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2-15)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10년 3월 31일에 서해 상에서 발생한 우리나라 초개함(천안함)의 침몰된 배의 구조를 바라보다,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 앞서 일부 참모들에게 “직접 가봐야겠다”며 준비를 지시했다는 후문입니다.
특히 이 대통령은 “내가 국군통수권자다. 더욱이 실종된 장병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국민일 뿐 아니라 내 자식, 내 부하와 같은 사람들 아니냐” 면서 “더 이상 앉아서만 볼 수 없다”고 말하고 백령도를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천사를 보내시고 왕과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전달되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이 땅에 가봐야겠다고 결정하시고 오셨습니다. 더 이상 하늘에서만 보고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무작정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실 계획을 함께 마련하시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는 것은 부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식을 하는데 세례를 왜 받습니까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는 ‘메시야’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증거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성경에 못 믿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못 믿을 사건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성경이 다 믿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믿어지면 성경이 다 안 믿어집니다. 제가 몇 가지로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바른 증거를 한다고 해도 믿지 못할 분은 믿지 못한다는 것을요. 많이 배웠다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나 권세가 있다고 부활이 믿어집니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신비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기독교는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동정녀 마리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시겠다는 말씀이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학문을 통해서 모두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신비적 경험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를 우리는 경계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비조차 외면하는 이성주의가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앙의 모습도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와 다르게 신앙이 자라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치우쳐 있었지만 일본은 지나치게 이성주의 였습니다. 신비주의도 문제이지만 이성주의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신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는 신비를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최고의 신비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본문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사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만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고 전파한 제자들 역시 처음에 부활을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눅 24:11)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마태복음 맨 마지막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7) 고 했습니다. 예수님 승천이 임박해 있는 이 때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이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정도면 오늘날 우리들이야 얼마나 의심이 가겠습니까

그래서 음모론이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워터게이터 사건 이후 음모에 가담했던 척 콜슨(Chuck Colson)은 음모가 성립하려면 “가담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확신을 보이고 또 재능도 있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꾸밀 정도로 제자들은 여유가 있지 못했습니다. 일을 꾸미려면 주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보통 이런 일을 주도하려면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주도면밀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죽었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챙기기도 바빠 습니다. 완전히 실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다음에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1세기에 누군가 날조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유대 법정은 여인들의 증언은 증언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머리를 써서 꾸몄다면 최소한 여인을 첫 증인으로 내세우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베드로나 요한 아니면 니고데모라도 증인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 손을 대려면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A.D. 90년 이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런 요한마저도 똑 같이 기록합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큼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마 28: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고 부활의 충격을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저도 과거에 부활을 못 믿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던 것이 부활입니다. 중학생이 못 믿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실 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부활에 인생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성령의 역사로 처음에 저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난 뒤 지금은이요 그 때 그 강력한 성령의 경험을 통해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이 간증식으로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이요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 찾아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성도들이 흩어졌는데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북쪽의 다메섹에 제일 많이 도망갔었습니다. 바울도 지독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거기까지 찾아갑니까 자기가 밝힙니다. “멸절”시키려고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씨를 말리려고 헸던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 길에서 빛이 바울을 두르고요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니까요 바울이 “주여 누구시나이까 ” 그 때 주님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이 한마디에 사울은 무너졌습니다. 그때부터요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 계시지 않았다면 바울에게 이런 음성을 어찌 들려주시겠습니까 거짓말하나를 지키려면 수 없는 거짓말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활은 반대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해야 합니다. 본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짓 증인은 용서될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to; khvrugma:토 케뤼그마)를 말합니다. 이 말은 전파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내용(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헛것이며” 는 앞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라고 했는데 앞의 것은 kenh;(케논)입니다. 케논은 ‘실제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한 공허한 것’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도 헛것이며” 의 헛것은 mataiva(마타이아)입니다. 마타이아는 “실제적인 것을 획득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을 말합니다. 캐논은 ‘할 수 없어서 공허한 것이고’ 마타이아는 ‘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 입니다. 나중 것이 더 강한 의미입니다. 전파하는 것이 헛것 인 것보다는 믿음이 헛것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늘 그랬듯이 부활도 각기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인생의 변화를 체험했고 희망과 용기로 가득 차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 부부가 싸우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제일 문제가 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싸우면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입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왜 예수님이 부르셨다고 보십니까 그의 열심입니다.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것을 믿을 준비도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그런데 아주 무관심한 사람은 대책이 없습니다.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도 안 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먹고사는데 만 정신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잔치를 벌이면서도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의심이 많았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오늘날 우리가 복된 줄 믿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성도 여러분이 부활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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