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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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사 44:1-4)

세상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헬라(그리스)의 철학이 세계제일이지만 그 철학의 기반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의 출발점이 다릅니다. 누가는 현재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핼라의 철학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 헬라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다릅니다.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향식 족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는 참 재미있습니다. 앞으로 하나 뒤로하나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무신론자인데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알 때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국가관만 잘 확립하면 애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관 없이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 애국가가 나옵니다. 월드컵은 시작할 때 나오고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면 나옵니다. 그 중에 제일 가슴을 뛰게 만드는 때는 월드컵 때 나오는 애국가인 것 같습니다. ‘두근두근 대한민국’입니다. 우리가 애국가를 들을 때 가슴이 뛰는 것은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고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적인 운명을 띠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른다면 국가관이 생기기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존재가 확인 될 때 어떻게 살아야 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말합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면 세상철학, 그리스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세요. 2절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나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만드신 분, 지어낸 분(디자인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아버님은 강원도로 다니시며 보따리 옷 장사를 하시면서 저를 키우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글을 모르신 채 평생을 사셨습니다. 제가 육신의 부모님 밑에서만 자랐다면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원대한 비전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습니다. 나를 디자인 하셨습니다. 예수를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육신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물질적 육체는 언제든지 회복이 가능합니다. 창조하시고 지으신 분은 다시 지어주십니다. 사람에게는 옷과 같을 뿐입니다. 우리가 옷을 만들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의 육체를 옷과 같이 만드십니다. 그러나 살았으나 예수가 계시지 아니하시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들의 꽃과 같이 시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육체 의지하고 우리가 얼마나 더 잘살겠습니까 그 육체를 위하여 뭐 그렇게 대단히 이루겠습니까 이룬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울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는 이를 가리켜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주전 622년 요시왕 때에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여호와의 율법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성전에 있었는데도 그 책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유다 왕국에서만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1517년 성경이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있었는데도 그 내용은 진정으로 알고 따르는 사람이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전건축이 뭡니까 왜 성전을 건축 못해 그 안달을 떱니까 어떻게 돈주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교회가 속입니까 마틴 루터는 개인의 힘으로 그 로마 교황권을 부정했습니다. 교황이 성경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도 사람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입니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내가 다 지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서 강남 갔다는 식의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빨리 시작하는 겁니다. 아무리 마라톤을 잘해도 2-3시간 전에 출발한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경기는 똑같은 시간에 출발하지만 인생은 다릅니다. 먼저 출발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 할 때 보면 뒤에 오는 선수가 보이는데도 여간 해서는 뒤바뀌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늦게 된 자도 먼저 될 수 있지만, 먼저 된 자가 더 유리한 겁니다. 그 유리한 것을 가다가 낮 잠자서 헛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아마 택민이는 영어도 잘할 것입니다. 엄마가 영어를 잘하니까 잘하게 될 겁니다. 저는 글도 늦게 깨달았습니다. 어머님이 글을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어머니는 다른 것으로 저를 잘해주셨습니다. 옷 깨끗이 빨아 입히고, 먹을 것 맛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으로선 최선을 다하셨지만 저에게는 빨리 터득했더라면 더 기초가 잘 준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새벽입니다. 이제 우리의 자세가 요구되고, 촉구되고 있습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분명히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살 것이냐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이냐를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홍해를 앞두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옵니다. 바로의 군대에 맞아 죽으나 홍해에 수장되어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그 홍해에 몸이 다 잠기도록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제가 설문조사하면서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 라고 하고 “스스로”라는 항목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역시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우리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했습니다. 예정하고 선택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너를 도와 줄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니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책임지지 못할 하나님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축복은 3-4절에 잘 나타납니다.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찬양]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 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픈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 갈 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 힘으로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가요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사 56:2)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으면 복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죽음과 자기 숙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는 당하지 않을까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갑자기 죽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까봐, 직장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무서운 것입니다. 실패를 했을 때 실패도 문제이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심리적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특별한 현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밀폐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갇히고 밀폐되면 겁이 나는 것입니다. 식은땀이 나고 혈압이 올라갑니다. 밀폐된 공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광장공포’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갇히면 편안한데 넓어지면 두려운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왕들의 침실은 엄청나게 넓습니다. 그런데 침대 위에는 지붕처럼 무엇을 씌워놓아서 잠을 자는 공간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심리입니까 너무 넓으면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까요 잠자는 곳은 좁게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광장 공포입니다. ‘고공공포’도 있습니다. 높은 데만 올라가면 겁이 납니다. 이런 사람 아파트 높은 층에 살지를 못합니다. ‘세균공포’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데나 앉지 못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앉을 때에도 오무려서 앉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균이 득실득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어댑니다. 온갖 것에 세균이 우글거린다고 세균 없이 깨끗하게 하느라고 그토록 애를 씁니다. 이것 역시 공포증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지켜져도 이상하게 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면역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나치게 보호되면 면역성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오히려 병이 많습니다. 적당히 때도 있어야합니다. 너무 빡빡 밀어서 살 갓이 다 벗어져서 피부과 찾는 사람이 많은데 피부과 의사 분들이 이태리 타월로 때 밀지 말라고 말씀을 안 하신 답니다. 죽는 것은 아니니까 자꾸 빡빡 밀어서 피부에 이상이 생겨야 피부과를 찾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움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쌓이면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살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건강마저 해치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쥐 1백 마리를 철책 속에 가두어 놓은 후 그 주위에 무서운 고양이 한 마리를 묶어 놓고 쥐들을 위협하게 만들었습니다. 1백일 후에 쥐를 꺼내어 해부해 본 결과 대부분의 쥐가 심장병, 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쥐들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장육부가 오그라들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자유 함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공포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야곱에게도 이런 약점이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매일 치어서 살다보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허약했던 것 같습니다. 막내에 여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야곱을 늘 걱정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약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를 헤치려는 고양이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을 물리치십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차지하고 싶어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방법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그의 속임의 대가로 엄청난 고난의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에서는 세상 적으로 난 사람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습니다. 자기가 힘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외면하는 사람은 그의 인생을 내버려두십니다. 잘 나가는 것 같아도 그는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나의 가진 재능이, 축복이 하나님을 대항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겨 주님이 쓰시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와 달리 연약한 자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냥을 잘해야 합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와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승리자)’란 영광스러운 이름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한가지 이름이 더 나옵니다. ‘여수룬’이란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하나님이 두 번이나 지어준 사람은 야곱뿐이 없습니다. ‘여수룬’이란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시적인 표현으로서 ‘정직한 자, 의로운 자, 사랑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 전체를 의롭게 받으셨다는 의미로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이름입니까 우리도 ‘여수룬’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축제의 함성-자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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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1-5)

