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빛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26. 나의 빛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창조한 것은 해와 달과 별의 빛입니다. 태양에 빛이 없으면 이 지구 위에 사람들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이나, 날 짐승이나 벌레도 살 수 없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식물도 자랄 수도 없습니다.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고 곡식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금수 초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들까지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전등불이 없으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야합니다. 캄캄한 밤에 불이 있어야 합니다. 불 없이 잠시라도 지내기가 힘이 듭니다. 빛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입니다.
우리의 현대문명은 빛의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 CD플레이어 등은 알고 보면 모두가 빛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전자기기들은 레이저에서 방출되는 광선을 이용하여 우주 통신, 정밀 공작 등에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병원에 의사들이 현대최신 기계(엑스레이)를 가지고 사람의 내부를 들어다 봅니다. 이것은 다 빛의 작용입니다.
우리나라 포항제철에 만든 ‘포항방사광가속기(PLS : Pohang Light Sour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체 부지는 660,000㎡로서 이중 조성한 부지는 110,000㎡이며 축구 경기장으로 비교하자면 약 20개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게 되는데, 8개 동의 건물은 42,000㎡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방사광가속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12개국뿐이며, 더욱이 ‘포항방사광가속기’처럼 광범위한 영역의 빛을 만드는 최첨단 3세대형 가속기는 6개국밖에 없습니다.
단일 실험 장치로서 건설비가 무려 1400억원이 소모되었고 건설 기간만도 5년여 남짓 걸려 완성되었습니다. 이 장치는 에너지가 25억 전자볼트를 이용하여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보통 실험실에서 얻을 수 있는 적외선, 자외선, X선 보다 그 밝기가 몇백만 배에서 수억 배에 달하는 강력한 빛이 나타납니다. 이 빛을 이용하면 생명공학, 의학, 4G D램 이상 초고집적회로 등 첨단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미래를 밝히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으면 현대문명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로 선포하신 두 번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축제 기간인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예식행사가 있는데 하나는 성전 제단에 물을 끌어들이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좋은 기회를 교육에 활용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라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동기가 된 예식입니다. 4개의 황금 촛대를 밝히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젊은 제사장이 사닥다리에 올라 황금 촛대에 점화함으로 온 성전과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히는 상징적인 행사인 것입니다.
이 두 예식은 초막절에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출13:21-22, 14:19-25).
요1: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을, ‘어두움’은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빛이 계속하여 세상에 비취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으로 온통 덮혀 있어서 어디를 보아도 빛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비취고 있지만 어두움이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빛은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공존할 수도 없고 합쳐질 수도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빛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에는 ‘이기지 못한다’(overcome)는 뜻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빛이 비취면 단숨에 물러갑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움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아가고, 빛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희망과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들 하시지만, 미안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얻으실 수는 없습니다. 혹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여러분을 착각 속에 빠지게 하여 영원하신 빛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소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말했습니다. 하바국은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하셨습니다.
모세와 대화하실 때도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신 방법중의 하나로 빛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빛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가 곧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것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시27:1, 잠6:23).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사 49:9)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누가복음 1:78-79에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요1:4-9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심으로 이 예언된 말씀들과 이루어진 말씀에 대해서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6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이 빛이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빛이시니 당연히 우리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했습니다.

단체의 [신곡] 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단테가 한번은 지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지고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을 하느라 저 모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 허리를 굽히는 것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우리가 빛을 발한다는 것은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어서만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개인택시기사 한 분 소개할까요. 이분 성함은 강박수입니다.
이분은 낙천적인 성격에 하나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눈 비시시 부비며 일어난 아내는 “당신은 매일 뭐가 그렇게 신나요?”라고 묻는다. “당신은 가서 잠이나 한잠 더 푹 자구려”하면서 아내를 두드립니다. 강집사는 휘파람을 불면서 “하나님 오늘 으싸으쌰~ 한번 살아볼 텐데 하나님 오늘도 팍팍 밀어주세요? 달구지도 잘 굴러가게 하시구요. 아무리 사랑스럽지만 다른 달구지하고 절대 키스는 안됩니다.”하면서 집을 나섭니다.
첫 번째 만난 손님은 길 저쪽에서 안경쓰고 손을 높이 흔드는 여자. 예전 같으면 안경쓰고 특히 여자를 이른 아침부터 태우면 재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손 흔드는 사람은 무조건 OK
“어서 오십쇼! 굿모닝!” 형식적인 아침인사가 아니라 씩씩하고 우렁찬 소리로, 그러나 손님은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혹시? 긴장을 하면서도 아니지. 기사양반 성질 건드렸다간 나만 손해보지… 하는 쪽으로 사고가 진전되면서 마지못해 ”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히 말합니다. 강집사는 손님의 표정을 흘깃 거울 속으로 바라보니 표정은 좋은 아침이 아니다.
”어디로 모실갑쇼?“ ”세브란스 영안실이요!“ ”저런 누가 돌아가셨군요.“ ”네가 젤 존경하는 친척분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요새는 왜 그리 폐암이 부쩍 많답니까?“ ”그분은 술, 담배도 안하셨는데…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제 대화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다 왔습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살다보면 또 만나겠지요. 건강하세요“
두 번째 여자손님. 무엇에 쫓기는지 아니면 무엇을 쫓는지 여간 급하지가 않았다.
“기사 양반 남대문으로 빨랑 갑시닷!” 사뭇 명령조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할 강집사님이 아닙니다. “아마 누가 기다리시는 모양이죠?” 여자는 흘깃 쳐다보면서 뭐 이딴사람이 다 있어? 데려다주고 돈만 챙기면 되지 하는 눈치입니다. 강집사님은 이럴 때는 음악을 틀어줍니다. “클레식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어디 베토벤 없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음악은 달콤한 뽕짝을 틀어줍니다. 일단 클래식으로 허영의 사다리를 타본 여자는 뽕짝의 추억에 조금씩 풀어집니다. “사실은 내 돈 떼어먹고 도망간 여자가 남대문에서 장사를 한데지 뭐예요. 지금 안가면 못 만날까봐 잠도 설치고 지금 갑니다.” “아이쿠 오래 되셨나요?” “5년도 넘었어요. 내가 받은 고통은 말로 다 못해요. 이혼까지 할 뻔했어요.” “그러게 사람일은 한치 앞을 모른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여자는 이제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맞아요.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는 밤 세웁니다. 저녁때로 갑니다. 어둑어둑 해질 때 아파트 입구에서 할머님 한 분을 태웠습니다.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은 돈을 두둑이 주면서 “말죽거리에 가면 박 의원이 나와있을 겁니다. 그곳에 안내해 드리면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내릴 곳이 다가오자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며늘애가 날 버린 거라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우.” 말로만 듣던 신종 고려장에 직접 동참을 한 꼴이 되었다.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아십니까?”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할머니는 서글픈지 고개만 저으며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태웠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한참을 해매고 수소문해서 그 집을 찾았다.
골치아픈 암 덩이리 하나를 치운 것으로 생각했던 며느리는 돌아온 할머니를 다시보자 경악을 했다. “아니 누가 당신더라 남의 집일에 감 나라 콩 나라 하랬어?” 시퍼런 여자가 늙어가는 강집사에게 퍼붓는 소리다. “돈도 푸짐하게 주었는데 눈치껏 내려주기만 하면 될 거 아냐?” 더 이상 대화가 안 되는 이 여자와 말할 가치를 없어서 무뚝뚝하게 “주인 양반 안 계십니까?” “남의 주인을 왜 찾아? 외국 출장 중인데 왜?” ‘아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시어머니를 버리시겠다? 하이고 잔머리 한번 요란하게 군리셨군 그래?’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당신 남편을 낳아주신 분 아니오? 잘 좀 돌봐드리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오늘은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가는 길에 서울역에서 아줌마가 탔습니다. “아자씨, 이거 보고 요기로 데려다 줘유.” 얼굴에 기미가 덕지덕지 낀 시골 아줌마는 주소, 약도, 전화번호까지 적힌 너덜~너덜~한 종이를 내민다. 아줌마는 시골에서 더 이상 먹고살기가 힘들어 가족 대표로 여관집에서 식모 살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월급은 130만원인데 이 액수에 황홀해 있었습니다. 꿈이 부푼 아줌마에게 말도 못하고 약도를 따라 그 앞에 내려드리면서 ‘하나님 이분이 어린양 아닙니까? 지켜주세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일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우시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세요. 그곳에 아줌마를 지켜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말할 때 고쟁이 속바지에서 돈을 꺼내주려는 아줌마에게 웃으면서 “아줌마 서울에 오신 것을 기념으로 제가 무료 서비스합니다. 돈은 그만 두십시오.” “아자씨, 시방 머라고 하셨당가유? 돈을 안내도 된다구유?” 강집사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줌마는 모두지 믿을 수 없다면서 말합니다. “아니 왜유? 밸일도 다 있구만유. 서울가면 코 베어간다고 조심하라고 하든디 다 거짓말 이네유? 아자씨 참말로 공짜란 말이어유?” 강집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줌마 행복하게 사세요. 꿋꿋하게 사세요. 예수님 믿으시구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주님의 사랑”을 찬양한 졸라맨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표현된 주님의 사랑인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웨일즈에 나이 많은 설교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한 노인이고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 거북하지만 그는 비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리한 비평가였습니다. 어느 기회에 그는 두 사람이 강사로 되어 있는 두 집회의 마지막 시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신학교 교수들이었습니다. 처음에 한 강사가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이 문제의 설교자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빛만 있지 열은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두 번 째 강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전번 설교자 보다 나이가 많고 다소 열정적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그 냉소적인 교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고 “열만 있지 빛이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분들은 다 바른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설교자가 다 결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뜨거움이 없는 빛은 결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습니다. 모르지요. 지나가는 비처럼 당분간 화끈하는 효과가 있을지.

