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언약의 일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6)

이모(18)군은 1992년 2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90년도에 유행했던 원정출산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98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주로 한국에서 살다가 1992년 1월부터 3개월 동안만 미국에 머문 뒤 아들과 함께 귀국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한·미 복수국적자가 된 이군은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한국 국적을 이탈하고 싶으면 먼저 병역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생은 미국에서 했지만 살지 않았고 국적만 취득해 갔고 있다가 군대갈 때가 되니까 대한민국 국적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혜택은 누렸지만 의무는 안 지겠다는 겁니다.

KBS1 일일극 ‘바람불어 좋은 날’에 보면 오복이는 아이가 있는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친 엄마 미란이가 나타나 결혼생활을 방해합니다. 아이만 나 놓고 미국으로 떠났던 미란이를 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엄마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버리고, 아무 책임은 가지지 않고 천국만 가려고 한다면 양심 없는 이중 국적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신 것을 약속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책임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구약에서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도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로 주신 것입니다(창 9:16-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하나님은 나타나셨다하면 사람하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사람하고 약속을 하신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만들어 가지고 올라갔던 궤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박스입니다. 그 약속의 궤가 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과 개인은 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건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이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이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21)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목적은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 가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바로 이 증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실 약속은 우리가 여겼는데 하나님은 먼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의 피입니다. 피로서 새우신 언약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갑자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뭐가 있었지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까? ‘예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입니다. 이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힘은 세상 적인 힘이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학교는 병원은 큰 곳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세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있지만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할 것은 보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꾼이 일할 때 약속하지 않고 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다 약속이 있는 겁니다. 얼마큼 일할 태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ㅣ22)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못 믿지만 예수가 보증입니다.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일꾼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역사는 한가지 큰 원리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인간은 어느 한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인간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시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자기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이 자신만을 위한 복음이었다면 신약을 남을 위한 복음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민족 복음이었다면 신약은 이방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본문에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인 무익합니다. 육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다른 것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은 엉망인데, 영혼은 죽었는데 다른 것이 잘되면 뭐합니까? 영혼을 위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교육학사전에서 교육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능력과 행동을 발달시키는 전체 과정, 그리고 사회적 경쟁과 성장을 이루게 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육의 출발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어디서 오게되는지는 모르고 인간의 소질만 개발시키고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 축은 소외시키고 주변 기능과 유능성을 함양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게된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지혜 있는 악마를 만들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일 짧은 시간에 성경을 다 가르칠 수 없지만 성경을 요약해서 다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운동경기도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육디스로피협회를 만든 분이 계십니다. 일명 근육병입니다. 이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근육병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격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 영역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첫째, 예수 믿은 것이고, 둘째, 교회에서 집사가 된 것이고, 셋째 하비타드를 세워서 남을 위해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시고 할 때 한가지를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약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우리는 지금 이런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엘리사 시대가 아닙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1-56)
좀 돌아가면 됩니다. 길 가로막았다고 다 죽여버리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마리아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원수지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저주하시고 원수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밤에 가룟유다하고 군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고 나섰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1)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군병들에게 초라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죽여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방법을 쓰는 겁니다. 미란이 아버지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안주십니다. 주시면 그 능력을 다 죽이는데 결국 사용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여버릴 것입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잘못을 저질러 태형을 때리지만 그러나 40대 이상 때리면 안됩니다. 자꾸 때리다 보면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못이 있어 때려야 하지만 무시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회개하고 다시 잘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살면 잘됩니다. 지금 왜 매를 때립니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나라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11)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도화지를 한 장 씩 주고 가족의 얼굴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모두 열심히 식구들의 얼굴을 그리는데, 한 어린이가 그 큰 도화지 한 가운데 엄마의 얼굴을 크게 그려놓고 그 밑에는 언니, 오빠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얼굴이 없어서 선생님이
“얘 아름아, 너는 아빠가 안 계시는구나?”라고 하자 아름이는
“아빠가 왜 안 계세요? 계세요.”
“그러면 왜 아빠의 얼굴은 안 그렸어?” 라고 하자 아름이는 도화지 뒷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뒷면을 보니 큼직한 얼굴이 도화지 뒷면에 그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름아, 도화지가 너무 작아서 아빠의 얼굴은 뒤에 드렸니?” 그랬습니다.