지난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1950.6.25)한지 60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의 연장선에서 일어났습니다. 전쟁 발발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사전 모의로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당시 소련의 전략적인 계획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소련은 미국의 막강한 힘을 다른 곳에 쏟아 붇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국력이 약화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내심 중국의 부강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소련 입장에서는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싸우면 자신들은 앉아서 손도 안대고 코푸는 격입니다. 그래서 한국전쟁에 미국과 중국이 싸우게 만들어서 소련은 강대국의 미국과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화약고를 다른 대로 돌려 자신들의 나라를 방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김일성이 말려들었고 소련의 좋은 먹이 감이 된 것입니다. 김일성의 야욕이 부른 동족상잔입니다. 소련 스탈린에게 남침을 도와 달라고 무려 48번이나 요청했습니다. 북한은 20만 명의 병사, 대한민국은 절반인 10만 명, 탱크 242대 우리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전투기는 북한이 211대인데 우리는 연습용 비행기 22대가 다였습니다. 상대가 안 되는 전쟁입니다.
여러분! 힘이 있다고 무력을 사용합니까? 그것도 같은 동족에게 총을 겨눕니까? 만일 소련에서 먼저 부추겨도 절대 안 된다고 방어를 해야 합니다. 언제나 악은 늘 두 가지 조건이 성립이 되어야 가능한 것을 봅니다. 악한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무리들에게 늘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야욕 때문입니다. 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남을 비웃고 넘어뜨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진 사람입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뭐든지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을 가르치는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무소유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가 남을 죽이는데 사용된다면 무소유가 났습니다. 기독교는 소유하되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소유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그 소유를 나눌 때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과 성도라는 이름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르게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구별된 존재임을 많이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늘에 기록된 자가 구별된 자입니다.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샀다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으로 팔렸습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제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의 함성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우리 아파트 위에서는 발을 구르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 소리를 우리가 언제 들어보겠습니까? 민족이 하나되어 외치는 소리, 정말 감격적입니다. 빼앗아 갈 때는 눈물과 고통과 비참함이 있지만 나눌 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땅에 다시는 고통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기쁨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월드컵 공인구가 ‘자블라니’라는 공입니다. 공 이름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잡을 라나?, 잡을 래면 잡아봐’ 뭐 그런 뜻처럼 들립니다. 자블라니는 아디다스가 제작한 공으로 남아공 공식언어인 줄루어로 ‘축제를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나라 사람들은 그 공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네 슈퍼마켓에서 파는 공 같다고 했습니다. 우습게만 여긴 것입니다. 그런 나라들은 16강에도 못 오르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공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갑자기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세트피스 중심으로 연습을 한 것입니다. 힘을 너무 넣어서 차면 자꾸 뜨니까 힘을 빼고 차는 연습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골이 약속된 세트피스에서 절반이 나왔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성도라는 말과 또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팔 소리, 큰 음성(우렛소리)입니다(계 4:1, 5, 5:2, 11, 12, 6:1, 7:10, 5 11:12, 15 등) 계 10:3에는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했습니다. 천둥치는 소리 들어 보셨지요? 어떤 때는 연속해서 계속 울리는 때가 잇습니다. 그래도 동시에 울리는 것은 아니고 하나씩 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을 보세요.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합니다. 일곱이 동시에 울리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일곱이라는 숫자는 7도 되지만 완벽한 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에 의해 나는 소리입니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십사만사천명이 부르는 새 노래입니다. 아마 최고의 교향곡 베토벤의 운명, 헨델의 메시야가 이 소리를 연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흉내는 내보고 상상은 해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 이 소리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막 불어대는 ‘부부젤라’ 소리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인류 역사상 제일 아름다운 노래, 제일 웅장한 스케일의 노래입니다.
여러분! 이 악단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 노래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대학을 나와도 안됩니다. 레슨을 많이 받아도 안됩니다. 이 노래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본문 3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배우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자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악단의 수는 십사만사천 명입니다. 그러나 이 수는 보이는 수가 아닙니다. 영적인 수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수입니다.
‘뉴욕 필하모니, KBS교향악단’ 이 사람들이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악단의 지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여기 들어가는 겁니다. 대단합니다. 이 악단은 인류 최고의 악단입니다. 다른 데서는 다 떨어져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악단에 반드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이 악단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본문 4절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남자들이 독신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 여자의 기준은 없지 않습니까? 영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절개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남녀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간음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까? 아마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이보다 더 배신을 하는 행위는 없을 겁니다. 바로 우상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렘 2:20, 호 2:5).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입니다. 잠언서는 5, 6, 7장에 걸쳐 음녀에게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음녀는 우리는 망하게 합니다. 잠 5:5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라고 했습니다. 죽음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지금도 가정이 왜 망합니까?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가정이 파탄나는 것은 음란의 문제입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전 11:2)고 했습니다. 정결해야 신부로 소개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입니다.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위하여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린양이 그리로 인도해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월드컵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모두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조건적인 국가관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혈통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어린양에게 속해야 합니다. 어느 정당보다,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인으로는 일본 사람을 용서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속해 있으면 용서해야 됩니다.

넷째, 5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거짓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의 영입니다. 거짓은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흠이 없는(a[mwmoi:아모모이)”는 ‘흠, 얼룩, 명예롭지 못한 사람, 치욕, 불명예, 결점, 오점’을 뜻하는 모모스(mw’mo”)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생활의 정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단어의 이미는 구약성경에서 왔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갈 때에는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시간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배인 것입니다. 삶으로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4)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는 진정한 축복은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는 흠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2절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엄청난 소리입니다. 대단한 소리입니다. 단순히 큰 소리가 아닙니다. 리듬이 있습니다. 부부젤라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는 파도치는 소리나 폭포수의 소리처럼도 들립니다.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관현악기의 소리처럼도 들립니다. 크라이막스 어느 정점에 도달 했을 때는 큰 뇌성처럼 들립니다. 어쨌든 상상할 뿐이지만 이 노랫소리는 대단합니다. 성도의 마지막 승리의 함성입니다. ‘자블라니’ 축제의 함성입니다. ‘자블라니’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십사만사천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승리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한 정도가 아닙니다. 마지막 승리의 함성 ‘자블라니’ 입니다. 이 노랫소리를 부르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이스라엘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B.C. 93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라가 나뉘어졌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나중에 교만과 후궁들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음란하여 타락한 것뿐만 아니라 이 후궁들이 이방 여자들인데 자기나라에서 섬기던 우상들을 가지고 들어와 그 우상들을 이스라엘에서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타락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친 경제 논리에 빠져서 음란과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면 안됩니다. 경제 성장도 좋고 나라 발전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북왕국 왕들은 20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도 선한 왕이 없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에도 19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 중에 선한 왕을 많이 뽑아도 9명 정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왕은 5명 정도입니다. 그 중의 한 명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유다 16대 왕입니다.
B.C. 640년(8세 왕이 됨 1절)-608년 동안 31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서 왕이 되어 젊었을 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남북왕조로 이스라엘이 분단된 지 289년 지난 때의 일입니다. 요시야 왕은 왕위에 올라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보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 짓는데 7년이 걸렸는데, 자기 집 짓는데 무려 14년이 걸렸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보다 배가 더 걸렸습니다. 자기 집을 더 화려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거처를 가지고 뭐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자세입니다.
요시야 왕은 부서진 하나님의 집을 볼 때 그 어린 마음에 마음이 아팠나 봅니다. 왕이 된 때가 8살입니다. 조금 컸어도 열뎃살, 스무살 정도입니다. 그 어린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 고치는 것을 먼저 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셔서 요시야 왕 같은 칭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존 록펠러(1839-1937)라는 미국의 부호가 있습니다. 록펠러를 가리켜 십일조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록펠러는 19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강철 왕 카네기, 자동차 왕 포드와 함께 석유사업의 왕으로서 미국자본주의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 농산물 도매업을 시작하여 1870년 엔 오하이오에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세웠고, 1882년엔 스탠다드 석유 트라스트를 만들어 전 산업을 석권하는 기업합동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지독한 악덕 자본가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하여 1892년에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중의 하나인 시카고대학을 세웠고, 1913년엔 저 유명한 록펠러 재단을 세워 병원, 교회, 학교 등 많은 문화사업과 자선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올해가 에딘버러 선교대회가 열린지 100년째 되는 해인데요, 이 대회를 가능하게 했던 사람이 존 롤리 모트(John Raleigh Mott)입니다. 뉴욕 주 출생으로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1881년부터 1915년까지 국제 YMCA의 학생부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존 모트는 1926년 YMCA의 세계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위하여 성사시키기 위해 280만 km를 여행하였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지구를 68바퀴나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원조 사업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갔습니다. 존 모트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것은 존 모트가 어떻게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누가 그 여비를 다 대 주었는지 그것이 궁금했었습니다. 그리고 YMCA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모두 알고 보니까 그 돈이 다 록펠러 재단에서 나왔습니다. 록펠러는 세계 선교를 위해서 아끼지 않고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록펠러에게도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농산물 도매업을 하다 큰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으며,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는데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고, 그것이 바로 석유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도 전해내려 옵니다.
록펠러가 한번은 허름한 이발관에 가서 이발을 했답니다.
이발사는 당연히 대부호가 이발을 하러왔으니 엄청난 팁을 바라고 정성스럽게 이발을 하였답니다. 그러나 록펠러는 단돈 1달러를 팁으로 주었답니다.
이발사가 말했죠. “회장님, 회장님의 아드님께서도 이것보다는 더 주실거 같은데요…”
그러자 록펠러가 “그는 부자인 아버지가 있지만 난 부자인 아버지가 없소”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록펠러가 아닌 다른 부호에게도 있을법한 이야기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부탁한 신앙생활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한 말이 집이 너무 가난하니까, 너에게 아무것도 물려줄 것이 없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라 하면서 유언했습니다. “교회 잘 나가라. 예배 시간에 늘 앞자리에 앉아라. 십일조를 반드시 해라.” 록펠러는 가난했지만 이 유언을 8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합니다. 요시야 왕도 8살 때 신앙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보수했습니다. 록펠러도 8살 때부터 스스로 지켰습니다. 부모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님의 유언대로 그것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사업이 잘되고 어른이 되면 그 말씀을 버릴 수 있는데 록펠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업이 커졌을 때는 십일조만 계산하는 직원이 250명이었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부탁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도 잘 지켜보세요. 축복이 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잘 살았습니까? 언제 평안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 때였습니다. 다윗 시대였습니다. 솔로몬 초기 시대였습니다. 그 때 구약 성경의 중요한 케투빔이라고 말하는 시편, 잠언, 전도서가 다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스라엘에게 주의 모든 나라가 배우러 왔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정신 못 차리니까 나라가 금방 기울어집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순간입니다. 망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해야 삽니다.

