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18-26)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 병에 걸린 이 사람을 사람들이 침상 그대로 메고 나왔습니다. 스스로 일어나거나 걸을 수 없는 중증환자입니다. 이런 병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과 함께 병들면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떠나는 것이 더 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사람은 비록 중풍 병이 걸리기는 했지만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잘 나갈 때야 주위에 사람이 많겠지요. 그러나 병들어 보세요. 사람이 떠납니다.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병자나 친구들은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친구들이 하는 행동을 보세요.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합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병든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쉽게 만날만한 환경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일이든 장애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뜻을 이루게 된다면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강원도 경제를 살린다고 카지노를 만들어 놓았는데요, 다른 사람 노름해서 사람 버려놓고 그 돈으로 잘살면 뭐하겠습니까?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노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거져 얻으려는 것입니다. 결국은 노름을 해서 망합니다. 혹 돈을 딴다고 해도 이 사람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됩니다. 돈의 가치를 모릅니다. 땀흘림의 수고를 모릅니다. 잘해보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병자의 친구들이 주변 환경을 탓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내일 오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의 집을 헐었을 때, 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변상은 누가 할 것입니까? 먼지가 날 것을 염려해서 지붕을 뜯지 않았다면 병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집수리 비용을 누가 낼 건가? 이러면서 토론하고 싸우고 있다면 지붕을 뜯지 못했을 겁니다. 희생이 없이는 결과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먼지를 뒤집어 써야했고, 누군가가 수리비용을 지불해야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하나만을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를 살려야 한다.

예수 앞에 가야 합니다.
18절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어디로 갑니까?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예수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께 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기적도 능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데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가듯이 나도 가야하고 우리 민족도 주님께 메고 가고 세계를 주님께 메고 나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도 주님께, 친구도 주님께로 우리의 이웃도 주님께로 우리의 집안 모두를 안고, 이고, 메고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 안에 들어갑시다. 그러면 마음에 중풍병, 가정에 중풍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풍병. 못쓰고 버림받은 인생도 살아나고 희망을 찾고, 쓸모 없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능력 있는 사람되어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었습니다. 나사로는 누이들이 예수님께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환자 본인의 믿음이 강조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입니다. 친구는 누구입니까? 이런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친구의 믿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상관이 없는데 이런 수고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사정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병은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근본은 죄입니다. 이것을 용서받는다면 죄의 결과로 인한 육체의 질병은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병 고침을 할 수 있느냐 할 때 저는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 참 믿음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말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예수님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 누구도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종교는 다 거짓된 것이며 그들의 교주 또한 거짓입니다.

옛날 한국에 김익두 목사님이 그랬다고 하잖아요. 교회 바로 앞집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베드로, 요한도 고쳤는데 나도 한번 고쳐 봐야지!” 그리고는 열심히 기도를 하고 하루는 새벽기도 마치고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나가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머리채를 잡아 당겼는데 그만 머리카락만 한 줌 빠지고 못 일어났데요. 병자가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창피해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죄가 사해지니까 중풍병자가 낳았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날 때 예수님 바로 앞에 앉은 사람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학자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열심은 또한 어느 정도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예수님과 마주 앉을 정도였으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부지런을 떨고 왔어야 합니다.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부지런했고 열심을 냈을까요? 그런데 이들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지요.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을까? 이런 비판적인 태도로 와 앉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과 다를 때 즉각적으로 비판을 하였습니다.
본문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습니다. 조금만 겸손했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절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옛 개정성경에서는 “참람하다”는 말로 번역했었습니다. 이 말은 “블라스페미아”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계 13:6).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야 임을 주장하실 때(막 14:64), 하나님과 동등하고 주장하실 때(요 10:30)에 신성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 역시 이 죄목으로 고소당하신 것입니다(막 14:64).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옛 성현은 마흔을 가리켜 ‘불혹(不惑)’이라 했습니다. 마흔이 되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과 일상을 단단히 간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마흔이 되어도 흔들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 유혹에 흔들리고 시대가 빨리지나가서 그런지 40대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다른 것에 유혹을 받지 않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마흔이 되면 그만큼 자기 철학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불혹이 세상에 유혹되지 말라는 것이지 예수께 문을 닫아놓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 마음을 여세요. 마음을 열고 아이들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이웃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세계를 보세요.

