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회복하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0-30)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네 민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자기가 집안에서 가장 작은 자이고 힘이 없었는데…” 여러분! 그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일 큰 문제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나 천사를 보면 바로 죽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천사를 보았으니 자신이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삿 6:23) 고 했습니다.
죄인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십니다. 죄인에게는 십자가가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사탄은 십자가를 보면 도망가게 되어있습니다. 기드온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았습니다. 그 감사함으로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삿 6:24)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에 한창 금광 경기가 좋을 때 광부들을 위한 텐트와 여러 가지 야외 시설을 위한 천막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한 천막업자가 금광 붐을 타고 텐트에 재미를 보면서 천막 원단을 엄청나게 많이 쌓아 두었는데 갑자기 금광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천막 수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업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텐트 원자재를 쳐다 볼 때마다 처분 할 방법이 없어 절망의 한숨만 나왔습니다. 이 업자는 그래도 길이 있으리라 믿으며 천막 원단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 한 광부의 작업복을 쳐다 볼 때 섬광처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험한 일을 하는 광부에게 튼튼한 천막 원단으로 바지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청바지를 만들어 광부에게 입혔을 때 상상외로 반응은 좋았고, 청바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의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단순히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쫓아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생각입니다. 광부들에게 좋은 바지를 입혀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선한 마음은 위기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조금 버리니까 다른 사람이 편안해 집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내 고집만 부리려면 예배가 안됩니다. 나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으로 믿을 때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살아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한 주를 시작하고, 한 주간을 살아간 후에는 예배를 통해 다시 삶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실패하면 삶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입니다.
본문 23절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예배입니다. 예배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 예배가 왜 이토록 소중합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 무엇을 한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살아있는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감격적인 예배가 있는 교회입니다. 예배를 감격 없이 드리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입니까?

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본문 20절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맡는지, 자기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맡는지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장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보러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가대 찬양을 잘 하는가, 연습이 잘 되었나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는 잘 준비되었는가, 틀리는 것이나 잘못된 말씀은 없는가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히말리야 산맥을 넘어가는 새의 이름을 제가 다시 들어보니까 독수리라고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비둘기라고 두 번이나 말하고 나중에 독수리라고 했습니다. 처음 두 번 비둘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정정합니다. 그래도 우리교회 예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예배 순서가 깔끔하게 잘 짜여져서 잘 진행되는가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관람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를 무엇인가 받으려고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은혜가 안 되었다고 예배가 은혜롭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오늘 부른 찬송이 자기의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은혜롭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보다는 부담과 도전을 주는 말씀을 했다고 은혜롭지 못했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 받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틀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드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만 받는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드릴 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욥이 어떤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

예배라는 말 자체는 “무릎을 꿇다, 경배하다, 헌신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릎을 꿇고, 헌신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받기 위해 나오시기보다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기 위해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를 드리면 은혜는 자연히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림이 없으면 은혜는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자기에게 무엇인가 채우려 하면 하나님은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드리면 하나님은 채워주십니다. 왜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드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2.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됩니다.

본문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라고 했습니다. ‘영(靈)’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영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영시라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면 그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의 생각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안됩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예배, 사람이 듣기에 좋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때 사람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재미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나를 드릴 때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한 화가가 손님들을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불을 끄고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림이 있는 전시실로 와서 구경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묻자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당신들의 눈이 세상에서 너무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잠시 어두움에서 눈을 씻긴 후에 그림을 더 잘 보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즉 새로운 눈으로 그림을 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일주일 동안 더렵혀진 몸과 마음을 좀 일찍 나와서 다 내려놓고 정리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더 선명하게 들리게 됩니다.

‘진리(眞理)’ 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거짓의 반대가 진리입니다. 진리에 합당하게, 참되게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거짓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의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따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멍하게 예배를 드리지 마십시오.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 밖에 세워둔 차에 관심을 가지지 마세요. 손으로 핸드폰 만지작거리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다른 곳에 두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만 주목하십시오. 정성을 다해 드리십시오. 천천의 수양이나 염소를 받기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싸울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짐승들을 진멸하지 않고 전리품으로 남겨두었을 때 사무엘이 사울 왕을 꾸짖었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했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해서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은 다 아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5:21-22절 말씀입니다.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먼저 21절 보세요. 하나님은 멸하려고 하셨는데 자기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실 줄 알고 가장 좋은 것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22절 말씀이 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순종을 원하시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들 좋은 것으로 드린다고 하나님이 금방 태도를 바꾸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조금 큰 교회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특별한 날이 되면 종종 선물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의 값어치를 떠나서 정성이 담긴 선물은 참으로 반갑고 고맙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그런데 어거지로 그저 때가 되었으니까 담임목사님꺼 하나 사고 부교역자 모른 척 할 수 없으니까 하나씩 사서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심지어 귀찮은 듯한 태도로 주는 선물은 받아도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넥타이를 은영 선생님이 선물한 것으로 하고 나왔습니다. 여기 별표 모양의 종이에 뭐라고 썼냐하면 “목사님! 늘 삶에 힘이 되는 말씀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마음이 있고, 정성이 있어서 좋은 선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이 깃든 예배, 우리의 마음이 담긴 예배를 하나님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영어로 예배는 ‘Worship’ 이라고 쓰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가치를 의미하는 ‘Worth’라는 단어와 태도, 마음을 의미하는 ‘ship’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즉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릴 때 최고의 태도로 드리십시오. 옷매무새도, 찬송 부르는 태도도, 봉헌을 할 때에도, 내 재능을 드릴 때에도 우리는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되도록 옷도 정장을 입고 오세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집을 나설 때부터 옷을 다듬고 마음을 준비하고 오셔야 됩니다.

3. 예배는 헌신입니다.

예배는 헌신입니다. 설교는 바로 그 헌신을 촉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우리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제사로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제물이 있었습니다. 비둘기나 양이나 염소 등의 자신의 형편에 닿는 대로 준비하여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자신을 드리는 삶의 표현입니다.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오늘 드리는 돈을 우리는 헌금이라고 합니다. 헌금에는 반드시 헌신적인 요소가 있어야합니다. 돈만 드리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주님 나 자신을 드려야 하는데 그 표현으로 헌금을 드립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미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아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삶을 다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예배이다.”

구약 히브리어 단어에 “레브쉐미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혜로운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은 ‘듣는 다’ 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즉 지혜로운 마음이란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느 8:6) 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로마서 12:1절에 보면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지금 살아 있을 때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입니다. 삶입니다. 내 삶이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진 사람은 삶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1-6)

어느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항공기 안에서 댁의 보청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고객 서비스 카운터에 와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청기의 주인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 주인은 보청기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구가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도구입니다. 귀를 열게 하시는 영입니다. 듣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둠에 빛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뭄에서 단비의 축복으로 온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고 치료받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은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도 우리 스스로 회개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핑계 대고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 통회하면서 죄에서 탈출하도록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때에 따라 우리에게 봉사의 길도 열어주십니다. 이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보통 때는 잘 모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낙심할만한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모합니다. 성령이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5:5)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어떤 장애나 한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나름대로 모두 장애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조건들이 우리가 예수를 찾게 만듭니다. 너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들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 한사람 왔다가 그냥 갔습니다. 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은 다릅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나를 도우소서, 우리가정을 도와주소서!, 우리교회를 도와 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너무 풍족한 가운데서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인류역사를 보세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때에 신기술개발이 많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해야하니까 그 때 비행기, 잠수함이 다 만들어졌습니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서는 발전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많이 부르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헨델 작곡, 로웰 메이슨 편곡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헨델의 노래에서 힌트를 얻은 로웰 메이슨이라는 미국 사람이 작곡한 것이 뫘다고 합니다. 메이슨은 헨델의 노래를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헨델의 음계는 오르내림만 사용해서 노래를 만드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단순한 음계지만 박자를 달리해서 탁월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내림음계 ‘도시라 솔파 미레도’ 는 단순한 음계입니다. 그런데 박자를 달리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되었습니다. 제약조건에서도 이와 같이 훌륭한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지원을 다해주면 절대로 탁월한 창의력은 나오지 않습니다. 제약 조건 속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러한 제약조건들을 극복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부족한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채우려고만 하지 않고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너무 움켜지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려고 합니다.