요시야 왕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수리 하다가 된 것입니다. 유다의 왕들이 약 300년 동안 못 찾았습니다. 물론 성전 어디에 감추어져 있으니까 못 찾았겠지요. 그만큼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관심이 없으니 성경이 보이기나 하겠습니까? 본들 무엇하겠습니까? 사실 무엇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을 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는 아무리 보석을 주어도 모릅니다. 성경책이 집집마다 널렸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정에도 한 두 권은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릅니다. 가치를 모릅니다. 그 속에 진짜 보물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끼고 교회만 나온다고 성경의 가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정말 잘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면 다 됩니다. 교회 나와서 복 못 받을 사람 없고, 나온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앞자리에 앉는 열심히 필요합니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앞자리에 앉아보세요. 분명히 여러분의 신앙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십일조를 해 보세요. 물질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지혜)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 그것(지혜)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 4:20-22)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얻는”의 원문은 동사형으로 ‘마차’라는 단어입니다. ‘마차’는 ‘발견하다, 획득하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인 표현으로는 “애써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예수님은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라고 하셨습니다. 찾는 것은 다름 아닌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내 아내가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귀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어디 먼데서 찾는 것 아닙니다. 도 닦아서 찾는 것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내 주위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한 왕 밑에는 진실한 신하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요시야 왕의 정직한 모습에 성전을 감독하는 사람들이나 수리하는 사람들도 정직히 행하였습니다(7절). 예수께서 우리의 대장 되시고, 우리의 주가 되시니 우리 또한 정직해야 됩니다. 비겁한 자들이 되면 안됩니다. 핑계나 일삼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되는 것처럼 선은 어떤 모양이라도 따라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잘 되는 사람을 따라하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1.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하시고 물결 위 걸라 하시네
할 수 있다하신 주 할 수 있 다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2.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나를 바라보시고 능력 준다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하신 주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의복치료”(suit thraphy)라는 것이 있습니다. 옷을 입기에 따라서 사람이 변한다는 겁니다. 학교 다닐 때 보이스카웃학생들 옷은 달랐습니다. 그 때 그 옷은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태권도 할 때 복장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그 옷을 입고 집에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나 태권도 하니까 잘 보라는 것입니다. 나한테 덤비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아이들이 못살게 굴지 않습니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일수록 대충 입고 다닌답니다.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포자기하여 그런 겁니다. 얼룩이 묻어도 닦지 않습니다. 신경 안 씁니다. 그러나 옷을 정장을 입어보세요. 품위를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가끔 목사도 복장을 통일하여 평상복도 입자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 옷 입고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게 입어야 합니다. 바른 옷이 바른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의복치료”입니다.
미리부터 정해놓지 마세요?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다. 나는 잠이 많은 사람이라 새벽기도가 어렵다. 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많다고 생각하는 것예요. 새벽잠이요. 다 많습니다. 그러나 습관을 고치면 됩니다. 예수 믿고 안 고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 요시아 왕의 태도가 참 모법 적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 지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말씀이 발견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책이야 어느 집에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제사장 힐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자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왕에게 읽어주었습니다. 라인이 중요합니다. 천안함 사건도 보고라인의 문제 아닙니까? 왕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기 때문에 제사장 힐기야가 사반에게 주고 사반은 왕에게 읽어주는 것 아닙니까? 만일 왕이 평소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싫어했다면 갖다주고 읽어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요시야 왕은 이 말씀을 듣는 동안 옷을 찢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옥만 찢은 것아 아니라 쓸어 내리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이대로 하면 되는구나?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벧전 1:23). 죄를 깨닫게 하고(대하 23:14-33) 거듭나게 합니다(약 1:18). 뿐만이 아닙니다. 그동안의 무지를 깨닫게 합니다. “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0) 하나님의 말씀만이 내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의 우둔한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다윗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기 위해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고 했습니다. ‘헐떡이다’의 어근은 ‘r[‘P;:파아르’로 하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a’v;:솨아’ 탐하다, 서두르다입니다. 그러니까 헐떡이다는 참 잘 번역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함 입니다. 요시야 왕이 바로 이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누가 좋아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정직한 사람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의 영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 할 수도 없고, 순종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한결같은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5-36)

