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구원(로마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13) (더 보기…)

온 마음으로 주를 구하라(예레미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더 보기…)

죄와 여자의 후손(창세기 4)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16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렘 35:16)

오늘도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죄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죄의 문제는 대충 넘어갈 성질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그냥 두고 무슨 축복 운운하는 것은 맡지도 않고 되지도 않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 될 때 사함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왕이 가면 다 따라옵니다. 신하들과 선물들이 다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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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3)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오늘은 창세기의 다섯 번째 주제 ‘죄’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전재합니다. 만일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보지도 않을 것이며 믿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 책이냐 하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죄인이 되었고 그 죄를 어떻게 사함 받느냐를 가리키는 책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가르칠 것도 없고, 예수님의 죽음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분명히 죄인입니다.

먼저 죄가 어떻게 사람에게 들어오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다음 하신 일을 알려줍니다. 창 1:27 부분에 2장이 들어가도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곳이 ‘에덴’ 입니다(2:8). 그리고 그 동산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그리고 16-17절에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모든 명령 중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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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본문 : 누가복음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우리부부는 대화의 소재가 많지 않습니다. 부부의 문제를 없애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이 대화를 해 보았어야지요. 대화하라니까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인줄 안답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저희는 요즘 서은이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고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여러분이 은혜를 받았는지를 물어봅니다. 저희 집사람도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한 음식 맛있게 먹었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밥상 차린 사람의 심정이나 제 심정이 같을 것입니다. 열심히 먹어주는 식구가 있기에 열심히 만드는 것입니다.

요리를 맛있게 한다고 소문난 오리 농장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요리사는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요리해서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 음식점에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오리요리가 맛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리를 기를 때 특별히 신경 써서 사육해서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방장은 주인의 말에 서운해 했습니다. “오리도 좋지만 주방장이 신경써서 요리를 했기 때문에 맛있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좋은데 안 하는 겁니다. 하루는 주방장이 오리 다리를 하나만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두고보자.“ 손님들 앞에서 한참 오리고기 자랑을 늘어놓던 주인은 오리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자 당황해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왜 오리다리가 하나냐고 했더니 주방장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원래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하고 오리농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오리들이 한발을 들고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방장은 오리를 가리키면서 ”보세요.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 주인은 화가 나서 손뼉을 쳐서 오리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저걸 똑똑히 보아라“ 그러자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님이 손뼉을 치니까 오리들이 숨겨두었던 다리 하나를 내놓잖아요! 저에게도 요리를 잘한다고 손뼉을 쳐주신다면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나가서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마가가 가버나움 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몇 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4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붕이 분명히 ‘기와를 벗기고’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집들은 옥상이 평평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기와를 덮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팔레스타인의 집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당시 지붕을 쉽게 뜯어낼 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 것 또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누가 같지가 않습니다. 누가는 의사이면서 역사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검증된 사건이 아니면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루는 사건은 아주 정밀하게 기록합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자세히 기록한 사람입니다(눅 1:3). 그런데 본문은 마가보다도 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복음서 본문을 다룰 때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다른 복음서로 정하지 않고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보는 관점입니다.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핵심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협력자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협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이 나온 다른 사건들은 자신이 걸어나왔습니다. 아무리 중한 병자라도 심지어는 소경이나 문둥병자 조차도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병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인 이 환자는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 병자를 들고 예수님께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이로 보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랍비도, 제사장도, 바리세파 사람도, 서기관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평소에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런 친구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이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고 말했습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바로 이런 친구들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
친구들이 저를(중풍병환자) 침상에 누인 체 데리고 왔을 때는 갈릴리 여러 마을과 더 아랫마을 유대와 예루살렘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지난번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은 신분도 높은 분들입니다. 감히 저희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평생에 한두 번 함께 지내면 영광이랄까 그런 신분 높은 양반들이 온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입니다. 이분들은 저희 같은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로 율법준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양반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 주위에 가득 했습니다.