오늘본문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혔습니다. 자유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놀랍게도 당시의 에베소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바울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몸으로 채운다는 각오로 고난도 기뻐했습니다. 자기에 닥친 상황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분들은 거의 모두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을 다 남의 탓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렇게 못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탓해서 남는 것 하나 없습니다. 내게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지 마세요. 주님을 보세요. 다시 일어서세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세요.

바울이 여기서 간곡히 전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되기가 참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나눕니다. 싸우게 합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조직이나 제도를 가지고 하나가 아닙니다. 교파를 가지고 하나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를 한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형제, 자매입니다. 영적인 형제입니다. 육신이 형제는 부모로부터 피를 나누어 받았습니다. 영의 형제는 예수님의 피를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 속에 계신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데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라는 겁니다. 하나되는 예식입니다. 결혼식은 부부가 하나되는 예식이지만 성찬식은 예수와 우리가 하나되는 예식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십니다. 성령이 들어오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 때문에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입니다. 형제, 자매입니다.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교회가 하나라고 할 때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 안에 계십니다. 각 사람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 성도에게도 계십니다. 또한 과거의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도 임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우리 속에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왜 이토록 중요합니까? 그리고 왜 하나되라고 하신 것을 강조합니까? 성령의 역사는 하나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사탄은 싸우고 찢어지게 하여 나누어져서 멸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교회를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오순절 이후 이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를 믿는 모든 무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된 교회를 지켜가라고 합니다.

한 가정을 지켜나가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제목이 ‘아버지’ 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중년의 공무원이 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친구 의사의 진단을 받고 몇 개월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는 내용의 줄거리입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살아갈 걱정으로 자기가 죽고 나면 아내가 빵집을 하면 되겠다 싶어 빵 가게를 구합니다. 자식들의 남은 대학 공부를 걱정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삶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가족들 때문이지요. 내가 쓰러지면 고통 당할 가족들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지요. 이 소설에서는 남자들의 무거운 짐과 어려움을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죽는 자신도 두렵지만 더 난감한 것이 가족들이지요.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입니다. 가장으로서 남자들이 짊어지는 무거운 짐과 애환을 그린 소설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지켜나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아내가 가족들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가정의 파탄을 막기 위해 참고 견디고 헌신합니까? 왜 입니까? 힘든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가정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갖는 마음도 동일합니다. 성도가 갖게되는 마음입니다. 성도는 교회가 잘되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성도는 교회를 지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성도라 해서 왜 이 땅에서 고통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몸이라 해도 역경과 시련이 있습니다. 크고 작건 간에, 많고 적건 간에 성도에게도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교회를 지킬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보호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하셨듯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지켜나가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먼저 본문 1절 하반절에 보십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라고 하셨습니다. ‘합당하게’(앜시오)는 문자적으로는 ‘다른 들보 하나를 더 세워’입니다. 세상의 기준만 가지고 안됩니다. 다른 뭔가가 우리에게는 더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하면 우리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 더 세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준이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리고 분문 2절에 4가지로 우리가 더 세워야 할 것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모든 겸손”으로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제일 높은 곳에서 제일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둘째, “온유”로 해야합니다. ‘이해심 깊음’ 또는 ‘정중함’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고후 10:1).
셋째, “오래 참음”으로 해야합니다. 죄인을 대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넷째,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해야합니다. 자기희생 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되는 일에 있어서 하나되지 못하는 사람은 늘 핑계를 뎁니다. 우리는 핑계하기 이전에 내가 위의 다섯 가지를 잘 지키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우리도 이런 능력 있는 주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악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유약하고 병들며, 나약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실로 강한 것입니다.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세상 적인 육체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실 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장애와 한계, 부족함을 극복하고 주를 위한 감사로, 찬양으로 축복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성령의 교통하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지난 월요일에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에 다녀왔습니다. 길은 알지만 먼 길이라 네비게이션을 켜고 갔습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연결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충청도까지 갔는데도 연결이 안되고, 어쩌다 연결이 되면 충청도 말로 GPS연결됐드래유! 길 찾아 볼까유! 그러고는 또 잠잠합니다. 같다가 돌아오는 길까지 GPS가 하는 일이란 계속 GPS연결됐드래유! 길 찾아 볼까유!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런데 GPS연결 안 되고 자동차가 서있는 그림이 더 가관입니다. 글쎄 네비게이션 지도 위의 제 차 모양이 도로 위를 달려야 하는데 멈춰있으니까 길을 딱 막고 있더라고요. 국도에서도 고속도로에서도 길 가운데 턱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하고 연결이 안되고 자꾸만 끊기면 내 길도 못 찾고 남의 길까지 턱 막고 있게 됩니다. 모든 원리가 교통의 원리입니다. 의사 교통이 안되면 멀어집니다. 단절됩니다. 부부간에도 대화를 해야 가까워집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지속적으로 교통하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경제도 움직여야 합니다. 교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은 돌라고 돈이라고 하잖아요. 피도 돌아야 합니다.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바닷물도 움직여야 합니다. 파도가 쳐야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교통이 안되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는 겁니다. 늘 하나님과 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경영학의 대가, 드러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 경영에 실패하는 원인의 60%는 사원과 사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교통)이 잘 안 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부부 상담자인 퀴베인이라는 분도 이렇게 말했다.
“이혼하는 원인의 50%는 부부 사이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범죄 심리학자의 주장도 이와 같습니다.
“범죄자의 90%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 교분관계가 드물고 원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전문가들의 통계로 볼 때에 커뮤니케이션이 인간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멀리하는 생활, 교회에 자주 나오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과 교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해진 예배참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찬송하는 것은 쓸데없는 의식적인 일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라고 했습니다. 패역한 자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마음의 시선(視線)을 향하고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진정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와 죄인과 섞일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빛과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미움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고 어두워 지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은 사탄이 주는 겁니다. 미움도 사탄이 주는 겁니다. 우리가 빛이 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을 찾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1977년에 만든 <미지와의 조우 The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는 그보다 두 해 전에 나온 <조스 Jaws>와 함께 스필버그를 세계적인 감독 대열에 올려놓은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외계인과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다양한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고 무엇인가에 이끌려 사막의 한 장소로 모여드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과학자들이 모여 외계인과 교통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람이 외계인과 교통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입니다. 소통수단은 가락이 있는 다섯 개의 소리입니다. 과학자들은 똑같은 소리로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마침내 외계인도 같은 소리로 응답하고 결국 우주선의 문이 열리고 외계인이 데려갔던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사람과 외계인 사이에 제한적으로나마 소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끼리의 소통도 참 어렵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도무지 통하지 않습니다. 또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어는 알아들어도 생각이 다르면 통하지 않습니다. 교통하려면 결국 두 가지 같아야 합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생각입니다. 언어가 같아도 생각이 다르면 통하지 않습니다.
부부사이가 좋아지려면 대화하라고 했더니 ‘대 놓고 화를 내는 것’이 대화인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화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통은 얼마나 어려울까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을 아는 것이 구요.