여러분이 사위 감을 구한다면 어떤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장인 어린이 좋아하는 사위 감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딸을 평생 책임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고 해도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평생 책일 질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햇빛이 비치나 언제나 똑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 그곳에 찾아 같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왜 그렇게 좋아하셨습니까?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치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그 점을 부각시킵니다. 지금이야 잘 먹고 잘 사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지 그에게 환난이 일어난다면 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욥 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욥의 믿음을 바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환경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교회도 몇 분의 성도가 안되지만 저는 참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좀 많이 내고 좀 적게 내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남을 후히 대접할 정도로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먼저 갈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만일 제가 먼저 하나님께 먼저 간다면 여러분 부탁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이 교회를 지키십시오. 지금처럼 한결같은 믿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왔다 같다 하는 것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정합시다. 살아도 이 교회에서, 죽어도 이 교회에서 죽겠노라고.
그리고 또 정하세요. 우리 집은 하나님을 믿는 집니다. 사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집이다. 예수님이 지켜주시는 집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이름을 다시 지어주셨습니다. 수리아어로 게바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큰 바위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쉽게 요동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 없는 반석이 되라는 것입니다. 처음 제자를 부르시고 지어준 이름이기 때문에 사실 이 이름은 모든 제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을 좋아하시고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부모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을 찾으시고, 그분 또한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신 아버지입니다.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내 어찌 그 사랑 잊으리
내 어찌 주의 긍휼 잊으리 내 영혼의 모든 소원 만족시킨 하나님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나 길을 잃고 헤맬때
그 사랑 날 찾아 내셨네 내 영혼의 모든 소원 만족시킨 하나님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은 크고 놀랍습니다.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한결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빈손으로 왔어도, 내가 병든 몸으로 왔어도, 내가 실패하고 왔어도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는 내 편입니다.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잠 4:8-9) 이 구절을 승미 자매가 종이 박스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한결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살면 그가 높아질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첫째, 본문 35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라고 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사람입니다. ‘띠다’의 헬라어 원문은 perizwvnnumi(페리존뉘미)는 끊을 조여 매는 것을 말합니다. 허리에 매야 합니다.
허리가 어디입니까? 몸의 중심입니다. 가운데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라”(잠 3:26) “의지”는 ‘케셀’이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허리’를 뜻합니다(레 3:4, 10:15, 욥 15:20). 우리가 씨름할 때 “허리를 붙들고 늘어지다”는 말을 합니다. 허리를 붙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캄보디아에 조성규 목사님의 큰아들 수아하고 간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찌하다보니 다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있는데 제 다리를 두 손으로 꼭 껴안는 것입니다. 이제 이사람 까지 잊어버리면 나는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나 봅니다.
현대 축구에 있어서도 허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미드필드가 살아나야 공수전환이 잘 됩니다. 상대방의 공격은 허리격인 미드필드부터 막아야 합니다. 골대 앞에서만 수비하려고 하면 아무리 잘해도 골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허리에 띠를 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허리에 띠를 두르셨습니다(요 13:4). 우리는 놀고 먹으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열심히 일하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0-11)고 했습니다. 허리는 이스라엘의 힘입니다. 허리가 생명입니다.
유다 족속에게 축복할 때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신 33:1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다가는 허리가 꺽입니다. 여러분!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하지 마세요. 100전 100패입니다. 어찌 사탄을 믿고, 의지하고 살려고 합니까? 사탄은 거짓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라고 합니다. 아담이 여기에 속았습니다. 죄가 이로 인하여 들어왔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 18:46)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비가 오게 한 후에 허리를 동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것입니다. 축복이 임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입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이나 우리에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밷전 1:13, 5:5). 겸손이 우리의 허리띠가 되어야 합니다. 교만이 허리띠가 되면 하나님과 싸웁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항하라고 꼬입니다. 겸손이 없습니다. 사탄에게 종노릇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공의로 허리띠를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등불을 켜고…” 등불을 켜고 있는 사람입니다.
원문의 lucno”(뤼크노스)는 옮길 수 있는 조명기구를 말합니다. 등불은 필요한 것을 비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출 27:20, 민 8:3) 구약의 성소의 제사장의 임무 중의 하나가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등불이 꺼지면 안됩니다. 이 빛은 세상을 위하여 비추는 빛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빛입니다. 등불입니다. 우리가 인도해야 합니다. 등불이 켜있지 않으면 인도할 수 없습니다. 등불을 켜시기를 바랍니다. 남을 위해 비추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기도합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 달라고 다윗처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 24:2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등불을 끄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 앞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세요. 예수 이름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빛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셋째, “서 있으라”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사극 드라마를 보면 왕 옆에는 늘 내시가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왕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내시는 늘 왕이 부를 때 언제든지 대답을 합니다. 저는 드라마에서 한번도 왕이 “거기 누구 있느냐?” 그렇게 부를 때 대답을 안 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부르면 대답을 합니다.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하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서 있는 사람은 늘 준비된 사람입니다. 왕이 부를 때 그 부름에 대답할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꺼진 불을 들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고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6절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혼인잔치를 하는 이스라엘의 풍습 상 주인이 혼인집에 가서 언제 돌이올지 모릅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서 있는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보면 잠도 안자는 것 같습니다. 주인이 조금만 소리를 내도 금방 일어납니다. 대단합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강아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출 17:9)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지팡이를 잡고 섰습니다.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출 33:10) 라고 했습니다. 예배도 서서 드리는 것입니다.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안주하려고 하지 마세요.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아람’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아람’이라는 학생이 한 학년에 한 명씩은 있었습니다. 아주 흔한 이름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이름에 큰 애착은 없었습니다. 이름 때문에 불만을 내비치면 엄마는 “첫 딸이라고 얼마나 정성 들여 지은 이름인데 그런 말을 하니? ‘아람’은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를 뜻하는 말이야’ ”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름보단 낫지요. ‘성국’ 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성이 ‘여’ 씨입니다. 그래서 ‘여성국’ 이 되어 늘 놀림을 당했습니다. 부모님께 이름에 대한 불만을 말하니까 부모님이 처음에 두 이름을 놓고 고민하셨답니다. 그래서 “성국이 말고 다른 고민한 이름으로 하시지 그랬어요? 그 이름이 무엇이 예요.” 라고 여쭈었습니다. “그 이름은 ‘성용’ 이야!” 그 이름 앞에 성을 붙이면 ‘여성용’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여성국’ 에 만족하며 살았답니다.)
‘아람’이가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주민 등록을 만들러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이름이 ‘서아람’ 맞으세요?”, “네. 뭐가 잘못되었나요?”, “서아람이 아니라 ‘서아름’ 이로 되어있네요. 누군가 이름을 작성할 때 실수했나 봐요.” 충격으로 멍해 있는데 직원 분이 말했습니다. ” ‘서아름’ 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주민등록증에 ‘서아람’으로 올릴 수 없어요. ‘서아름’으로 올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20년 가까이 ‘서아람’으로 살아왔는데 난데없이 ‘서아름’으로 바꾸라니… 다시 ‘서아람’으로 올릴 수 없냐고 하니까 법원에 가서 제판 받고, 이름을 변경해야 된다는 겁니다. 부모님께 전화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했는데 엄마가 받았습니다. 항상 듣는 엄마의 음성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엄마는 내 이름을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엄마는 내일 법원 가서 당장 이름 바꾼다고 하고 ‘서아람’으로 등록해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주민등록증에 ‘서아람’이라고 신청하고 눈물까지 나왔습니다. 이름을 지켰다는 기쁨과 부모님이 내 이름을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름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변경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다른 어떤 이름을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름보다도 예수의 이름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참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예수’를 우리나라 사람이 정확히 발음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영어권에서는 JESUS가 되었는데 이게 헬라어에서 라틴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바뀌면서 발음이 변질되었습니다. ‘아멘’ 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멘’ 이 아니라 ‘아멘’ 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신사참배 안하고 죽었습니다. 공산당에게 총 맞아 죽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이 순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불만이 있고 그 불만은 부족함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어떤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면 불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은 늘 2%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자신은 2%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부류의 사람뿐이 없습니다.
하나는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실 2%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착각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2%도 부족하지 않은데 노력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 살맛이 나겠습니까? 사람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려고 평생을 노력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부족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식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합니다. 거기에 재능도 부족합니다. 그러면 상당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보통은 공부를 못하면 운동을 잘하는데 저는 공부도 잘 안되고, 운동은 아주 안됩니다. 이 둘이 안되면 보통은 음악을 잘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음악도 잘 안됩니다. 이 정도면 2%가 아니라 50%가 넘게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채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2%가 부족하다는 음료수 광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완벽해도 2%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때문입니다. 운동을 해도 땀을 흘려도 2%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채우라고 할 때 많은 사람이 그 모자람에 공감한 것입니다.

