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능력으로…(베드로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5-6)

베드로는 알려진 대로 말할 필요가 없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복음서를 쓰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유일하게 기록한 성경이 베드로전, 후서입니다. 이것도 자신이 다 기록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제자 실루아노가 대필했습니다(벧전 5:12). 그래서 혹자들은 아람어 밖에 몰랐던 베드로가 세련된 헬라어로 기록한 것을 가지고 베드로 저작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더 보기…)

내 증인이 되라(사도행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배경
4복음서가 먼저 나온 후에 역사적인 사도행전이 뒤따랐습니다. 이 책은 예수의 후계자인 사도들의 환상도, 이론도, 사색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이 실제로 행동해서 이루어 놓은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들은 다시 선교하여 복음이 로마까지 번져나간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주요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며 대체로 살펴보면 바울의 사적이 6분지 3, 베드로의 사적이 6분지 2 그 밖의 사도들의 사적이 6분지 1에 해당합니다. 베드로의 활동이 먼저 1-12장까지, 나머지 바울의 활동이 1,2,3차 전도여행과 로마여행까지 28장까지의 기록입니다. (더 보기…)

한결같은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5-36)

여러분이 사위 감을 구한다면 어떤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장인 어린이 좋아하는 사위 감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딸을 평생 책임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고 해도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평생 책일 질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햇빛이 비치나 언제나 똑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 그곳에 찾아 같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왜 그렇게 좋아하셨습니까?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치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그 점을 부각시킵니다. 지금이야 잘 먹고 잘 사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지 그에게 환난이 일어난다면 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욥 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욥의 믿음을 바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환경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교회도 몇 분의 성도가 안되지만 저는 참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좀 많이 내고 좀 적게 내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남을 후히 대접할 정도로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먼저 갈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만일 제가 먼저 하나님께 먼저 간다면 여러분 부탁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이 교회를 지키십시오. 지금처럼 한결같은 믿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왔다 같다 하는 것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정합시다. 살아도 이 교회에서, 죽어도 이 교회에서 죽겠노라고.
그리고 또 정하세요. 우리 집은 하나님을 믿는 집니다. 사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집이다. 예수님이 지켜주시는 집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이름을 다시 지어주셨습니다. 수리아어로 게바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큰 바위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쉽게 요동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 없는 반석이 되라는 것입니다. 처음 제자를 부르시고 지어준 이름이기 때문에 사실 이 이름은 모든 제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을 좋아하시고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부모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을 찾으시고, 그분 또한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신 아버지입니다.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내 어찌 그 사랑 잊으리
내 어찌 주의 긍휼 잊으리 내 영혼의 모든 소원 만족시킨 하나님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나 길을 잃고 헤맬때
그 사랑 날 찾아 내셨네 내 영혼의 모든 소원 만족시킨 하나님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은 크고 놀랍습니다.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한결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빈손으로 왔어도, 내가 병든 몸으로 왔어도, 내가 실패하고 왔어도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는 내 편입니다.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잠 4:8-9) 이 구절을 승미 자매가 종이 박스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한결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살면 그가 높아질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첫째, 본문 35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라고 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사람입니다. ‘띠다’의 헬라어 원문은 perizwvnnumi(페리존뉘미)는 끊을 조여 매는 것을 말합니다. 허리에 매야 합니다.
허리가 어디입니까? 몸의 중심입니다. 가운데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라”(잠 3:26) “의지”는 ‘케셀’이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허리’를 뜻합니다(레 3:4, 10:15, 욥 15:20). 우리가 씨름할 때 “허리를 붙들고 늘어지다”는 말을 합니다. 허리를 붙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캄보디아에 조성규 목사님의 큰아들 수아하고 간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찌하다보니 다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있는데 제 다리를 두 손으로 꼭 껴안는 것입니다. 이제 이사람 까지 잊어버리면 나는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나 봅니다.