“아뇨, 우리 아빠는 볼 수 없는 분 이예요. 아침 새벽에 나가시죠. 밤에는 우리가 잠든 후에 오시거든요. 우리가 못 보는 아빠니깐 안 보이게 뒤에다 그린 거예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당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름이처럼 도화지 뒤에다 그려야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면에 그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음성으로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제일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런데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 설교를 위해 먼저 구약성경의 마지막 성경책, 스가랴서, 말라기서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제목도 주제도 먼저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본문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에만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설교의 본문과 제목을 정하는 것은 내가 미리 이것을 전해야지 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직통계시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는 B.C. 516년경 성전재건 이후로 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8장까지는 B.C. 520-518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나 스가랴 9-14장까지는 몇 십 년 이후인 B.C. 480-470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마지막 성경은 스가랴 9-14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가랴를 통해서 이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게 하신 후 하나님은 세례요한 때까지 아무 말씀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스가랴서의 핵심어는 ‘순종’과 ‘메시야’ 입니다. 메시야를 보내시기 전에 이 땅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순종’입니다. 딸 가진 부모님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신랑에게 딸을 당부합니다. 그 때 대부분의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 딸 눈에서 눈물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남편들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가진 것 없어서 고생은 시키지만 마음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이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요. 하나님의 이 당부의 말을 들어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슥 1:3-4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불란서의 사상가 파스칼은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만드실 때에 그 마음속에 하나의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물질을 쌓고, 향락을 누리고, 명예와 권세를 얻음으로, 채워 보려고 하지만 채워지지 않고 쌓고, 누리고, 얻으면 얻을수록 인생의 갈증은 더 증폭되어 갑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먼저 어느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 잃은 것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두 번째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입니다. 죄인을 회개케 하는 성령의 빛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셋째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종일 그 팔을 벌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냥 집으로 달아나지 마십시다. 벌리고 계신 주님 팔에 다 안기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는데 세 번째 취임사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자원과 능력에 합당할 만큼 모든 국민의 안전과 기회와 지식을 보다 크게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목적들만 달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육체를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는, 이 나라의 정신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하고 자원이 많으며, 정신적으로 아무리 미국이 좋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영적인 축복이 가장 귀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미국이 잘 살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영적인 삶이 죽으면 미국은 끝납니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겸손한 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예수님 이전의 어떤 왕도 ‘겸손’이라는 말을 경의어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신 독생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는 ‘겸손한 하나님’이라는 모순 어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또한 겁에 질려 따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 말과 회오리바람을 대동하신 채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만큼 작아지시고 작아지셔서 우리들이 태어나는 방법과 다르지 않게 난세포가 되셔서 믿기 어려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인 존 돈(John Donne)이라는 사람은 “그대의 존귀한 태중에 광대한 존재가 은둔해 있나니”라고 탄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산문투의 어법으로 말했습니다.

세계 최대 항공기 A380이 지난 화요일(2009.12.15) 동북아 최초 인천~두바이 노선 투입되었습니다(에미레이트항공). 이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특급 호텔’로 부르는 2층 구조의 초대형 여객기입니다. 프랑스 에어버스가 제작한 것으로 전체길이 73m로 축구경기장 너비를 능가하고, 높이는 10층 짜리 아파트와 비슷하답니다. 이 비행기는 세계 4개 항공사에서 20대를 운항하고 있습니다. 한번 타는데 값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퍼스트 클래스의 항공운임은 약 25,000달러랍니다. 우리 돈 약 3천만원정도 됩니다. 제가 이거 타고 중동한번 갔다오면 우리교회 1년 헌금이 다 들어갑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성공회와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대단한 위엄과 찬란한 영화의 발자취였습니다. 러시아 크렘린 왕궁에 가면 공주들이 입던 드레스가 있습니다. 금실로 짠 금 드레스가 있습니다. 왕국에서 사용하던 금 그릇들과 마차들도 모두 금으로 되어있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책도 겉 표지를 각종 보석으로 장식했습니다. 얼마나 보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지요. 대단한 나라입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영국 시장이 타던 마차도 금 마차였습니다. 열왕기서를 보던 유대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솔로몬의 저 영화로운 시대,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왕상 10:27)라고 말하던 그 시대의 강렬한 향수를 생각한 것은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신은 너무나 위대하여 미천한 인간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이슬람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영국여왕의 행차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경호원들과 호화스런 치장과 웅장한 팡파르에 맞추어 ‘의전품’들을 일일이 챙겨가면서 나타납니다. 영국 왕가 일행이 해외를 한번 방문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26억이랍니다. 이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의 이 지상의 방문은 어떻습니까?