빛은 불에서 나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사람의 몸도 차가우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잃으면 금방 차가워집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면 뜨겁습니다. 한마디로 불이 납니다. 차가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빛이 발산됩니다. 뜨거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아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52. 나의 아멘이신 예수님) / 계 3:14, 계 22:16-21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16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16-21)

오늘은 성도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아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깨어 정신을 차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저를 믿어 주셔서 우리 목사님은 특히 주일 낮 예배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시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도 된다고 생각하시고 주무시면 안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설교를 지난 일년간 해 왔는데 그 마지막 번째이기도 합니다.

원문에서 아멘(ajmh;n)은 신약에서만 129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49개만 나타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다른 말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는 아멘의 뜻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바로 “진실로”라는 단어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복음서에 112번 나타납니다. 특히 원문 요한복음서에서는 “ajmh;n ajmh;n”으로 두 번씩 나옵니다. 그래서 번역성경에서도 “진실로 진실로”로 번역했습니다. 원래 헬라어에는 이 단어가 없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서 온 것입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처음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민 5:22절에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멘의 시작(민 5:11-22).
남편 모르게 아내가 바람을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증이 없는 것입니다. 심증은 가는데 증인도 없고 물증이 없습니다. 이 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방법입니다. 또한 아내가 바람을 피지 않았는데 남편이 의심이 생겼을 때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제사장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서 보리 가루를 예물로 드립니다. 이것을 “의심의 소제”라고 하고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은 여인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제사장은 거룩한 물을 떠다가 성막 바닥의 티끌을 물어넣고 여자는 머리를 풀고 의심의 소제물(곡식제물)을 여자가 들고 있게 하고, 제사장은 저주를 내리는 쓴 물을 손에 들고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맹세를 ‘어떤 남자와도 동침한 일이 없고, 남편을 배반하여 몸을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를 내리는 이 쓴 물이 네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 몰래 몸을 더럽혔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를 시킵니다. 그리고 이 물을 먹게 합니다. 이 때 제사장은 맹세를 시킬 때 여자는 “아멘 아멘”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만일 거짓으로 맹세하면 배가 붓고 허벅지가 말라죽습니다.
만일 간통한 여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아멘 할 수 있습니까? 아마 미리 도망갈 것입니다. 아멘 할 수 있는 여인은 남편 몰래 바람을 피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아멘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시키신 것입니다.

맹세에 사용된 언어입니다.
그 다음에 아멘은 신명기 27:15-26절까지 매 절 12번이 나옵니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신 27:15)
여기에 나온 아멘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속이거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백성이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 맹세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 언어입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대상 16:3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 8: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시 41:13)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89:52)
다윗 시대 때부터 아멘의 사용은 다시 왕성해 졌습니다. 이 때도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멘 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멘 아멘 두 번씩 사용하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분이 좋거나 확실하면 즉 거짓이 없으면 사람은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멘을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정말, 참, 진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진짜 참 기름이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진짜 참 기름이냐는 말은 믿지 못하는 우리의 풍습에서 기인한 말입니다. 참기름이면 참기름인데 가짜 참기름이 있기 때문에 ‘진짜 참기름이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믿지 못할 때 ‘정말 진짜 참기름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에서 아멘 아멘 한 것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맹세에 맹세를 하는 의미입니다. 즉 이 시대 사람들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만 적용된 언어입니다.
아멘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맹세할 때 사용한 언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용어가 예수님께 적용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무슨 말입니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아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아멘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삼위일체이신 성자라는 뜻입니다.
개역한글판 성경에 아멘이라는 말이 무슨 말로 번역되었다고 했습니까? ‘진실’입니다. 이 말은 원문에는 ‘아멘’입니다.
이 말이 신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실 때 “산상수훈”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19-21)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같은 뜻입니다. 앞에 것은 마태가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나중 것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께 보여 주신대로 기록한 요한계시록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한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렇게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멘”을 언제 하셨습니까? 문장 맨 앞에서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번역성경에서 혹 앞에 오게된 것인가 살피기 위해서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았습니다. 원문 성경에서도 말씀 앞에 이 단어가 놓여있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상대방의 조건을 들어보기 전에 그 조건을 전재로 해서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약속에 대해서 이행할 것을 다짐한 상태이고 내 조건을 들어달라는 약속입니다. 아멘의 경우고 구약에서 사용된 경우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용된 경우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맹세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멘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아멘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면 아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은 아주 잘 해야 됩니다. 아무 때나 아멘 하면 큰일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멘 자체가 맹세요,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최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멘을 먼저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은 예수님이 알고 계신 것이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보고 자신의 입맛에 맞으면 아멘 할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미리 다짐을 받아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을 먼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멘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아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아멘하고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조건을 말할지 모르는 사람하고 미리 약속할 수 있습니까? 조건을 들어보지 않고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편이 무슨 조건을 말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라면 무슨 말씀하셔도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처지를 아시는 부모님이 무리한 조건이나 부탁을 하시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을 때 여덟 살 된 아들이 음식 투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맛이 없고, 저것도 맛이 없고, 나 밥 먹기 싫어!”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달랬습니다.
“애야, 아빠가 너처럼 어렸을 때는 밥 한 끼 먹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단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은 우리랑 사니까 훨씬 좋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런 것입니다. 그냥 웃어야지요.

