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아들 이삭(창세기 8)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14-15)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축복의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이제 인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 아담에게 기대했던 마음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축복입니다.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이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식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 배속에서 나왔어도 부모님 마음대로 안된 다는 것이 자식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고마운 아들이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우리가 자식 교육하면서 잘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더 보기…)

새언약의 일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6)

이모(18)군은 1992년 2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90년도에 유행했던 원정출산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98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주로 한국에서 살다가 1992년 1월부터 3개월 동안만 미국에 머문 뒤 아들과 함께 귀국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한·미 복수국적자가 된 이군은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한국 국적을 이탈하고 싶으면 먼저 병역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생은 미국에서 했지만 살지 않았고 국적만 취득해 갔고 있다가 군대갈 때가 되니까 대한민국 국적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혜택은 누렸지만 의무는 안 지겠다는 겁니다.

KBS1 일일극 ‘바람불어 좋은 날’에 보면 오복이는 아이가 있는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친 엄마 미란이가 나타나 결혼생활을 방해합니다. 아이만 나 놓고 미국으로 떠났던 미란이를 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엄마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버리고, 아무 책임은 가지지 않고 천국만 가려고 한다면 양심 없는 이중 국적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신 것을 약속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책임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구약에서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도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로 주신 것입니다(창 9:16-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하나님은 나타나셨다하면 사람하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사람하고 약속을 하신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만들어 가지고 올라갔던 궤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박스입니다. 그 약속의 궤가 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과 개인은 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건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이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이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21)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목적은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 가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바로 이 증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실 약속은 우리가 여겼는데 하나님은 먼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의 피입니다. 피로서 새우신 언약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갑자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뭐가 있었지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까? ‘예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입니다. 이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힘은 세상 적인 힘이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학교는 병원은 큰 곳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세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있지만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할 것은 보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꾼이 일할 때 약속하지 않고 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다 약속이 있는 겁니다. 얼마큼 일할 태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ㅣ22)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못 믿지만 예수가 보증입니다.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일꾼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역사는 한가지 큰 원리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인간은 어느 한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인간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시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자기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이 자신만을 위한 복음이었다면 신약을 남을 위한 복음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민족 복음이었다면 신약은 이방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본문에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인 무익합니다. 육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다른 것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은 엉망인데, 영혼은 죽었는데 다른 것이 잘되면 뭐합니까? 영혼을 위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교육학사전에서 교육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능력과 행동을 발달시키는 전체 과정, 그리고 사회적 경쟁과 성장을 이루게 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육의 출발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어디서 오게되는지는 모르고 인간의 소질만 개발시키고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 축은 소외시키고 주변 기능과 유능성을 함양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게된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지혜 있는 악마를 만들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일 짧은 시간에 성경을 다 가르칠 수 없지만 성경을 요약해서 다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운동경기도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육디스로피협회를 만든 분이 계십니다. 일명 근육병입니다. 이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근육병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격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 영역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첫째, 예수 믿은 것이고, 둘째, 교회에서 집사가 된 것이고, 셋째 하비타드를 세워서 남을 위해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시고 할 때 한가지를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약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우리는 지금 이런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엘리사 시대가 아닙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1-56)
좀 돌아가면 됩니다. 길 가로막았다고 다 죽여버리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마리아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원수지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저주하시고 원수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밤에 가룟유다하고 군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고 나섰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1)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군병들에게 초라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죽여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방법을 쓰는 겁니다. 미란이 아버지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안주십니다. 주시면 그 능력을 다 죽이는데 결국 사용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여버릴 것입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잘못을 저질러 태형을 때리지만 그러나 40대 이상 때리면 안됩니다. 자꾸 때리다 보면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못이 있어 때려야 하지만 무시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회개하고 다시 잘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살면 잘됩니다. 지금 왜 매를 때립니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나라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1- 15)