제가 여러 번 러시아에 갔었습니다. 2005년도 갈 때는 공항심사대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여권 가지고 가더니 인터폴에 검사해 본다고 하더니 나타나질 안는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안 해주고 1시간을 세워두는 것입니다. 함께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은 다 나갔고 또 다른 비행기가 왔습니다. 밖에 짐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너 어디한번 골탕을 먹어봐라 하는 심정입니다.
처음에 이 사람들이 공산국가 만들려고 불만 세력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하여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철학 때문에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이 나라들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소련이 100% 기독교국가였고,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동독 다 100% 기독교국가였어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동독이 본산지인데,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다. 왜 들어갔습니까? 세계적인 교회가 있고, 세계적인 오르간이 있고, 세계적인 예배가 있는데 왜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까? 교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불평불만만 하면 문을 열어놓는 거예요. 이 사람들 다 모아서 공산주의 만들었습니다. 교회생활이, 신앙이 무너지게 되고 감사가 떠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어둠의 세력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23절에서 서기관들에게 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어느 것이 쉬워요? 분명히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쉬울 것입니다. 왜냐 하면이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그 결과가 일어났는지, 안 났는지 표시가 안 나지만,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는데 안 일어나면, 김익두 목사님처럼 금방 들통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죄 사함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24절을 보면,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인자”라는 말이 14번 나오는데요. 막 8: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후부터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4번 중에 12번이 막 8:29절 이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는 누가복음의 핵심사상으로 34회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 자신을 사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원문상의 의미로는 人子(사람의 아들)아들을 의미하지만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 적으로는 ‘인자’이지만 의미상으로는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본 ‘인자’가 장차 올 메시야였던 것입니다(단 7:13). 인자로 오신 목적은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35세의 나이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대관식 때 교황 비오 7세에게서 왕관을 뺏어 스스로 쓰고 황후인 조세핀에게도 씌워 줄 정도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하면서 정신력으로 한때 전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력이며 물질의 기여도는 10대 1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유럽을 평정했으면 1808년에 나폴레옹에게 쫓겨 도망간 포르투갈의 돈 페드로 황태자가 브라질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888년에 독립 선언을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그곳 세력가들을 쫓아내고 1969년에 브라질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도망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브라질입니다. 나폴레옹의 불똥이 브라질까지 틴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에 유럽의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영국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지중해 건너편에 있어 나폴레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말을 잘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을 길들이기 위해서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 때문에 자신들이 죽게된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시베리아로 깊숙이 달아났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게 됩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가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수는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정교회(기독교) 국가입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를 쳐들어갔다가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망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본문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자를 데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생을 감수하며 어려움이 이겨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는 그 뿐입니다. 그냥 가난한 것입니다. 그냥 불쌍한 것입니다. 그냥 장애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장애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나오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체할 수 없는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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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18-20)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 매년 300명 이상을 전도했습니다. 하루에 한 명씩 거의 전도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석 달 동안의 유세기간에 무려 30만 명을 만났고, 30만 명과 악수를 한 카터입니다 하고 자기를 피알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양심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일년에 300명 정도 밖에는 전도를 안 했는데 내 이름을 피알 하는데는 내가 석 달 동안에 30만 명과 악수를 하고 다녔으니 내가 과연 대통령을 하나님보다 더 좋게 여기는가? 하나님보다 대통령이 더 좋은가?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깨끗한 양심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 임기동안에 단 한번도 주일을 범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간증하기를 나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지내는 시간보다는 선데이스쿨에 나가서 어린 영혼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리키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할 때 가장 행복하고 보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을 그만 두고 난 후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복음 선교를 위하여 살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사느냐? 에 달렸습니다. 값지고 멋지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길은 바로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본문에 한 중풍병자를 살리기 위하여 네 명의 친구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며 선교인 것입니다. 선교는 생명을 구원하는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선교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R. A. 토리 목사가 영국의 브라이튼이라는 곳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돕던 한 사람과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자기에게 음식을 주문 받고 봉사해 주는 웨이터에게 전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게 무얼….”하는 생각과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일을 미루어 두고 식사를 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그래도 한마디 말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려 웨이터를 기다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이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기에게 봉사해 준 웨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주인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한 후 이층으로 올라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살리기 위하여 네 명의 친구들이 의논을 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지금하자, 내일하자… 의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데 조금 기다렸다가 하지 등등… 그러나 지금이 기회입니다. 주님이 이곳에 계실 때가 기회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로 미루어도 안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 귀한 선교사역을 우리는 계속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선교는 서로 함께 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 2:3)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에 메고 왔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한 시인은 이런 시 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한 사람이 없을 뿐인데도 도시가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바람을 일으키며 도시를 헤집고 다녀도 그 한 사람만 떠나고 나면 도시는 텅 빈 도시일 뿐입니다.
아니 한 사람이 없으면 서울이 아니라 온 우주가 텅텅 비는 것이지요?
막 8:36-37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이 귀한 것처럼 남의 영혼도 그만큼 귀합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절망으로 떨어지는데 그 영혼을 구하는 일만큼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지옥 체험을 간증하는데 온 세상 죄인들이 지옥의 자력선에 의해서 끌려가는데 어느 누구도 그 힘에 항거할 수 없이 강하더랍니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지옥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주님이 지혜를 주시더랍니다. “보혈을 믿으라.”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믿습니다. 보혈을 믿습니다.” 했더니 그 강력한 지옥의 흡인력이 자기에게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더니 천국으로 자기를 옮겨놓더랍니다. 복음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죄 없게 만들어주며 죄에서 끌어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하는 사명입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선교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본문에 중풍병자를 메고 왔지만 사람들이 많아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지붕위로 올라가자!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에 달아 아래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주님도 이 사실을 보시고 감탄을 하셨습니다.