知足者(지족자)는 貧賤(빈천)도 亦樂(역락)이요 不知足者(부지족자)는 富貴(부귀)도 亦憂(역우)니라. “만족을 아는 자는 빈천해도 즐겁고, 만족을 모르는 자는 부귀해도 근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만족할 줄을 아는 사람은 집이 가난하더라도 즐거워하지만 만족을 모르고 불평을 일삼는 자는 아무리 부귀해도 걱정을 떨쳐 버릴 날이 없다는 이 말은 신라 때 낭산(狼山) 밑에 백결선생(百結先生)이란 분이 살았는데, 너무 가난하여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어 붙여진 이름이다. 제가 지난번 지하철에서 스님을 보았는데 그 옷이 누덕누덕하더라구요. 그런데 오래 입어서 헤어지고 달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새 옷인데 나올 때부터 누덕누덕 기어서 나온 것이 예요. 마치 청바지 찢어서 나온 것하고 같은 것입니다.
가난하지만 백결 선생은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이었습니다.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내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남들은 모두 여유가 있어 저처럼 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이에 백결 선생은 아내를 달랬습니다.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인데 불평한들 무엇하겠소. 내가 오늘은 당신을 위해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낼 터이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면 좋겠구려.” 하고 거문을 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루이스 라펨 교수가 쓴 ‘돈과 계급’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미국에서 범죄 하는 90%가 돈과 여자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랍니다. 이 통계가 비단 미국만 그렇겠습니까? 온 세상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두가 돈과 여자와 권력의 문제입니다. 잘못된 돈, 잘못된 이성관계, 잘못된 권력도 자신이 이익을 위해서는 허락하기 때문에 사탄은 늘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고 했습니다. 나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좀 단단해 져야 합니다. 사탄에게 물러 터지면 안됩니다. 사탄에게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친절은 사탄에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타협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보고 분명히 하라고 명령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뜨거워 져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 져서 악한 것을 다 내어쫓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경건으로 채워집니다. 세상 온갖 쓰레기 갖은 것을 담아있어 가지고는 주님의 경건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2-23)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난 사람은 뜨겁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충만함이 있습니다.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된 것입니다.

사람은 2% 부족한 것을 자기가 채울 수도 없지만, 만일 채웠다고 생각하면 교만해 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할 수도 없고, 했다고 생각하면 교만에 빠질 뿐입니다. 가끔 이런 망상에 사로잡혀 자기가 다시 온 메시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목자로 삼은 사람들은 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내가 잘나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골라서 주시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왜 지식을 배웁니까? 왜 돈을 법니까? 기도하세요 여러분! 우리 식구 먹고살도록 베풀어주신 은혜도 감사하지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웃을 도울 수 있게 축복해 달라고 하세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축복,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여기 잘 보세요. “안겨 주리라” 품안에다 안전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있으니 가져 가라가 아닙니다. 품안에 안겨주십니다.

저는 처음에 선교한다고 후진국에 많이 다녔습니다. 그냥 불쌍합니다. 그런데 후진국만 여행을 해 가지고는 보이질 않습니다. 여행은 후진국과 동시에 선진국을 가봐야 합니다. 왜 그들이 잘 사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러시아는 국토가 너무 넓습니다. 시베리아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땅속에 묻혀 있는지조차 확인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삽니다. IMF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잘 살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어려워집니다. 방글라데시는 국토의 절반이 물에 잠겨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고 땅을 고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면 땅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방법중의 하나가 땅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다녀본 동남아시아는 그 땅이 절대 유럽에 비해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럽 땅을 보 잘 것이 없습니다. 겨울이 길고 춥습니다. 그런데 잘 삽니다. 스위스는 지형적으로 산이 많아 쓸모 없는 땅이지만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동양도 그런 데가 있습니다. 네팔 히말리야산 밑은 스위스에 뒤지지 않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사람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충분히 복을 받을 수 있는 땅이 있는데도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니까 단점도 장점으로 바뀝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바뀝니다.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후 6:17-18)

우리가 경건하게 사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맡기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삽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있다면 바로 그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을 사탄이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우리는 보통 경건하면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나 잘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경건입니다.
여러분은 자녀교육의 모토가 무엇입니까? 잘사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현대 사회가 다른 사람과 지나치게 경쟁하며 살다보니까 잘못하면 다 적이 됩니다. 우리가 잘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공부해야 되는 것은 남을 돕기 위함입니다. 경건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야 남을 도와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한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배워서만 안 채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셔야 합니다. 지식도, 지혜도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 없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이 없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에 마음이 없으면 우리 가정이 황폐해 집니다. 땅이 굳어버립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여세요.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채워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여기서 우리만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는 내가 되게 해 달라고 우리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우리 기도합시다. 그것이 경건한 교회입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예배를 회복하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0-30)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네 민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자기가 집안에서 가장 작은 자이고 힘이 없었는데…” 여러분! 그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일 큰 문제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나 천사를 보면 바로 죽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천사를 보았으니 자신이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삿 6:23) 고 했습니다.
죄인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십니다. 죄인에게는 십자가가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사탄은 십자가를 보면 도망가게 되어있습니다. 기드온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았습니다. 그 감사함으로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삿 6:24)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에 한창 금광 경기가 좋을 때 광부들을 위한 텐트와 여러 가지 야외 시설을 위한 천막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한 천막업자가 금광 붐을 타고 텐트에 재미를 보면서 천막 원단을 엄청나게 많이 쌓아 두었는데 갑자기 금광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천막 수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업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텐트 원자재를 쳐다 볼 때마다 처분 할 방법이 없어 절망의 한숨만 나왔습니다. 이 업자는 그래도 길이 있으리라 믿으며 천막 원단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 한 광부의 작업복을 쳐다 볼 때 섬광처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험한 일을 하는 광부에게 튼튼한 천막 원단으로 바지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청바지를 만들어 광부에게 입혔을 때 상상외로 반응은 좋았고, 청바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의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단순히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쫓아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생각입니다. 광부들에게 좋은 바지를 입혀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선한 마음은 위기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조금 버리니까 다른 사람이 편안해 집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내 고집만 부리려면 예배가 안됩니다. 나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으로 믿을 때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살아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한 주를 시작하고, 한 주간을 살아간 후에는 예배를 통해 다시 삶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실패하면 삶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입니다.
본문 23절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예배입니다. 예배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 예배가 왜 이토록 소중합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 무엇을 한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살아있는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감격적인 예배가 있는 교회입니다. 예배를 감격 없이 드리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입니까?