하나님은 우리를 힘으로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여러분 종교는 어떤 대상과 철학을 만들어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복종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그런 식으로 굴복시킬 것 같으면 너무 쉽습니다. 당장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빌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딱 한번만 보여주면 아마 다 가서 빌 걸이요? 태양을 한동안 비춰주지 않는다든가. 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도록 한다든가 강력한 허리케인을 만들어 바다와 육지를 뒤집어엎으신다 든 가 그 방법이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사람의 모든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뭐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으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대화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원래 대화를 하려면 한쪽에 참아야 합니다. 아무도 참지 않으면 대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참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크고 무서운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둘째 아들이 자기 유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유산을 물려주었더니, 그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다 까먹고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돼지가 먹는 열매도 제대로 못 먹는, 그야말로 돼지보다 더 못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머슴으로 살아도 이보다 더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좋아서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아들이 그 고생을 안 해도 되는데, 괜히 고생을 했습니다. 집만 안 나갔어도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니 집을 나갔더라도 돈이 떨어진 후에 바로 돌아왔어도 그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원인이 무엇입니까? 역시 교통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평소의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하여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돌아왔을 때, 맏이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재산을 다 창기와 떨어 먹고 돌아온 놈에게, 죽도록 때리고 두 대 더 때리고 내 쫓아도 시원찮을 놈을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베푸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나 집에 안 들어간다. 나는 이때까지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친구들과 먹으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안 잡아줘 놓고, 저런 녀석에게 송아지를 잡아줘! 나 집에 못 들어간다.”
맏아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와 그렇게 함께 살았으면서도 아버지와 교통이 안 됩니다. 함께 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통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 하는 것 중요합니다. 다른 일하면서 사는 것보다야 백 번 낫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혹 큰아들처럼 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신앙 생활합니다. 예배도, 기도도, 봉사도, 맡겨진 사역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지쳤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하며 한숨 푹푹 쉬며, 죽을상으로 갑니다.
교통입니다. 아버지와 통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교통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일은 좀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의 교통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잡고 창세기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어 나가다 보니까, 딸 둘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을 하여 아이를 낳지 않나,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여 다른 사람에게 주지를 않나, 아들한테 시켜서 힌 밀가루를 칠해 손을 내밀어 큰아들이라고 속이는 어머니가 없나 정말 요지경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성경을 집어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지저분한 종교는 믿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의사교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요지경속에 인간들, 도저히 구제 받을 수 없는 인간들, 그렇게 약하고 고민이 많고, 실존에 문제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인간들, 바로 그 속에 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속 하시고, 용서하여 구원하시는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전혀 거룩하지 않은 책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거룩할 겁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의 탈을 벗기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자녀교육이 무엇입니까? 교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있던 교회에서 장로님 아들이 고3학년이 되니까 교회에 안나오는 겁니다. 제가 전도사 때인데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아들이 일류대학 가려고 준비한다고 주일날도 교회에 안 나와도 좋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저를 비교하는 듯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하고는 부류가 다르다는 거지요. 저는 정말 기겁했습니다. 아니 주일은 쉬어야 하는데? 주일까지 공부하고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하다니요?

제가 컴퓨터선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교통의 문제입니다. 어른들이 컴퓨터를 모르니 아이들과 교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교통하려면 막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막힌담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아닙니까? 이것을 허물면 됩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교통하려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기도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곳에 모여서 적어도 열흘 동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여 열흘 동안 기도한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말씀에 순종하여야 주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행1:14절에 보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드려 기도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라고 해서 바쁜 일이 없었겠습니까? 바쁜 일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시간을 드렸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매뉴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5-26)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좋아하셨는지 창세기 26:4-5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삭에게 축복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창 26:4-5)
모든 부모는 자식을 잘 키워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잘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잘 하는 것 그것이 자식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율법은 모세 때 세워진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을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율법을 내려주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도 하나님의 법도가 있었습니다. 아담 때도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내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자식인 이삭이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고 3일을 걸어가서 수르광야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말이 쓰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전에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사건을 체험했는데 3일이 지나니까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리 큰 하나님의 기적도 3일을 못 가는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나약한 존재입니다. 3일을 어린아이들 노약자들 홍해 바다를 건널 때 기분이 좋았지만 육지로 올라와 3일 길을 걸어보니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사막에 물이 없습니다. 얼마나 갈증이 심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출 15:24). 이것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한 기사입니다. 3일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의 기적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망부터 하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나약함과 동시에 죄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왜 모세에게 원망합니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 기도한번 안 했습니다. 모세에게도 무조건 원망할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다른 사람 원망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사람은 안됩니다.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티코를 탄 아줌마와 그랜저를 탄 아가씨의 대화입니다. “언니, 티고 얼마 주고 샀어?” 이 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온 아줌마는 자꾸만 생각하니까 열이 받습니다. ‘누구는 남편이 돈 잘 벌어다 주면 티코타고 다니겠냐?’ 하면서 혼자 열 받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아줌마는 그 얄미운 아가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벤츠사니까 덤으로 끼워줘서 잘 모르겠는데.” 웃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하나님께 무릎꿇고 기도하면 되잖아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잖아요. 이제는 믿음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불평을 먼저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던졌더니 물이 달게되어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것입니다. 법도와 율례가 왜 필요한 것이냐 하면 다음에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제는 우왕좌왕하지 말고 가르쳐 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매뉴얼입니다. 무조건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매뉴얼대로 따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서 우리가 납득하기 힘든 것은 해군의 초개함 하나가 침몰 됐는데도 어떻게 국방장관에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알려지냐 하는 것입니다. 합참의장은 사건이 나지 49분 후에야 보고를 받았고, 국방장관은 그보다 3분 후에 보고 받았다고 합니다.
합참의장 및 국방장관이 보고를 늦게 받은 것은 “상황통제반장의 실수” 라고 합니다. 실수할 것이 따로 있지요? 군대에 가면 벽마다 붙어있는 것이 상황보고 판입니다. 그런데 이게 실수할 일입니까? 이 말을 그대로 믿기도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만큼 군의 기강이 해이되었다는 것이니 그 자체로도 엄청난 문제입니다.
지금이 무슨 파발을 띠우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아닌 말로 핸드폰 한번만 하면 1분이면 알릴 내용을 뭐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 중요한 사건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보고 되었다는 것은 납득이 안됩니다. 급기야 이명박 대통령은 건국이래 처음으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 주재’ 했습니다(2010.5.4 화)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침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강한 군대는 강한 무기보다도 강한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안보체제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의 국가안보총괄점검기구를 구성하겠다’ 고 밝혔습니다. 한 국가도 비상 사태가 발생하고 문제점이 드러나면 다시 고치고 시정하고 필요할 경우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보지 않은 유대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법을 세우십니다. 매뉴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매뉴얼을 따라해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이 오셔서 계명을 다시 정리해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십계명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정한 것까지 합해서 613개정도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너무 복잡하고 형식에 치우쳐있기 때문에 다시 정리해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문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 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 해군에 매뉴얼이 있었지만 그것 마저 따라하지 않았습니다.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계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대로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법을 만들어 놓아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두 번째가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입니다.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출 16:28) 본문과 출 16:28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처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따라서 할 규범을 만든 것이 율례, 규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직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키지 않는 계명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매뉴얼이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지킬 때에만 소중한 것입니다. 지킬 때에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출 15:25에서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는데 출 16:28에서 하나님은 “어느 때까지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고 하십니다. 성경의 한 장도 못 넘겼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허탈한 것입니다. 출 16:1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15일에 벌써 엘림에서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출 16:12) 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는 겁니다. 율례와 규례로 정하신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들의 생각대로 합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교회 나오고, 내 마음대로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을 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신 5:10) 하시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처음에 세 가지(순종, 의, 규례지킴)를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되는지 10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돌판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 고 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이 레위기 제물에 대한 성결 규례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드리는 겁니다. 제물만 드리고, 예배만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말렉을 이기고 나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 15:40) 사람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도 계명을 지킬 때입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는 모두 한 시대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성경에서 잊혀져 버렸습니다.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약 400년이 지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오래 전에 잊혀져 버릴 뻔한 하나님의 법률과 계명이 나옵니다. 다윗은 스스로 찾았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두 하나님을 자기가 스스로 찾은 겁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면 그 명령들이 다 부담스럽고 지키기 싫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명령을 기뻐합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10) 라고 합니다. ‘전심’입니다. ‘힘을 다하여’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입니다. 아이가 젖 빨 힘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힘이 남아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쓰세요.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다윗이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주의 계명입니다. 제일 사랑했습니다. 제일 좋아했습니다. 사랑하면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가짜는 이요 끝까지 자기의 유익만 구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 없는지, 그것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 열왕기에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5-6) 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하나님을 떠나지 마세요.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나의 모든 것 몸, 마음, 물질, 시간, 명예, 그리고 영혼까지도 주님이 주장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마치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잠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내 영혼이 잘 되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 때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악을 쓰며 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짤랑거리는 방울을 주어도 웁니다.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추어도 웁니다. 사랑을 주고 아이스크림을 주어도 웁니다. 이모가 안아줘도 더 웁니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 웁니다. 그때 밖에 나갔던 엄마가 쫓아와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평화이며, 안정이며,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방울도, 노래도, 춤도, 돈도 내 영혼의 쉼터가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실 때 평화와 안정과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혼의 안식을 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세상을 이기는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올 봄은 유난히 추웠던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27일(화) 하도 추워서 실내에서 난로 피우고 있었습니다. 기상관측사상 100년 만에 제일 추웠답니다. 5월이 다 되었는데도 이렇게 춥습니다. 이 기후가 우리 마음대로 조절이 안됩니다. 요즘 중국에는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세계경제의 질서가 중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약 7%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1978년 개혁ㆍ개방정책을 표명한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올 1-3월 중국의 수입은 64.6% 증가했고 무역흑자는 76.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중소기업 하시는 분들이 원 자제가 없다고 난리입니다. 칠레 지진으로 광산에서 나오는 구리, 철 등의 자원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 세계의 공급량이 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중국이 사제기를 하는 바람에 품귀현상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국이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국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이 겁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연재해입니다. 지진뿐만 아니라 급속도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의 흥망성쇠도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아주 작은 차이에서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야합니다. 거듭남입니다. 새로 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 나야됩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이 이야기를 예수님과 깊게 나누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랍비이면서도 이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떠나 있어서는 어떤 사람도 구원이 없습니다. 허망한 인생을 살뿐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아무리 있어도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 해도, 아무리 많은 지혜를 얻었다해도, 아무리 많은 도를 닦았다해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의 근본이 모두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으로 해 보아야 세상입니다. 그래서 안됩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세상 것으로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선행 역시 세상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죄인인 인간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행이란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새로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지 못하는 이유를 바울은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엡 4:18) 입니다. 사람이 똑똑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 다 알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헛것입니다. 무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굳어짐”입니다. 죄인인 사람은 자기가 최고인줄 압니다. 이 마음은 처음에 사탄이 하와와 아담에게 넣은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인간이 교만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가 교만합니다. 이슬람이 교만합니다.

