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우간다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는 길에서 반군이나 강도가 많이 나타납니다. 선교사님 한 분이 길을 가다가 총으로 무장한 강도를 만났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것 모두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까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만 기다려 달라. 내 주인에게 물어보고 줘도 줘야 할 것 같다고 하고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선교하라고 준 차인데 이분들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고는 차 키를 주고 차에서 내렸답니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가는데 무장강도들이 차를 타고 쫓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순간 겁도 났습니다. 그러더니 이분들이 도로 가져가라고 하면서 차를 주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모든 일이 잘 됩니다. 인생이 잘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불행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대표적인 무신론자 중에 볼테르(1694-1778)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이 거짓말 이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기독교는 5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그가 죽은 지 20년 후 제네바 성경 협회는 그의 집을 사들여 전 세계에 성경을 보급하는 센터로 만들었습니다. 볼테르는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구나.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볼테르는 죽어도 성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토마스 페인이란 사람은 1794년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란 책에서 “나는 성경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죽음 직전에 “차라리 이성의 시대가 씌여지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들여서라도 그 책을 회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랬습니다.

한 때 과학자들은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천문학자, 물리학자의 90%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천재 과학자 뉴튼과 아인슈타인은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무신론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1804-1872)입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존재하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그럴듯한 이론에 지성인들이 매료되었습니다. 독일은 개신교의 본거지입니다. 지금도 독일은 유럽 국가들 중에 선교를 꾸준히 잘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나라에서 제일 악한 영의 세력이 일어난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포이에르바흐의 이 주장으로 칼 마르크스, 니체, 다윈, 잉거솔 등이 인본주의 사상에 기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물질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는 유물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는 사람의 인권과 영혼을 버리고 인류 역사에 깊은 상처만 남겼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메모에서 “신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내가 미칠 것만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미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한 사람들은 모두 미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은 비록 9살 때 어머니 낸시가 떠났지만 그에게 성경을 주면서 “내 아들아! 이 성경책은 나의 부모님께 받은 것이다. 많이 낡았지만 내가 너에게 100에이커(12만평)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고서도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나의 오늘, 나의 희망, 나의 모든 것은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성경을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잘 됩니다. 비행기가 오는 방향으로 바람이 밀어주면 빨리옵니다. 기름도 별로 안 듭니다.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밀어 주시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만 바라보고 가지만 뒤에서 지켜주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지의 모든 것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시니 나는 기쁘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면 혹은 그 열쇠를 내게 쥐어 준다면 나는 슬픔에 잠길 것이다.” J. 패커의 말입니다. 우리 미래를 여는 열쇠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 열쇠를 내가 가지고 이문 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또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을 탈출하기 위해 그 열쇠가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애원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결코 뛰쳐나가서는 안 되는 상황을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우리의 간절한 애원에 그 열쇠를 때로는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아이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부모님에게 맡겨두고 있는 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칼을 나에게 달라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이제는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리심보다는 눈에 보이는 왕의 다스림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6)고 사무엘게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으로 도망가고 싶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셈을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런 백성들을 돌이켜 보고자 왕의 제도가 어떤 것인가를 사무엘을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17)고 하십니다.
그러나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그럽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속셈을 다 아시고 결과를 가져다 주는 미래도 다 아시면서 목이 곧은 백성들이 요구하시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22)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비참했습니다. 나중에 앗수르와 바벨론이 쳐들어와 성전 기둥에 칠한 금까지 다 벗겨갔습니다. 자기들의 왕이 자기들을 지켜줍니까? 비참한 국가의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왕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사탄은 오늘도 아담에게 한 거짓말을, 예수님께 한 시험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다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으면 시험에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 사마귀가 눈앞에 있는 매미 잡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고 뒤에서 노리고 있는 참새를 못 본다는 말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이익만을 탐하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면 그 이익보다 수백 배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는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합니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당랑규선(螳螂窺蟬)이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입니다. 앞만 보지말고 주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왕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다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돈 있고 권력 있으면 뭐합니까? 자기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전 대통령이 미얀마에 갈 때 김포공항에 아침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공항 근처의 중고등학생이 나와서 잘 다녀오시라고 비 맞으면서 태극기 흔들었습니다. 가서 좋은 분들 다 죽이고 자기 혼자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그런 왕 되시기 원하십니까?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큰 자’(왕)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사울 이었던 바울은 자기 이름을 그래서 빠꿉니다. 사울은 큰 자 이지만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모든 사도들보다 작은 자로다”고 고백합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잠 31:8) 한 나라의 왕이 되려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부탁하는 잠언입니다.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8) 영원히 내 종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년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땅을 한번 사면 영원히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 땅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땅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는 너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었습니다. 선한 것을 선하게 못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요 눈이 있지만 소경이었습니다. 눈을 뜨세요. 귀를 여세요. 귀 있는 자 되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주가 아닙니다. 내가 왕 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남에게 잘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세요. 하나님께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주를 앙망하고 주의 팔에 의지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5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6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4-6) 