여러분! 복음서를 다시 보세요. 진실로가 다 앞에 있잖아요. 저는 이것을 보면 은혜 받습니다. 내가 들어보고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면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는 미리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아멘을 하지 못합니다.

아멘은 삼위의 하나님 말씀에만 적용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와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두 말씀은 모두 말씀에 관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시카고에 있는 성도님과 한시간 반 가량 통화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이분은 아까운 듯 조금씩 말씀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찾다가 제 성경공부 사이트을 찾아 연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가르치는 방법이 성경에서 짝을 찾아야 한다. 비유를 모르면 안 된다 등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재림주가 한국 그것도 경상도에서 나온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그분은 문제가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하고 읽지 않다 보니 성경대로 살수도 없고 미혹하는 말에 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조금 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또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 척 하면 안됩니다.
어떤 초신자가 할렐루야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라서 어떤 집사님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집사님도 잘 몰라서 얼른 생각 나는 대로 대답하기를 남원에 가면 광한루가 있고 진주에 가면 촉석류가 있듯이 천국에 가면 할렐루가 있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 벧후 3:16에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말에 ‘참’과 ‘개’를 구별합니다. ‘참’은 진짜를 ‘개’는 사이비를 나타내는 접두어로 사용됩니다. 개는 한자 ‘가(假)…’의 준말이며 참은 순수한 우리말인데 한자로는 ‘진(眞)’입니다. 때로는 참 대신에 한자를 사용해 ‘참달래’가 되어야 하는데 ‘진달래’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진짜를 나타낼 때는 ‘참’자를 쓰고 가짜를 나타낼 때는 ‘개’자를 사용합니다. 진짜 기름을 참기름이라고 하고 얼굴에 흐르는 쓸데없는 기름을 개기름이라고 합니다. 쓸모 있는 말을 참말이라고 하고 쓸데없는 말을 개소리라고 합니다. 나리꽃은 비슷하지만 산에 코고 아름답게 피는 것을 ‘나리’라고 하고 집 뜰에 나리처럼 흉내는 냈지만 작게 피는 꽃을 ‘개나리’라고 합니다. 나쁜 먹을 ‘개먹’이라고 하고 붓글씨를 쓸데 잘 못 쓴 글에 덧쓸 때 개칠한다고 합니다. 가짜 눈알을 개눈 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말대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만일 ‘개(소리)’말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계 22:19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오직 성 삼위이신 하나님의 참 말씀에만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 아멘을 많이 하면 무식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멘은 많이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아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장을 아무 데나 찍지 않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습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 하면 도장을 남발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단 한번의 보증 도장을 찍어줌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멘을 잘못하면 이 보다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멘 하기 겁나시죠? 그렇다고 아멘을 안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아멘을 많이 하면서도 문제없는 방법 하나 알려 드립니다. 성경을 그대로 읽을 때 미리 아멘 하셔도 됩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도 성경구절 잃고 그대로 설교하면 아멘 하시면 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지키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멘

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1. 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 딤전 2:1-7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딤전 2:1-7)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심리적으로 3대 중요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① 자존심(자신이 중요한 존재로 평가받기 위하는 마음) ② 안정감(의식주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자유롭기 원하는 마음) ③ 소속감(어디엔가 속해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기본욕망을 만족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얻으실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재벌인 록펠러(J. D. Rockefeller)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첫째, 예배당에 가면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둘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셋째,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라. 록펠러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 이 땅의 축복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생각과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으며 모든 악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 ‘모든’이라는 단어가 모두 5번이나 나타납니다.
첫 번째 ‘모든’이 세 번 기록된 것은 ‘기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중보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모든’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크게 새 부류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민족성이 강하여 물과 기름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자신의 민족이 우선이요, 먼저였습니다.
얼마 전 이라크에서 한국 분이 한 명 무장단체에 의해서 피살되었습니다(김선일 25세 남, 2004년 6월 24일 이라크 팔루자 인근). 이 사건을 통해서 이라크 파병에 대한 국론분열 현상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라크 국민에 대해서 적대시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신약시대의 세 민족은 이런 반목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범 세계적인 사람을 말한 다기보다는 민족을 뛰어넘어 사랑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라크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모든’이 두 번 기록된 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는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중의 제일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했습니다. 칼빈주의 자들은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준비되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믿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의 주장을 따르는 것입니까? 칼빈입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칼빈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사회의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를 침략했던 일본 사람들도 예수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도 중국사람도 베트남 사람도 이라크 사람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조건 유대인이라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민족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구원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중보도 한 분이십니다.
본문 5절에 헬라어 원문에는 ‘가르’(ga;r)가 나옵니다. 이 말은 ‘왜냐하면’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분되어 원수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형제, 자매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3:20에서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중보하실 수 있는 분도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이 두분 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낳아 주신 분, 길러주신 분으로 말할 때 부모님이 혹 여러분을 모시고 섬길 수는 있는 것이지만 낳아주신 부모님은 한 분 외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신 분도 한 분이시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 역시 한 분뿐이십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질 무렵, 워싱턴의 백악관 대기실에는 검은 가방을 든 훤칠한 키의 미국 신사가 초조히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한국의 육영공원 교사로 왔다가 곧 미 감리회 한국 선교사였던 헐버트였습니다. 그는 지금 일본의 마수에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고종 황제가 미국의 루스 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밀서를 지니고 대통령의 면회를 요청하고 서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밀서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무력에 의해 강압으로 이룩한 것이다. 한.미 수호조약의 규약과 그 정신에 입각하여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백악관 문전에서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이미 제국주의의 열강간에 즉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비밀협약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한국 침략은 미국의 용인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미국 대통령께 중보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국익을 위해서 결정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영혼만을 위해서 결정하십니다.
히브리서는 다음 세 구절을 통해서 확실하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 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우리를 속전해 주셨습니다.
‘속전’에 해당하는 ajntivlutron(안틸뤼트론)은 헬라어 원문 성경에서도 이곳에만 나오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사람의 몸값을 말하는 lutron(뤼트론)과 대신을 말하는 ajntiv(안티)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우리 나라의 노비와 같다고 보면 되는데 우리보다는 훨씬 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만 주면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우리의 죄 값은 무엇으로도 대신 값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계속해서 양과 소등을 제물로 드렸으나 이것으로 죄를 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텔레마코스(Telemachus)는 주후 4세기에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살았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중에 “로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반복해서 듣고 수도원을 떠나 무조건 로마로 왔습니다. 도착해 보니 로마 원형경기장에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검투사들(gladiators)이 싸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께서 이 땅에 다녀 가신지가 4세기가 지났는데 아직도 오락과 같이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하는 관중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 양손을 들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관중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놈을 치워 버려라!” 그리고 그는 다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검투사 하나가 칼등으로 그를 쳐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 그러자 다른 검투사가 그의 배를 칼로 찔러 그는 그곳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피가 모래위로 나오면서 어떤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경기장을 나갔습니다. 그러자 한 두 사람씩 경기장을 빠져나가 8만 관중이 모두 나가고 이때부터 로마 원형경기장에서는 다시는 검투 시합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바울이 ‘이를 위하여’(7절)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으로 내어주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라고 말한 것의 원문은 임금이나 행정관, 군주 등의 명령을 받고 공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통신병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고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 드라마에서 왕의 명령서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시급성을 요하는 문서를 가지고 말을 빨리 재촉하여 왕의 급한 명령을 받고 가는 신하라는 뜻으로 빨간 깃발을 꽂고 빨리 달려가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는 사도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급하고도 중요한 명령을 받고 가는 전령이 가다가 쉬고, 딴 짓 하지 말고, 자신의 일을 보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전령이 아닙니다. 사도가 아닙니다. 아마도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입니다.