오늘이 어린이 주일이니까 어린이 설교 많이 합니다. 이 때 제일 많이 다루는 내용은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마 18:2),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부른 것을 우리는 “예수님이 참 인자하시다”는 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의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은 사람 축에도 못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랍지역에 가면 여자는 물건으로 취급합니다. 낙타와 바꾸는 것이 여자입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은 1884년 4월 29일에 여성에게 처음으로 입학시험을 허용했습니다. 30세 이상의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이 1918년 2월 6일이고, 미국이 1920년 8월 26일에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습니다. 인권이 발달된 프랑스도 여성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이 1945년 4월 29일 입니다. 스위스는 1958년 6월 12일 여성참정권을 인정했습니다. 옛날에는 여자, 어린아이들 종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수를 셀 때 항상 여자와 아이들이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취급 안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어린이를 만났습니다. 여자도 만났습니다. 세리도 만났습니다. 죄인도 만났습니다. 당신을 거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깁니다. 승리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 믿음은 5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 것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찾으십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제가 다른 나라에 입국을 하려고 하면 그 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 인생의 전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둘이 맷돌을 가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교회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양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 있는 사람은 존귀한 자가 됩니다. 쓰임을 받습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믿음을 주었으면 다 준 것입니다. 믿음을 가르쳤으면 다 가르친 것입니다.
자녀교육은 본을 보이는 것이 최고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최고의 교육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민족, 개인, 사상, 국가, 기업은 다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떠나면 제일 안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져버리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 증거가 러시아이며 공산주의입니다. 러시아는 천년동안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 세계 1등 국가, 1등 문화민족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떠나면서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 온 나라가 다 같이 굶어 죽는 거지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을 겪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겪은 것도 아닙니다. 러시아요 정말 고생했습니다.
구 소련이 무너질 때 제일먼저 독립한 나라가 에스토니아입니다. 제가 그 나라를 가보니까요 도로도 포장이 잘 안되어서 이제 유럽연합에 들어가 길 닦고 있습니다. 얼마나 공산주의에 지겨웠는지 70년 소련연합국에 있었는데요 소련 말 안 합니다. 소련을 따라가서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을 무시합니다.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나라는 하늘도 땅도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습니다. 러시아를 따라간 민족은 다 망했습니다. 여러분! 잘 믿는 사람 따라가고, 잘 믿는 사람 사랑하고, 잘 믿는 사람 친구 되고, 잘 믿는 사람을 귀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망하려면 안 되는 사람 따라갑니다. 그러나 잘 되려면 예수 믿는 사람 따라갑니다. 교회에 갑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캄보디아가요 공산주의를 따라가다가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를 따라하려고 합니다. 수상이 예수 믿습니다. 예전에 중국과 베트남을 따라 갔습니다. 김일성 거리가 있고 경비를 북한이 와서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친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나라만 골라 가지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캄보디아는 엄청나게 움직이고 경제가 발전하며, 정치가 안정되고 혼란이 질서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캄보디아는 우리나라를 제일 좋아합니다. 북한을 버리고 남한을 제일 좋아하고, 미국을 좋아하니까 나라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조성규 선교사님이 캄보디아 아이들 데리고 우리나라 식으로 캠프를 했나봅니다. 아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변화됩니다. 새롭게 됩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집, 굳은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세요. 이스라엘은 땅은 강원도 크기 만한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6백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서울 시민 반 밖에 안 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모든 일에 왜 이렇게 축복을 받았습니까?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고 감사 시를 썼습니다. 이 내용이 역대상 16:7-36에 나옵니다.
“10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11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에 역대상 17:8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고 하셨습니다. 누가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 라고 다윗이 고백합니다. 22절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녀교육은 무엇을 보여주며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어떻게 교육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유대인의 요절은 딱 하나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밤낮으로 외우고 끊임없이 가르치는 말씀이 쉐마입니다. 쉐마는 신명기 6:4-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읽어보면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민족입니다.