예수님 주의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 제가 정상인 몸이라도 혼자의 몸으로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친구라면 그냥 돌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정말 저에게는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남의 집을 뚫는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기물 파손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파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을 제 친구들은 저를 위해서 그런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저를 예수님께 내려놓은 것입니다. 제가 지붕에서 내려질 때 온통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로 쏠렸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도 꾸중을 듣지 않고 병고침은 물론이요 칭찬 받은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리한 방법을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행동 외에 아무 말도 예수님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이며 이 친구를 함께 달아 내린 친구들입니다. 이들이 “저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에 감격해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땅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자신만을 아는, 입으로만 토론하는 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저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 첫 번째 말씀은 병이 아니라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마지막 만찬을 할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죄 사함”입니다(마 1:21). 이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들은 사람은 본문의 중풍병자와 누가복음 7:48의 시몬의 집에 들어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여자입니다. 두 사람만이 예수님께 직접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늘 처음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발하는 종교지도자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고침을 받고자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큰 축복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러한 의논이 일어난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사용한 “참람”(blasfhmiva”: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모독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13: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실 때는 세 가지 경우였습니다. ① 죄를 사하실 때(막 2:7) ② 메시야 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③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심리를 알고 즉시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질문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가언적 양도논법’으로 반대자들을 꼼짝없이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확실한 반박을 못하시면 매우 곤란해지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적당한 불쾌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성모독’ 죄는 당장 끌어내어 돌로 쳐죽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일을 행할만한 고위층 지도자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표면상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병이 나아야 되고 즉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당장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생각할 때는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눈에 보이는 병도 고쳤습니다.
인자선언
이 때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24절 “인자가 땅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사용하신 자기표현입니다. ‘인자’(ajnqrwvpou:안드로포스)는 복음서에 90여 회 나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만 26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데반이 한번 사용한 것 위에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제일 처음으로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도데모의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때 ‘인자’가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7:13). 사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 중에 자칭 예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가짜이지요. 이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우깁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고 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침상을 들쳐 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영생의 약속과 육체의 질병도 깨끗하게 해결 받았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 해 줍니다.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역사 앞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표현한 말은 “기이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예상을 넘는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입니다.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 늘 교회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평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는 부흥회 하는 교회입니다. 그 때 부흥 강사목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교회 2층은 관중석이고 1층은 은 자리요 교회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앞자리부터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거나 정체된 교회들은 앞자리가 잘 채워지지 않습니다. 음악회나 운동장에 가도 앞자리가 더 좋은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주부터는 조금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사건의 관중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나갔던 친구들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은 중풍병자만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의 역사는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은 걸릴 수도 나을 수도 있지만 구원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해 주셔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받아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친구처럼 내가 친구를 고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데리고 주님께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아파서 병만 고치러 나갔지만 주님은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해방과 진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 해방과 진리) / 본문 : 요한복음 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어느 가정에 아내가 며칠간 친정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아내는 혼자 있을 남편이 걱정이 되어 반찬도 마련해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 옷은 어떻게 입고 나가고, 양말은 어디 있고 등등 여러 가지를 남편을 위해 챙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못내 미안한 마음으로 ‘가능하면 빨리 올게요’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부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남편의 표정을 보니, 부인이 없기에 쓸쓸한 표정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부인이 없는 집에 들어선 순간 남편은 땅을 치면서 좋아하더랍니다.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해방이다!” 마치 8.15 광복절을 만난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더랍니다.

내일은 우리 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 된지 60주년 되는 날입니다. 이제 일제의 만행과 광복을 체험한 세대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때의 아담과 하와의 죄로 우리가 지금까지 죄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있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한번 엎지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교훈 삼아 지금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제의 만행으로 고통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사진/위안소에서 도망치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정옥순 할머니.) 저는 이 사진과 이야기가 너무 끔찍해서 주일예배에 전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전해야 되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 않으며 모두 거짓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마다 전쟁기념관을 만들어서 역사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자료제시 설명).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던 1945년의 국민생활 수준을 통계청에서 발표하였는데 당시 평균수명 44세, 유아 사망 율은 1000명당 102명, 인도 다음 2위로 높았으며, 문맹자 77%이었습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현재 평균수명 남자 73.4, 여자 80.4세로 평균 77세입니다. 그리고 문맹률은 2%정도로 세계 최하위에 속합니다. 우리경제는 IMF을 경험했지만 교만하지 않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런 민족적 해방을 귀히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아직까지 자유가 속박되어있는 북한이 여전히 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루 속히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사람은 속박 당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속박 당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1.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면 자유 함이 없습니다.
시편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진리’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참이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진짜 거짓말은 ‘나는 절대 거짓말은 안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이시며 진리이십니다.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어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통령이 심각한 얼굴로 담화문을 발표해도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이미 사회와 정부, 국가의 신뢰도는 백성들에게 깨어져 버렸습니다. 백성들이 정부와 국가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이런 나라, 이런 정부가 싫다고 조국을 떠나는 젊은 엘리트 가정들이 늘어나고만 있습니다. 사회 생활하면서 누구를 만나든 그 말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에그, 순진하기도 하지’라고 동정을 살 정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의가 사라졌습니다.