필리핀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처가 시장에서 암탉을 두 마리 샀습니다. 제가 가끔 비실대니까 몸보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 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끈으로 묶어 놓고 한 마리는 푹 고아서 아이들도 주지 않고 제게만 기름이 동동 뜨는 닭국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그만 끈으로 묶어 두었던 닭이 끈을 풀고 담을 넘어 뒤편에 있는 수렁을 지나 건넛집 지붕으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 닭을 잡으려고 저는 발을 걷어붙이고 긴 장대를 들고 수렁을 지나 건너편 집에 가서 몇몇 아이들을 도움을 받으며 그 닭을 잡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촌닭은 어찌 그리도 잘 나르는지!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종횡무진 도망을 쳤습니다. 몇 시간을 따라다니며 저는 마음속으로 “주님 저 닭을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므로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저는 문득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이사와서 천하보다 귀한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이 집 저 집을 다니지 아니했는데 고작 암탉 한 마리 잡으려고 이런 열심을 가지다니, 나도 별수 없는 속물에 불과하구나. 저는 닭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잃은 영혼들을 찾으러 이와 같은 열심을 가지고 이 집 저 집을 다니게 하옵소서. 종에게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중국복음화에 문을 연 사람으로 알려진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로부터 “성경을 사랑하거라.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안하신단다. 그분은 너희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지도 않으신단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공부에 흥미를 잃고 문제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교장으로부터 더 이상 학교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통지를 받고 그는 집에서 놀며 아버지와 함께 약국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제임스 테일러)는 불어, 라틴어를 가리키며 산수도 직접 가르쳤습니다. 허드슨은 두 명의 누이동생들(아벨리아 세 살 아래, 루이자는 여덟 살 아래)과 함께 자랐습니다. 산수를 가르치며 아이들이 재미 없어하면 재미있는 화재로 바꾸었는데 “면적이 영국의 100배나 되고 표면 중 사람이 살 수 있는 부분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요.” “맞았어. 만일 중국인이 1m 간격으로 쭉 한 줄로 늘어선다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돌게 된단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훗날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허드슨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을 받았으면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령의 사명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전령이심을 믿고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0.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 눅2:11, 행13:23-3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행 13:23-31)

우리 나라에는 성명학(姓名學)이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학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 석자가 인생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믿는, 역학(易學)의 일종인 잡학(雜學)입니다. 성명학 관계자들은 성씨나 이름이 ‘금목수화토’ 오행(五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미래와 운명을 미리 점쳐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런 성명학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와 이름 석자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설령 사주팔자와 이름 석자가 인생 행로(行路)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할지라도, 우리 기독교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생일과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고로,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날짜와 그 지음 받은 이름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 인생을 얻은 구원의 날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지음 받은 이름이 더 중요합니다. 그야말로, 팔자가 바뀐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얻게 된 새 이름은 그리스도인, 성도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는데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높은 이상들을 설명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방법과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즉 석가모니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설명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사해주거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한사람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한 사람이 “왜 위험한 강물에 들어갔느냐? 가지 말라고 했지 않더냐?”
다른 사람은 “손을 이렇게 하고, 발을 이렇게 하여 수영을 하여 빨리 물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웃옷을 벗고 물 속에 첨벙 들어가 그 사람을 붙잡아 나왔습니다.”
한사람은 유교이고, 다른 사람은 불교이고, 또 다른 사람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달려 자신을 희생한 분입니다.
기독교가 왜 세상의 영화를 부러워하지 말고 경건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이 땅의 축복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 문제를 생각하면 이 세상의 축복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 땅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땅의 축복도 의미가 있어집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 재물과 시간을 사용할 것입니다. 좀 나은 사람들은 사회의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나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물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인간에게 제일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미국의 대통령이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서 한국에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난리가 날겁니다. 미 대통령이 나 한사람을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에 온다면 그것은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미국 대통령이 와서 이 세상의 물질과 권세를 어느 정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도 내 영혼을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정도이겠지 나를 위해 희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전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아멘-