미국 국회에 가면, 국회 의사당 회의장 앞에다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1달러 짜리에도 미국 백악관 그려 넣고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 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돈을 쓸 때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어찌 복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십니까? 어떤 과학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 지구에 있는 인류가 다 사용하는 에너지를 모두 합해도 일 년 내내 모든 원자력 발전소, 수력 발전소, 화력 발전소 흔히 말하는 풍력 발전소 하여튼 석탄, 석유 몽땅 다해도 하나님이 태양에너지 한 시간 주는 에너지에 비교가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어떻게 다 측량 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 왜 나옵니까? 이런 전능자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땅의 수십 억이 있지만 다 다릅니다. 부족 할 수도 있고 못 배울 수도 있으며, 누구보다 능력이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길은 많습니다. 경제를 모르면 정치 쪽으로 가면 되고, 정치를 모르면 문화계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고, 문화를 모르면 음악계로 가면 되고, 음악을 모르면 과학자로 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다 다릅니다. 다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그것을 개척이라고 합니다. 사막에 길을 냅니다. 컴퓨터선교회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시작한 겁니다.
사람들은 획일화시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다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우리는 무시할 권한이 없습니다. 또한 무시당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있으면 조심해야 됩니다.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 부족함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내 앞날을 맡기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께로 옵니다. 위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위대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위대했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유대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예레미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구하려고 울면서 돌아다녔습니다.
바울도 믿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찾아다니며 죽이던 그 사람을 왜 불렀습니까? 잘 믿을 수 있는 그릇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잘 만났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방황하지 마세요. 목사도 성도를 잘 만나야 하고 성도도 목사를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한번 잘 해봅시다. 잘 믿어봅시다. 주님이 기뻐하는 자녀로 키워봅시다. 주님이 받으시는 교회로 만듭시다. 남이 해주는 것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주님 기뻐하시는 교회와 가정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빈들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3-14)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부함으로 물질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18-20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이 안수하여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보고 돈을 드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소서” 라고 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네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 라고 합니다. 돈으로 성령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누우셨던 자리는 쓸쓸한 말 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셨던 자리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인생들이 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있었고, 이 땅의 여러 남편이 있었지만 아무 소망도 없이 살던 우물가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치 빈들과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처음 교회를 나왔습니다. 처음 부르게 된 찬송이 [183장] “빈들에 마른풀 같이” 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다 눈물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빈들에 마른풀 같은 시들은 영혼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지쳤습니다. 처음에 결혼을 할 때는 꿈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자상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남편을 이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지쳤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빈들에 마른풀” 이었습니다. 이제 시들어서 지쳤습니다. 하나님의 이슬이나 단비 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찬송을 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빈들에 마른풀 같은 사람입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역사의 빈들, 마음의 빈들입니다. 누가는 평화의 왕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도 빈들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은 텅 빈 광야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들로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옛 사랑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묻은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 앞에 나아가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

여러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빈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궁으로 가시고, 대 제사장을 찾아가시고, 부잣집으로 가시고, 랍비의 집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빈들로 가셨습니다. 빈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물질로, 권세로 꽉 차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들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어디서 이 생수를 구할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빈들이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생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병든 사람은 나음을 입었고, 소망이 없이 살던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찾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빈들로 가셨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외치던 그 빈들로 나가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아왔습니다. 빈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땅이든지, 가을걷이가 끝난 땅입니다. 이곳에는 먹을 것이 없고,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빈들은 먹을 것조차 없는 부족한 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리를 마을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빈들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순종했고 무리들이 순종했습니다. 바로 그 빈들이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강제 부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이 극적인 기적을 통해 갈대바다를 가르고 적의 전차 부대를 바다 속에 몰살시키면서 통쾌하게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방의 감격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야 했습니다. 홍해를 건너 갈대바다에서 가나안까지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40일을 넘을 수 없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땅, 조상 대대로 갈구해 온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40년이란 긴 세월을 빈들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축복을 빙빙돌려가지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주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곧 바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의 감격적인 체험을 했지만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갈대바다를 건너고서도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불평은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노예 근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습니다. 조금만 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불평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불평을 토로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히브리 민족을 더 이상 인도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위대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미루시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에 대한 대가로 홍해바다의 그 감격적인 체험을 했던 1세대는 모세까지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됩니다. 교회 나갔더니 무슨 문제가 생겼더라. 그래서 당분간 안나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됩니다. 그 광야의 길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조금 참으면 됩니다. 기껏해야 40일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순종하지 않은 결과로 40년 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끝까지 순종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누구에게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 책임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주인은 책임을 가지고 책임을 집니다.

빈들에서 순종할 것인지 불평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빈들에서도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으며 불평하는 자에게는 고생만 있습니다. 빈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빈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빈들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빈들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헤롯궁으로 갔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결과는 모두 순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순교 당하였고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세속정치에 도덕 적인 문제를 언급했고, 예수님은 믿음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예수님에게는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들도 많이 들렸을 것입니다. 난세는 영웅을 많이 배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뜻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하면 민족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길만이 살길이라는 주장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도 이런저런 주장들을 들으면서 성장하셨습니다. 물론 그런 난무하는 주장들의 맨 밑바닥에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고 신음소리마저도 내기 어려웠던 암 하레츠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과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는 자칭 의인들로부터는 죄인들로 낙인찍히고, 체제의 수호자들로부터는 흙무지렁이들 이라고 비웃음이나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 주장들이 난무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조용히 자신의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난세를 구한다고 목청 높여 외치던 어떠한 집단에도 직접 가담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떤 정당이나 집단을 만들거나 이미 있는 세력에 들어가야 보호를 받으며 어떤 일이든 성공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족주의 운동이나 바리새파의 경건주의 계몽 운동, 에쎄네파 은둔주의자들의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주장들과 거리를 두면서 예수님이 유일하게 동조한 것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활동에 대한 동의와 동참의 표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외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 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잘한 것이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성령을 받도록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는 성령이 임하기 전입니다. 그러나 세례가 먼저 주어졌습니다. 깨끗해지기를 원할 때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깨끗함을 받으라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하나님이 앞서 보낸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어떤 정파에도 가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능력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중앙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호산나’ 하면 시끌 법적 했지만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한 그들은 예루살렘을 책임지고 있는 대제사장의 무리나 산헤드린공의회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 자격도 권한도 없는 암 하레츠인들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을 이끈 사람들과 같습니다. 설령 이들에게 나라의 권한이 넘어갔다고 다 잘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죄인들이 이끄는 이 땅의 일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지나치면 인민해방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보같이 그 도적의 소굴인 예루살렘으로 가셨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사명’ 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헤롯궁에 가서 도덕적인 일이나 지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도덕도 회복해야 되고, 유대인이라면 이스라엘도 로마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명입니다. ‘사명’은 누구에게 부여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메시야입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가신 것은 사명을 이루시고자 함입니다.

[사명]
주님이 홀로가신 그 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길을 나도 가오
험한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않겠소 나를보내주오
세상이 나를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할십자가 나도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당신 이작은 나를받아주오 나도사랑하오

지난 수요일 택민이 아빠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 지켜주세요.” 하는 마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는 국가가 시끄러운 나라 중에 하나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먼저 구하라” 하셨습니다. 정말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억지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오세요. 기뻐서 오세요. 기도하러 오세요. 시간만 있으면 다른 곳 가지 마시고 교회 나아 오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가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에 있어야 성령이 임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사업을 follow up 해줄 교회를 세우고 장로를 세웠습니다. 한 교부는 ‘아무도 교회를 그의 어머니로 모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칼빈도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고까지 말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아무도 천국에 혼자 가지 않는다. 그는 친구를 만나든지 아니면 친구를 삼아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적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종종 교회생활에서 상처를 입고 이제는 교회를 나가지 않고 혼자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10이면 10 다 신앙생활을 떠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두철미한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복음전도와 선교처럼 중요하고 최우선적인 과제와 사명이 없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노새 세대(generation)를 양육해 놓았다는데 있다”고 한 신학자는 염려스럽게 말했다. 노새는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지만 새끼를 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가장 큰 사명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빈들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완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예수를 주목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열중셨 차렷,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주목’입니다. 열중셨 차렷이 왜 필요한 줄 아십니까 자세를 올바르게 하고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열중셨 차렷 다음에 반드시 ‘주목’ 하는 것입니다. 열중셨 차렷만 해놓고 ‘주목’을 안 하면 열중셨 차렷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중셨 차렷하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00에게 주목’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예수께 주목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비운 공허한 마음이 청결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채워 넣지 않아 보세요 청결하여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져서 공허하고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마음을 비웠다고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에서 해방되었다는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이요 세상 욕심이 잘못된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욕심이 있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보고 마음만 비우라고 해 보세요 그 다음에는 무슨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갑니까 마치 열중셨 차렷 해놓고 주목을 안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무엇에 주목하는지 제 나름대로 뽑아 보았습니다. 젊은 인터넷 사용자가 많아 그들의 관심도이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네이버 인기 검색어입니다(2010년 4월 2주차 주간종합). 광화문괴물녀, 나나, 큐리, 노홍철복근, 고나은, 성균관스캔들, 정형돈삭발, 이파니, 이정현, 신데렐라언니입니다.
그리고 다음(Daum) 실시간 이슈 검색어입니다(2010.4.14). 유인나 전소속사, 이효리 결혼계획, 2nise 뮤직비디, 칭하이성 지진, 안재모 배신, 이응경 딸, 이은우 하차, 똥폰남, 재범 한국, 유진 비키니입니다.
여기 보시면 사람들이 어디 주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검색어들이 그저 재미로 보다 보니까 검색어가 올라갔다고 해도 우리는 지나치게 연예인, 오락위주의 검색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흥미로 삼아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루터는 어느 날 키우던 개에게 먹이를 주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루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개는 그 손을 따라가면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루터는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주목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이 개보다 못하다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한 자신을 인도한 주님께, 영도 없고 이성도 없는 저 미물인 버러지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 좋아할 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3) 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마음을 채워봐도, 마음을 비워봐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채우려고 노력하고, 어떤 사람은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 양쪽이 다 안됩니다.