현대 축구에 있어서도 허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미드필드가 살아나야 공수전환이 잘 됩니다. 상대방의 공격은 허리격인 미드필드부터 막아야 합니다. 골대 앞에서만 수비하려고 하면 아무리 잘해도 골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허리에 띠를 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허리에 띠를 두르셨습니다(요 13:4). 우리는 놀고 먹으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열심히 일하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0-11)고 했습니다. 허리는 이스라엘의 힘입니다. 허리가 생명입니다.
유다 족속에게 축복할 때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신 33:1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다가는 허리가 꺽입니다. 여러분!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하지 마세요. 100전 100패입니다. 어찌 사탄을 믿고, 의지하고 살려고 합니까? 사탄은 거짓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라고 합니다. 아담이 여기에 속았습니다. 죄가 이로 인하여 들어왔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 18:46)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비가 오게 한 후에 허리를 동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것입니다. 축복이 임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입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이나 우리에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밷전 1:13, 5:5). 겸손이 우리의 허리띠가 되어야 합니다. 교만이 허리띠가 되면 하나님과 싸웁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항하라고 꼬입니다. 겸손이 없습니다. 사탄에게 종노릇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공의로 허리띠를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등불을 켜고…” 등불을 켜고 있는 사람입니다.
원문의 lucno”(뤼크노스)는 옮길 수 있는 조명기구를 말합니다. 등불은 필요한 것을 비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출 27:20, 민 8:3) 구약의 성소의 제사장의 임무 중의 하나가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등불이 꺼지면 안됩니다. 이 빛은 세상을 위하여 비추는 빛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빛입니다. 등불입니다. 우리가 인도해야 합니다. 등불이 켜있지 않으면 인도할 수 없습니다. 등불을 켜시기를 바랍니다. 남을 위해 비추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기도합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 달라고 다윗처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 24:2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등불을 끄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 앞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세요. 예수 이름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빛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셋째, “서 있으라”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사극 드라마를 보면 왕 옆에는 늘 내시가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왕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내시는 늘 왕이 부를 때 언제든지 대답을 합니다. 저는 드라마에서 한번도 왕이 “거기 누구 있느냐?” 그렇게 부를 때 대답을 안 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부르면 대답을 합니다.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하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서 있는 사람은 늘 준비된 사람입니다. 왕이 부를 때 그 부름에 대답할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꺼진 불을 들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고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6절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혼인잔치를 하는 이스라엘의 풍습 상 주인이 혼인집에 가서 언제 돌이올지 모릅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서 있는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보면 잠도 안자는 것 같습니다. 주인이 조금만 소리를 내도 금방 일어납니다. 대단합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강아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출 17:9)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지팡이를 잡고 섰습니다.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출 33:10) 라고 했습니다. 예배도 서서 드리는 것입니다.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안주하려고 하지 마세요.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우리가 어찌 할꼬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6-39)

스위스는 명품 시계를 잘 만드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그에 따른 일화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시계가 귀하고 시계에 태엽을 감아 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 가서 시계를 풀어놓고 나왔답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 그 시계를 잊어버린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그곳에 시계가 있더랍니다. 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그 시계가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인이 올 때까지 태엽을 주고 나가고 다른 사람도 와서 태엽을 감아주고 나갔던 것입니다.
시계가 가고 있었던 것은, 시계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기 욕심으로 가져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꺼이 자기를 지킨 결과입니다. 욕심을 가지지 않은 결과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도 않고 호랑이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방법이 좋고 수단이 좋아도 과학도 아니고 경영도 아닙니다. 요행입니다. 요행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 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두려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 심어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많이 거두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간단합니다. 많이 심으세요.