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본문 20절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맡는지, 자기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맡는지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장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보러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가대 찬양을 잘 하는가, 연습이 잘 되었나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는 잘 준비되었는가, 틀리는 것이나 잘못된 말씀은 없는가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히말리야 산맥을 넘어가는 새의 이름을 제가 다시 들어보니까 독수리라고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비둘기라고 두 번이나 말하고 나중에 독수리라고 했습니다. 처음 두 번 비둘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정정합니다. 그래도 우리교회 예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예배 순서가 깔끔하게 잘 짜여져서 잘 진행되는가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관람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를 무엇인가 받으려고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은혜가 안 되었다고 예배가 은혜롭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오늘 부른 찬송이 자기의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은혜롭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보다는 부담과 도전을 주는 말씀을 했다고 은혜롭지 못했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 받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틀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드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만 받는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드릴 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욥이 어떤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

예배라는 말 자체는 “무릎을 꿇다, 경배하다, 헌신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릎을 꿇고, 헌신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받기 위해 나오시기보다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기 위해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를 드리면 은혜는 자연히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림이 없으면 은혜는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자기에게 무엇인가 채우려 하면 하나님은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드리면 하나님은 채워주십니다. 왜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드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2.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됩니다.

본문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라고 했습니다. ‘영(靈)’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영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영시라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면 그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의 생각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안됩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예배, 사람이 듣기에 좋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때 사람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재미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나를 드릴 때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한 화가가 손님들을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불을 끄고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림이 있는 전시실로 와서 구경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묻자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당신들의 눈이 세상에서 너무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잠시 어두움에서 눈을 씻긴 후에 그림을 더 잘 보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즉 새로운 눈으로 그림을 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일주일 동안 더렵혀진 몸과 마음을 좀 일찍 나와서 다 내려놓고 정리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더 선명하게 들리게 됩니다.

‘진리(眞理)’ 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거짓의 반대가 진리입니다. 진리에 합당하게, 참되게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거짓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의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따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멍하게 예배를 드리지 마십시오.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 밖에 세워둔 차에 관심을 가지지 마세요. 손으로 핸드폰 만지작거리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다른 곳에 두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만 주목하십시오. 정성을 다해 드리십시오. 천천의 수양이나 염소를 받기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싸울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짐승들을 진멸하지 않고 전리품으로 남겨두었을 때 사무엘이 사울 왕을 꾸짖었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했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해서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은 다 아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5:21-22절 말씀입니다.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먼저 21절 보세요. 하나님은 멸하려고 하셨는데 자기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실 줄 알고 가장 좋은 것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22절 말씀이 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순종을 원하시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들 좋은 것으로 드린다고 하나님이 금방 태도를 바꾸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조금 큰 교회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특별한 날이 되면 종종 선물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의 값어치를 떠나서 정성이 담긴 선물은 참으로 반갑고 고맙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그런데 어거지로 그저 때가 되었으니까 담임목사님꺼 하나 사고 부교역자 모른 척 할 수 없으니까 하나씩 사서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심지어 귀찮은 듯한 태도로 주는 선물은 받아도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넥타이를 은영 선생님이 선물한 것으로 하고 나왔습니다. 여기 별표 모양의 종이에 뭐라고 썼냐하면 “목사님! 늘 삶에 힘이 되는 말씀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마음이 있고, 정성이 있어서 좋은 선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이 깃든 예배, 우리의 마음이 담긴 예배를 하나님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영어로 예배는 ‘Worship’ 이라고 쓰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가치를 의미하는 ‘Worth’라는 단어와 태도, 마음을 의미하는 ‘ship’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즉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릴 때 최고의 태도로 드리십시오. 옷매무새도, 찬송 부르는 태도도, 봉헌을 할 때에도, 내 재능을 드릴 때에도 우리는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되도록 옷도 정장을 입고 오세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집을 나설 때부터 옷을 다듬고 마음을 준비하고 오셔야 됩니다.

3. 예배는 헌신입니다.

예배는 헌신입니다. 설교는 바로 그 헌신을 촉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우리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제사로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제물이 있었습니다. 비둘기나 양이나 염소 등의 자신의 형편에 닿는 대로 준비하여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자신을 드리는 삶의 표현입니다.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오늘 드리는 돈을 우리는 헌금이라고 합니다. 헌금에는 반드시 헌신적인 요소가 있어야합니다. 돈만 드리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주님 나 자신을 드려야 하는데 그 표현으로 헌금을 드립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미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아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삶을 다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예배이다.”

구약 히브리어 단어에 “레브쉐미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혜로운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은 ‘듣는 다’ 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즉 지혜로운 마음이란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느 8:6) 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로마서 12:1절에 보면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지금 살아 있을 때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입니다. 삶입니다. 내 삶이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진 사람은 삶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1-6)

어느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항공기 안에서 댁의 보청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고객 서비스 카운터에 와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청기의 주인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 주인은 보청기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구가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도구입니다. 귀를 열게 하시는 영입니다. 듣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둠에 빛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뭄에서 단비의 축복으로 온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고 치료받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은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도 우리 스스로 회개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핑계 대고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 통회하면서 죄에서 탈출하도록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때에 따라 우리에게 봉사의 길도 열어주십니다. 이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보통 때는 잘 모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낙심할만한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모합니다. 성령이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5:5)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어떤 장애나 한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나름대로 모두 장애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조건들이 우리가 예수를 찾게 만듭니다. 너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들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 한사람 왔다가 그냥 갔습니다. 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은 다릅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나를 도우소서, 우리가정을 도와주소서!, 우리교회를 도와 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너무 풍족한 가운데서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인류역사를 보세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때에 신기술개발이 많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해야하니까 그 때 비행기, 잠수함이 다 만들어졌습니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서는 발전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많이 부르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헨델 작곡, 로웰 메이슨 편곡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헨델의 노래에서 힌트를 얻은 로웰 메이슨이라는 미국 사람이 작곡한 것이 뫘다고 합니다. 메이슨은 헨델의 노래를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헨델의 음계는 오르내림만 사용해서 노래를 만드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단순한 음계지만 박자를 달리해서 탁월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내림음계 ‘도시라 솔파 미레도’ 는 단순한 음계입니다. 그런데 박자를 달리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되었습니다. 제약조건에서도 이와 같이 훌륭한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지원을 다해주면 절대로 탁월한 창의력은 나오지 않습니다. 제약 조건 속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러한 제약조건들을 극복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부족한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채우려고만 하지 않고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너무 움켜지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려고 합니다.

오늘본문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혔습니다. 자유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놀랍게도 당시의 에베소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바울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몸으로 채운다는 각오로 고난도 기뻐했습니다. 자기에 닥친 상황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분들은 거의 모두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을 다 남의 탓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렇게 못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탓해서 남는 것 하나 없습니다. 내게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지 마세요. 주님을 보세요. 다시 일어서세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세요.

바울이 여기서 간곡히 전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되기가 참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나눕니다. 싸우게 합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조직이나 제도를 가지고 하나가 아닙니다. 교파를 가지고 하나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를 한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형제, 자매입니다. 영적인 형제입니다. 육신이 형제는 부모로부터 피를 나누어 받았습니다. 영의 형제는 예수님의 피를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 속에 계신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데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라는 겁니다. 하나되는 예식입니다. 결혼식은 부부가 하나되는 예식이지만 성찬식은 예수와 우리가 하나되는 예식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십니다. 성령이 들어오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 때문에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입니다. 형제, 자매입니다.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교회가 하나라고 할 때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 안에 계십니다. 각 사람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 성도에게도 계십니다. 또한 과거의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도 임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우리 속에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왜 이토록 중요합니까? 그리고 왜 하나되라고 하신 것을 강조합니까? 성령의 역사는 하나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사탄은 싸우고 찢어지게 하여 나누어져서 멸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교회를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오순절 이후 이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를 믿는 모든 무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된 교회를 지켜가라고 합니다.

