너 하던 대로, 생긴 대로 해라”. 그래서 그 때부터 억지로 잘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주신대로 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따라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이천석 목사님께 해당된 말입니다. 자기를 따라다니던 동생들(깡패들)이 옵니다. “너 이 새끼 그렇게 믿어서 복 받겠냐” 그럽니다. “야 너 십일조 떼어먹으면서 잘되기를 바라냐”, “그따위로 신앙생활해서 복 받겠냐” 그럽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교회가 1,000명도 안되던 교회가 7,000명이 넘는 성도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기도원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책의 기록은 엉터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름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 헌금한 것, 선교한 것, 전도한 것 모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 없는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떠다준 것도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까 그것도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우리의 눈물, 우리의 기도가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내 마음의 생각에 대한 기록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 책의 기록을 가지고 본문 2절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 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단순히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본문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고 하셨습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별과 같이 빛나게 사는 자는 누구입니까 지혜있는 자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가 별과 같이 빛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기를 죽입니다. 기업을 하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결국 사람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용기를 주며 희망을 주며 사는 사람과 기를 죽이며 사람을 없신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기죽이려고 좋은 차 타지는 마세요. 다른 사람 기죽이려고 돈 많이 벌지는 마세요. 다른 사람 기죽이려고 성공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공하려는 것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요즘에 자유주의가 난리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자유로운 교육 속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가파는 안됩니다.

여러분!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절대 안됩니다. 교육이 왜 필요합니까 가만히 놔두어서 잘 될 것 같으면 교육할 필요 없잖아요. 다른 것은 못 가르쳐 주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 순종해야 된다는 것은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자유주의가 다 좋은데 순종하게 만드는데 약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자유롭되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개 숙일 줄 아는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자가 누구입니까 순종하는 자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많이 배웠으면 행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별과 같이 빛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