사람의 첫 번째 죄, 두 번째 죄, 세 번째 죄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죄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시고 하와를 주셨습니다. 하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아담(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물론 아담도 하와를 도와야 합니다. 서로 돕고 살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지어진 목적이 그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도와 줘야 하는데 사탄의 꾀임에 빠져 그만 아담이 아니라 사탄을 도와 주었습니다. 하와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주었고 이 부부는 하나님께 범죄 하였습니다. 남자 분들 잘 들으세요. 사탄이 제일 간교하고요, 그 사탄은 여자를 통해서 들어옵니다. 여자 말 너무 잘 들으면 안됩니다. 그냥 설거지하는 것 정도는 들어주세요. 남자가 가정을 리더하지 못하면 문제입니다. 가정을 지키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목소리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정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아담을 부르시며 …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여기 잘 보세요. 죄를 지은 사람을 부르시는데 하나님은 하와를 먼저 찾지 않습니다. 아담을 찾으십니다. 책임이 아담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주가 아담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었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은 양으로, 가인은 자기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 질투하여 결국 살인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두 번째 음성이 가인에게 내려집니다. “6…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7 내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6-7) 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사람이 많아졌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보기에 좋은 여자를 선택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고 물로 이 땅에 홍수를 내리십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뽑습니다. 노아였습니다. 성경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말한 사람은 ‘욥’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시고 이스라엘 레위지파 사람들에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고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소개한 사람은 ‘므두셀라’(창 5:22), ‘에녹’(창 5:24) 두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만큼 성경에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이 세상을 제 창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죽였습니다.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살려두실 자와 없애버리실 자를 선택하고 계십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예수님은 첫 설교에서 우리에게 8가지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5:1-12).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복을 주지 않은 일이 있나 찾아보세요. 책망하고 버릴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고쳐 쓰시기 위함입니다. 회개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둡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4절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먼 길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얼마나 힘드냐 하는 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얼마나 멀어도, 힘들어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다 좋은데 한가지 너무 물질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성공시키려면 반드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그것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무너진 지 오래되었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4절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고 하셨습니다. “세우리라”는 원문은 ['yGIr]a(아르기아)인데 어근인 [g’r;(라가)에는 여려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르다, 절단하다, 던지다, 열다, 해결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내가 해결할 것이다” 또는 “내가 열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 3:17) 고 했으며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히 10:20) 라고 했습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캄보디아 조성규 선교사님이 말씀하신 것인데 캄보디아 어느 지방의 촌인데 한 지역을 개발시키고 우물을 파주고하는 외국 분들이 계시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거의 현지인 처럼 생활하면서 돈이 모이면 우물하나 파주고 하면서 몇 년째 일을 하는 분이 계시답니다. 그런데 조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일을 하는 분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나와서 거기서 몇 년째 그러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놀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요. 하버드를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는 1638년 여름에 초라한 통나무집에서 단 한 사람의 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버드라는 이름은 마치 삭개오처럼 자기의 책과 재산의 절반을 대학에 기증한 청교도교회 목사 존 하버드의 이름을 따라 붙인 것입니다. 19세기 초 신학대학·법과대학·의과대학으로 개설된 학교입니다. 하버드 대학교는 청교도 목사에 의해 신학교로 출발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는 전통이 있습니다. 학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따로 따로 배우기보다는 다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신학’입니다. 하나님을 배우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다른 것 다 하고 하나님 잊어버리면 끝납니다. 본문에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법학’입니다. ‘법’이 무너지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미국 서부에서 얼마나 총질을 해댔습니까 심심하면 사람이 죽는 겁니다. 도적질에 살인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법은 십계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무슨 돈 벌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법이 아닙니다. 본문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법이 나가는 것입니다. 시작이 하나님이라야 합니다.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파라오가 만든 법이 아니고 공산당이 만든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학’입니다. 고통과 아픔에서 구하는 의학입니다. 이 세 가지 학문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할 때 이 세 가지를 권해보세요. 장자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고 가르치세요. 신학을 하라고 하세요. 그 다음에 법학을 하라고 하세요. 그 다음에 의학을 하라고 하세요.

오바마 대통령도 하버드에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오바마는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며, 민간기업에서 잠시 근무 후 철강산업의 쇠퇴로 슬럼화 된 시카고에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운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낙후된 주거환경, 범죄와 실업의 증가 등 지역의 문제 해결에 노력하여 주목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법을 모르니 도와줄 한계를 느끼고 하버드 법대를 들어가서 공부했습니다. 하버드학교에서는 꼭 면접을 봅니다. 학생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그 때 제일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은 이 학생이 하버드를 졸업하고 인류와 미국을 위해서 무슨 선한 일을 할 사람인가를 판단합니다. 오바마는 “시카고 빈민들을 법을 알아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학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하버드는 이런 사람 제일 좋아합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인 2세 아이가 미국 SAT(미국 대입학력고사)시험을 수석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지원한 학교가 하버드였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하버드 총장에게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우리 아이가 떨어진 것을 납득이 가게 설명해 달라고 당당하게 보냈습니다. 부모님들의 생각은 SAT에 수석을 차지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얼마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 학교를 나와서 인류와 미국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 학생이 지금까지 봉사한 경력이나 또 그런 봉사를 하겠다는 사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점수는 부족해도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겠다는 신념이 분명하면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학교를 2학년 다니다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세운 빌게이츠도 얼마나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삽니까. 정신이 있는 겁니다. 함께 사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쏙 빼놓고 자본주의만 배우면 안됩니다. 협력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일은 힘들다고 포기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 5절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나갔습니다. 정치인들이 한쪽에서 할 일을 다 했으면 다른 쪽에서 응답할 차례를 두고 “공은 넘어갔다” 고 합니다.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일만 남았습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고 하십니다. 이사야가 말한 ‘섬들’은 이방나라들을 말합니다(사 11:11, 40:15, 42:4, 10, 12, 49:1).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4) 고 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섬이지만 특별히 우리 민족도 섬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다른 것은 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반도의 지리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휴전선이 가로막혀 북쪽으로 못 갑니다.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회장은 소 500마리를 몰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실제로는 501마리였습니다. 1마리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끌고 온 소 값으로 501마리를 몰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 갑니다. 소 500마리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섬나라와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섬나라와 같은 이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앙망하고 주의 팔을 의지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 새벽마다 부르짖는 소리를, 추운 겨울 산 속 토굴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칼과 총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공산당에게 손들지 않은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앙망하여 살았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지켜 가야할 차례입니다. 받돈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본문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이 구원이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지만 이것이 제일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 만일 구원이 폐하여 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땅을 살펴보세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연기처럼, 하루살이처럼 사라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영원히 있고,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복음이 내게 도착했습니다.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제는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주님의 팔을 의지하여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5-17)

적진에 들어가 임무를 완수해야하는 검은 베레모의 특수요원들은 훈련을 늘 실제와 같게 합니다. 일년에 절반이 실제상황처럼 훈련합니다. 한번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비 오는 날 작전 나가면 비에 젖어 힘들지 않느냐?” 요원이 대답하기를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고난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이왕 고생스러운 것이라면 선을 행하면서 고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일어나 다시 달리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말합니다. 이거 하나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나는 누구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인가? 자기의 주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령을 내려보는 겁니다. 그 명령에 따르는지 보면 압니다. “주”를 길게 부르면 “주”에서 “주님”, “주인님”이 됩니다. 목사들이나 사명을 주님께 받은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 6: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노릇 해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약시대 때나 예수님 시대에는 거의 한번 종이 되면 평생을 종으로 살아야 됩니다. 종에서 해방 받을 길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가끔 탈출을 시도하는 종이 있는데 잡히면 죽거나 더 심한 고통스러운 일이 맡겨질 뿐입니다. 유럽에서는 해상이 발전하여 배 밑에 들어가 쇠고랑을 매단 채 평생을 노를 저어야 하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찬송가 305장을 쓴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바로 이런 노예를 팔고 사던 사람이었습니다. 뉴톤이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고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곧바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욕설꾼이 되어 보통의 저주와 맹세의 말들로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가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납니다. 배는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나를 살려 주소서.”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 절망과 조바심이 뒤섞인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뉴턴은 자기가 지은 죄가 하도 커서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못하는 뉴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배가 파도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손길로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았지만, 주님은 멸시치 않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 된지 4주만에, 뉴톤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해 주심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종이 누구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종의 운명은 오직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제일 바보 같은 짓이 사단의 하수인으로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사주신 선하신 우리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 하반에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십니다. 준비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포시 산본은 ‘피겨 요정 김연아’의 고향입니다. 바로 옆에는 ‘수영선수 박태환’의 고향 안양입니다. 우리 집사람 학교 동창이 박태환의 어머니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김연아, 박태환 같이 될래요?” 하는 아이들을 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고된 연습은 생각지 않고 그들의 영광만 생각합니다.
김연아는 한 해 300일 가량을 훈련합니다. 빙판에서 하루 300여 회 점프훈련을 합니다. 1년이면 약 9,000회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점프하는 셈입니다. 점프 성공률은 80% 정도이니까 1년에 점프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는 횟수가 1,800번 정도입니다. 차디찬 얼음바닥에서 엉덩방아를 수도 없이 찧으며 다시 일어나야 하는 어린 소녀를 기억해 보세요. 회전하려 애쓰는 척추, 착지를 위해 회전력을 잡아 줘야하는 골반의 상충작용으로 피겨 선수는 온몸에 골병이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는 모진 훈련 끝에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디즈레일리
성공은 공짜가 아닙니다. 천재도 소용없습니다. 항상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준비하는 자에게 본문은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ajlla; meta; prau?thto” kai; fovbou,) 하라고 합니다.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원문에는 두 단어가 더 있습니다. “ajlla; meta”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물론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대답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언어적 대답만이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삶으로 대답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헬라어의 온유(prau?thto”:프라위테토스)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을 뜻합니다(딤후 2;24, 25). 두려움(fovbou: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두려움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말하면 안됩니다.

