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3.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11:1-44

예루살렘에서 약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는 동생 마리아, 마르다하고 단촐하게 살고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2절)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음 12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기 전이며 나사로를 살리기 전이지만 예수님과 이들은 이미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라고 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은 나사로 였습니다.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 가정 역시 어떤 어려움이 있어(어떤 심각한 질병) 이곳에 살고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두 여동생은 이 급보를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계신 곳(요10:40: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주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이 사이에 나사로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고 결국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고 있는 것이면 깨우면 될 정도로 병세가 호전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절)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은 예수님이 속히 오시지 않고 이러한 급보를 들으시고도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고 계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게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의 죽음은 두 자매에게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채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래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왔습니다. 이 때쯤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지만 마리아는 일어나 맞이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아직 그대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이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께서 당장 나사로를 살려낸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고 즉석에서 질문하셨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27절에서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달려나오지 않은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찾으신다는 말에 마리아는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가 한 말하고 똑같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섭섭한 말을 토로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대인들과 마리아가 모두 울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저들과 같이 슬퍼하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33절) 계셨습니다(이 슬픔 속에는 분노와 어울려 노여움도 포함되어 있다). 사별의 슬픔에 잡힌 자매의 마음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자신도 비통함에 잡히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결과가 우연이 아닌 사단이 우리를 그리로 몰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전15:26에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라고 부르는 것에서 사망의 쇠사슬을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도 남음이 있는데 ‘빛이 있으라’하시는 창조적 말씀처럼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예수께만 존재할 수 있는 창조적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사망의 권세도 계속해서 나사로를 붙잡아 놀 수는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셨던 특징을 이해함으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나사로가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잠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급히 서둘러 길을 떠나시지 않았고 언제든지 그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에, 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과 살아나게 하심을 통해서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실 수 있는 분은 창조자가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우리 모든 육체를 살려낼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1절) 이것은 우리의 기도모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 신적 권한을 부여받아 오신 분으로 나사로를 살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미 이러한 권한을 부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나사로 이외에도 이미 다른 복음서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막5:22-43)과 나인 성에서 한 과부의 아들(눅7:11-17)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죽은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기절’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17절)는 진술은 그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체는 썩어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더 확신을 만들어준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25절)으로서 자신을 확실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동기
나사로를 우연하게 단순히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 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절)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은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딱 한번 더 나오는데 누가복음 19:41에 예루살렘
배고픈 독수리가 비둘기를 잡아먹으려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다가 밑에 굴이 보여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독수리는 독 안에 든 쥐라며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으나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굴은 독사의 굴이었습니다. 독사는 굴러온 떡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문제와 문제, 죽음과 죽음 사이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인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구구구구 외쳤습니다. 너무 멀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가 포기하지 않고 외치자 드디어 주인이 비둘기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인은 일단 독수리를 쫓고 곧 이어 독사를 죽였습니다. 비둘기는 마침내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뿐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눈물을 흘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게세마네의 기도에서도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에 우신 것은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는 살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우셨습니까? 그것은 사망(사단)의 권세가 저들을 감싸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눈물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이 사망의 눈물을 거두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27절)고 대답했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실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원문의 “감취었음이니라” kevkruptai(케크뤼프타이)는 현존적 현재 완료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얻은 생명의 효과가 현재 주어진 것이며 영원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세상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영원한 비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입니다(고전2:14, 요일3:2). 마지막 예수님 재림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에 꼭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어서만 천국에 빨리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고 하셨으며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이 땅의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땅의,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먼저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이젠 힘에 부치네요
(몇 일전 제게 온 상담 메일입니다. 실명이 아니기에 공개합니다.)