어느 여 목사님이 ‘축복, 기적, 치유전도집회’ 라는 제목으로 모 신문에 광고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고민하고 계십니까? 와 보라!! 여기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곳에선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스로 아래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비만, 체형관리, 영적문제, 불치의 질병, 모든 뼈 문제, 신경계통, 사시교정, 내적치유, 얼굴모양, 가계 저주의 치유, 말씀, 방언, 통변, 예언, 투시, 악성 아토피질환, 영 분별, 근이양증, 각종 암병, 기타 질병 등...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사업문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우리 모두가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과, 외과, 소아과, 성형외과, 안과, 정신과 등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이중에 한 두 가지만 한다면 모르겠는데 너무 많아요? 다 한다니까 믿을 수가 없어요. 요즘 음식점도요 한 두 가지만 맛깔스럽게 해야지 너무 여러 가지 메뉴를 만들어 팔면 전문적이지 못해서 안 갑니다. 우리 또한 이 광고 내용처럼, 다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도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많이 심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짜 욕심은 심지 않는데서 거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 위조품과 상표가 없는 상품, 거짓 처방전을 가려내는 비결은 ‘진짜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속는 이유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지 못해서입니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보는 눈, 듣는 귀’(신 29:4)라고 말합니다.

본문 36절에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스라엘 온 집’ 은 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온 집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뜻을 전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속썩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못을 박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사를 핍박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가슴에 못 박는 것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예수 믿는 다고 말하는, 교회 다닌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범죄 피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문의 제목이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이렇게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저는 구두에 광을 잘 안냅니다 만은 오히려 너무 번쩍이면 창피해서 다시 문질러 광을 좀 죽입니다. 광을 내기 좋아하는 분들이 만든 말이겠지만 ‘삐까번쩍’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에 ‘피카피카’란 말이 있는데 번쩍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도 ‘모찌떡’과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삐까는 일본어고 번쩍인다는 말은 한국말입니다. 광택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외제 구두약을 수입하려던 한 회사가 구두닦이를 통해서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광내는데는 국산 구두약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국산 구두약은 광을 내기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외제 구두약은 광보다는 가죽을 보호하는데 신경을 쓴 약이라는 것입니다. 이 회사는 광택내기만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선호에 밀려 결국 수입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삐까번쩍 내 인생에 광내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36절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을 외모로만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광내는데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끌어 안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 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못 자국을 보시며 뼈저린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때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14절부터 36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주님”이 나옵니다. 너희는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요한 일서 2:16절에도 마찬가지이고, 로마서 5-6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하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영원한 생명으로 이미 창조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인정했습니다. 마음에 찔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찔려야 합니다. 찔려야 회개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찔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습니다.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남편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못을 박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됩니까?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기도하여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가진 것입니다. 리브가는 배속의 두 아이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이삭이 알았습니다.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아이들 둘이 리브가 뱃속에서 싸우는데 남편인 이삭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삭이 이 일로 하나님을 찾아가 물은 것입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모를 때 첫째 기도하세요. 그리고 둘째 본문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그랬습니다. 사도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지금 이런 찔림이 누구로 인하여 생겼습니까? 베드로의 설교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도들과 베드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실컷 설교했는데 듣기는 여기서 듣고 상담은 어디 다른데 가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작은 교회가 좋다는 게 뭡니까? 언제든지 목사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활용하세요? 이 좋은 장점을 이용하세요. 큰 교회 다니면 쉽지 않잖아요?