우리 집사람 초등학교 동창이 가끔 와서 밥을 사주고 갑니다. 자꾸만 불러내서 제가 한번 따라가 봤습니다. 그분이 남자입니다. 우리 집사람 아직 인기 좋습니다. 제가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취미는 자전거랍니다. 한번은 집에 세워둔 자전거를 누가 차로 받아서 자전거가 망가졌답니다. 차 운전하시던 분이 기껏해야 몇 만원 하겠지 그러고는 5만원 주고 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몇 천 만 원짜리인 겁니다. 어지간한 자동차 값보다 더 비쌉니다. 이 자전거는 비행기 만들 때 쓰는 카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쌉니다. 그러면 자동차가 받으면 찌그러지지 말아야지 왜 망가집니까

고급 자전거는 카본으로 만듭니다. 카본은 비행기를 만드는 재질로, 수직의 힘은 엄청나게 잘 견디어 냅니다. 그래서 산악에서 높은 충격을 받아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카본의 약점은 옆의 힘에 약합니다. 그래서 자동차로 살짝 받았는데도 망가진 것입니다. 모든 조건에서 최고의 재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방법은 이와 같습니다. 어느 길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비워도 채워도, 도를 닦아도 아니 닦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의로운데, 그 의로움의 기준이 나라마다 다르고 지경마다 다른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은 사자를 많이 죽인 사람이 제일 의로운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다 다릅니다. 추장마다 다 다릅니다. 지역마다 다 다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동하고 남을 비판하고 신고 잘하는 그런 사람을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의인으로 뽑으십니까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를 합니다. 사탄은 땅의 여기저기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고 합니다(욥 1:8). 하나님이 욥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않아 구걸하던 못 걷게 된 사람을 걷게 했습니다. 이 못 걷던 사람은 자기를 걷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무엇을 좀 얻을까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그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 그럽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고 명령했을 때 걸었습니다. 구걸했으나 걷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좀 주는 것은 잠시입니다. 그때만 필요합니다. 그러나 걷게 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걸하는 식으로 기도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걷지 못한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에 자기들을 ‘주목’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 집중하세요. 주목해야 합니다. 잘 되는 사람이요, 잘 되는 가정, 교회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집에서는 부부끼리 싸우고, 직장에서는 선후배와 싸우고, 교회에서는 목회자하고 싸우는 사람은 잘 될 수 없습니다. 집안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사람끼리 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길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를 비우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함입니다. 비워놓고 채우지 않으면 공허해서, 허무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전에는 사도들에게 주목했는데 사도들은 다시 말합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5∼16에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아볼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바울이 잠깐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지만,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전 7:10)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바울이 이 문제를 두고 한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바울파다 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다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 저희는 각각 주께서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일뿐입니다. 내가 심는 일을 했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심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물을 주는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움이 트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큰 자를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도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누군 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기록은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이루진 것이지 갈데아우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는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낳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박해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물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왕녀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양자를 삼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 들어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간 양육 받으며 애굽의 학술에 통달하였습니다(행 7:22).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모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혈기 넘치는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처갓집에서 양떼를 지키며 40년을 더 지내게 만들고 80세가 되어서야 부르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다 버리게 하셨습니다. 혈기를 부리려고 해도 힘이 없어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팡이 하나가지고 바로에게 갔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국의 격언에 ‘하나님을 믿은 이 믿음은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다’ 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사 기드온의 때의 일입니다(사사기 6:23).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 7년 동안 넘겨주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철이 되었을 때 쳐들어옵니다. 토지 소산을 멸하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겨두지 않고 다 빼앗아 갔습니다(삿 6:4).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 6:11).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고 합니다. 기드온은 작은 자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가문의 작은아버지입니다. 기드온은 아들 중에서 제일 작은 막내입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여”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작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작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이 또한 예수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을 주목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첫 아담은 죄를 세상에 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구원을 주시 것을 주목해야 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광야 같은 길을 인도하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민수기를 보면서 마지막날에 구원받은 백성의 수를 세실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레위기를 보면서 다시 드릴 필요 없는 영원한 속죄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를 주목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서 우리 자녀에게 가르칠 영원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열왕기, 역대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왕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면서 오실 메시야를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주목하는 것이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를 주목하는 책입니다. 이 성경에서 예수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 그레코(El Greco)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참회하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에서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이미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국의 열쇠를 쥐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사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를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억울하다 하지말고 나를 들여다보아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예수님은 나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주목하는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주목하는 믿음만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입니다. 두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하나되는 것은 ‘주목’하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주목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예수께 주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목하는 믿음은 우리의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비천한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저주아래 있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주님이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저주대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께 주목하시어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조경의(1891. 11. 2-1950. 8. 4) 장로는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들이 떼어간 교회 종을 다시 찾아다가 걸고 예배시간을 알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잡혀가던 날도 아내와 함께 약방에서 환자를 돌보는데 심한 복통으로 그의 약방을 찾아온 군관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인민군 군관에게 “공산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모두가 내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지옥가지 않습니다.” 결국 군관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총살되었습니다.