스코틀랜드 설교가 매더슨은 자신의 전도집회에서 회심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읽을까요? 그들은 여러분을 읽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이 정말로 자기가 말한 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를 알기 위하여 여러분의 생활과 행동방식을 아주 샅샅이 읽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이 하는 말과 어긋나는 것을 그들이 발견하면, 마귀가 이일을 트집잡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내려 할 것입니다.”

본문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선한 양심이 있어야 선이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여기에 보면 쌓입니다. 선도 쌓이고 악도 쌓입니다. 잘 우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체적으로 공감하시지요? 잘 웃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개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이요 감정이 사라져 갑니다. 주님은 악한 세대를 가리켜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고 하셨습니다. 유머는 이요 마음을 열어야 만들 수 있고 보인다고 합니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사람은 웃을 줄도 모릅니다. 마음을 열면 유머가 보이고 행복해 집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머니랑 결혼하겠다고 버팁니다. 아버지가 뜯어말립니다.
“그건 안 돼,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란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기를 “그럼 아버지는 왜 우리 엄마랑 결혼했어?”
구약의 히브리어는 선한 것과 좋은 것과 기쁜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바로 ‘토브’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좋은 것이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것은 겨울에 입었다가 여름이면 벗어 던지는 외투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편하면 택하고 불편하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면 한국은 벌써 한국인으로부터 오래전에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 고 했습니다.
이 땅에 몸담고 사는 내 나라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새벽 한 시, 두 시에 나무를 짊어지고 오십리 떨어진 시장에 가면 아침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팔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이 됩니다. 그 일을 늘 반복했는데 어느 날 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예수 믿으라는 어느 선교사의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분은 한쪽 눈이 없고 배운 것도 없습니다. 남의 집 머슴입니다. 천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로는 상놈중의 상놈입니다. 아주 가난하고 불쌍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집안에 다이너마이트가 떨어진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온 마을이 복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온 마을이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습니다. 한쪽 눈이 없었던 나무꾼의 아들은 장관이 되고 방송국의 국장이 되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마을에서 목사만 18명이 나았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의 기적은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소망을 만들어 냅니다. 살립니다. 고칩니다.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면 다른 것이 주가 됩니다. 여러분! 그깟 돈을 주로 삼으시렵니까? 아니면 아파트가? 아니면 세상 출세가? 다 별것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님으로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를 바랄지어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27:7-14)

사람은 바라고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황금마차를 탄 왕자님을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로또 복권에 당첨 될 것을 기다리십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말씀하십니다. 여기 ‘바란다’는 말을 ‘기다린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은 이런 기다림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5-7)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라는 말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널리 울려 퍼지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마치 거지가 부자의 문턱에서 구걸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영어에는 웨이트(wai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주로 “기다린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또 다른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손님을 섬기는 사람을 웨이터(waiter)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고 궁핍해야 합니다. 마 5:3 산상복음의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가 주를 찾습니다. 세상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하고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 때 까마귀는 내어놓았는데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체 썩은 것이 많아서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내어놓았더니 다시 돌아왔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까마귀와 같으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비둘기 같이 주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2)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서 문을 두드립시다. 간절히 구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문 밖에서 기다린 사람 치고 빈손 들고 돌아간 경우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세요.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세요. 하나님께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꼭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배우려는 학생같이 기다려야 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영향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주님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제자가 되려면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인내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집요하게 욥을 추궁합니다. 그러나 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어떤 선교단체에서 선교사를 뽑기 위하여 새벽 3시에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선교사 지망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험관은 아침8시가 되서야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자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1번 문제, 빵집이라는 단어의 뜻을 말하시오.
2번 문제 2더하기 2는 얼마입니까? 그리고는 답안지를 제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응시자는 그것도 문제냐? 새벽 3시에 치르겠다고 하더니 8시에 나타나서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를 시험이라고 치르느냐? 면서 항의를 하고 나가버렸습니다.
시험을 다 치르고 시험관이 문제를 거두고 그런 문제를 낸 이유를 응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5가지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첫째는 극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른 시간 새벽3시에 나온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이긴 것입니다.
둘째는 시간약속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새벽 3시에 시험을 치른다 할 때 그 시간을 의심치 않고 지켰습니다.
셋째는 인내심에 대한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5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을 시험했는데 여기에 합격입니다.
넷째는 성격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도 화를 내지 않았으므로 합격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성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토록 유치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을 하는 것을 볼 때 인간성이 좋다는 것입니다. 위의 여러 가지는 선교사가 필히 갖추어야 할 자질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데 그 어떠한 시험도 유치한 일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감추인 보화의 밭을 자기 재산을 다 주고 사는 것처럼 해야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바라나이다.”(시 25:5)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롬 12:2)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여행자가 안내자의 인도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여행자는 가는 길이 초행이기 때문에 안내자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에 길을 잘못들 우려가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에 구찌 땅굴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미군을 끝까지 괴롭혔던 곳입니다. 이 굴에 들어갔는데요 땅 속에 가다가 갈래가 나옵니다. 이 때 안내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 가다가는 나오지도 못합니다. 땅 속의 굴이 얼마나 복잡하게 파지고 길고 깊은지 끝까지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안내자가 없으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갔습니다. 모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갔습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은 하늘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 자신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는 길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살아보고 사는 사람, 한 분도 안 계십니다. 하루 하루가 인생의 초행길입니다. 그러므로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길이 되신 주님을 기다리며 따라갈 때 잘못될 염려는 아주 없습니다.