얼마 전 미국 경제가 좋을 때 미국에 이민 가면 그림 같은 집들을 집 값 10%만 내면 산다고 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이것이 착각입니다.
진실은 10%입니다. 집 값을 내고 20-30년 매월 할부금 내느라 투 잡에 심지어는 스리잡에 주 7일 근무를 해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는 말 그대로 잠만 잡니다. 집(건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꼴이 된 겁니다. 여관도 아니고 오죽하면 이런 말이 있겠습니까. 멕시칸 가정부 호강시켜주러 미국 이민 왔다고 한탄합니다. 하루종일 돈 벌어다 하루종일 집 청소하는 가정부 다 같다줍니다. 그래도 가정부는 집에서 살아보지만 돈벌어오는 그 집 주인들은 집에서 살 시간이 없습니다. 그 뿐 인줄 아십니까 할부금을 조금이라도 못 내면 바로 은행 넘어가 다시 월세아파트로 돌아갑니다. 지금 이렇게 된 분이 많습니다.

이 집을 내 집으로 만들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가지게 하려면 진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 것은 믿음은 아무 노력도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0%만 내면 당장 내 집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돈은 좀 못 벌어도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식구들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살면 자식교육은 저절로 됩니다. 진실한 믿음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은 부지런한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12절 “게으르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이 부지런합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고 했을 때 바로 4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지체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삭을 바치러 가는데도 지체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창 22:3) 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하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치라고 했으니까 믿고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뭐가 급해서, 뭐 좋은 일이라고 새벽에 일어나 갑니까.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출 24:4) 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소유자들은 모두가 열심입니다.

믿음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오래 참음으로” 15절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하는데 그것을 못 기다립니까 예수님도 말세 때에는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4:13)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참고 기다릴 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주님이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8-29절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교회는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9) 고 했습니다. 열매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처음에 비해서 많은 결실을 맺은 교회입니다. 성장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이단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우리가 제사음식도 기도하고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경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말씀이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제사 음식 먹으면 안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안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은 아폴로 신전, 제우스 신전 같은 곳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먹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기가 힘들다보면 우상의 제물에도 욕심이 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폴로신전에가서 일해주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이 두아디라교회에는 이것 이외에는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계 2:24)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힘이 들어도 주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들어도 청소년에게 술, 담배 팔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노아는 600년을 그리고 에녹은 300년을 아브라함은 175년을 이삭은 180년을 야곱은 147년을 요셉은 110년을 모세는 120년을 여호수아도 110년을 모두 믿음을 지켰습니다. 치우치지 않았던 분들입니다. 롯이라는 분은 가다가 물질에 치우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들은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13절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믿음이라는 말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은 “약속”입니다. 약속을 못 믿는다면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 6:14) 하나님의 이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지 못했다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버리고 못 떠나는 것입니다. 정들었던 고향보다, 친척과 아버지가 있어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기록된 말씀을 ‘구약’이라고 하고 예수님 이후의 말씀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변함 없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믿는 다는 것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든 고행을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네 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라고 번역된 원문은 “levgwn, Ei mh;n(레고 에 멘)”입니다. 말(레고), 그 다음에 나오는 ‘에’는 분명하게는 참으로의 강세형 부사입니다. 그리고 ‘반드시(멘)’ ‘확증 적으로’라는 뜻의 강세형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라는 번역의 단어는 ‘에 멘’ 인데 두 단어모두 강세형으로 나옵니다. 우리말 ‘반드시’ 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고 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죄가 없으시며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더 어떻게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거짓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약속을 하고 지킬 수 없는 의지도 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약한 인간이 약속하는 것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이 거짓말시키지 사람이 거짓말 시키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에는 많은 변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나의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육신의 부모는 육체를 낳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나의 영혼까지 낳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낳으셨기에 나를 아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제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우리가 육체가운데 거하였을 때에는 이 음성을 들을 수 없었지만 이제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께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내 인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찬양하십시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몸바쳐 주의 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