“어찌할꼬”(Tiv:티)인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본문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Tiv: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예수님이 알려주신 말씀들입니다. 본문과 직접 관계가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이렇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들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이 좋아집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에도 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Tiv:티’가 있는 마태복음 서두에 몇 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성경 전제에서 445개의 이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입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은 딸려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몇 일 전에 TV 시트콤에서 본 것인데요 빵집을 하는데 이벤트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짜에 맞추어 빵을 많이 주문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골탕을 먹이려고 날짜를 다르게 알려주었습니다. 행사당일이 되었는데 빵이 오지 않는 거예요. 빵집 어머니인가요 이런 말을 합니다. “빵집에 빵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 빵집에 빵이 없으면 빵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혹 내가 용서 못하면 주님을 기억하세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너희가 너희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6.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 마 16:21-23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미국의 유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통증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통증을 느낄 때 그 통증을 약하게 하기 위해서 아스피린을 먹습니다. 그런데 통증을 느낄 때 자기의 과거 추억 중에서 좋은 것을 생각하면 아스피린이 미치는 영향보다도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아스피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심지어 마약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개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에 대한 생각을 했고,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클린턴 부부 이야기입니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가 주유소에 갔다가 우연히 힐러리 여사의 옛 남자친구를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클린턴이 부인에 물었습니다. “당신이 저 남자와 결혼했으면 지금 주유소 사장 부인이 돼 있겠지?” 그러자 힐러리가 되받았습니다. “아니 바로 저 남자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을 거야.”
생각이 여러분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면에서는 환경보다도 내가 생각하는, 내 마음과 내 생각이 크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도 바뀝니다. 그리고 운명도 바뀝니다. 여러분! 인생을 새롭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각부터 올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생각부터 새로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 중에 제일 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은 베드로
“이 때로부터”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3-16절)라고 고백한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분위기를 보아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고난에 대해서 말할 때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제자들의 신앙이 이 말씀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 대답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엄청난 충격적인 책망을 듣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이 틈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시험이 옵니다. 인본주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영과 육이 함께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육체를 위한 일과 영을 위한 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을 생각하지 않고 육체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6:20-27절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에 거지 나사로가 있습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지나가던 개가 거적데기를 핥고, 한마디로 노숙자처럼 생활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주인은 지옥에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로 사는 사람은 모두가 잘못되었고 반대로 모두 노숙자로 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극단적인 비유를 들으셨습니까? 그만큼 육체보다는 영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육체는 100년을 못삽니다. 하지만 영은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즉 육이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이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육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영에 비해서 육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영 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하루에 밥 세끼를 먹어야 한다면 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헛수고가 아닌가? 등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 고통스럽고, 또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정말 안타까워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정말 마음이 좋은 분입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옆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던 꿈을 버려야 합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슬피 웁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울음소리를 잘 들어보면 모두가 자기 한탄에서 운다고 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라고…’하면서 운답니다. 남편의 죽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갈 것이 한심스러워서 운다고 합니다. 결혼이 진짜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 결론적으로 혼, 혼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의 영을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데 출애굽기 16:26-27에 보면 모세가 안식일에는 주시지 않기 때문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27절 “제 7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안나오고 공부하면 잘할 것 같아요. 여러분! 해 봐서 알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일만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 내 삶에 우선 순위인지 분명히 정해 두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일이 보입니다.
본문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는 지고 있는데 자기 이름으로 지고있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를 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내가” 빠져야 합니다. 내가 있으면 자기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대신에 누가 들어가야 합니까? “주님”입니다. 지금 이영제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까? 이영제 목사가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육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보시는 분들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십니다. 아멘.
베드로는 아직까지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아는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곳에 장로님이 한 분 계신데 지금 교회를 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이분이 하시는 말은 자기는 평신도가 와서 교회를 가자고 하면 안가고 꼭 목사가 와서 교회를 가자고 하면 혹시 갈지 모른다고 저에게 가서 전도해 가지고 모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전화한 것입니다.
잠시 기도하면서 생각한 것은 장로님도 시험에 드실 수는 있습니다. 베드로도 시험에 들었고 사단이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제가 모셔 올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셔다 놓고 그분 대접하느라 상당히 바쁘지 않을까 생각해서 감당이 안될 것 같아 원래 다니시던 교회, 장로로 피택하신 교회가 있을 것이니 그곳으로 다니시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곳 교회로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지난 한번은 또 교회가 어느 교단이냐고 물으시는 장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신학과 신앙이 같은 곳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래저래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전주안디옥교회 이동휘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합니다. “성도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아멘.