예수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실 것이다.” 또는 “구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누가 지어 주셨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누가 제일 권한이 있습니까?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아버지 되는 요셉에게 친아버지인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마 1:20-21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직접 예수(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뜻으로 말하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나의 “구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분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기는 해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뜻과 의미를 모른체 부르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예수 이름이 왜 능력이 있습니까? 왜 예수이름만 부르면 마귀가 도망갑니까? 죄인은 누구를 보면 도망갑니까? 첫째는 자기가 죄지은 사람을 만나면 도망갑니다. 그리고 경찰을 보면 도망갑니다. 마귀는 예수님만 보면 도망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사단은 도망갑니다.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그분이 사단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 가신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예수 이름 불러서 손해본 사람 있으면 말해 보세요. 예수 이름은 절망에서 소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엡 1:21) 하셨으며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예수(구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에 대해서 조금 더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음으로 종교적 삶(권리와 의무)을 시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하나님은 그의 생애 속에서 생동력 있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 역사 하시는 실제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해 주어야 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2)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구주를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3:23-31의 말씀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날 유대인 회당에서 증거 한 것입니다(행13:14). 바울과 일행은 안식일에 이 유대인 회당에 가서 앉아있었습니다. 회당장이 성경을 읽은 후에 사람을 보내서 바울 일행에게 할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손짓을 해가며 유대인에게 증거 합니다(행 13:16).
바울이 증거 한 핵심적인 것은 예수님은 구주라는 것입니다.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리고 26절에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상표 인지도를 조사하여 보고한 것에 보면 전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코카콜라”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어보고 그리고 “예수”를 들어보았냐고 질문했습니다. “코카콜라”를 들어보았다고 대답한 사람은 조사대상 사람 중에 9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들어봤다는 사람은 70%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 회사의 브랜드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을 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전합니까? “예수” 이름만 전하면 됩니다.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카톨릭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예수님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해야 됩니다.
♬ 1245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거짓 증인들을 조심하십시오.
상표도 유명해지면 가짜 상표를 붙여 파는 악덕 상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유명하고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5)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형편없는 생활을 하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알렉산더 대왕이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대왕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화가 난 대왕이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 이름을 대라”
병사는 세 번째도 똑같은 말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대왕은 “너는 네가 지은 죄만큼 벌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고치든지 선택하도록 하라. 아무도 내 이름 알렉산더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링컨은 “남자 나이 40이 지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이름과 역할이 있다. 역할과 이름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그 사람은 위인이 될 수도 있고 지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름 값을 다 못해 얼굴을 들지 못하곤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으로서의 명분과 책임을 다하지 못해 비난의 대상이 될 때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 우리 가정의 문제, 나의 문제들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 불러 보세요. 예수 이름 자체가 능력이요, 구원이요, 생명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주앙교회 이름에 자부심을 갔습니다. 어떤 분은 약간 현대적이지 못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만을 바라보라! 주님을 만을 바라보라! 온전히 예수 이름만을 부르라! 이런 성도들에게는 구원과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9.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 마 1:16, 막 8:29-31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29-31)

참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드린 것이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10년이 지나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세월은 참 빠르다. 그 때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모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는 세월 잡으려고 급하게 사는 민족 중에 우리민족을 따를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한국사람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현지 가이드들은 다른 말은 몰라도 “빨리 빨리”는 압니다. 저도 패키지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빠른 보트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아옵니다. 그런데 유럽사람들은 늦게 일어나 느린 큰배를 타고 서서히 그 섬을 돌려고 오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말도 빠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컴퓨터 시대에는 한 단어라도 줄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미개한 말일수록 단어가 길고 문장이 깁니다. 원래부터 한국말은 간단합니다. 신체를 부르는 말은 거의 단음절로 되어있습니다. “눈, 코, 입, 배, 젖, 손, 팔”이 모두 단음입니다. 두 음절도 있지만 그것은 “머리, 다리, 허리”처럼 규칙적인 꼬리를 가지고 있어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은 미분화 현상이라고 해서 “머리 깍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 카락을 깍는다”로 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미장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나 머리 잘랐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아니 미장원이 머리 자르는 사형장입니까? 외국인이 한국 사람을 보고 “빨리 빨리”라고 놀림을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빨리 빨리”가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그들이 한국사람 부르는 소리가 “빨리 빨리”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불러주면 제일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인 “크리스찬”으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빨리 빨리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일 많이 붙여지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Cristov”)라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이 단어의 횟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적용된 것만(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은 제외) 약 535개가 나옵니다. 제가 1년 동안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오늘까지 49번을 했습니다. 참 다양한 예수님의 칭호, 상징, 은유적이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제목들을 주보에 적어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성경저자들은 그 시작에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누가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증거 했습니다.
신약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전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Cristov”)라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입니다(요 1:41, 4:25). “메시야”를 헬라말로 번역했을 때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메시야”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란 말이 많이 사용된 것은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대인에게보다는 헬라지역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전 세계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도 그리스도인을 크리스찬(Christian)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돈만 있으면 가지 못할 이 땅의 어느 곳도 없습니다. 단 한곳을 빼고는요. 바로 북한입니다. 그러나 북한도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맺고 백두산(장백산)을 구경가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가 왔습니다. 이 때 가이드하던 자매가 있었는데 조선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두산 정상에서 교회를 다녀보지 않아서 아멘이라는 말도 모르는 가이드자매에게 어떤 장로님이 기도하면서 “아멘”하고 그 자매가 묻길레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아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때 관광객 중 “평신도”라는 깃발을 꺼내 들어서 이 자매가 생각하기를 아 남조선에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북도, 경기도”가 있는 것처럼 남조선에는 “평신도”가 있구나 생각했답니다.
성도의 이름을 통일한다면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찬으로만 부르면 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는 ‘기름부음’의 뜻으로 제사장(출28:41), 왕(삿9:8), 선지자, 예언자(왕상19:26)에게 해당하는 용어입니다. 사무엘상 16:6에서는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으로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사용되었습니다(시2:7, 100:4 등).
그리고 사람들(유대인)은 다윗과 같은 왕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대망(메시야)사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자신의 저서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고 했습니다. 예수가 바로 기다리던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보통 사람(랍비)과 달랐으며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이 다시 보내신 엘리야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가 본문 막 8:29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자신을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 나와서 장사나 하려는 사람이 있고, 병든 몸이나 나아보려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름부어 보내신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 있은 후에야 예수님은 본문 30절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0-31)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앞일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비밀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실 때 하나님의 비밀의 능력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제자들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4:40-41에 “40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 조용히 자신의 앞날을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들의 부르짖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은 사역이 더 남아있는 상태여서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사역에 방해를 일찍 받으시는 것을 피하시기 위해서 꾸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1-10)고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이 한 말씀에 나면서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고 찬송을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이름이었는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 인생이 송두리채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엇인데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고 세상이 해결할 수 없던 일도 회복시키고 해결케 되는지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두 가지로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① 내게 있는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뿐이란 말입니다.
② 네게 줄 것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뿐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있는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요 네게 줄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란 말씀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먼저는 내가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평안도, 기쁨도, 능력도, 은혜도 내가 먼저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먼저 주앙교회 성도들이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내가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복음을, 기쁜 소식을 전합니까?
왜! 사람이 감추려고 해도 얼굴에 너무 좋아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 있지 않습니까? 혼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실컷 웃고 즐기고 싶은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정말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염소를 하나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이것 드렸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해보자는 것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인 우리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각자 영생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산으로, 골방으로 가도 해결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무 기쁘기 때문에 복음은 전하지 않으려 해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기쁜 사람의 얼굴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8.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 엡 4:15-16, 5:23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제가 공원에 앉아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데 비둘기를 보았더니 다리가 멀쩡한 놈이 별로 없었습니다. 뒷발이 부러진 놈, 옆 발이 부러진 놈, 한 마리는 아직도 실이 얽혀져 있어 잡아 가지고 풀어주려고 했으나 푸드덕거리더니 도망가 버렸습니다. 저도 살려고 인간 가까이 다가왔으나 살아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상처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좀 배가 고파도 산비둘기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없는 한적한 곳 자연만 있는 곳, 오히려 그곳이 이들이 살기에 더 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죽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살겠다고 먹이를 주어 먹으러 오는 모습은 우리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도 비둘기 보다 별로 나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닙니다. 다리만 아파서는 죽지 않습니다. 머리가 상하면 죽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사단과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 있습니다.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심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머리를 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꿈치 약간을 상하게 됩니다. 시편 74:13에서도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사망 직전에 있습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꿈치만 상했습니다. 사단의 머리가 깨어진 후에야 교회가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최고의 인사는 머리숙여 절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찾아온 장면입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창 43:28)고 했습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땅에서 나와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출 12:27)고 했습니다.
세상 많은 민족이 인사하는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은 최고의 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겸손히 낮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도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합니다. 고개 뻣뻣이 들고 있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겸손을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북한에는 “숙인 머리 베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잘못을 진실로 뉘우치는 사람은 관대히 용서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머리에 면류관을 씁니다.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출 29:6)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출 29:7)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 21:3)
머리가 신체 중에 제일 귀중한 부분이기 때문에 머리에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예식, 왕이 되어 면류관을 머리에 씁니다. 마라톤 우승자는 월계관을 씌어줍니다. 미스코리아는 미스코리아 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잠언서 기자가 말한 관입니다.
잠언 1:8-9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
제물에도 머리에 안수했습니다.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 오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출 29:10) “너는 또 수양 하나를 취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수양의 머리위에 안수할지며”(출 29:15)라고 했습니다. 또 레위기에 보면 재물을 드릴 때마다 “머리에 안수하고”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그냥 드리면 되지 왜 머리에 안수하고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안수”예식을 행해야 우리 인간을 대신해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수하지 않으면 그냥 양, 소를 드리는 것이지 우리 죄를 담당한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리는 신체의 다른 부분과 구분되었습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5)
“그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민 6:7)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예수님이 말씀하신 머리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 5:36)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눅9:58)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 10:30, 눅12: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 26:7, 막14:3)