선교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지속적인 기도와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엄청난 헌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도 닥쳐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설이거나 주저한다면 선교는 결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과감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가 어디서 나옵니까? 포기하지 않을 때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본문 25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오사카’에서 ‘나카사키’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는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 훈련을 마치고 일본으로 부임해 가는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선교의 꿈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미래에 선교 현장에서 영혼을 구원하며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조금은 두려움과 그리고 부푼 마음으로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날 밤에 바람이 몹시 불었고 비가 쏟아졌는데 무엇인가 좋지 않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배가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잽싸게 구명대를 메고 갑판으로 올라갔는데 곧 이어 배는 침몰하였고 그는 폭풍 속에서 물 속에 잠겼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기 앞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구명조끼도 없는 웬 할머니였습니다. 구명조끼가 부족하여 3등 칸 손님들 모두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갈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른 체 할까? 아니면 살려야 할까? 나는 이제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가야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 여인은 거의 다 산 할머니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먼저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을 살리려 가는 사람으로 그 할머니를 보고도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구명대를 벗어 할머니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로 최초요 마지막인 설교를 그 할머니에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 나중에 구출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해 주세요! 내가 할머니 대신으로 죽고 내 생명을 할머니에게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었고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말을 마친 뒤에 청년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할머니에게 대신 생명을 주고 말입니다. 그런데 구출된 그 할머니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에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 대신 죽은 그 청년이 말하기를 그분이 내 죄를 위해서 그 청년처럼 죽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할머니는 늘 울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남은 생애에 그 선교사를 대신하여 일평생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 많은 사람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입니까?

본문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에게 믿음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까지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상적인 육체를 가지지 않은 중풍병자와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께 데려간 이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였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병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았다고 합니다. 예, 중요한 것은 중풍 병이 아닙니다. 죄 사함입니다. 그들은 중풍 병을 고치려고 갔지만 결과는 죄 사함이었습니다.