훗날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했습니다.
육체만을 생각하다 한 때 예수님의 엄청난 책망을 들었던 베드로는 훗날 영혼의 귀중함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깨닫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아멘.
베드로와 같이 변화되는 주앙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데 특별히 제한을 두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 하고 싶다고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목사가 구약시대의 제사장하고는 물론 차이가 있지만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감당했었고 지금의 목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집행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지파 사람이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 육체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레위기 21:16-23절까지 제사장 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특별히 19절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라고 나옵니다. 제가 왜? 특별히 이 구절에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제가 손 부러졌거든요. 구약성경에서 손이라고 하는 것은 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팔이 부러져 군대 현역을 못 가고 방위를 받았습니다. 총 쏘고, 훈련받는데 별로 지장은 없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아니면 살맛이 없는 세상이 될 뻔했습니다. 군대도 현역으로는 오지 말라지요,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도 못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로마서 10:12-1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사우나 이발소에 머리를 깍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아저씨는 갈 때마다 당신이 한 때 청와대에서 머리를 깍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청와대에서 머리깍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멘.
우리 주앙교회는 개척한지 얼마 안되어 작아서 성가대도 없고, 아직까지 각 부서도 없고 해서 오히려 봉사할 수 있는 기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또한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맡겨진 직분과 사명 열심히 감당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피할 수 없는 질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3. 피할 수 없는 질문) / 마16:13-17(막8:27-30, 눅9:18-21)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꼭 찾고 싶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웨스트민스턴 사원입니다. 저도 이 교회를 방문했었는데 오래 전에 이 사원을 방문했던 방문객들의 입에서부터 이런 흥미 있는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이 유명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인도해 주던 안내자가 있었습니다. 이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그리고 무덤에 묻혀 있는 지나간 세기의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또 현재 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정황 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니오아 주에서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여신도 한 사람이 안내자를 향해서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이 유명한 일화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훌륭한 설명을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가지만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 앞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안내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오늘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종교나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수없이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임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와 내용은 무엇이며, 오늘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모든 형식과 허상은 그 내용과 어떤 관련이 되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뒤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당시 제자들에게만 한 질문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임할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지리설명과 서언 - 프리젠테이션 참고]
예수님이 오늘 질문을 한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입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와는 다른 곳입니다(행 10:1).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방 약 40km 지점으로 헬몬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약 345m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작은 마을이었는데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서 커진 마을입니다. 마을의 이름이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붙여진 이유는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라고 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헤롯 빌립’은 이곳에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한가지를 더 만들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신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 지역의 구약시대 이름은 ‘바알갓’(수 11:17) 또는 ‘바알 헤르몬’(삿 3:3)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 갓’은 ‘행운의 바알’이라는 뜻이고 ‘바알 헤르몬’은 헤르몬 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우상을 섬기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구약의 이름으로 보나 현재의 이름으로 보나 우상이 만연한 곳입니다. 깊은 산과 바다 근처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을 많이 섬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상의 땅에 도착하셔서 자신에 대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태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우상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절도 많지만 우상이 길가에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손바닥만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 깔린 것입니다. 선교사님들과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게 우상이 많은 곳에서는 더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서 믿음을 확실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부르신 이름 인자
“13…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본문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 인자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자’라고 표현하셨는데 공관복음서에만 69번 나오고, 사복음서에는 81번나옵니다. 단 두 번(눅 24:7, 요 12:34)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성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가 신으로 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럼 당신이 사람이지 신이야?”라고 말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라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질문
예수님은 먼저 객관적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제자들은 ‘더러는 … 더러는 … 어떤이는’이라는 연결 어가 사용됩니다.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한 메시야 이심을 알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는 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적 능력(눅 1:17, 80)을 행하고 있었으며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백성들의 타락을 꾸짖고 선지자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입니다(왕상 19:10, 왕하 1:11, 말 4:5-6).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백성을 긍휼히 여긴 선지자입니다(렘 9:1, 14:17).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 믿으세요.”그러면 “나도 예수를 믿지, 그분은 좋은 분이야”정도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가 그런 양상을 보입니다. 힌두교의 신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모신다고 하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으론 안됩니다.