교회의 머리되심
“머리”는 지체를 인도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은 곧 교회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교회가 바로 섭니다.
“두 사람의 머리는 한 사람의 머리보다 낫다.”(헤이우드)고 했습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둑둘 때 보면 9급이 100명 모여도 1급 한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머리로 하는 것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합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음을 합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머리를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려고 한다면 안됩니다.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며 운영은 하지만 머리는 되지 맙시다. “주앙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아멘
본문 엡 4: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한 지체라고 비유했을 때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전에서 비둘기 팔고 세금내기 위해서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왜 엎으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머리가 당시의 대제사장이 마음대로 하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쳐 준대로 일러 준대로 만 하시기 바랍니다.

두개의 머리(탈무드)
탈무드에는 어떤 사고법을 단련시키기 위해 현실성이 부족한 원리와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어린아이가 태어났다면, 이 아이를 한 사람으로 대우해야 하는가. 아니면 두 사람으로 대우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는 것 같지만, 예를 들어, ‘인간은 설령 머리가 둘 이더라도 몸통이 하나이면 한 사람이다’라든지 ‘머리 하나를 한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태어나 한 달이 지나면 예배당으로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 이 때 머리가 둘이면 두 번 축복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몸통이 하나이니까 한번만 받아도 되는가? 또, 기도할 때는 작은 주발을 머리 위에 얹는데 이 때 머리가 둘이니까 두 개의 주발을 얹어야 하는가? 혹은 몸통이 하나이니까 한 개의 주발을 얹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이 가설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겠습니까? <탈무드>의 답은 아주 명쾌합니다.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다른 쪽 머리도 뜨겁다고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만일 다른 쪽 머리가 무표정하게 있으면 두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유태인들이 어떤 민족인가를 이야기할 경우, 이 이야기를 잘 인용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에 있는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거나, 러시아에 있는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른다면 그는 유태인이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유태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지체라면 머리는 한 분 예수그리스도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우리 지체 중 하나가 아프면 그리스도는 아프신 것입니다. 즉 교회에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아픔과 슬픔, 기쁨을 함께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따로 따로 느낀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머리되시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왕의 머리가 되심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되실 뿐만 아니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5)
이 땅의 모든 왕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알면 이 세상의 왕도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역사상 제일 큰 민족을 이루었지만 그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맷돌로 골리앗을 이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면 이긴다는 것을, 승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의지했습니다.
왕은 한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에도 있습니다. 가정에도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곳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요, 왕이 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자기가 머리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여보게 친구, 자네의 긴 주둥이로 내 목의 가시를 좀 뽑아줄 수 있겠나, 사례는 충분히 하겠네”
학은 늑대의 입에 긴 주둥이를 집어넣고 목구멍에 걸린 가시를 어렵게 뽑아냈습니다. 늑대는 그제 서야 살 것 같았습니다.
“옳지 됐어, 참 시원하군, 이렇게 좋은걸”
학은 늑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 약속한 사례비를 좀 주시지요”
그러자 늑대란 놈이 화를 벌컥 냈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구, 네 머리가 내 입에 들어갔을 때 깨물어 토막을 내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해라”
이솝우화의 한 토막입니다. 세상에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주앙교회 성도여러분 주님의 은혜 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니까 내가 왕이 되고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7.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 마12:1-8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1-8)

제가 이스라엘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안식일 날(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이다) 옆집에 사는 유대인이 달려와서 가스 불을 아이가 켰는지, 켜져서 그것을 끄지 못하고 빨리 와서 그 가스 불을 꺼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 집에 가봤더니 잘못하면 불이 날 뻔할 정도로 가스 불이 타고있어 그것을 꺼준 일이 있다고 합니다. 불을 끄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 금지법 37번째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교수들은 안식일에 사인을 안 합니다. 안식일 금지법 32번을 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 39가지 구체적인 안식일 금지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속에서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배고팠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그런데 밀 이삭을 잘라먹었던 것은 “시장하여” 먹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으면 안 되는 것쯤은 알고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일입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안식일 금지법을 몰랐겠습니까? 충분히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히 “시장하여”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 이삭을 잘라먹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익히지 않은 밀만을 먹은 적은 없지만 밀가루를 어려서 먹어본 일은 있습니다. 익히지 않은 밀이 맛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먹었던 것입니다. 한국속담에 “배고픈데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중, 상류층에 속해있었던 바리새인들은 배고픔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야하는 제자들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을 잘라먹었겠습니까? 흔히 배고프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말합니다.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북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너무 배가 고파서 밖을 보니 돼지가 지나가고 있어 그것을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자리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모른 척 하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먹는 문제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밀 이삭을, 그것도 안식일 날 따먹는 것을 보고만 계셨습니다. 제자들만 배고픈 것은 아닙니다. 육체를 입고오신 예수님도 제자들과 똑같이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나의 일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은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의 배고픔을 내버려두었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에 내려오는 문제는 제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받아야 하는 어려움 우리도 받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만 예외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 모두 똑같이 태양 빛을 주십니다. 혹 기도한다고 너무 특별한 무슨 은사나 있는 것 같이 말하는 분들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자들이 배고픔을 참으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배고프지만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우편에, 좌편에 앉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도 이 제자들과 똑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예수 믿고 축복 받을 생각만 합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을 확실히 받습니다. 하지만 제일 큰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이 땅의 잠시 지나가는 영화에 너무 욕심 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앞장 마 11:7-8절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7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제일 처음 한 시험이 먹는 문제였습니다.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3-4)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부터 제자들이 배고프면 밥 주고 아무 어려움이 없게 돌보시면 이 제자들은 온상에서 키운 풀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이 되어서는 나중에 순교할 수 없습니다. 순교는커녕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알지도 못하고 지금 바리새인들처럼 될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예전에 부모님 세대에 굶은 적이 있다고 하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라고 한다지요. 그렇게 키워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지 걱정이 됩니다. 좀 강하게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굶겨야 합니다. 그래야 배고픈 사람 심정을 알지요. 예수님은 지금 이런 배고픔 정도야 제자들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믿고 계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이 땅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다 주시는 것 아닙니다.