삶의 무게가 오늘도 나에겐 버겁다.
난 오늘도 이곳 저곳을 전전하면서 돈을 벌만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러나 어제처럼 그제처럼 일자리는 없었다.
혹 있다고 하더라고 신용불량자이기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신용불량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카드를 쓰는건 외상으로 소잡아 먹는 거라며 반대를 했던 나인데 나 역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걱정하고 삶에 비애를 느끼면서 자살까지 생각을 한다.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을 보면서 부럽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처음엔 한 장 또 다음 또 다음의 순으로 신용카드가 많은걸 무슨 자랑인냥 은행에서 현금 서비스를 마구 받아서 나도 재벌의 꿈을 향해서 주식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정과 의지가 강해서 조금의 이익이 생겼으나 그건 정말로 나에겐 땀을 흘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래서 무리를 하게되었다.
참 이이러니하다 나 같은 인간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었다는 게, 투자금액이 크면 이익도 크다라는 나만의 착각으로 무리를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카드대금은 한 달에 한번씩 한 달에도 열 번씩 소위 말하는 돌려치기 방법으로 결제를 했지만 떨어지는 주가에 꼬박꼬박 카드대금의 이자와 수수료를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다.
결제 일이 늦어지면 한도액이 줄고 한도액이 줄면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결제를 하고 그러다 여동생의 카드를 빌려서 간신히 돌려서 결재를 하는 상태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원금이 계속 들어가야 하기에 꾸준한 수입이 없는 난 가족들의 카드를 몰래 이용해서 결재를 하였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카드를 몰래 가지고 나와서 결재하고 하루 하루를 연명하였다.
전에 장사하다 당시에 나의 실수로 부모님께 큰짐을 드린 관계로 이번 일은 말씀을 드리지도 못한다. 혈압이 높으신 아버지 그리고 엄마 또한 말씀을 드린다고 한들 갚을 길이 없다. 나 역시 우리 집 가족의 구성원이기에 우리 집 사정을 잘 안다
앞이 깜깜하다 살고는 싶다 그렇지만 살아갈 힘이 없다. 난 빚이 너무나 많아서 살아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혼자서 애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동생에게 부끄럽고 부모님에게 더욱더 면목이 없다. 벌써 집을 나온지 4달 근근히 먹고는 산다. 그나마 날이 따뜻한 관계로 막일이라도 하면 소위 말하는 때껄이는 해결되지만 돈이 모이질 않는다.
못난 내 자신을 원망하면서 채찍질해가며 서글피 운다. 아들 하나라고 잘 키워주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다.
보고싶은데 얼마나 많이 보고싶은데 볼 수가 없다. 엄마 아버지 여동생과 조카 …
내 신용만 불량이면 되는데 가족들에게까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나라는 인간은 정말로 한심스럽다.
만약 나에게 새로운 삶이 다시 한번 부여된다면 열심히 살고싶다.
모든 게 다 나의 잘못이기에 난 절규한다. 어떻게 던 살고싶다고… 그러나 난 결코 자살은 안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자꾸 의지가 상실이 된다. 자살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삶의 끈을 놓았는지 이해가 간다.

 

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2. 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21:1-14

오늘 본문말씀을 정리하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야고보)과 다른 제자 둘(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빌립과 안드레로 추측한다) 모두 7명의 제자들이었는데 베드로가 먼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3절)하고 어찌 보면 먼저 선동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늘 먼저 말하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언제나 제자들의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6명의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이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디베랴 바다는 여러 이름으로 불러졌는데 바다를 중심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들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지역적으로 불려진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요6:1), ‘긴네렛 바다’(민34:11), 겐네롯 바다(수12:3), ‘게네사렛 호수’(눅5:1) 등으로 불러졌는데 “디베랴 바다”라고 불러진 이유는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그들이 이전에 하던, 갈고 닦았던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았지만 고기는커녕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서 계셨습니다. 아직 새벽인지라 물안개가 가려서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얘들아(5절) Paidiva(파이디아)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현재 어른들에게 사용되기도 하는 말인데 우리 식으로 옮긴다면 “여보게들, 젊은이들” 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예수께서 이 말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친근감을 더해주는 애칭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메 티)로 부정관사와 명사를 사용하여 이미 고기가 없음을 알고 계시면서 묻는 것이다). 제자들은 고기가 하나도 없다는 대답을 아마도 기운하나 없이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6절)고 하십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제자들이 아직도 주님을 몰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고 보기보다는 그저 지친 나머지 누군지 모르지만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눅5:1-11에서 유사한 경험(베드로를 부르실 때 예수께서 함께 고기를 잡았던 것.)을 했기 때문에 주님인지 아직 완전히 몰랐지만 그 말씀을 따라하면서 어떤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전율이 제자들의 몸 속에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제일먼저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7절).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 kuvriov”(퀴리오스)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벗고있던 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마 그의 기쁨이 주님을 만나는데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바다로 뛰어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제자들은 작은 배에 옮겨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사람이 감격과 감동하면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효력을 가진 사이몰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이몰핀은 암세포를 죽이는데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건강해지고 강건해진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감격과 감동의 연속적인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육지에 올라온 제자들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숯불을 피우시고 그 위에 고기가 놓여있었고 떡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잡은 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고기는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그물이 찢어져 버릴 만큼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16절)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확실히 주(主)신 줄 알게되었고 더 이상 묻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자신들에게 해 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장면입니까?