주관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사람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내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당시 12제자에게만 내려진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대답되어질 수 없는 질문입니다. 또한 질문은 대충 얼버무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꾸며서 말하거나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나의 중심을 아시는 분에게 중심에서 나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삼상 16:7). 이 한마디의 말이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꿈에서 소리질러 보신 적 있으시지요.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소리가 질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 질문에 꾸며서 대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예수님의 질문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벽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자’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인성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신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말에 흡족해 하셨습니다. 물론 조금 있다가 21절에서부터 보면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그리 마옵소서”하는 바람에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백만 생각합시다.
여러분! 때로는 자녀가 다 지키지 못하지만 말로만 해도 부모는 고마운 것입니다. 자식이 지금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때가 되면 정말로 집을 지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전의 아버님들은 그런 허풍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님들은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아버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런 말도 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여자들은 별을 따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별을 따다 줄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남자가 좋은 것입니다. “야 그걸 어떻게 따다주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라!”라고 하면 그 남자는 그 즉시로 차이는 겁니다.
이런 얄미운 아들도 있습니다. 일곱 살짜리 철이는 금붕어를 몇 마리 키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났습니다. 결국은 철이 엄마가 금붕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는 데 지친 엄마는 하루는 철이에게, “금붕어를 내다 버리든지 누구한테 주든지 해라, 알겠니?”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슬그머니 나타난 철이가 엄마에게 직접 만든 카드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어머니께 귀여운 금붕어를 선물로 드립니다. 철이로부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에 축복해 주십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이래 적입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때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가 사용되었는데 아람어는 평상시에 제일 편하게 꾸밈없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고향 사투리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도 아람어입니다.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22:20절에 사용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도 아람어 “마라나타”입니다.
“바”는 아람어로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아들 이런 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렇게 어르신들이 부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희 아버님 함자는 ‘헌’자 ‘국’자를 쓰십니다. 그래서 ‘헌국이 아들 영제’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틴이나 중동에서는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이 “바요나”그러셨는데 그러면 시몬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가 아버지라는 뜻이니까 ‘요나’입니다. 히브리어로 ‘요하난’(요 1:42)이 베드로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이 뜻은 ‘비둘기’입니다. 즉 평화라는 의미도 담겨있는 것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매우 친근한 의미도 있지만 천연적인 신분인 상태로 부르신 것입니다. 즉 갈릴리 어부의 아들로서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로, 지식으로, 신분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고백이 사람의 혈육에서 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무엇이 복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이 복입니다. 다른 것이 복이 아닙니다. 제일 큰복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원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만 살아 계십니까? 예수님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곧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서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나 글이 살아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말씀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일찌기 비상한 위험과 공포에 직면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때, 기운 없이 멍청히 앉아,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비비드! 비비드!” (vivid! vivid! – 그는 살아 계시다! 그는 살아 계시다!) 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희망이고, 인류 전체의 희망입니다. 고난 속에 빠졌어도 선지자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고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비비드”의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내과의사 출신으로 영국의 청교도 출신의 후예로 1940년대에 활동한 목사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가지고 설교한 목사님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한번은 이분이 웨일즈 지방에서 설교하기를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고 바닷가로 피서 가시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가족이 죽었을 때 교회로 오시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왕 교회에 다닐 것이면 확실히 구원의 은혜를 받으며 다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한다고 여러분이 보이지도 않는 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줄 모르는 분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돈이 제일인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식교육 시키는 것이 제일인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이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다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죄인임을 고백할 때 알게 하십니다.
주님을 따를 때 알게 하십니다.
겸손할 때 알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