맛있는 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알프스 산록,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
아무리 맛있어 보이는 자연수를 손에 넣은들,
당신의 마음이 좋지 않으면 결코 맛있는 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아무리 맛있는 물이라도 맛이 없게 되고 맙니다.
땀을 흠뻑 흘리는 운동을 하고 나서
마시는 물은 수돗물이라도 맛있습니다.

항구에 정박한 한 상선에서 선장의 아들이 원숭이와 어울려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소년의 모자를 낚아채 돛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소년은 모자를 빼앗기 위해 정신없이 원숭이를 뒤쫓았습니다. 소년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발 밑을 내려다본 소년은 겁에 질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공포에 몸을 떨며 밧줄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선장이 돛대 위에서 울고있는 아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5. 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 요13:12-15

“12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한 소년이 담임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었습니다.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교사는 충혈 된 눈으로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며 다그쳤습니다. 소년은 어려운 가정형편을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하는 소년을 향해 교사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그로부터 17년 후 이 소년은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최후진술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선생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생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산헤드린 공의회나 율법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오합지졸의 사람들이 모여 다녔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제자의 절반 가량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고, 나머지는 마태(세리)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라 다니는 말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선생 될 자격이 있는 분이냐 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 또한 선생(랍비)될 자격이 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가 되려면 전통 있는 학문의 가문에서 배운 적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학문적 가문에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 40세가 되어야 랍비가 되는데 예수님의 현재 나이는 33세 이십니다. 유대인(세속적)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나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던 세 부류가 있습니다.

1. 대적 자들이 예수님께 부른 선생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눅 19:3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 8:4)
이 모두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진짜 예수님을 존경하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비꼬아서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그저 어떤 기적이나 요구합니다. 아직 믿음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따져 불으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목사도 표적이 됩니다. 자신이 어디서 하나 알고 온 것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질문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곤란한 질문들 그리고 “당신 목사니까 한번 해봐”라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변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2. 관심 있는 자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마 8:19)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막 9:17)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관심은 있었으나 자신들의 요구을 위해서 나아왔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답을 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기에게 손해가 안 난다면 하겠지만 작은 어떤 희생이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주는 대로만 먹고 말겠다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3. 제자들이 부른 선생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 1: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막 10:35)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선생이나 주가 아니라 본문에는 ‘호 디다스 칼로스’(@O didavskalo”)로 부릅니다. 그리고 ‘주’라고 부를 때도 ‘호 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의 호격에는 관사가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관사인 ‘호’가 붙은 것은 주격으로 부르고 잇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선생, 유일하신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많은 선생님중의 한 분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빌립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땐 ‘퀴리에’라는 호격을 사용하여 여러 일반적인 선생 중에 뛰어난 선생으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유일하고도 참된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경탄
어느 초등학생의 답안지(실화)
‘슬기로운 생활’ 문제 :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었습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할까요?
답 : 뭐 이런걸 다
문제 :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 까요?
답 : 그러게 말입니다.
문제 :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낸 사람은?
답 : 죽었다. / 요즘 아이들의 시험답안을 보면서 경탄을 합니다. 예전에 나올 수 없었던 답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마 7:28)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 13:54)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33)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한 마디로 아주 특별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께서 특별히 어느 가문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것을 배웠단 말입니까? 그에 대한 해답을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3:11절에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와 같은 선생이 되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생되지 말아야 합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선생이란 세속적인 선생, 즉 잘난 체만 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그런 선생을 말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이 선생 되심을 스스로 밝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과 같은 선생이, 제자가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셨습니다. 이 행동은 상당히 의도된 행동이십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러 가야하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잃지 못할 교육을 시키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사막이 많아 먼지가 많고 이들은 센달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발이 항상 더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육의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목은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유언을 물었습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주십시오.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다구요.”
어린 군인은 짤막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후 어린 군인은 무슨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숨을 헐떡이면서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구요.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군목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마지막 유언을 들려주었습니다. 여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결심했어요. 다음 주일부터 다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일관되게 가르치신 것 하나가 있습니다.
.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 높아지지 말고 스스로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행동으로 이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전에 앞서서 예수님은(요 12:14) 예루살렘에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조롱 말이나 타고 가셔서 솔직히 어디 왕 같아 보이십니까? 큰 군말을 타고 가셔야 되지요. 그런데 스스로 작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겸손, 낮아짐, 섬김”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은 선생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6. 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 히9:11-15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 15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1-15)