“기다리라” 는 말씀에는 참으로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아이가 부모님을 기다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아무 부담감이 없이 부모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갖다 주리라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기다리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기저귀 안 사왔나, 우유 안 사왔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준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호는 “여호와 이레”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데는 회개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기다리는데는 담대해야 합니다. 비겁해서는 절대로 주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데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문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 얼굴 보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죄 지은 사람은 피해 다닙니다. 경찰 얼굴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뵙기를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피하거나 숨을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을 없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가 있어서 그럽니다.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만 있으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교회 안 나오시는 분들이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네… 무슨 문제가 있네 그럽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회개하지 못하도록 사단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가증한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기다립시다. 담대하게 기다립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 드러냅시다. 야고보 장로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담대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으로 구하지 마시고 담대한 마음, 확신을 가지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윌로우 크릭-빌 하이벌스 목사님은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독일 속담에 “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므로 영원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시게 되고 신비한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납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될 때 새로운 영적인 힘이 솟아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욥은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당한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심할 때일수록 주님 품에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부모가 자식을 때릴 때, 자식이 가슴에 안겨 들면 더 이상 때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계속 기다립시다. 원수가 아무리 공격을 가해도 겁내지 맙시다.

헬렌 켈러가 정상인들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사람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사람처럼 당신의 귀를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아무 것도 못 만지게 될 사람처럼 당신의 촉각을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사람처럼 꽃의 향기를 맡아보세요
우리에게 주신 기능들 아끼지 말고 사용합시다. 주를 위해 사용하세요.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주를 앙망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1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1-22)

제가 새벽기도를 4:30분에 나오는데요 같은 시간에 요즘 길에서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연세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 분은 옆에 성경을 끼고 남자 어린아이가 초등학생 2-3학년쯤 되어 보이는데요 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가시는 거예요. 언 듯 보아 엄마 같지는 않고요 할머님이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것 같은 아이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교회로 가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인 제가 보기에도 그렇게 이쁜 데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가 이쁘 겠어요?

찰스 스펄전이 17세기 침례교 전도자인 존 번연에 대해서 말한 적인 있는데 “그의 몸 어디든지 찔러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피가 곧 성경을 전달하는 라인(Bible line)인 것을 알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스펄전 역시 성경의 본문을 인용하지 않고는 설교하지 않았던,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블랙우드(Blackwood)교수는 스펄전에 대해서 “사도시대 이후의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유능한 설교자 였다.”고 했습니다. 그를 이처럼 영향력 있는 목회자로 만든 것은 그가 바른 신앙,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9세기말의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존 폭스(John Foxe)의 “순교사기”(The Book of Martyrs),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과 같은 17세기의 청교도 경건 서적을 통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오류를 인식하였고, 철저한 성경주의, 철저한 예수 중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존 번연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커서, 그는 평생 “천로역정”을 100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존 오웬(John Owen),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청교도의 경건과 신학, 특히 설교는 그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습니다. 한국최초의 7명의 목사 중에 한 분인 주기철 목사님도 천로역정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스펄전은 신장질환에 걸려 고생하다 죽었는데요 그가 죽은 날 영국에서는 상가들이 문을 닫고 끝없이 이어지는 장례행렬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관 위에는 성경이 펼쳐 있었는데 그를 회개 시켰던 바로 그 성경 본문이 펼쳐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입니다. 5만여 명의 사람들이 스펄전의 관위에 놓인 이 구절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을 변화시켰던 이 말씀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고 믿으세요.

본문 21절에 “21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기독교는 덮어놓고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지하여 무조건 믿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알아야 효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야 어떻든 관계없이 나만 좋자고 하는 것은 효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시 36:10)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빛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숨깁니다. 죄는 감춥니다. 하나님은 드러내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5)

구원을 주시는 다른 이가 없습니다.

21절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22절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요. 그곳에도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요, 그리고 다른 길도 없습니다. 다른 구원도 없습니다.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이제 길을 잃지 마세요.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설교한 것입니다(2006.7.2).
“어제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님이 신문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핵심인물’ 이라는 이런 기사로 국민일보에 실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자세히 읽어보니까 내용이 이렇습니다. 새만금에 구경을 갔는데 마침 교인이 거기 있는 핵심 키인 수문을 여는 키를 가진 분의 안내를 받으며 구경을 잘했다는 겁니다. 거기는 아무도 갈 수 없는 자리에 자기가 깊이 들어가 보았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핵심인물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따라갈 때 가장 귀한 데로 안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나에게 너무 감동이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핵심인물입니다. 이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이 온 우주의 리더예요. 온 우주의 감독이시고 그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목자예요. 이 분에 의해서 모든 우주가 다 만들어지는 거예요. 앞으로 되어 질 미래도 이 분이 다 계획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하늘과 땅과 열방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생명을 다 다스리시는, 잡고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냐 말입니다. 핵심인물이에요.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사해사본을 보았어요. 어떻게 보았느냐? 그 안에 있는 사람도 안 보여 줍니다. 그 안에 있는 누구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어느 나라 국가 원수가 와도 사해사본은 보여 줄 수 없다라는 거예요. 큰 쇠로 된 집채만 한 문을 몇 개나 열고 지하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보관되어 있는 사본을 보여 주는 거예요. 어떻게 제가 보았느냐? 그 관장이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어요. 핵심인물이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은혜 받은 거예요. 그랬더니 곧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저는 미국에 가서 아폴로 우주선도 올라 타 보았어요. 거기서 사진도 찍었어요. 물론 하늘은 안 갔어요. 아폴로 연구소에 근무하는 과학자들은 옆에 있는 사무실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 있는 핵심인물이 안내하고 그 분이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저에게 약속해 주었어요. 내가 아폴로에 태워드리겠습니다. 아폴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폴로를 보고 올라탔다라는 거예요. 핵심인물입니다.”

저는 김삼환 목사님과 같이 핵심인물을 아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해사본도 보지 못했구요, 아폴로 우주선도 타보지 못했어요. 그런데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갈 거예요. 근데 아마 그것도 그분보다는 늦게 갈 것 같아요. 그래도 섭섭하지 않아요. 열심히 하는 것이 예요. 김삼환 목사님도 그분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시는 것 같이 우리도 열심히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 많은 데서 떠밀려 가듯이 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 더 쉽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어려워요.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다.” 명심하세요.