마땅히 누우실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잠시 천사들의 방문이 있었고 빛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추운 겨울에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의 목자들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던 비천한 부류입니다. 그들만이 이 광경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네 가운데 거할 것
슥 2:10-11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수 방법은 희생제물과 몸을 최대한 낮추어 이슬람교도들처럼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최대한 낮추어 기도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에게 하는 절을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합니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절하는 방법입니다. 두 팔꿈치와 두 무릎과 이마가 땅에 닿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몸의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이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대다수의 종교적 전통들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사실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만지는 사람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지성소에만 잘못 들어가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관계를 끊고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어린 아기 예수를 보고 두려워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두려워 할 자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아기가 자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두렵기 이전에 친근하신 분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부자지간에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어떤 때는 친구같이 지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토론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어린이들하고 잘 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린아이들과 같아 져야 합니다.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5) 예수님이 어린아이가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는 말이 주역의 혁(革)괘에 보면 나옵니다. ‘군자는 표범의 털가죽이 선명하고 아름답게 변해 가는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소인혁면(小人革面)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는 변해야 할 때 표범의 무늬처럼 확실하게 변하지만 소인은 겨우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자기변혁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감한 변혁이 필요할 때 확실한 자기변혁을 해야 합니다. 군자표변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354-430)이 9년 동안이나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19세 때 부모님의 동의 없이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의 이웃집에서 ‘집어 들고 읽어라’(tolle lege)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 즉시 성경을 폈습니다. 로마서 13:13-14절이었습니다.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밝은 빛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뜨거워집니다. 밤새도록 회개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의 주홍 같은 죄가 사라졌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이에서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세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셔서 마지막 날에 주님께 칭찬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 피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1-11)

우리 인사합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올 설 명절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30명이고 설 당일 날 교통사고 부상자는 5,176명이나 됩니다. 대물사고 발생은 4,692건입니다. 이것은 연 평균보다 8-9% 감소한 것이라고 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대대 약 500명, 연대 2천~3천명(대령:***)이고, 사단 1만~2만 명(소장:☆☆)이면 10개 대대 또는 2개 이상의 연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한 부대가 된 것이고, 1개 사단의 절반이 중상 병이 생기고 자동차는 쓸모 없이 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고인이 된 30명은 아마 자기 자신이 죽을지 몰랐을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불행은 나에게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에 고인이 된 30명 중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군포가 유명해 지고 있습니다. 군포 여대생 납치하여 살인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 일대에서 실종된 부녀자 7명을 모두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매스컴이나 다른 사람들은 ‘군포’ 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정작 여기에 사는 우리들은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세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쓴 것입니다. 다윗은 전 국력을 사용해가며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칼을 피해 10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전쟁의 역사 속에 늘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들이 죽는 것을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작습니다. 면적이 강원도와 비슷합니다. 다윗 시대 때의 면적은 유대 주변이기 때문에 더 적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적들과 사울만이 다윗을,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미 믿는 우리에게도 사단은 손을 내밉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지시기까지 사단은 쫓아 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 어느 곳에 피해 숨어 있어도 사탄 마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은 21세기가 성령 시대가 아니고 21세기는 무신론의 재도전 시대이고, 적 그리스도의 시대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안전지대(safety zone)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찾아가도 안전한 땅(Safety Island)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가장 안전한 곳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다윗은 이 안전지대를 종종 피난처라고 말했습니다. 시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다윗은 어려서 형들과 목장에 나갔다가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적장이 이스라엘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겁없이 골리앗에게 도전장을 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입니다. 다윗의 진정한 피난처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다윗의 도피성이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던져 영원한 안전 지대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미국의 서부의 평원지대 중에 끝없이 펼쳐지는 대초원 지대가 있는데 사람들은 때때로 그곳에 사냥을 하러 가기도 하며 또 그밖에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가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건조기에는 그 대초원 지대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데 그때는 불길이 60미터 내지 90미터나 높게 타오르게 되고,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벌판을 달리는 말보다도 더 빨리 번져 나간다고 합니다. 이때, 그곳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도피하지 안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속히 안전지대를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전 지대를 어떻게 만드냐 하면 맞불을 놓아서 자신들이 머물러 있는 초원 지대를 태워 버리면 더 이상 불길에 휩쓸릴 염려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죄를 소멸시켜서 안전 지대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며 안전 지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오시는 것만으로 사단은 우리를 헤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만 들어도 마귀는 벌벌 떱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안전 지대는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명저 중에 『하나님의 도시』(City of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두 개의 큰 도시가 나옵니다. 하나는 성공과 부와 영화로 가득 찬 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다른 도시는 세속화된 도시처럼 화려하거나 영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 위에 서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속 도시를 로마로 보았고 하나님의 도시는 기독교로 보았습니다. 로마는 망했고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삽니다.