미국 LA 영락 교회에서 목회 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몇 해 전, 평양에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오래 전에 서울에서 목회 할 때, 남대문 시장에 바지를 하나 사러 가셨습니다. 바지 사러 가시는 목사님께 권사님 한 분이 코치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무조건 절반을 깎으세요” 그래서 바지 하나를 고르고, 얼마요 했더니 주인이 7천원 이라고 합니다. 무조건 절반 깎으라는 코치가 있었기에, 심호흡을 하고 짐짓 잘 아는 체 하며 ‘아니 왜 그렇게 비싸요? 3천 5백원만 합시다’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풀이 죽는 표정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옳거니 기 싸움에서 내가 이겼구나’했는데, 그 주인이 풀 죽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그거 원가가 6천원이에요.” 자기를 보고 목사라고 부르는 소리에, 게다가 그 가게 주인이 자기 교인이란 말에 목사님은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고 합니다.

시편 57:3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영으로서가 아니라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언하실 때 분명히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2. 진리를 변명으로 거부합니다.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니고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변명합니다.
33절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 아시겠지만 거짓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의 종 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 왜 애굽에서 탈출해 나왔습니까? 노예 살다가 나온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조 들이 출애굽기에 그리고 구약성경 전체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된 덕이 없다니요! 우리는 이럴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 낫다’ 이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때도 70년간이나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 통치하에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민족적으로 지금도 자유가 있습니까?
그러면 정말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런 것을 모르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치적인 예속상태에 있었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압제 속에서도 종교적인 자유를 빼앗겨본 적이 없다는 일종의 자부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면 거짓인 것이 금방 들어 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들이 우상을 섬기고 거짓을 계속해서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대상 9:1)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거부하면 안됩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거부한다는 그 자체가 그 어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족적 자부심도 좋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항하면 안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을 보면 이런저런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무슨 무슨 가문의 몇 대손 이라고 하는 자부심 때문에, 내가 그래도 어떤 학교를 나왔는데 등등 많습니다.
빨리 손들고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은 일의 활력이 되지만 자만심은 망하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3. 죄의 종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민족적인 노예나 지금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적으로 자신들이 잘 지켜왔다는 자부심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극명히 들어 납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적인 해방이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입니다. 지금은 민족적으로 해방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민족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민족이 타민족에게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민족은 지배당하고 있을지라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민족이 해방되어 있어도 지옥 갈 사람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죄의 문제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육체가 노예가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죄에게 지배받으면 안됩니다.
목회하기 힘들다고 할 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분 만나면 괴롭습니다. 다른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서 세례증명서를 떼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앞으로 받을 거니까요. 그러면서 떼어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세례 받을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떼어주겠어요 안 떼어주겠어요. 안 떼어줍니다. 이 목사님도 안 떼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나가서 하는 말이 “목사가 융통성이 없니, 목사가 사랑이 없어, 너무 꽉 막혔어!”하고 다니더랍니다.