최원초(1905.11.27-1950. 9.23) 목사는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라고 군복을 걸친 내무서원에게 정중하게 전도를 했습니다. “저한테 지금 전도하고 계시는 겁니까 ” “물론이지요 공산당원이라고 인간 대열에서 낙오될 수 있나요 사람은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전도하다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다 순교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제시대 때에도 한국전쟁 때에도 공산당에게도 전도했습니다. 전도하다 죽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주일날 선거하는 것을 반대하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주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 아닌지요. 주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허은(1914. 2.28~1950. 7.25) 목사는 교회 헌당 후 한국전쟁이 터졌으나 교인들만 피난시키고 두 번 양떼를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신축된 해방제단에 엎드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다가 정치보위부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가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향하여 “예수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순교하였습니다. 이 유언이 우리를 향한 부모님들의 유언인줄로 믿습니다. 단순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는 말씀을 주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뻐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어두움은 사탄이 주는 것이고 빛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악은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다툼과 분열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고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슬픔과 우울한 것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고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만 슬픔은 사탄에게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그만이지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이 없으면 인생이 잘못된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면 기쁨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지면 가질수록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뽕나무에서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 만나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을 왜 사랑합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곳에 사람들을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사탄을 만나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고생을 하더라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힘이 들어도 교회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고 본문 한 절에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이 세상의 것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볼 때도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참 복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기뻐해야 합니다. 왜요. 기쁨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기쁨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5).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며 베옷(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띠우십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과 함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430장] 주와 함께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 97:11-12) 여기 잘 보세요.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누구로 말미암아 기뻐합니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입니다. 본문에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입니다. 이 땅의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0-11)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기쁨의 근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못 됩니다. 오직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지금 근심하는 것(곡하고 애통하는 것)도 나중에 큰 기쁨이 됩니다. 우리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주님께 구하세요. “그리하면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은 세계 어느 나라, 어디서 누가 만들었던지 밝고 기쁨이 넘칩니다. 찬송에는 어두움을 걷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찬송 부르세요.
(2. 기도를 드리세요 3. 말씀을 들으세요. 4. 예수님 믿으세요. 5. 전도를 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3) 고 했습니다. 참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상쾌하여 낫고” 했습니다. 상쾌합니다. 사탄은 어둡습니다. 우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상쾌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즐거워 할 때, 기뻐할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상쾌한 사람입니다. 깨끗한 사람입니다. ‘상쾌하여’의 어근은 토브(좋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매일 이 토브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토브)” 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면 기쁨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둡고 기쁨이 없는 우울한 사람을 만나면 복잡합니다. 꼬이게 합니다. 무슨 말을 하면 오해를 하고 자꾸만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산뜻합니까
승미 자매가 옷을 가져와 우리 집사람이 아는 목사님 딸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 집사람 입으려고 했는데 승미 자매가 날씬하여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 목사님 딸이 대학교에 갔는데 입고 다닐 옷이 시원치 않아 주었더니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승미 자매에게 했더니 승미 자매가 얼마나 기뻐하는지요.
사람은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면 스스로 기쁨이 넘쳐나도록 만드셨습니다. 좋은 일 해보세요. 기쁨이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아하면 반드시 기뻐하게 되어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고 했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에 우리나라 대학총장님으로 제일 연세가 많으신(78세) 황희융 서울 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총장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황 총장님은 우리나라 서울대에서 컴퓨터공학과를 처음 만드신 분입니다. 이분이 청년 때 중학교 못 들어간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쳤답니다. 좁은 골방에서 라면을 같이 끌여 먹으면서 공부했는데 그 때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 40년 만에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그 제자 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테마데라시 시장을 역임한 재미교포 양진석(66세)씨입니다. 지금은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으로 있습니다. 양진석씨는 야학을 하던 그 시절이 늘 마음속에 고향 같으며 그 때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신만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신에게 복종 만하고 같다 바쳐야 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식에게 맹종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없으면서 복종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기업가들이 제대로 사람을 보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도 안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경영이란 사람을 어떻게 부려먹을까 연구하고 잘하는 것이 기업을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50년 전에 자기네 공장의 사람을 보니까 머리가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몇 십 년 흘러서 보니까 사람은 사랑하는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머리를 존중하고 사람의 가슴을 존중하니까 기업에 힘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근심도 하게 됩니다. 바울에게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에서 붙잡혀 감옥에 가게됩니다. 처음 갇힌 때가 A.D. 61년 가을-63년 봄입니다(행 28:16-31). 바울은 이 때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를 기록합니다. 잡아 가두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도 열심히 기록하고 그것을 전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옥중서신의 모든 책에 기쁨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감옥에 갇혀서 뭐가 그렇게 기쁨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바울이 왜 기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전제로 드릴지라도” 죽게되더라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기쁨이 넘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라고 예레미야는 고백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겁주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책이 아닙니다. 기쁨을 주는 책입니다. 생명을 주는 책입니다. 성경을 보면 생명수가 강같이 흐르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산성이십니다. 우리의 피할 바위이십니다. 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힘과 능력은 위로부터 주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루터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 치셨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작곡도 하고 작사도 했습니다. 그 곡이 찬송가에 있습니다. 그 성에서 보호를 받았거든요. 마치 다윗 같은 찬양을 합니다. 자기를 지켜 준 것은 큰 성이 아니라 그곳에서 역사 하신 주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루터는 그 성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스스로 찬송을 만들어 불렀습니다. 주님이 성이십니다. 네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그분이 싸우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렘 32:40)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모님이 좋아하는 자녀가 누구이겠습니까 세상에 나가서 출세한 자녀요 명절 때마다 비싼 선물을 보내주는 자녀요 아닙니다. 찾아오는 자녀가 제일 반가운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고 스바냐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우리를 이렇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 또한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2-15)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10년 3월 31일에 서해 상에서 발생한 우리나라 초개함(천안함)의 침몰된 배의 구조를 바라보다,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 앞서 일부 참모들에게 “직접 가봐야겠다”며 준비를 지시했다는 후문입니다.
특히 이 대통령은 “내가 국군통수권자다. 더욱이 실종된 장병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국민일 뿐 아니라 내 자식, 내 부하와 같은 사람들 아니냐” 면서 “더 이상 앉아서만 볼 수 없다”고 말하고 백령도를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천사를 보내시고 왕과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전달되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이 땅에 가봐야겠다고 결정하시고 오셨습니다. 더 이상 하늘에서만 보고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무작정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실 계획을 함께 마련하시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는 것은 부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식을 하는데 세례를 왜 받습니까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는 ‘메시야’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증거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성경에 못 믿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못 믿을 사건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성경이 다 믿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믿어지면 성경이 다 안 믿어집니다. 제가 몇 가지로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바른 증거를 한다고 해도 믿지 못할 분은 믿지 못한다는 것을요. 많이 배웠다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나 권세가 있다고 부활이 믿어집니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신비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기독교는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동정녀 마리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시겠다는 말씀이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학문을 통해서 모두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신비적 경험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를 우리는 경계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비조차 외면하는 이성주의가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앙의 모습도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와 다르게 신앙이 자라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치우쳐 있었지만 일본은 지나치게 이성주의 였습니다. 신비주의도 문제이지만 이성주의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신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는 신비를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최고의 신비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본문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사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만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고 전파한 제자들 역시 처음에 부활을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눅 24:11)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마태복음 맨 마지막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7) 고 했습니다. 예수님 승천이 임박해 있는 이 때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이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정도면 오늘날 우리들이야 얼마나 의심이 가겠습니까