고백하세요.
본문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피한 사람, 하나님만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요청하세요. 제가 일산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여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아파트를 구입할 때 구 아파트 이름이 “청구” 아파트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청구아파트를 청구합니다.” 하셔서 아파트 입주하셨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는데 몸 속에는 부적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 가면 대들보에 부적 붙여놓은 사람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런데요 몸에 지닌 것 보다, 집 대들보에 붙여 놓은 것 보다 더 심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에 의심하고 주를 믿지 못하고 다른 것에 기대어 보려는 마음의 부적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요, 이것저것 많이 구합니다. 예수께서 믿고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으니까 무엇이든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명히 합시다. 다윗의 시(기도)를 보면은이요 사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본문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성도라는 단어만큼 좋은 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말은 성도입니다. 목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도 집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되고 장로 집사는 되었지만 성도가 안된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를 우습게 압니다. 여러분! 목사, 장로, 집사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구원받습니다. 총신대학교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1948년 6월 9일 신설장로회신학교 특별 기도회 때 박형룡 박사가 열왕기상 6장 1-7절의 본문으로 “선지 학교의 중건”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나온 것이다)입니다.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하고 거룩한 성자(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되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목사, 장로, 집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성도가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한 성도들을 존귀한 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장수였습니다. 마치 군대 문화와 같은 곳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가 존귀한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는 다윗에게 늘 기쁨이었습니다.

훈계와 교훈을 받아들이세요.
본문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그랬습니다. 잠언 15: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여야 생명의 길로 가게됩니다(잠 4:13, 10:17).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훈계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밤마다 다윗은 양심이 교훈을 했을까요? 예 밤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을 보면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시 121:3-4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자기가 밤에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졸립니다. 육신의 피곤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앞서 모시세요.
본문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마치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먹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먼저 드리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뒤에 모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자기의 우선 순위에서 하나님은 뒷전입니다. 다른 모임이 먼저입니다. 다른 것에 돈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른 생각에 마음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먼저입니다.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지금 곤경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항상’ 이라는 말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거 아세요?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앞에 두셨습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시 17:15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제가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내가 일어날 때에 주를 닮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북한에서는 지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어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다합니다. 한 목사님이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북한이 공산화 된지 벌써 6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북한에 기독교인이 남아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분은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8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에 공산군이 들어왔습니다. 강가에서 놀고 있다가 마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친구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공산군들이 마을 공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묶어 놓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엄마 아버지도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고,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빨리 대답해라” 엄마 아빠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풀려나기를 바랐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에게 빨리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지만, 어른들은 괴로워 두 눈을 꼭 감아버렸습니다. 화가 난 공산군 장교는 사람들을 모두 목만 남겨놓고 땅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해라”
그러나 하룻밤이 지났지만 아무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군 장교는 더 볼 것이 없다며 장갑차를 몰고 와서 그 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머리가 깨지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부모님들을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주셨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은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빌 2:8) 정작 자신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은 로마 군인도, 무지하여 침을 뱉으며 따라오던 사람들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모두 용서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성도가 됩니다. 회개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을 먼저 드리되”(레 5:8) 라고 했습니다. 급한 것은 나의 속죄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