주를 앙망하라

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땅 끝의 모든 백성들을 초대하십니다. 이제 민족과 국가를 구분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사야도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앙망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yl’aeAWnP](페누-엘)인데 이 뜻은 “향하다, 돌아가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시 22:27) 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22절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그리하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을 얻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우리에게 다시 풀어줍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31)

엄상익 변호사가 쓴 ‘임종 연습’이라는 책에는,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을 잘 그려놓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와서 전도하면 “당신이나 혼자 가슈”할 정도로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갑자기 세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세례 받은 후엔, 식사 때마다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까지, 아버지는 정정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은 지 한 달 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임종하시던 날 아침, 아들이 아버지를 뵈었을 때, 아버지가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내가 조금 전에 아주 좋은 곳으로 가려다가 도로 왔단다. 내가 빨리 가고 싶은데도, 의사와 간호사가 아서 주사바늘을 찌르는 바람에, 내가 가지를 못했구나.”
임종을, 한 시간 가량 앞둔 때였습니다. 아버지 표정은 진지했고 정신도 아주 맑았습니다. 먼 길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기대 섞인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묘한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물었습니다. “아버지, 정말 가시려는 곳을 보았어요? 그곳이 있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때, 의사가 말하기를, “심장이 서서히 정지되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마지막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면 어떨까요?” 하고, 보호자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얘야, 어젯밤에도 여러 번 전기 충격을 했단다. 겪어보니, 그것이 죽는 것만 못하구나. 천국이 있는 걸 알았는데, 이제는 편안히 가게 해다오.” 그리고, 아버지는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하품을 크게 한 번 하시고는, 잠자듯이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저자인 엄상익 변호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버님의 죽음은 내게 강도가 높은 지진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경에, 한 부자가 지옥에 떨어져 형제에게 그 사실을 전하려 해도 전하지 못했던 저 세상을, 아버지는 생전에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후,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신약을 서른 번이나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말씀이, 성경 갈피에서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튀어 오르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제 열심히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 주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주를 앙망하는 거예요.

그리하면, 그리하면,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주 음성 외에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 주 음성 외에는) / 본문 : 요한복음 5:25-29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지난 2005년 7월 7일 영국런던에서 테러가 발생하여 5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영국수사당국은 처음에 범인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범인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정보당국의 수사 때문이 아닙니다. 테러가 발생했는데 가족이 돌아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신고를 했습니다. 이중에서 파키스탄계 영국인인 ‘모하메드 사디크 칸’과 ‘저메인 린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추적하던 중에 그들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라낸 것입니다. 미국 NBC뉴스는 칸이 지난해 11월 파키스탄을 방문해 알 카에다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영국국민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요즘 영국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집안에 슬픔이 생겼고 그 슬픔이 완전히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집안의 문제로 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인인데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민족이 국제사회로부터 부당하게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알 카에다가 훈련을 할 때 먼저 사상적으로 무장을 시킵니다. 미국과 연합군의 폭격으로 자신들이 당한 처절했던 사진을 펴놓습니다. 다리가 잘라지고 얼굴에 흉터가 생기고 어린아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자살폭탄이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할만큼 이들은 가슴이 뜨거워 옵니다. 민족을 위해서 항전할 것을 다짐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들어야 할 말을 바로 듣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편향된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그 많은 교육과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알 카에다 교육에 넘어갔습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들의 말은 죽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다릅니다. 주님의 음성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음성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죽은 자들 과 생명

성경은 죽음의 종류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① 육체적 죽음(창 3:19, 히 9:27) ② 영적 죽음(엡 2:1) ③ 영원한 죽음(요한은 둘째 사망이라고 함, 영원한 지옥형벌)(계 2:11, 20:6, 14) 본문의 25절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체적으로 숨은 쉬지만 이미 죽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28-29절에 나오는 “무덤 속에 있는 자”와 “생명 또는 죽음의 부활”은 영적 죽음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 심판을 의미합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나사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붕대가 감긴 체로 걸어나왔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신 예 표입니다.
본문 26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 2:7에서 인간에게 생기를 넣어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능력을 “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이 생명의 주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28절에서 이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덤속에 있는 자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

성경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기 대표적인 몇 사람만 소개하겠습니다.

노아
노아는 홍수심판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출애굽 하던 모세를 시내산으로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셨습니다.

사무엘
사무엘상 3장에 보면 하나님은 성전에서 잠든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처음에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가 물었습니다.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10)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으며,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으며, 모세는 출애굽 했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했습니다.

바울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사울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회개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누구든지 살아납니다. 주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자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대항하거나 막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늘 주님과 대화하세요. 그도 그러면 지나치게 우리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고하는 것이잖아요. 그런 대화만 하지 마시고 일상에서 늘 주님과 대화해 보세요. 기쁨이 일어날 겁니다. 살아나는 축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냥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입니다만 아담과 하나님이 대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에덴동산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이브는 정말 예뻐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만 바라보지 않겠니”
그러자 아담이 다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브의 피부는 정말로 부드러워요. 왜 그렇게 만드신 거죠?”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를 쓰다듬어주지 않겠니”
“그런데 하나님 이브는 좀 멍청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만드신 거죠?”
“그래야 그 애가 널 좋아할 거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생각하십니다.

주 음성 외에는

요한계시록 3: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그랬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해외정보국(MI6)이 있는데 7.7 테러사건도 이 기관에게 많은 화살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런던 나이트클럽 테러 미수 사건 시 모하메드 사디크 칸을 비롯한 8명의 용의자를 체포해 폭탄테러에 많이 사용되는 질산암모늄 0.5t을 찾아냈음에도 칸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감시 대상 인물에 올려놓지 않고 미국에서 받은 첩보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관의 이름이 요즘 또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습니다.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사망으로 이어졌던 프랑스 파리 교통사고 당시 사고차량을 몰았던 운전자가 영국의 해외정보국(MI16)의 첩보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석간신문 이브닝 스탠더드는 2일 다이애나의 사망원인을 재조사하고 있는 런던 경찰청이 이 같은 의혹을 파헤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운전사였던 폴이 영국 정보기관 요원이 확실하다면 ‘왕실을 배신한 다이애나가 피살됐다’는 음모론이 사실로 확인될 수 있습니다. 폴은 7년 전 다이애나와 연인 도디 파예드를 실은 채 파리 알마교 지하도를 과속으로 달리다 마주 오는 차량과 정면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일으켜 세 사람 모두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영국사람들은 이신 전심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다이애나가 사귀고있는 남자가 이슬람인 인데 이슬람인과 결혼하게되면 여자는 주권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영국 왕실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입니다.

이슬람은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입니다. 영국전체인구 6천만 명중 무슬림은 약 2백만 명 정도이며 이중 60만 명 이상이 적극적으로 이슬람 활동에 가담하는 무슬림으로, 이는 기독교보다 높은 비율입니다. 현재 영국 전역에는 약 600여 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60여 개의 이슬람 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슬람공동체는 영국의 모든 영역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경제, 금융, 교수, 법률, 건강, 교육, 사회 봉사, 예술, 문화 등 영국사회의 모든 분양에 진출해 있습니다. 약2백만 명의 무슬림 중 55%가 영국에서 출생한 무슬림으로, 영국에서 기독교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를 갖은 종교입니다.
이들은 중동, 북 아프리카, 서부 아프리카, 동부 아프리카, 서남 아시아, 동부 유럽, 카라비안(쿠바 아래의 카리브해 지역) 에서 이주한 이민자 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Urdu (파키스탄), Bengali (방글라데시), Arabic (중동), Turkish (터키), Persian (이란), Malay (말레이시아) 이외의 아시안 언어와 아프리카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약 3,000여 개의 이슬람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런던을 ‘아프가니스탄의 대기실’이라고 부를 정도로 극단주의 단체도 자유롭게 활동하는 곳이 영국입니다.