그래서 음모론이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워터게이터 사건 이후 음모에 가담했던 척 콜슨(Chuck Colson)은 음모가 성립하려면 “가담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확신을 보이고 또 재능도 있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꾸밀 정도로 제자들은 여유가 있지 못했습니다. 일을 꾸미려면 주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보통 이런 일을 주도하려면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주도면밀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죽었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챙기기도 바빠 습니다. 완전히 실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다음에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1세기에 누군가 날조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유대 법정은 여인들의 증언은 증언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머리를 써서 꾸몄다면 최소한 여인을 첫 증인으로 내세우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베드로나 요한 아니면 니고데모라도 증인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 손을 대려면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A.D. 90년 이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런 요한마저도 똑 같이 기록합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큼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마 28: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고 부활의 충격을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저도 과거에 부활을 못 믿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던 것이 부활입니다. 중학생이 못 믿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실 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부활에 인생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성령의 역사로 처음에 저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난 뒤 지금은이요 그 때 그 강력한 성령의 경험을 통해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이 간증식으로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이요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 찾아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성도들이 흩어졌는데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북쪽의 다메섹에 제일 많이 도망갔었습니다. 바울도 지독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거기까지 찾아갑니까 자기가 밝힙니다. “멸절”시키려고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씨를 말리려고 헸던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 길에서 빛이 바울을 두르고요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니까요 바울이 “주여 누구시나이까 ” 그 때 주님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이 한마디에 사울은 무너졌습니다. 그때부터요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 계시지 않았다면 바울에게 이런 음성을 어찌 들려주시겠습니까 거짓말하나를 지키려면 수 없는 거짓말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활은 반대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해야 합니다. 본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짓 증인은 용서될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to; khvrugma:토 케뤼그마)를 말합니다. 이 말은 전파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내용(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헛것이며” 는 앞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라고 했는데 앞의 것은 kenh;(케논)입니다. 케논은 ‘실제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한 공허한 것’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도 헛것이며” 의 헛것은 mataiva(마타이아)입니다. 마타이아는 “실제적인 것을 획득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을 말합니다. 캐논은 ‘할 수 없어서 공허한 것이고’ 마타이아는 ‘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 입니다. 나중 것이 더 강한 의미입니다. 전파하는 것이 헛것 인 것보다는 믿음이 헛것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늘 그랬듯이 부활도 각기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인생의 변화를 체험했고 희망과 용기로 가득 차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 부부가 싸우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제일 문제가 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싸우면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입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왜 예수님이 부르셨다고 보십니까 그의 열심입니다.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것을 믿을 준비도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그런데 아주 무관심한 사람은 대책이 없습니다.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도 안 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먹고사는데 만 정신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잔치를 벌이면서도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의심이 많았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오늘날 우리가 복된 줄 믿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성도 여러분이 부활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우리나라는 교육열만 1위가 아닙니다. 1등할 필요 없는 것까지 1등입니다. 2008년도 우리나라 자살 사망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살 사망자는 인구 10만 명 당 2006년 21.5명에서 2008년에는 24.3명으로 한 해 동안 1만 2,858명이며, 전년 대비 5.6%가 늘어났습니다. 10년 전인 1998년 8,622명과 비교하면 49%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하루 평균 35.1명이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한국에 이어 헝가리 21명, 일본 19.4명, 핀란드 16.7명, 벨기에 15.8명, 프랑스 14.2명, 뉴질랜드 12.2명, 미국 10.1명입니다. 자살율이 높다고 알고 있던 일본보다 5명이 더 많습니다. 미국은 심심하면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무려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자살 원인으로는 염세, 비관으로 33.5%가 가장 많았고 병고 17.8%, 정신 이상 9.1%, 낙망 7%, 가정불화 6.4% 입니다. 특히 20-30대의 사망원인 중 자살은 40.7%, 28.7% 입니다. 교통사고에 이어 2위입니다. 자살의 원인이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영복귀 요청을 받고 한달 동안 고뇌를 한 뒤 내린 결론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기업은 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로 지금이 진짜 위기입니다. 청소년들이 교회는 오지 않고 자살을 저렇게 많이 하는데 위기가 아닙니까

본문에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은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가진 목소리는 다 특색이 있어 친한 사람의 목소리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칼칼한 목소리, 마음이 편안한 목소리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목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도 음성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음성이 떨립니다. 진실한 음성은 다릅니다.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곧습니다. 부드럽습니다. 떨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힘있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있었던 작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배가 육지에서 상당한 거리를 떠났는데, 바람이 반대편에서 불어와 여간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절반은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출신 들입니다. 한마디로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써도 사나운 물결은 잠잠해 지지를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전쟁(6.25)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에게 제일 기억에 남는 사진은 노량진 역인가요 부모를 잃은 채 깡통하나 가지고 기차 옆에 서 있는 아이가 기억납니다. 저는 이 사진이 제일 감동스럽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아픈 일의 무엇인지 아십니까 화물차 지붕 위에 앉아서 피난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 위에 난간이 없지 않습니까. 간신히 매달려서 가는데 그만 안고있던 아들의 손을 순간에 놓친 것입니다. 저만치 떨어져 나간 아이를 바라보는 그 순간 부모의 가슴은 찢어진다고 해야 표현이 됩니까 그 안타까움, 그 절망감, 무슨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2000년 전에 하나님이 그와 같은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던지 하늘을 푸르게 열어놓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땅이 부끄러웠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극심한지 땅이 떨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공포심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불안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형틀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의 증거입니다.

614장 [얼마나 아프셨나]
(1)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발, 죄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들도 초목들도 다울고, 해조차 빛을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후렴:오 놀라운사랑 크시고 끝없도다, 오 주님사랑에 구원의 강물넘치네

“안심하라”(Qarsei’te:달세테)는 원문으로 딱 세 번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안식이나 안심을 뜻하는 평안(샬롬,eijrhvnh:에이레네) 하고는 다릅니다. 한번은 본문에서 나온 것이고 한번은 같은 사건을 설명하는 평행구절 마가복음 6:50절에서 나왔습니다. 또 한번 나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번역성경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한 곳은 그 유명한 요 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의 어느 부분이 본문의 “안심하라”(Qarsei’te:달세테)와 같은 단어 같습니까 “담대하라”입니다. 본문 마 14:27 과 같이 번역한다면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가 됩니다.
우리가 안심하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면 사해바다가 있습니다. 이 바다에 들어가면 염분이 높아 몸이 둥둥 뜬답니다. 어떤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난리를 떠는데 사람들은 가만히 구경만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손만 들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손만 들면 그냥 뜬답니다. 심지어는 책도 볼 수 있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손만 들면 됩니다. 갈릴리바닷가에서 자신들이 자랐고 경험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을 들 때, 그 때에 ‘안심하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시나요.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뿐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안심하라” 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차 위에서 아이의 손을 놓쳐버린 부모가 무슨 힘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없으면 미치는 겁니다. 제 정신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와 위로 받지 못할 심령이 없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죄 사함 받음으로 안심하라.
예수님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고 하셨습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을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고 하셨습니다.
여기 두 군데 잘 보셔야 합니다. 무엇을 안심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겁니다. 병을 고쳤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안심하는 것은 풍랑이 잔잔해 졌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안심하는 겁니다. 아기는 엄마 목소리만 듣고 안심하는 겁니다. 예수가 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저는 막 협박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자기가 무슨 권능을 받았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사람들. 여러분! 겁먹을 것 없습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우리를 협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안심시키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압송 되어갑니다.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배가 파산하고 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경우 백부장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력사용이 가능합니다. 선장은 기술자입니다. 그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자입니다. 선주는 배를 소유한 재벌입니다. 그는 돈으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력도, 기능도, 돈도 없는 가난한 전도자입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무시했고, 그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집과 소신은 다릅니다. 고집은 강할수록 손해고, 소신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고집은 버려야 하고, 소신은 지켜야 합니다. 소신은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지만, 고집은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망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사랑 받기 어렵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파산합니다.
사공들은 짐을 바다에 버리고 배의 기구들까지 버립니다(행 27:19). 배의 기구들이라고 하는 것은 배를 향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것들까지 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은 목숨입니다. 사람이 죽을 일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몇 일 동안 해가 비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이 배에 누가 탔기 때문입니까 십자가만 아는 바울이 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가는 바울이 탔기 때문입니다. 요나와는 반대입니다.
바울은 풍랑으로 죽게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행 27:22)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그대로 됩니다. 배에 탄 276명중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았습니다.

천국 길은 좁은 길입니다. 쉬운 길은 넓습니다. 누구든지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은 힘이 듭니다.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열매가 있습니다. 쉬운 길에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어렵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때 인생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요 세상이 악합니다. 말세 때가 가까울수록 세상이 더 악해진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예수 믿는 다니까요 말이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요 옆집강아지만도 못하게 취급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에 대해서도요 너무 쉽게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때가 이 나라가 없습니다. 큰 교회는 이요 기도할 때 핸드백 꽉 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언제 채갈지 모릅니다. 화장실에서 가서도요 잘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래도 말만하면 우리나라를 표현하기를 ‘동방 예의지국’ 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요 무슨 예의가 있습니까 심각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예의가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예의가 생깁니다. 우리가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김구선생님은 서대문 감옥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무슨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니가 갖다준 성경을 읽었습니다. 15년 동안 세계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8-9)

우리가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그 차이가 하나님께는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수고가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믿을 때, 우리 인생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마지막 순간에도 안심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