누가 선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언제 받으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사도행전 13: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변합니다. 7절에 사울이라고 했는데 9절부터 바울로 소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이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이라면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방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선교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타드 벤트리라는 전도자가 있습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하여 온갖 오해를 한 몸에 받고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에 단지 부랑자들에게 다가가 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문신을 한 부량자들에게 다가갔더니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모로카이 섬의 다미엔 신부도 나병 환자들에게 전도하려고 스스로 나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변신을 해야 합니다. 선교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합니다. 선교를 우리는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명령은이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전도와 선교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도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축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9. 진정한 축제) / 본문 : 누가복음 5:27-32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지난 6월 13일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와 토고경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포시 산본에 사는데 저녁에 사람들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입니다. 3단지 뒤에 운동장이 있는데 그곳에 대형스크린을 설치해서 함께 응원하는가 봅니다. 한번 가봤더니 사람들은 붉은 악마의 티를 입고 또 요즘은 머리에 불 들어오는 뿔 하나씩 달고 응원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도 문제가 되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공허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것이니 우리도 뒤질세라 함께 응원하며 애국심을 키워 나가는 것이라면 뭐라 할 것은 없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축제을 벌여야 하는 것은 축구경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 집에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병자를 고치신 후의 일입니다. 중풍병자가 얼마나 사람이 많았는지 지붕을 뚫고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내렸습니다. 본문 27절 “그 후에 나가사”는 바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그 집에서 나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집에서 나가시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에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말씀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 따라 다니는 사람,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리를 뚫고 들어오려는 사람들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흠과 티를 잡으려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고 예수님을 늘 감시하며 책잡으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를 뒤로하고 잡시 밖으로 나간 예수님께 보인 것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한마디가 레위의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의 이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 이 지역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도급제도가 시행 중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세금은 로마가 세입을 배당한 ‘헤롯 안디바’에게 바쳐졌습니다. 레위가 걷은 세금은 인두세(人頭稅)라기 보다는 통행세나 일종의 관세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헬라와 로마까지 넓게 퍼져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외국에 가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입국심사대와 세관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짐이 많으면 늘 세관 통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런 세관은 상인들에게는 늘 문제입니다. 이 당시에는 무슨 정확한 법적 근거에 의해서 세금을 받았기보다는 세관의 마음대로 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로마가 걷어 가는 세금이야말로 착취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반민족주의자요, 부정직한 집단으로 심한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탈무드(Talmud)는 세리를 강도들로 규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인 이 레위인을 부름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책잡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반대 세력의 눈치를 살피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이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레위
예수님의 부름에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감쌌습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기회는 일생 일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부자를 한번 더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마 19:22).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가 제일 부자였을 것 같습니까? 당시의 세리가 누렸을 사회적, 직업적 위치를 생각하면 레위만한 제자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레위의 조용한 이 선택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물론 자기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도 유사시에는 다시 아무 어려움 없이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은 방황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요 21:3)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행동을 함께 한 제자들은 6-7명인데 분명히 여기서 마태는 빠졌을 것입니다. 그는 고기 잡는 일을 해 본적이 없고, 고기 잡을 생각도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가 세리직을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번 세리직을 버린 사람은 다시 고용될 수 없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최후의 결단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을 하시면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6)고 하셨습니다. 레위는 이 진주를 산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축제)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같은 본문이 레위(마태) 자신이 쓴 마태복음 9: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나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당히 축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잔치가 “큰 잔치”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지만 레위는 냉혹한 체념의 심정이 아니라 깃발을 휘날리며 자신의 생의 전환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버린 세관직업, 그리고 그곳에서 얻게되는 수입 등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레위의 잔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신 예수님이 이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둘째,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을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선언을 한 것입니다. 결혼식 올리는 것이 불편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하고 사는 것하고 그냥 사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이것이 형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태는 이제 전혀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태 역시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를 다진 것입니다.
셋째,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이 자리에는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는 세리들도 물론 있었습니다만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마태가 초청한 자신의 동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의 집에 간 이 행동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사건인지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압니다. 어느 날 베드로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큰 보자기에 쌓인 것이 베드로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짐승, 기는 곤충,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잡아 먹으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먹을 수는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일이 있은 후 베드로는 이방 군인이었던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 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사도행전 10장).
베드로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을 보면 당시에 죄인의 집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마련한 이 초청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오늘도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속에 주님은 오십니다.

병든 자들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남이야 누구와 밥을 먹든 무슨 상관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주로 받아들인다면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비방해야 되는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사단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은 예수께 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레위 같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완전한 수용을 의미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것은 제자들이었으나 대답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대답하셨습니다. 3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오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신 것처럼 이 땅의 의인이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든 사람들입니다. 죄지은 육체가 병들어 죽게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병들었습니다. 이것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단지 두 가지 죄인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또 하나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소설 “주홍 글씨”가 생각납니다. 여기 나오는 여인은 죄인의 표시로 가슴과 등에다가 빨간 글씨[A]자를 붙이고 다닙니다. [나는 죄인이오]라는 표시입니다. 이 여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죄를 짓게 한 남자는 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 남자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앞쪽에서 나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해주고 싶은데 왠지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본문 : 누가복음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우리부부는 대화의 소재가 많지 않습니다. 부부의 문제를 없애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이 대화를 해 보았어야지요. 대화하라니까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인줄 안답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저희는 요즘 서은이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고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여러분이 은혜를 받았는지를 물어봅니다. 저희 집사람도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한 음식 맛있게 먹었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밥상 차린 사람의 심정이나 제 심정이 같을 것입니다. 열심히 먹어주는 식구가 있기에 열심히 만드는 것입니다.