그러면 영국 국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영국 국교회 자체 내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앞으로 영국의 국교회가 60년 있으면 사멸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영국의 국교회는 파멸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살리려는 노력은 했지만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국의 국교회사입니다.
그 동안 영국 교회가 얼마나 많이 부흥되었고, 얼마나 많은 행정 조직과 교육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많이 부흥과 수많은 조직과 교육을 위해서 많은 투자를 했지만 지금 대영 제국의 교회는 사멸해 가고 있습니다. 반면 이슬람은 영국 땅에서 더 강해지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가 오늘 왜 이렇게 영국문제에 매달립니까? 우리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국의 선교사 통계를 말할 때 사람들은 우리가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선교사 많이 파송하게 된 것은 저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떻게 영국이 그렇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 개신교의 복음은 로마가, 프랑스가 전해준 것 아닙니다. 영국이 전했습니다. 영국이 민주주의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은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스펄전이 들었던, 웨슬리가 들었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들었던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삽니다.
부흥과 교회교육이 다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다른 것을 다 하고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음성 외에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과 심판의 부활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들은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는 지금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또한 마지막 때, 주님 재림하실 때 듣기 싫어도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간에 모두가 부활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살기 싫어도 살아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영생과 심판의 부활로 구분됩니다. 다시 부활했지만 결과가 심판과 지옥이라면 이것은 축복의 부활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이 마지막 때 오실 때 그때 주님의 음성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안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지금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 죽었다면 육체만 부활되면 되는 것입니다. 영은 이미 하나님께 가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족한 종이 대언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요 10:3)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바로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교회에 오셨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있어서 마지막 때 모두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구원의 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 구원의 주) / 본문 : 요한복음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855년 한 아일랜드 청년이 결혼식 전날 익사사고로 신부를 잃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기도하다
가 『그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잃고 구원을 이루셨으니 나도 상실을 믿음으로 이기자』라고 말하며 재기했습니다.
청년은 즉시 이 ‘믿음의 고백’을 시로 썼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이 시가 오늘날 세계 크리스천들이 가장 애송하는 찬송가 487장이며 청년의 이름은 조셉 스크리븐입니다.

꿈 많고 신사적이며 존경받던 그리스도인 가운데 토마스 무어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하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재판관을 향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재판관님,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친구여,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만,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이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을 것이요. 그대가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오.“
재판관은 이 토마스 무어경의 감격스런 선언을 듣고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그대가 나를 선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요?” 토마스 무어경이 대답하기를 “주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구원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랑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자연스럽게 소개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이 11개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그 첫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에서 시작합니다. 유대 고위관리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는 정말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의 눈을 피해 어두워진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그가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을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토론 문화가 발전해 있었는지 제가 늘 말씀드려서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대인은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이 학교를 보낼 때 아이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 안 되는 것이 선생님께 꼭 질문하라”는 것입니다.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 멸망치 않고 영생을

멸망과 영생사이에 다른 것은 선택할 것이 없습니다. 멸망 아니면 영생 양자 택일 뿐입니다. 중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 안 믿어도 선한 일 하고 살면 제일 좋은 천국에는 못 가도 극락에는 가겠지 하는 분이 있습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저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멸망하다’의 아폴뤼미(ajpovlhtai)는 ‘잃다, 없어지다, 상실하다, 파괴시키다’의 뜻으로 사람이 병에서 나아갈 때 ‘회복하다’는 말과 반대의 의미가 있습니다. 독생자의 이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이라고 하심으로 긍정적 표현으로 사용하십니다.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영생) 아니면 멸망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2.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6절에서 멸망과 영생이 대조되었고, 17절에서는 심판과 구원이 대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그 권한을 위임받으셨습니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심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지나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심판이 시작되는 날에는 무섭습니다. 그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을 뜻하는 소조(awvzw)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해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해주거나 철길에 있는 사람을 구하고자 열차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을 구해내는 목숨을 건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3.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지 마세요.

어느 민족이든 불행한 역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족적으로 참 안타까운 한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베트남입니다. 호치민은 30명밖에 안 되는 민병대를 만들어 200년 넘게 지배해온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미군과 싸워 물리쳤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싸우다 사상적으로 공산국가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상당한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합니다. 공산당의 법은 하지 말라는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도 금지되어있습니다. 특히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전하다 들키면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을 감시하고 똑같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공상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공산주의 역시 특권층이 있습니다. 사상적으로 계급적으로 있어서 처음부터 출신 성분이 좋지 못하면 절대로 그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물론 특권층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분명히 빛보다 어두움을 택한 것입니다. 빛은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숨기려고 합니다. 죄는 드러나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 어디서 좋은 일 한 것 있으면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몇 일 전에 운동장 뒤편 야산에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가면 뒤쪽으로 아마 사유지 재산인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 못 들어오라고 철조망을 쳐 놓았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나무 중간으로 철조망이 덮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철조망 좀 풀어주라고 군포시청에 사진 찍어다 제보했습니다.
선과 악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압니다. 악은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선은 드러납니다. 알리고 싶습니다.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선이며 좋은 일입니다. 자 용기를 내세요. 빛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천국에서도 도저히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었던 천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천사는 여러 차례 지옥에 있는 사람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지옥에서 놓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갖다 놓을 만한 선행을 하나라도 기억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선한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부인이 “거지에게 양파를 하나 준 적이 있어요.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선한 일이고 말고요.” 천사가 하늘나라의 문서 보관소에 올라가서 부인에 관한 서류를 찾아보니 과연 양파에 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파 하나를 갖고 지옥에 있는 부인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이걸 손으로 붙잡으세요. 그러면 나는 이쪽 끝을 붙잡을 테니, 같이 천국으로 날아 올라갑시다.” 양파가 두 사람의 몸무게를 잘 지탱해 주어 그 부인은 천사와 함께 날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자, 부인의 옷과 팔과 다리를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인에게 매달린 사람들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 아래 달라붙어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 본 부인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양파의 껍질이 벗겨져 자기가 떨어질 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팔 굽으로 다른 사람들을 밀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 같이 선한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는 죄인들은 지옥에 남아 있어야 해요.” 그 순간 양파 껍질이 벗겨져 떨어졌습니다. 이것으로 그녀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4.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진리를 쫓는 자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마 3:8) “빛으로 오나니”는 ‘에르케타이프로스 토 포스’(e[rcetai pro;” to; fw’”)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아담과 하와가 숨었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게되는 것을 “빛으로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나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향해 중인 배가 태풍을 만났습니다. 파도가 두 시간정도 계속되어 배를 휘감아 버렸습니다. 기관실의 모든 기능은 마비되었고 무전기도 불통되었습니다. 그래서 배는 정처 없이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금방 구조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날이 계속 가자 불안해 졌습니다. 먹을 것도 점점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자 부상당한 한 선원이 죽자 슬픈 척 했지만 속으로는 입이 하나 줄어든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이 사는 것과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승객들 가운데 임신부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임산부가 아이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는 죽더라도 저 아이만은 살리자.’
‘저 아이에게 육지의 꽃과 평화를 맛보게 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감추어 놓았던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또 한 사람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죽음이 저 아기를 위한 죽음이 되게 하소서’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기를 통해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변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살겠다고 하면 조금 더 살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즘 건강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TV에서도 건강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건강에 대해서 그만큼 많은 관심이 있으면서 왜 영생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100살 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영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교회들은 이 땅에서의 축복 논리에 빠져있는데 예수님은 사실 이 땅에서의 축복을 그다지 많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잠깐의 고통과 어려움은 견디라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얼마 길지 않은 인생을 잘 살아야 됩니다. 하지만 너무 이 땅에서의 축복 논리에 빠져서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소망이 없어지면 안됩니다. 또 이 땅에 안주하려고 하여 영생을 위해서 아무 일도 안 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무디는 이 말을 자주 했습니다. “회심하기 전 나는 십자가를 향해 일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십자가로부터 일해 왔다. 전에는 구원받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받았음으로 일한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며 열매 맺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1.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흔히 약장수들이 약을 선전할 때 그 약이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합니다. 우리 나라에 제일처럼 대일밴드가 나왔을 때 이것을 가지고 시골을 다니면서 판 약장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픈 곳에 부치기만 하면 심지어 배아픈 것까지 낫는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만병통치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교만하면 그것은 도리어 믿음이 없는 것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은 겸손입니다.