한 가정을 지켜나가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제목이 ‘아버지’ 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중년의 공무원이 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친구 의사의 진단을 받고 몇 개월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는 내용의 줄거리입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살아갈 걱정으로 자기가 죽고 나면 아내가 빵집을 하면 되겠다 싶어 빵 가게를 구합니다. 자식들의 남은 대학 공부를 걱정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삶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가족들 때문이지요. 내가 쓰러지면 고통 당할 가족들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지요. 이 소설에서는 남자들의 무거운 짐과 어려움을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죽는 자신도 두렵지만 더 난감한 것이 가족들이지요.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입니다. 가장으로서 남자들이 짊어지는 무거운 짐과 애환을 그린 소설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지켜나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아내가 가족들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가정의 파탄을 막기 위해 참고 견디고 헌신합니까? 왜 입니까? 힘든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가정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갖는 마음도 동일합니다. 성도가 갖게되는 마음입니다. 성도는 교회가 잘되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성도는 교회를 지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성도라 해서 왜 이 땅에서 고통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몸이라 해도 역경과 시련이 있습니다. 크고 작건 간에, 많고 적건 간에 성도에게도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교회를 지킬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보호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하셨듯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지켜나가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먼저 본문 1절 하반절에 보십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라고 하셨습니다. ‘합당하게’(앜시오)는 문자적으로는 ‘다른 들보 하나를 더 세워’입니다. 세상의 기준만 가지고 안됩니다. 다른 뭔가가 우리에게는 더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하면 우리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 더 세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준이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리고 분문 2절에 4가지로 우리가 더 세워야 할 것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모든 겸손”으로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제일 높은 곳에서 제일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둘째, “온유”로 해야합니다. ‘이해심 깊음’ 또는 ‘정중함’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고후 10:1).
셋째, “오래 참음”으로 해야합니다. 죄인을 대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넷째,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해야합니다. 자기희생 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되는 일에 있어서 하나되지 못하는 사람은 늘 핑계를 뎁니다. 우리는 핑계하기 이전에 내가 위의 다섯 가지를 잘 지키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우리도 이런 능력 있는 주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악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유약하고 병들며, 나약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실로 강한 것입니다.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세상 적인 육체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실 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장애와 한계, 부족함을 극복하고 주를 위한 감사로, 찬양으로 축복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성령의 교통하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지난 월요일에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에 다녀왔습니다. 길은 알지만 먼 길이라 네비게이션을 켜고 갔습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연결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충청도까지 갔는데도 연결이 안되고, 어쩌다 연결이 되면 충청도 말로 GPS연결됐드래유! 길 찾아 볼까유! 그러고는 또 잠잠합니다. 같다가 돌아오는 길까지 GPS가 하는 일이란 계속 GPS연결됐드래유! 길 찾아 볼까유!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런데 GPS연결 안 되고 자동차가 서있는 그림이 더 가관입니다. 글쎄 네비게이션 지도 위의 제 차 모양이 도로 위를 달려야 하는데 멈춰있으니까 길을 딱 막고 있더라고요. 국도에서도 고속도로에서도 길 가운데 턱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하고 연결이 안되고 자꾸만 끊기면 내 길도 못 찾고 남의 길까지 턱 막고 있게 됩니다. 모든 원리가 교통의 원리입니다. 의사 교통이 안되면 멀어집니다. 단절됩니다. 부부간에도 대화를 해야 가까워집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지속적으로 교통하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경제도 움직여야 합니다. 교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은 돌라고 돈이라고 하잖아요. 피도 돌아야 합니다.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바닷물도 움직여야 합니다. 파도가 쳐야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교통이 안되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는 겁니다. 늘 하나님과 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경영학의 대가, 드러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 경영에 실패하는 원인의 60%는 사원과 사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교통)이 잘 안 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부부 상담자인 퀴베인이라는 분도 이렇게 말했다.
“이혼하는 원인의 50%는 부부 사이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범죄 심리학자의 주장도 이와 같습니다.
“범죄자의 90%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 교분관계가 드물고 원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전문가들의 통계로 볼 때에 커뮤니케이션이 인간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멀리하는 생활, 교회에 자주 나오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과 교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해진 예배참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찬송하는 것은 쓸데없는 의식적인 일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라고 했습니다. 패역한 자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마음의 시선(視線)을 향하고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진정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와 죄인과 섞일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빛과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미움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고 어두워 지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은 사탄이 주는 겁니다. 미움도 사탄이 주는 겁니다. 우리가 빛이 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을 찾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1977년에 만든 <미지와의 조우 The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는 그보다 두 해 전에 나온 <조스 Jaws>와 함께 스필버그를 세계적인 감독 대열에 올려놓은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외계인과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다양한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고 무엇인가에 이끌려 사막의 한 장소로 모여드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과학자들이 모여 외계인과 교통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람이 외계인과 교통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입니다. 소통수단은 가락이 있는 다섯 개의 소리입니다. 과학자들은 똑같은 소리로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마침내 외계인도 같은 소리로 응답하고 결국 우주선의 문이 열리고 외계인이 데려갔던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사람과 외계인 사이에 제한적으로나마 소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끼리의 소통도 참 어렵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도무지 통하지 않습니다. 또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어는 알아들어도 생각이 다르면 통하지 않습니다. 교통하려면 결국 두 가지 같아야 합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생각입니다. 언어가 같아도 생각이 다르면 통하지 않습니다.
부부사이가 좋아지려면 대화하라고 했더니 ‘대 놓고 화를 내는 것’이 대화인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화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통은 얼마나 어려울까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을 아는 것이 구요.

하나님은 우리를 힘으로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여러분 종교는 어떤 대상과 철학을 만들어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복종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그런 식으로 굴복시킬 것 같으면 너무 쉽습니다. 당장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빌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딱 한번만 보여주면 아마 다 가서 빌 걸이요? 태양을 한동안 비춰주지 않는다든가. 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도록 한다든가 강력한 허리케인을 만들어 바다와 육지를 뒤집어엎으신다 든 가 그 방법이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사람의 모든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뭐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으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대화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원래 대화를 하려면 한쪽에 참아야 합니다. 아무도 참지 않으면 대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참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크고 무서운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둘째 아들이 자기 유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유산을 물려주었더니, 그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다 까먹고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돼지가 먹는 열매도 제대로 못 먹는, 그야말로 돼지보다 더 못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머슴으로 살아도 이보다 더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좋아서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아들이 그 고생을 안 해도 되는데, 괜히 고생을 했습니다. 집만 안 나갔어도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니 집을 나갔더라도 돈이 떨어진 후에 바로 돌아왔어도 그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원인이 무엇입니까? 역시 교통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평소의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하여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돌아왔을 때, 맏이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재산을 다 창기와 떨어 먹고 돌아온 놈에게, 죽도록 때리고 두 대 더 때리고 내 쫓아도 시원찮을 놈을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베푸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나 집에 안 들어간다. 나는 이때까지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친구들과 먹으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안 잡아줘 놓고, 저런 녀석에게 송아지를 잡아줘! 나 집에 못 들어간다.”
맏아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와 그렇게 함께 살았으면서도 아버지와 교통이 안 됩니다. 함께 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통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 하는 것 중요합니다. 다른 일하면서 사는 것보다야 백 번 낫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혹 큰아들처럼 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신앙 생활합니다. 예배도, 기도도, 봉사도, 맡겨진 사역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지쳤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하며 한숨 푹푹 쉬며, 죽을상으로 갑니다.
교통입니다. 아버지와 통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교통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일은 좀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의 교통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잡고 창세기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어 나가다 보니까, 딸 둘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을 하여 아이를 낳지 않나,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여 다른 사람에게 주지를 않나, 아들한테 시켜서 힌 밀가루를 칠해 손을 내밀어 큰아들이라고 속이는 어머니가 없나 정말 요지경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성경을 집어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지저분한 종교는 믿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의사교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요지경속에 인간들, 도저히 구제 받을 수 없는 인간들, 그렇게 약하고 고민이 많고, 실존에 문제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인간들, 바로 그 속에 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속 하시고, 용서하여 구원하시는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전혀 거룩하지 않은 책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거룩할 겁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의 탈을 벗기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자녀교육이 무엇입니까? 교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있던 교회에서 장로님 아들이 고3학년이 되니까 교회에 안나오는 겁니다. 제가 전도사 때인데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아들이 일류대학 가려고 준비한다고 주일날도 교회에 안 나와도 좋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저를 비교하는 듯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하고는 부류가 다르다는 거지요. 저는 정말 기겁했습니다. 아니 주일은 쉬어야 하는데? 주일까지 공부하고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하다니요?