4. 아들이 자유를 줍니다.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뒤에 나오는 “자유하리라”는 해방을 받으리라는 말입니다.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사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과감하게 종의 멍에를 버립시다. 오랜 관행이라고 하면서 대충하지 맙시다. 정직하게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죄에서 해방을 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일제 만행의 증거 정옥순 할머니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 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 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4.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 고전 15:45-50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45-50)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렘 44: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고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첫 아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에덴 동산의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의 각종 먹을 것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안전한 낙원이었습니다. 특별히 더위나 추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되는 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쫓겨나자마자 그들은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상하고 병들어서 힘에 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워서 몇 번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이 지키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그 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덴을 바라보며 두 부부는 쓸쓸히 그곳에서 발길을 또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첫 아담의 실패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소망합니다. 그 증거로 성공에 관한 책과 지도자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 사울, 가룟 유다의 실패와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의 실수 등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실패자 중에 최고의 실패자는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공 중에 성공인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실패는 아담 자신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실패이며,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첫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믿음의 성공자가 됩시다.

첫째, 탐욕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창 3:5). 하나님은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줍니다. 이 때,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우리는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어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하고, 사단보다 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합니다(창 3:1 하). 이것은 오늘날 이단들도 동일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창 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지키면 누구나 인생의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마 4:4).

셋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 전가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말하면서, 아내에게 책임을 떠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에 대해서 감사는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넷째, 회개하지 않았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보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잠 28:13). 하나님이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징벌하려고 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즉시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바로 성공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 내려온 죄

아담의 교만(욕심), 불순종, 회개하지 않은 것은 아담의 한 사람의 문제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도 쉬어(울고) 넘는다”는 옛 시조의 고개일까요? 아니면 박달나무로 우거진 문경 ‘새재’의 고개일까요? 또 아니면 임꺽정이 지키고 있었던 ‘까치 고개’일까요? 아니면 지금은 터널이 뚫어있는 대관령 고개일까요? 아닙니다. 그 고개는 지금 봄의 끝자락에 있는 이 때쯤이 제일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릿고개”입니다.
인사말은 그 나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영국에서는 “굿모닝” 좋은 아침이 그 사람들의 인사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 개조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후(안개)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국 사람들이 왜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아침 인사란 것이 없고 언제나 만나면 “봉주르”하면 됩니다. ‘봉’은 ‘좋은’, ‘주르’는 ‘낮’이란 뜻인데 향락문화가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늦게 일어나는 것이 예의이고 귀족들은 오후에 생활을 했답니다. 그래서 괜히 아침 일찍 여자가 다니면 창녀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답니다.
몽고 사람들은 모든 것(음식, 의복, 연료 등)을 가축에 의지하여 생활하다보니 “당신네 집 가축은 살이 얼마나 쪘습니까?”가 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고 나왔냐”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죽는 사람도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였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많습니다.
아담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사망이 왕노릇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불평, 불만은 많이 하면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 에요. 마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 야죠. 목사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다니는데 먼지가 자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다는 겁니다.
미국은 요즘 시끄럽습니다. 이라크를 해방시켜 주겠다고, 핵무기, 화학무기를 찾겠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름 빼앗아 오려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라크 해방”은 명분으로 내어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잔학한 짓을 한 것이 탈로 난 것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갖은 모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 이라크 해방군입니까? 그래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청하면서 겉으론 평화를 내걸고 사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 인권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본인들만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저쪽 중동의 국민들만 죄인시 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은 또 한번의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도 역시 아담 이후 내려오는 죄의 문제를 안고있는 첫 아담의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고 또 내가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어도 따먹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가 바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로, 규칙적인 경건 생활로, 선교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9시 15분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회심을 하고 “그가 내 죄, 곧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셨으며 나를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시조인 아담의 후예이나 또 한 사람의 다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여 생명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있음을 저는 감사드립니다. 죄의 문제가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첫째 아담과 비교하기 위해서 이며 첫 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는 그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럼 성공한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과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 아담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탐욕이 없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사단이 시험한 것은 바로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시험입니다. 천하세상을 보여주고 다 주겠다고 한 사단의 소리는 바로 첫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사단의 소리를 들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오직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지시는 것만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늘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결과 첫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후 아담을 통해서는 이 죄가 단절되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탐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하늘에서 나셔서 오셨고 하늘의 생각만을 했습니다.
지금도 누가 욕심이 많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욕심이 많은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죄의 육체로 하늘의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한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체는 이 땅에 벗어버리고 아프지 않고 썩지 않을 새 육체로 갈아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서는 교회에서 만나지만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이 아닌 곳에 있다면 반드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