사실 제자들이 고기 잡을 정신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허전하니 잠시 고기 잡으러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녔던 제자들은 이미 세상의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오늘의 본문내용에서 나타난 주 kuvriov”(퀴리오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본문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 kuvriov”(퀴리오스)는 “주인, 절대자,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인데 성경에 나타난 주님은 어떤 분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 ‘프레드의 생선가게’가 있었습니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프레드는 음식솜씨가 아주 좋아서 생선으로 갖은 요리를 맛있게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드에게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을렀던 것입니다. 그는 너무 게으르고 나태해서 식당을 청소도 하지 않고 방치한 채 더럽게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이 더러운 식당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프레드의 식당이 더럽다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은 점점 줄고 급기야는 식당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주인이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식당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더러워진 식당 내부를 완전히 정리하고 청소하고 음악을 틀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식당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할 일도 없어진 프레드를 새 주인은 그의 음식 솜씨를 보고 주방장으로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새 주인은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광고를 보고 한 사람, 두 사람 이 식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위기, 깨끗한 식당 안에서 맛있는 생선요리를 맛보고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이 식당은 다른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데.”
이 소문은 금방 퍼지게 되었습니다. ‘프레드의 생선가게’는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포도밭 주인(막12:9), 동물들의 소유자(눅19:22, 마15:27), 청지기의 주인(눅16:3), 종들의 주인(엡6:5-6)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인줄 착각합니다. 만물에는 주인이 있는데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잠깐 맡겨진 청지기일 뿐입니다.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땅도 진실로 여러분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뿐이십니다.
혹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물의 주인도, 교회의 주인도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섬길 때 모든 문제들은 해결됩니다.

둘째, 주님은 모든 것의 주관자이십니다.
추수하는 주인(마9:38), 안식일의 주인(막2:28), 주의 날(요20:1, 행20:7, 고전16:2)의 주관자요 주인 되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의 심판자시요 날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일(부활일)은 예수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요 주님만을 위해서 필요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성도의 주님이십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롬12:11).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다 주님께 달렸습니다(롬14:14). 그러므로 주님께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고전11:27). 장차 오실 분도 주님이십니다(딤전4:15).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주님도 한 분이십니다(고전8:6). 우리는 이런 어마어마한 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주 kuriva/(퀴리아)가 여성형으로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부녀’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 유일한 용법은 요한이서 1, 5절에 나타납니다. 신부 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회들은 서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주앙교회도 중국의 00교회를 자매교회로 개척하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수님의 부활 후에 나타나신 장면에서 주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인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kuvriov”(퀴리오스)라는 용어가 이전에 나타난 주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롬10:9, 행2:36, 히2:6). 즉 사탄의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승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7절에서 요한이 주시라는 말을 할 때 그는 바로 지체할 겨를도 없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지금 배에 있는 고기 따위에는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로 부를 때 이미 배에 가득한 고기와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왔던 제자입니다. 그가 사실 먼저 다른 제자들에게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고 나갔었지만 이제 그곳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면 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교회에만 나오지 주님을 아직도 못만 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고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주님이 잡아주셨지만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그 물고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알아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 던져 버리고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베드로와 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최후의 만찬과 그리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살 때 루도빈코(Ludovinco) 백작의 부탁을 받아 주님의 최후 만찬 석상의 모습을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여기 저기 제자들이 앉아 있고 주님은 오른손을 뻗어서 잔을 쥐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걸작품을 완성한 다음 백작에게 넘겨주기 전에 친구들에게 먼저 보여주면서 평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그림을 본 친구는 “훌륭해! 너무 훌륭해! 특히 저 잔이 사실적이어서 그 잔에서 내 눈을 떼어놓을 수가 없네”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친구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빈치는 붓을 들어 그 잔을 지워버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혹 다른 곳에 우리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6: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자에서는 왕(王)자 위에 점을 더 찍어서 왕보다 높은 것이 주(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왕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는 누구에게나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은 한 분인 것입니다. 진돗개 같은 영리한 개는 평생에 주인을 세 번 이상은 바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혹 우리들은 주가 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아닌지요.
물질과 명예와 권세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있지는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가, 자식이 자신의 주인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가 되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한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2-3)
 

나의 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1. 나의 길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14:4-6

성경에서 예수님은 약 100가지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서 비유, 은유, 상징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금주부터 이러한 다양한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을 하나 하나 설교해 가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또는 지루하다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전달할 때 그 어떤 주제나 제목보다 강력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희 주앙교회가 월요일에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하는 설교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평소에 다 알고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바로 알고 따라가면 우리의 신앙은 반석위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왜 예수님이 나의 길이 되시는지를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산에 올라갔다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숲 속을 헤매다 가시에 찔리고, 나뭇가지에 맞고,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고 이렇게 한참을 헤매다 그만 뱀 소굴을 만났습니다. 뱀들이 바위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놀라서 무조건 숲 속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어렵게 깊은 산 속의 숲 속에서 작은 길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길은 저에게 생명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한숨을 크게 쉬고 길로 나아갔을 때는 이제는 되었다는 마음의 안도였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보니까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길을 찾지 못했을 때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가고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세상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길하고는 차원이 다른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원은 oi[date(오이다테)로 완료형이지만 현재적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형은 아니기 때문에 “알리라”의 번역보다는 [너희가 알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오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5절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마가 말했지만 “우리가”로 말함으로 다른 제자들도 포함하여 함께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심정은 사도행전2장에서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알고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미래에 알게될 것이지만 현재 완료형으로 표현하여 이미 알고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싶게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나 어떻게 나았어’라고 물어보면 ‘이 다음에 다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아이가 성장하면 반드시 알게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너는 이미 알고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논법입니까?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확신을 당겨와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해하고 있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때는 분명히 알게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예지 능력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신 말씀이다.
 