제가 컴퓨터선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교통의 문제입니다. 어른들이 컴퓨터를 모르니 아이들과 교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교통하려면 막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막힌담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아닙니까? 이것을 허물면 됩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교통하려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기도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곳에 모여서 적어도 열흘 동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여 열흘 동안 기도한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말씀에 순종하여야 주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행1:14절에 보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드려 기도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라고 해서 바쁜 일이 없었겠습니까? 바쁜 일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시간을 드렸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매뉴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5-26)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좋아하셨는지 창세기 26:4-5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삭에게 축복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창 26:4-5)
모든 부모는 자식을 잘 키워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잘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잘 하는 것 그것이 자식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율법은 모세 때 세워진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을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율법을 내려주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도 하나님의 법도가 있었습니다. 아담 때도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내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자식인 이삭이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고 3일을 걸어가서 수르광야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말이 쓰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전에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사건을 체험했는데 3일이 지나니까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리 큰 하나님의 기적도 3일을 못 가는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나약한 존재입니다. 3일을 어린아이들 노약자들 홍해 바다를 건널 때 기분이 좋았지만 육지로 올라와 3일 길을 걸어보니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사막에 물이 없습니다. 얼마나 갈증이 심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출 15:24). 이것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한 기사입니다. 3일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의 기적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망부터 하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나약함과 동시에 죄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왜 모세에게 원망합니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 기도한번 안 했습니다. 모세에게도 무조건 원망할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다른 사람 원망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사람은 안됩니다.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티코를 탄 아줌마와 그랜저를 탄 아가씨의 대화입니다. “언니, 티고 얼마 주고 샀어?” 이 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온 아줌마는 자꾸만 생각하니까 열이 받습니다. ‘누구는 남편이 돈 잘 벌어다 주면 티코타고 다니겠냐?’ 하면서 혼자 열 받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아줌마는 그 얄미운 아가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벤츠사니까 덤으로 끼워줘서 잘 모르겠는데.” 웃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하나님께 무릎꿇고 기도하면 되잖아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잖아요. 이제는 믿음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불평을 먼저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던졌더니 물이 달게되어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것입니다. 법도와 율례가 왜 필요한 것이냐 하면 다음에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제는 우왕좌왕하지 말고 가르쳐 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매뉴얼입니다. 무조건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매뉴얼대로 따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서 우리가 납득하기 힘든 것은 해군의 초개함 하나가 침몰 됐는데도 어떻게 국방장관에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알려지냐 하는 것입니다. 합참의장은 사건이 나지 49분 후에야 보고를 받았고, 국방장관은 그보다 3분 후에 보고 받았다고 합니다.
합참의장 및 국방장관이 보고를 늦게 받은 것은 “상황통제반장의 실수” 라고 합니다. 실수할 것이 따로 있지요? 군대에 가면 벽마다 붙어있는 것이 상황보고 판입니다. 그런데 이게 실수할 일입니까? 이 말을 그대로 믿기도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만큼 군의 기강이 해이되었다는 것이니 그 자체로도 엄청난 문제입니다.
지금이 무슨 파발을 띠우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아닌 말로 핸드폰 한번만 하면 1분이면 알릴 내용을 뭐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 중요한 사건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보고 되었다는 것은 납득이 안됩니다. 급기야 이명박 대통령은 건국이래 처음으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 주재’ 했습니다(2010.5.4 화)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침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강한 군대는 강한 무기보다도 강한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안보체제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의 국가안보총괄점검기구를 구성하겠다’ 고 밝혔습니다. 한 국가도 비상 사태가 발생하고 문제점이 드러나면 다시 고치고 시정하고 필요할 경우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보지 않은 유대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법을 세우십니다. 매뉴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매뉴얼을 따라해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이 오셔서 계명을 다시 정리해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십계명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정한 것까지 합해서 613개정도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너무 복잡하고 형식에 치우쳐있기 때문에 다시 정리해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문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 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 해군에 매뉴얼이 있었지만 그것 마저 따라하지 않았습니다.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계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대로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법을 만들어 놓아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두 번째가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입니다.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출 16:28) 본문과 출 16:28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처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따라서 할 규범을 만든 것이 율례, 규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직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키지 않는 계명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매뉴얼이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지킬 때에만 소중한 것입니다. 지킬 때에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출 15:25에서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는데 출 16:28에서 하나님은 “어느 때까지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고 하십니다. 성경의 한 장도 못 넘겼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허탈한 것입니다. 출 16:1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15일에 벌써 엘림에서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출 16:12) 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는 겁니다. 율례와 규례로 정하신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들의 생각대로 합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교회 나오고, 내 마음대로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을 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신 5:10) 하시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처음에 세 가지(순종, 의, 규례지킴)를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되는지 10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돌판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 고 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이 레위기 제물에 대한 성결 규례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드리는 겁니다. 제물만 드리고, 예배만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말렉을 이기고 나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 15:40) 사람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도 계명을 지킬 때입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는 모두 한 시대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성경에서 잊혀져 버렸습니다.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약 400년이 지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오래 전에 잊혀져 버릴 뻔한 하나님의 법률과 계명이 나옵니다. 다윗은 스스로 찾았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두 하나님을 자기가 스스로 찾은 겁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면 그 명령들이 다 부담스럽고 지키기 싫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명령을 기뻐합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10) 라고 합니다. ‘전심’입니다. ‘힘을 다하여’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입니다. 아이가 젖 빨 힘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힘이 남아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쓰세요.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다윗이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주의 계명입니다. 제일 사랑했습니다. 제일 좋아했습니다. 사랑하면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가짜는 이요 끝까지 자기의 유익만 구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 없는지, 그것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 열왕기에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5-6) 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하나님을 떠나지 마세요.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나의 모든 것 몸, 마음, 물질, 시간, 명예, 그리고 영혼까지도 주님이 주장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마치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잠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내 영혼이 잘 되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 때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악을 쓰며 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짤랑거리는 방울을 주어도 웁니다.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추어도 웁니다. 사랑을 주고 아이스크림을 주어도 웁니다. 이모가 안아줘도 더 웁니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 웁니다. 그때 밖에 나갔던 엄마가 쫓아와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평화이며, 안정이며,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방울도, 노래도, 춤도, 돈도 내 영혼의 쉼터가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실 때 평화와 안정과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혼의 안식을 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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