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본문 : 누가복음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우리부부는 대화의 소재가 많지 않습니다. 부부의 문제를 없애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이 대화를 해 보았어야지요. 대화하라니까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인줄 안답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저희는 요즘 서은이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고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여러분이 은혜를 받았는지를 물어봅니다. 저희 집사람도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한 음식 맛있게 먹었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밥상 차린 사람의 심정이나 제 심정이 같을 것입니다. 열심히 먹어주는 식구가 있기에 열심히 만드는 것입니다.

요리를 맛있게 한다고 소문난 오리 농장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요리사는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요리해서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 음식점에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오리요리가 맛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리를 기를 때 특별히 신경 써서 사육해서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방장은 주인의 말에 서운해 했습니다. “오리도 좋지만 주방장이 신경써서 요리를 했기 때문에 맛있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좋은데 안 하는 겁니다. 하루는 주방장이 오리 다리를 하나만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두고보자.“ 손님들 앞에서 한참 오리고기 자랑을 늘어놓던 주인은 오리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자 당황해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왜 오리다리가 하나냐고 했더니 주방장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원래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하고 오리농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오리들이 한발을 들고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방장은 오리를 가리키면서 ”보세요.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 주인은 화가 나서 손뼉을 쳐서 오리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저걸 똑똑히 보아라“ 그러자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님이 손뼉을 치니까 오리들이 숨겨두었던 다리 하나를 내놓잖아요! 저에게도 요리를 잘한다고 손뼉을 쳐주신다면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나가서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마가가 가버나움 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몇 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4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붕이 분명히 ‘기와를 벗기고’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집들은 옥상이 평평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기와를 덮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팔레스타인의 집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당시 지붕을 쉽게 뜯어낼 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 것 또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누가 같지가 않습니다. 누가는 의사이면서 역사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검증된 사건이 아니면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루는 사건은 아주 정밀하게 기록합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자세히 기록한 사람입니다(눅 1:3). 그런데 본문은 마가보다도 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복음서 본문을 다룰 때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다른 복음서로 정하지 않고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보는 관점입니다.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핵심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협력자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협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이 나온 다른 사건들은 자신이 걸어나왔습니다. 아무리 중한 병자라도 심지어는 소경이나 문둥병자 조차도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병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인 이 환자는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 병자를 들고 예수님께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이로 보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랍비도, 제사장도, 바리세파 사람도, 서기관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평소에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런 친구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이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고 말했습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바로 이런 친구들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
친구들이 저를(중풍병환자) 침상에 누인 체 데리고 왔을 때는 갈릴리 여러 마을과 더 아랫마을 유대와 예루살렘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지난번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은 신분도 높은 분들입니다. 감히 저희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평생에 한두 번 함께 지내면 영광이랄까 그런 신분 높은 양반들이 온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입니다. 이분들은 저희 같은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로 율법준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양반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 주위에 가득 했습니다.

예수님 주의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 제가 정상인 몸이라도 혼자의 몸으로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친구라면 그냥 돌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정말 저에게는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남의 집을 뚫는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기물 파손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파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을 제 친구들은 저를 위해서 그런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저를 예수님께 내려놓은 것입니다. 제가 지붕에서 내려질 때 온통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로 쏠렸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도 꾸중을 듣지 않고 병고침은 물론이요 칭찬 받은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리한 방법을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행동 외에 아무 말도 예수님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이며 이 친구를 함께 달아 내린 친구들입니다. 이들이 “저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에 감격해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땅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자신만을 아는, 입으로만 토론하는 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저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 첫 번째 말씀은 병이 아니라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마지막 만찬을 할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죄 사함”입니다(마 1:21). 이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들은 사람은 본문의 중풍병자와 누가복음 7:48의 시몬의 집에 들어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여자입니다. 두 사람만이 예수님께 직접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늘 처음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발하는 종교지도자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고침을 받고자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큰 축복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러한 의논이 일어난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사용한 “참람”(blasfhmiva”: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모독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13: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실 때는 세 가지 경우였습니다. ① 죄를 사하실 때(막 2:7) ② 메시야 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③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심리를 알고 즉시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질문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가언적 양도논법’으로 반대자들을 꼼짝없이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확실한 반박을 못하시면 매우 곤란해지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적당한 불쾌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성모독’ 죄는 당장 끌어내어 돌로 쳐죽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일을 행할만한 고위층 지도자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표면상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병이 나아야 되고 즉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당장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생각할 때는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눈에 보이는 병도 고쳤습니다.
인자선언
이 때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24절 “인자가 땅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사용하신 자기표현입니다. ‘인자’(ajnqrwvpou:안드로포스)는 복음서에 90여 회 나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만 26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데반이 한번 사용한 것 위에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제일 처음으로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도데모의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때 ‘인자’가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7:13). 사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 중에 자칭 예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가짜이지요. 이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우깁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고 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침상을 들쳐 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영생의 약속과 육체의 질병도 깨끗하게 해결 받았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 해 줍니다.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역사 앞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표현한 말은 “기이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예상을 넘는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입니다.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 늘 교회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평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는 부흥회 하는 교회입니다. 그 때 부흥 강사목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교회 2층은 관중석이고 1층은 은 자리요 교회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앞자리부터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거나 정체된 교회들은 앞자리가 잘 채워지지 않습니다. 음악회나 운동장에 가도 앞자리가 더 좋은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주부터는 조금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사건의 관중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나갔던 친구들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은 중풍병자만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의 역사는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은 걸릴 수도 나을 수도 있지만 구원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해 주셔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받아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친구처럼 내가 친구를 고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데리고 주님께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아파서 병만 고치러 나갔지만 주님은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