어느 목사가 대중들 앞에서 설교를 한 뒤 무척 우쭐해 졌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목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기에도 자기의 설교가 꽤 근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 같소?” 그러자 아내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당신이 생각하는 숫자보다 한 사람이 적을 것 같아요”

저는 먼저 교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전재하고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합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언제가 한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탔습니다. 그리고 엄마 이거 “엘리베이터지”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리지도 않는 여러 층을 누른 것입니다. 그때 옆에 있는 엄마가 “너 그러지 말랬지!”하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혼을 내 줘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하는 말. “엘리베이터가 뭐야 다시 해봐! (혀를 둘려가며)엘리베이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영어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근본을 위해서 교육하시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히브리어, 아람어 발음이 좋지 않다고 꾸짖으신 것 아닙니다. 그런 것을 교육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핵심 교육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눅 12:28)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의 생활 전체를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마 16:8)고 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당연히 염려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자들은 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축사하시고 5천명을 먹이신 일과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신 일을 경험한 후였습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바다건너(마가단 지경)로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들은 떡이 없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간질들린 아이를 제자들 앞에 데리고 왔는데 고치지 못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 17:17, 막9:19)하시고 고쳐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17:20에서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도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일 많이 그리고 자주 꾸짖으셨던 것은 이빨 안 닦는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운동 안 한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일 좋은 교육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칭찬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으며 바로 그러한 일을 만나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마8:5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때 한 백부장이 나왔습니다. 백부장이란 자기가 거느린 군병이 100명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중풍병 때문에 주님께 나아와 고쳐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에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내 집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면서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 부하들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면 하인의 병은 고쳐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눅 7:9)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누가 만듭니까?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면 교육적인 효과로 자녀에게 믿음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본입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고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차라 시골에 가면 번쩍번쩍 빛이 나던 그런 시절입니다. 길을 물어보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노인과 아이가 섰습니다. 그런데 차에 타고 있던 젊은 부인은 왜 심통이 났는지 “진주로 가려면 어디로 가요.”라고 반말 투로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노인과 소년은 “저리로 고개를 돌아 좌측으로 가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젊은 부인은 “진짜 그리로 가면 진주 나와요”라고 물었습니다. “예 그리로 가면 진주가 나옵니다.” 거짓말 아니지요. “예 아닙니다” 그리고 젊은 부인은 “당신들 거짓말시키는 거지”하면서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더니 가르쳐준 방향대로 안가고 자기들 마음대로 뒤돌아 갔습니다. 그곳은 삼천포가는 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화는 자신이 내고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주 찾아가는 길이야 가다 잘못가서 삼천포면 다시 돌아가면 되겠지요. 하지만 천국가는 길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1) 믿음은 곧 능력입니다.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들은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눅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께 병을 가지고 나왔던 사람들은 병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너를 구원하였으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은 잠이 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병 고침과 구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오늘날에는 병원에 가면 어지간한 병은 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냥 육체의 병만 일시적으로 나은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 구원”해 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치유는 완벽한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인 치유가 아님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주님께 부탁하십시오. 그분에게 먼저 구해야 합니다. 제자들도 주님께 구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 17: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물론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믿어주셨습니다. 즉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믿어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간에 용서와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인디언 마을에 ‘너구리 잭’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불평과 불만이 많이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디언 마을 계곡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너구리 잭도 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 교회에는 신앙고백 시간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성령이 강림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일어나 일종의 짧은 간증(고백)을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 시간에 너구리 잭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 내 등뒤에서 나를 놓고 쑤군거린다는걸 알고 있어. 난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구. 당신들이 뭣 땜에 그러는지 알아. 교회 임원 모임에서 내게 찬송가 상자 열쇠를 맡긴 게 샘나서 그렇지? 좋아 그렇다면 모두들 잘 들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나오라구. 내가 가진 걸로 해결해 줄테니.”
너구리 잭은 미친 듯이 발을 쾅쾅 구르면서 사슴가죽 셔츠를 확 저치더니 권총 손잡이를 두들겼습니다. 금방 교회안에서 총을 쏘지는 않겠지만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너구리 잭에게 말했습니다. “잭 자네가 찬송가 열쇠를 어찌나 잘 간수하는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감탄하고 있어. 행여 자네 기분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일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슬퍼할 걸세.” 너구리 잭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풀리는지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휴! 하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아버지 손자가 물어보았습니다. “너구리 잭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너도 알다시피 체로키족(인디언 부족 이름)이 고향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 주로 강제이주당할 때 너구리 잭은 혈기 왕성한 젊은 이었다. 잭은 산속으로 달아나며 열심히 싸웠지. 그러는 동안에 남북전쟁이 터졌는데, 잭은 이번에 연방군(북군을 말함)을 물리치면 땅과 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싸웠는데 결과는 패배로 끝났지. 전쟁이 끝나자 이제는 정치가들이 들어와서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것 가지고 또다시 싸웠지… 너도 알다시피 너구리 잭은 평생 싸운 것 밖에 없어. 이제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 찬송가 열쇠란 말이다. 이제 잭은 그것 밖에 남은 것이 없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너구리 잭 아저씨가 좋아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지난 15일에 했습니다. 투표 결과에 대해서 마음에 드시는 분, 안 드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반목만 하고 상대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넓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 그분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성향이 생긴 것 아닙니까?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고 칭찬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2. 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21:1-14