둘째, 도마가 생각하는 길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이 달랐습니다. 도마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로 말하므로 실제로 사람이 걸어다니는 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도마의 질문에 대답한 말씀으로 !E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형식으로 대답하셨는데 이러한 용법은 요한이 일곱 개(요6:48, 요8:12, 요10:9, 11, 요11:25, 요14:6, 요15:1)를 사용했는데 그 중에 여섯 번째가 됩니다(참고. 요15:1). 예수께서 “길”이 되시는 것은 그분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옛날 미국 뉴욕주에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과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두 청년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이었지만 아주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은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고, 믿지 않는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기독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은 예수를 잘 믿었을 뿐 아니라 신앙이 아주 좋은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 청교도적인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누군가가 이 두 집안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맥스 쥬크스 집안에서는 1,026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약 300명 정도가 조산으로 일찍 죽었고, 약 100명이 평균 13년 간씩 교도소에서 복역을 했고, 약 190명은 매춘부 노릇을 했고, 약 100명은 술고래가 되어 그 말로가 아주 비참했다고 합니다. 이 집안이 뉴욕주에 부담시킨 비용은 120만 달러라는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즉 국가에 공헌하기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끼치고 부담을 준 집안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집안에서는 모두 729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300명에 이르는 자손이 목사가 되었고, 65명이 대학 교수가 되었고, 13명이 대학 총장이었고, 그리고 50명이 유명한 베스트 셀러의 저술가였습니다. 이 집안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이 공헌을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길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 문명이 그렇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길’을 잘 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세계에서 국토도 넓고 인구도 많은 중국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것은 ‘길’을 닦기보다는 성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길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닦으신 새롭고 산길입니다.
구약의 성소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소이고 또 하나는 지성소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하루에 한 차례 들어가서 분향하고 등불을 켜는 일을 했습니다. 성소 안쪽에 있는 지성소는 일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일이 이처럼 제한된 이유 가 어디 있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 둔 곳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특별히 하나의 이름 둔 것이요 머물러 계신 곳이 성전이기에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제사장이라도 반드시 속죄의 피를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자신의 죄를 씻는 속죄의 피가 없으면 제사장이라도 성전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보좌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에 있는 곳을 시은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왜 길을, 다리를 다시 닦고 놓습니까? 예전 길로는 다리로는 건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provsfaton(프로스파토스)는 성경 중에서 본 절에서만 기록된 것으로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으로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진 “산” zw’san(조산) “살아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사람들은 지성소에 자유롭게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장벽으로 여겨졌던 휘장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찢어졌습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휘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얇은 커텐이 아닙니다. 양피지나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쉽게 찢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나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번 잘못 들어선 길은 평생을 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이제 상처만 입고 돌아왔습니다.
이 길은 평생에 가는 길이지 가다말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이 길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욥은 그의 대답에서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욥12: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십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렸다면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아들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길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한번 찾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길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저와 여러분이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일곱 살 된 손자에게 아랫동네 큰 할아버지 댁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이는 심부름을 가다가 풍선장수가 예쁜 풍선을 팔고있는 것을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고,
다시 길을 가다가 동네친구들을 만나 함께 구슬치기를 하며 재미있게 놀기도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돌 뿌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소매로 피를 닦고 조금 쉬었다가 일어난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시간이 지나 해질 녘에야 큰 할아버지 댁에 무사히 도착을 했습니다.
큰 할아버지는 아이를 보고 무척 반가운 듯 말했습니다.
“네가 먼 길을 어떻게 혼자서 왔니?”
“할아버지 심부름 왔어요”
“그래, 무슨 심부름이니?”
“ …………………..”
아이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오는 사이 그만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보다 더 먼 길을 걸어왔는데도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고 있단다.”라고

자신이 지금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금 우린 예쁜 풍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져 있진 않은지,
또 친구와 어디선가 놀고 있진 않은지, 일상의 여유도 필요하지만 정확한 길을 걸으면서 가고 있는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