요리를 맛있게 한다고 소문난 오리 농장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요리사는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요리해서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 음식점에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오리요리가 맛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리를 기를 때 특별히 신경 써서 사육해서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방장은 주인의 말에 서운해 했습니다. “오리도 좋지만 주방장이 신경써서 요리를 했기 때문에 맛있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좋은데 안 하는 겁니다. 하루는 주방장이 오리 다리를 하나만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두고보자.“ 손님들 앞에서 한참 오리고기 자랑을 늘어놓던 주인은 오리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자 당황해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왜 오리다리가 하나냐고 했더니 주방장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원래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하고 오리농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오리들이 한발을 들고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방장은 오리를 가리키면서 ”보세요.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 주인은 화가 나서 손뼉을 쳐서 오리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저걸 똑똑히 보아라“ 그러자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님이 손뼉을 치니까 오리들이 숨겨두었던 다리 하나를 내놓잖아요! 저에게도 요리를 잘한다고 손뼉을 쳐주신다면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나가서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마가가 가버나움 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몇 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4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붕이 분명히 ‘기와를 벗기고’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집들은 옥상이 평평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기와를 덮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팔레스타인의 집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당시 지붕을 쉽게 뜯어낼 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 것 또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누가 같지가 않습니다. 누가는 의사이면서 역사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검증된 사건이 아니면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루는 사건은 아주 정밀하게 기록합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자세히 기록한 사람입니다(눅 1:3). 그런데 본문은 마가보다도 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복음서 본문을 다룰 때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다른 복음서로 정하지 않고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보는 관점입니다.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핵심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협력자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협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이 나온 다른 사건들은 자신이 걸어나왔습니다. 아무리 중한 병자라도 심지어는 소경이나 문둥병자 조차도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병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인 이 환자는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 병자를 들고 예수님께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이로 보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랍비도, 제사장도, 바리세파 사람도, 서기관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평소에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런 친구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이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고 말했습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바로 이런 친구들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
친구들이 저를(중풍병환자) 침상에 누인 체 데리고 왔을 때는 갈릴리 여러 마을과 더 아랫마을 유대와 예루살렘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지난번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은 신분도 높은 분들입니다. 감히 저희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평생에 한두 번 함께 지내면 영광이랄까 그런 신분 높은 양반들이 온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입니다. 이분들은 저희 같은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로 율법준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양반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 주위에 가득 했습니다.

예수님 주의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 제가 정상인 몸이라도 혼자의 몸으로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친구라면 그냥 돌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정말 저에게는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남의 집을 뚫는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기물 파손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파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을 제 친구들은 저를 위해서 그런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저를 예수님께 내려놓은 것입니다. 제가 지붕에서 내려질 때 온통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로 쏠렸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도 꾸중을 듣지 않고 병고침은 물론이요 칭찬 받은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리한 방법을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행동 외에 아무 말도 예수님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이며 이 친구를 함께 달아 내린 친구들입니다. 이들이 “저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에 감격해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땅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자신만을 아는, 입으로만 토론하는 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저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 첫 번째 말씀은 병이 아니라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마지막 만찬을 할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죄 사함”입니다(마 1:21). 이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들은 사람은 본문의 중풍병자와 누가복음 7:48의 시몬의 집에 들어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여자입니다. 두 사람만이 예수님께 직접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늘 처음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발하는 종교지도자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고침을 받고자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큰 축복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러한 의논이 일어난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사용한 “참람”(blasfhmiva”: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모독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13: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실 때는 세 가지 경우였습니다. ① 죄를 사하실 때(막 2:7) ② 메시야 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③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심리를 알고 즉시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질문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가언적 양도논법’으로 반대자들을 꼼짝없이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확실한 반박을 못하시면 매우 곤란해지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적당한 불쾌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성모독’ 죄는 당장 끌어내어 돌로 쳐죽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일을 행할만한 고위층 지도자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표면상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병이 나아야 되고 즉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당장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생각할 때는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눈에 보이는 병도 고쳤습니다.
인자선언
이 때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24절 “인자가 땅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사용하신 자기표현입니다. ‘인자’(ajnqrwvpou:안드로포스)는 복음서에 90여 회 나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만 26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데반이 한번 사용한 것 위에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제일 처음으로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도데모의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때 ‘인자’가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7:13). 사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 중에 자칭 예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가짜이지요. 이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우깁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고 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침상을 들쳐 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영생의 약속과 육체의 질병도 깨끗하게 해결 받았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 해 줍니다.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역사 앞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표현한 말은 “기이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예상을 넘는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입니다.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 늘 교회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평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는 부흥회 하는 교회입니다. 그 때 부흥 강사목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교회 2층은 관중석이고 1층은 은 자리요 교회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앞자리부터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거나 정체된 교회들은 앞자리가 잘 채워지지 않습니다. 음악회나 운동장에 가도 앞자리가 더 좋은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주부터는 조금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사건의 관중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나갔던 친구들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은 중풍병자만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의 역사는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은 걸릴 수도 나을 수도 있지만 구원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해 주셔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받아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친구처럼 내가 친구를 고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데리고 주님께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아파서 병만 고치러 나갔지만 주님은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