오늘 본문말씀을 정리하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야고보)과 다른 제자 둘(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빌립과 안드레로 추측한다) 모두 7명의 제자들이었는데 베드로가 먼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3절)하고 어찌 보면 먼저 선동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늘 먼저 말하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언제나 제자들의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6명의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이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디베랴 바다는 여러 이름으로 불러졌는데 바다를 중심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들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지역적으로 불려진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요6:1), ‘긴네렛 바다’(민34:11), 겐네롯 바다(수12:3), ‘게네사렛 호수’(눅5:1) 등으로 불러졌는데 “디베랴 바다”라고 불러진 이유는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그들이 이전에 하던, 갈고 닦았던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았지만 고기는커녕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서 계셨습니다. 아직 새벽인지라 물안개가 가려서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얘들아(5절) Paidiva(파이디아)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현재 어른들에게 사용되기도 하는 말인데 우리 식으로 옮긴다면 “여보게들, 젊은이들” 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예수께서 이 말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친근감을 더해주는 애칭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메 티)로 부정관사와 명사를 사용하여 이미 고기가 없음을 알고 계시면서 묻는 것이다). 제자들은 고기가 하나도 없다는 대답을 아마도 기운하나 없이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6절)고 하십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제자들이 아직도 주님을 몰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고 보기보다는 그저 지친 나머지 누군지 모르지만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눅5:1-11에서 유사한 경험(베드로를 부르실 때 예수께서 함께 고기를 잡았던 것.)을 했기 때문에 주님인지 아직 완전히 몰랐지만 그 말씀을 따라하면서 어떤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전율이 제자들의 몸 속에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제일먼저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7절).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 kuvriov”(퀴리오스)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벗고있던 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마 그의 기쁨이 주님을 만나는데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바다로 뛰어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제자들은 작은 배에 옮겨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사람이 감격과 감동하면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효력을 가진 사이몰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이몰핀은 암세포를 죽이는데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건강해지고 강건해진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감격과 감동의 연속적인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육지에 올라온 제자들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숯불을 피우시고 그 위에 고기가 놓여있었고 떡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잡은 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고기는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그물이 찢어져 버릴 만큼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16절)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확실히 주(主)신 줄 알게되었고 더 이상 묻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자신들에게 해 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장면입니까?

사실 제자들이 고기 잡을 정신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허전하니 잠시 고기 잡으러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녔던 제자들은 이미 세상의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오늘의 본문내용에서 나타난 주 kuvriov”(퀴리오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본문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 kuvriov”(퀴리오스)는 “주인, 절대자,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인데 성경에 나타난 주님은 어떤 분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 ‘프레드의 생선가게’가 있었습니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프레드는 음식솜씨가 아주 좋아서 생선으로 갖은 요리를 맛있게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드에게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을렀던 것입니다. 그는 너무 게으르고 나태해서 식당을 청소도 하지 않고 방치한 채 더럽게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이 더러운 식당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프레드의 식당이 더럽다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은 점점 줄고 급기야는 식당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주인이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식당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더러워진 식당 내부를 완전히 정리하고 청소하고 음악을 틀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식당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할 일도 없어진 프레드를 새 주인은 그의 음식 솜씨를 보고 주방장으로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새 주인은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광고를 보고 한 사람, 두 사람 이 식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위기, 깨끗한 식당 안에서 맛있는 생선요리를 맛보고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이 식당은 다른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데.”
이 소문은 금방 퍼지게 되었습니다. ‘프레드의 생선가게’는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포도밭 주인(막12:9), 동물들의 소유자(눅19:22, 마15:27), 청지기의 주인(눅16:3), 종들의 주인(엡6:5-6)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인줄 착각합니다. 만물에는 주인이 있는데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잠깐 맡겨진 청지기일 뿐입니다.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땅도 진실로 여러분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뿐이십니다.
혹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물의 주인도, 교회의 주인도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섬길 때 모든 문제들은 해결됩니다.

둘째, 주님은 모든 것의 주관자이십니다.
추수하는 주인(마9:38), 안식일의 주인(막2:28), 주의 날(요20:1, 행20:7, 고전16:2)의 주관자요 주인 되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의 심판자시요 날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일(부활일)은 예수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요 주님만을 위해서 필요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성도의 주님이십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롬12:11).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다 주님께 달렸습니다(롬14:14). 그러므로 주님께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고전11:27). 장차 오실 분도 주님이십니다(딤전4:15).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주님도 한 분이십니다(고전8:6). 우리는 이런 어마어마한 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주 kuriva/(퀴리아)가 여성형으로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부녀’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 유일한 용법은 요한이서 1, 5절에 나타납니다. 신부 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회들은 서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주앙교회도 중국의 00교회를 자매교회로 개척하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수님의 부활 후에 나타나신 장면에서 주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인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kuvriov”(퀴리오스)라는 용어가 이전에 나타난 주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롬10:9, 행2:36, 히2:6). 즉 사탄의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승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7절에서 요한이 주시라는 말을 할 때 그는 바로 지체할 겨를도 없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지금 배에 있는 고기 따위에는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로 부를 때 이미 배에 가득한 고기와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왔던 제자입니다. 그가 사실 먼저 다른 제자들에게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고 나갔었지만 이제 그곳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면 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교회에만 나오지 주님을 아직도 못만 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고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주님이 잡아주셨지만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그 물고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알아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 던져 버리고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베드로와 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최후의 만찬과 그리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살 때 루도빈코(Ludovinco) 백작의 부탁을 받아 주님의 최후 만찬 석상의 모습을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여기 저기 제자들이 앉아 있고 주님은 오른손을 뻗어서 잔을 쥐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걸작품을 완성한 다음 백작에게 넘겨주기 전에 친구들에게 먼저 보여주면서 평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그림을 본 친구는 “훌륭해! 너무 훌륭해! 특히 저 잔이 사실적이어서 그 잔에서 내 눈을 떼어놓을 수가 없네”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친구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빈치는 붓을 들어 그 잔을 지워버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혹 다른 곳에 우리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6: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자에서는 왕(王)자 위에 점을 더 찍어서 왕보다 높은 것이 주(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왕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는 누구에게나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은 한 분인 것입니다. 진돗개 같은 영리한 개는 평생에 주인을 세 번 이상은 바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혹 우리들은 주가 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아닌지요.
물질과 명예와 권세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있지는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가, 자식이 자신의 주인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가 되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한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