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1. 나의 길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14:4-6

성경에서 예수님은 약 100가지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서 비유, 은유, 상징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금주부터 이러한 다양한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을 하나 하나 설교해 가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또는 지루하다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전달할 때 그 어떤 주제나 제목보다 강력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희 주앙교회가 월요일에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하는 설교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평소에 다 알고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바로 알고 따라가면 우리의 신앙은 반석위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왜 예수님이 나의 길이 되시는지를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산에 올라갔다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숲 속을 헤매다 가시에 찔리고, 나뭇가지에 맞고,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고 이렇게 한참을 헤매다 그만 뱀 소굴을 만났습니다. 뱀들이 바위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놀라서 무조건 숲 속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어렵게 깊은 산 속의 숲 속에서 작은 길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길은 저에게 생명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한숨을 크게 쉬고 길로 나아갔을 때는 이제는 되었다는 마음의 안도였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보니까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길을 찾지 못했을 때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가고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세상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길하고는 차원이 다른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원은 oi[date(오이다테)로 완료형이지만 현재적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형은 아니기 때문에 “알리라”의 번역보다는 [너희가 알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오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5절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마가 말했지만 “우리가”로 말함으로 다른 제자들도 포함하여 함께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심정은 사도행전2장에서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알고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미래에 알게될 것이지만 현재 완료형으로 표현하여 이미 알고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싶게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나 어떻게 나았어’라고 물어보면 ‘이 다음에 다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아이가 성장하면 반드시 알게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너는 이미 알고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논법입니까?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확신을 당겨와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해하고 있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때는 분명히 알게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예지 능력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신 말씀이다.
 

둘째, 도마가 생각하는 길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이 달랐습니다. 도마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로 말하므로 실제로 사람이 걸어다니는 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도마의 질문에 대답한 말씀으로 !E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형식으로 대답하셨는데 이러한 용법은 요한이 일곱 개(요6:48, 요8:12, 요10:9, 11, 요11:25, 요14:6, 요15:1)를 사용했는데 그 중에 여섯 번째가 됩니다(참고. 요15:1). 예수께서 “길”이 되시는 것은 그분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옛날 미국 뉴욕주에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과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두 청년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이었지만 아주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은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고, 믿지 않는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기독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은 예수를 잘 믿었을 뿐 아니라 신앙이 아주 좋은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 청교도적인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누군가가 이 두 집안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맥스 쥬크스 집안에서는 1,026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약 300명 정도가 조산으로 일찍 죽었고, 약 100명이 평균 13년 간씩 교도소에서 복역을 했고, 약 190명은 매춘부 노릇을 했고, 약 100명은 술고래가 되어 그 말로가 아주 비참했다고 합니다. 이 집안이 뉴욕주에 부담시킨 비용은 120만 달러라는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즉 국가에 공헌하기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끼치고 부담을 준 집안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집안에서는 모두 729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300명에 이르는 자손이 목사가 되었고, 65명이 대학 교수가 되었고, 13명이 대학 총장이었고, 그리고 50명이 유명한 베스트 셀러의 저술가였습니다. 이 집안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이 공헌을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길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 문명이 그렇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길’을 잘 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세계에서 국토도 넓고 인구도 많은 중국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것은 ‘길’을 닦기보다는 성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길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닦으신 새롭고 산길입니다.
구약의 성소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소이고 또 하나는 지성소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하루에 한 차례 들어가서 분향하고 등불을 켜는 일을 했습니다. 성소 안쪽에 있는 지성소는 일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일이 이처럼 제한된 이유 가 어디 있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 둔 곳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특별히 하나의 이름 둔 것이요 머물러 계신 곳이 성전이기에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제사장이라도 반드시 속죄의 피를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자신의 죄를 씻는 속죄의 피가 없으면 제사장이라도 성전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보좌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에 있는 곳을 시은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왜 길을, 다리를 다시 닦고 놓습니까? 예전 길로는 다리로는 건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provsfaton(프로스파토스)는 성경 중에서 본 절에서만 기록된 것으로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으로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진 “산” zw’san(조산) “살아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사람들은 지성소에 자유롭게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장벽으로 여겨졌던 휘장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찢어졌습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휘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얇은 커텐이 아닙니다. 양피지나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쉽게 찢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나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번 잘못 들어선 길은 평생을 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이제 상처만 입고 돌아왔습니다.
이 길은 평생에 가는 길이지 가다말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이 길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욥은 그의 대답에서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욥12: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십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렸다면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아들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길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한번 찾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길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저와 여러분이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일곱 살 된 손자에게 아랫동네 큰 할아버지 댁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이는 심부름을 가다가 풍선장수가 예쁜 풍선을 팔고있는 것을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고,
다시 길을 가다가 동네친구들을 만나 함께 구슬치기를 하며 재미있게 놀기도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돌 뿌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소매로 피를 닦고 조금 쉬었다가 일어난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시간이 지나 해질 녘에야 큰 할아버지 댁에 무사히 도착을 했습니다.
큰 할아버지는 아이를 보고 무척 반가운 듯 말했습니다.
“네가 먼 길을 어떻게 혼자서 왔니?”
“할아버지 심부름 왔어요”
“그래, 무슨 심부름이니?”
“ …………………..”
아이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오는 사이 그만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보다 더 먼 길을 걸어왔는데도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고 있단다.”라고

자신이 지금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금 우린 예쁜 풍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져 있진 않은지,
또 친구와 어디선가 놀고 있진 않은지, 일상의 여유도 필요하지만 정확한 길을 걸으면서 가고 있는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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