어떤 신발가게 주인이 한 켤레는 10만원, 한 켤레는 5만원의 가격표를 붙여놓고 고객들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10만원 짜리 구두를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값비싼 구두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값싼 것은 뭔가 결점이 있다. 값이 비싼 것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너무 값싼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구원을 너무 값싸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결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엄청난 희생의 값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성경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 되시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먼저 멜기세덱의 제사장 우월성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런 이유는 예수님이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1)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권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2) 아론보다 먼저 제사장직을 받음으로 율법아래 있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후손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제사장에 대해서 히 7: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레위지파만이 대제사장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지파의 자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직을 의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 멜기세덱이라는 아브라함 때의 대제사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제사장직이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멜기세덱 혼자하고 레위지파처럼 대물림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멜기세덱만으로 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또 내려가는 다른 제사장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마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의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대제사장들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옷은 방울이 달려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방울 소리가 안 나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가서 그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대신해서 사함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제사는 완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이들이 드리는 제물은 자신이 아니라 백성을 대신한 양과 염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본문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직접 드린 제물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선배목사님이 이렇게 권고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 병이 내게 옮겨와도 좋으니 이분의 병을 치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자녀의 고통을 내가 가지고 갈테니 내 자녀에게는 그런 시련을 주시지 말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만큼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단번에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 솔직히 우리는 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분은 죄가 있으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그분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구역의 멜기세덱을 비유로 들어 이미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도 대제사장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은 아론으로부터 내려오는 레위지파에서 오는 정통성을 말해오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긴 설명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긴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분이 이미 이 세상의 죄인들과 같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역시 레위지파의 대제사장이 해결하지 못했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분이라는 것 또한 믿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제사장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은 시기합니다.
기술개발을 하거나 내가 생각한 것이 이미 다른 사람이 생각했었고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기운이 빠집니다. 내가 독창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미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한마디로 기득권의 반격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공의회원 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닌데 그들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점점 교만하여져 가면 진짜 예수님이 오셔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누려야할 자리에 가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누가 필요해서 세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직접 아들을 보내셨으니 그것을 직분이 마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동안 특권을 누렸나 봅니다. 여러분 어느 자리에 있던지 마음을 비우십시오. 이 땅에서 영원한 직책과 직분은 없습니다. 어짜피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본문 11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는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에 대 제사장으로 오셔서”로 번역했습니다. “장래”(게노메엔온)은 “…하려고 하다”로 부정과거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오사(파라게노메노스)” 또한 부정과거형으로 “이미 오셨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즉 십자가에 이미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15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중보(메시테스)”, “화해자, 중재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씀이십니다.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때(첫 언약한 때)에 이미 하나님을 떠났으며 그로 인해 가나안땅에 빨리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단순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제사였지 사람의 죄를 없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전한 속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4절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2,000규빗을 대충 계산하면 1km 정도입니다. 1km 정도 뒤에서 따라가면 앞에 무엇이 가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언약궤를 아무나 만지면 죽습니다. 대상 13:10절에 보면 웃사가 언약궤를 만지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가 또 있습니다. 구약 시대 때 죄인의 몸으로는 하나님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한 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만큼 그분과 가깝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고 하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페루의 선원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우리는 지금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소”
페루 선원들은 아마존 강물을 퍼올려 스페인 사람들을 먹였다. 그제 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스페인 선원들은 사실 넓은 아마존강에 떠 있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바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경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낀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이름의 바다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카칼에네노이)”은 하나님께서 초청한 잔치에 청함 받은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된(마22:8, 계19:9) 완료 수동태 주격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이미 정해졌으나(엡1:4)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직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저와 여러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여 모두가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님 대제사장 되심
(1) 하나님이 명하신 바요 (히5:5).
(2) 맹세로써 제사장을 삼으신 바요(히7:21).
(3) 죄가 없으신 바요(히7:26).
(4) 제사장의 직분은 갈리지 아니하는 바요(히7:23-24).
(5) 제사 드리신 것이 완성하고 또 있는 바요(히7:25).
(6) 그 대신 간구 하심에 온전한 특권이 있는 바요(히7:25).
(7)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되심은 하나님을 대리하시고 사람을 대신하여 행하시는 권한을 받으신 바이다(히1:-2:)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4.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 고전 15:45-50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45-50)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렘 44: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고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첫 아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에덴 동산의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의 각종 먹을 것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안전한 낙원이었습니다. 특별히 더위나 추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되는 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쫓겨나자마자 그들은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상하고 병들어서 힘에 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워서 몇 번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이 지키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그 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덴을 바라보며 두 부부는 쓸쓸히 그곳에서 발길을 또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첫 아담의 실패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소망합니다. 그 증거로 성공에 관한 책과 지도자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 사울, 가룟 유다의 실패와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의 실수 등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실패자 중에 최고의 실패자는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공 중에 성공인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실패는 아담 자신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실패이며,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첫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믿음의 성공자가 됩시다.

첫째, 탐욕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창 3:5). 하나님은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줍니다. 이 때,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우리는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어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하고, 사단보다 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합니다(창 3:1 하). 이것은 오늘날 이단들도 동일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창 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지키면 누구나 인생의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마 4:4).

셋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 전가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말하면서, 아내에게 책임을 떠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에 대해서 감사는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넷째, 회개하지 않았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보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잠 28:13). 하나님이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징벌하려고 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즉시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바로 성공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 내려온 죄

아담의 교만(욕심), 불순종, 회개하지 않은 것은 아담의 한 사람의 문제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도 쉬어(울고) 넘는다”는 옛 시조의 고개일까요? 아니면 박달나무로 우거진 문경 ‘새재’의 고개일까요? 또 아니면 임꺽정이 지키고 있었던 ‘까치 고개’일까요? 아니면 지금은 터널이 뚫어있는 대관령 고개일까요? 아닙니다. 그 고개는 지금 봄의 끝자락에 있는 이 때쯤이 제일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릿고개”입니다.
인사말은 그 나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영국에서는 “굿모닝” 좋은 아침이 그 사람들의 인사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 개조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후(안개)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국 사람들이 왜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아침 인사란 것이 없고 언제나 만나면 “봉주르”하면 됩니다. ‘봉’은 ‘좋은’, ‘주르’는 ‘낮’이란 뜻인데 향락문화가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늦게 일어나는 것이 예의이고 귀족들은 오후에 생활을 했답니다. 그래서 괜히 아침 일찍 여자가 다니면 창녀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답니다.
몽고 사람들은 모든 것(음식, 의복, 연료 등)을 가축에 의지하여 생활하다보니 “당신네 집 가축은 살이 얼마나 쪘습니까?”가 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고 나왔냐”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죽는 사람도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였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많습니다.
아담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사망이 왕노릇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불평, 불만은 많이 하면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 에요. 마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 야죠. 목사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다니는데 먼지가 자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다는 겁니다.
미국은 요즘 시끄럽습니다. 이라크를 해방시켜 주겠다고, 핵무기, 화학무기를 찾겠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름 빼앗아 오려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라크 해방”은 명분으로 내어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잔학한 짓을 한 것이 탈로 난 것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갖은 모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 이라크 해방군입니까? 그래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청하면서 겉으론 평화를 내걸고 사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 인권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본인들만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저쪽 중동의 국민들만 죄인시 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은 또 한번의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도 역시 아담 이후 내려오는 죄의 문제를 안고있는 첫 아담의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고 또 내가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어도 따먹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가 바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로, 규칙적인 경건 생활로, 선교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9시 15분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회심을 하고 “그가 내 죄, 곧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셨으며 나를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시조인 아담의 후예이나 또 한 사람의 다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여 생명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있음을 저는 감사드립니다. 죄의 문제가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첫째 아담과 비교하기 위해서 이며 첫 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는 그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럼 성공한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과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 아담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탐욕이 없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사단이 시험한 것은 바로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시험입니다. 천하세상을 보여주고 다 주겠다고 한 사단의 소리는 바로 첫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사단의 소리를 들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오직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지시는 것만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늘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결과 첫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후 아담을 통해서는 이 죄가 단절되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탐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하늘에서 나셔서 오셨고 하늘의 생각만을 했습니다.
지금도 누가 욕심이 많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욕심이 많은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죄의 육체로 하늘의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한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체는 이 땅에 벗어버리고 아프지 않고 썩지 않을 새 육체로 갈아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서는 교회에서 만나지만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이 아닌 곳에 있다면 반드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