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5. 이렇게 기도하라①) / 본문 : 마태복음 6:9-1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캐나다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서울에서 부 목사님으로 계실 때 겪었던 일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너무 길게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주일저녁에 집사님이 하도 길게 기도하시니까 나중에 성도님들이 주무시는 겁니다. 누가 좀 이제 말려 줬으면 하고 생각할 때 목사님이 다가가셔서 집사님에게 줄이시라는 신호로 가까이 가서 바지춤을 잡고 살짝 당겼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손으로 탁 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시고 계속하십니다. 이쯤 되면 이제 말릴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아이스크림을 놓고 기도하는데 어찌 오래하는지 국내의 정치문제를 비롯해서 세계의 기아문제, 선교 등의 기도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흔히 세계일주 기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 15분하고 났더니 아이스크림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라면 놓고 이렇게 길게 기도하면 라면이 배가되는 축복을 보게됩니다.

제가 시골교회에 다닐 때 주일저녁 예배 때 있었던 일입니다. 작은 교회다 보니 봉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으로 시작해서 주일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성가대원들
그리고 피아노 치는 강…
또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면 기억하실 것 같아서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떤 분이 킥킥 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많은 성도들은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다행히 목사님께서 피아노 치는 강 자매로 마무리하시게 하였습니다.

기도를 단순히 좀 길게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공중 기도에서는 좀더 잘 하려고 하다가 그만 이런 실수를 하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단순 실수보다는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기도할 때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3세 가지 주의를 주셨습니다. “첫째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둘째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셋째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의 세 가지 경우처럼 이방인과 같이 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누가복음 11:1절에 보면 “…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1장과 본문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이제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필요성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 답안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의 ‘이렇게’(Ou{tw”:후토스)는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쓸모 없는, 아무 효과도 없는 즉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허한 기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려면” 지금부터 말씀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정신과 내용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그 순서상의 방법까지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배운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자기생각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하면 되지 무슨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라”(proseuvcesqe:프로슈케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이러한 기도를 단 한번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이러함 모범을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는 먼저 대상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먼저 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화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화를 걸어야 비로써 대화가 가능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전화하기 위해서는 전화번호를 바르게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미 기도의 대상이 정해졌다면 어느 정도는 할 말이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전화해 놓고 말 안 하면 전화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은 전혀 그 사람에게 필요 없는 말을 합니다. 마치 엄마 불러놓고 아빠한테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가 전화통을 잡고 늘 “어버버…”그러면서 노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길게 “어버버..”하면서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받아보니까 저 쪽에서도 똑 같이 어떤 아이가 “어버버…”하면서 둘이 통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끼리 전화를 해서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만나서 보니까 저쪽 아이가 엄청 덩치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놀다가 한방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전화벨만 울리면 피하는 겁니다. 전화에 해한 좋은 나쁜 추억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화한 상대가 말을 잘 받아주고 또 내가 기분 좋게 내 마음을 다 터놓고 이야기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 이야기만 하고 끊는 분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말만 먼저 잔뜩 늘어놓고 마치 예의 없이 전화를 뚝 끊는 분처럼 한다면 하나님도 기분 나쁘실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해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두려움’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란 단어는 두려워서 입술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거나 쓰기 위해서는 ① 목욕을 하거나, ② 오랜 세월 기도한 후, ③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옷을 입고 불렀습니다. ④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묵음으로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그저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구약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이 가까운 분으로 다가오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내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존귀하신 분입니다. 영원토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분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핍박가운데서 인도해 주시며 홍해를 가르시며 마른 아론의 지팡에 움이 돋게 하시며, 바위에서 샘이 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며 우리 죄를 속하려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또 부르고 또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거룩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간구 3가지, 나 자신을 위한 간구 3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간구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간구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요청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
캠블 몰간은 “기도의 첫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는 활동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순서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 12:28)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이요, 구원하신 목적, 우리가 추구할 최고의 사항입니다. 아버지가 높아지면 아들도 높아집니다.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여호와’로 7,040회이고, 다음은 ‘하나님’으로 4,000회, 사람으로는 ‘다윗’으로 1,000번 정도, ‘여호와 하나님’은 11,040회나 나옵니다. 가히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그 분의 품성을 의미합니다.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인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나루에서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레 24:16) 한 것은 상대 장사의 성품을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속성, 규례, 말씀, 사역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이 뜻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 분의 독특성과 하나님 됨과 성품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고 말씀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습니다. “나라이 입하옵시며”는 주기도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기원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막 4:11, 막 30:9) 혹은 ‘천국’(마 3:2, 마 4:17, 마 5:3), ’왕국‘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제일 처음으로 전파하신 말씀이요, 주님의 전도의 목적이요, 주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또 천국이 임하는 것은 성도들의 최종 목적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간구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서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뻐하며 이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은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였습니다.
계속되는 사역 중간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였습니다.
끝도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세 가지 시간적인 영역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과거의 것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마 8:11, 눅 13:28). 또 현재의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또한 미래의 것으로 이해되는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끝 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일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6-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하신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 6:38-39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속성이 있습니다. 첫째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사람의 뜻은 잘 변합니다. 아침에 목적한 것이 저녁에는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둘째 불가항력적이어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 9: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셋째 결국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어찌하든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왜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참여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나를 포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갑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 광고하고 나만 빼고 가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시기 위함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아멘으로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사 때 개척한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매일 예배를 드린 후 축도 대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항상 마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이제 축도 할 수 있다는 기분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물론 목사 안수 받은 다음 주일날 성도들에게
첫 번째로 할 축도 연습을 무진장했습니다. 모든 분들이 다 웃으시겠지만요. 드디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이제축도 할 시간이었습니다. 전 자신 있게 손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은혜와… 축도 초반부를 시작하는데 어딘 선가 이제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 은혜와 라고 따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기저기서 다 따라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하늘아버지의 거룩하신 은혜와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로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기도문으로 갔다가 다시 축도 문으로 갔다가 왔다갔다 하다보니 그냥 아멘이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리 사모가 축도를 모르고 즉 주기도문인지 잠시 착각하고 따라했고 초신자들이 성도들은 축도가 뭔지도 몰랐고 사모가 따라하니 따라했던 것입니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성도들이 하는 말! “목사님 ! 주기도문을 잊어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목사님 때문에 우리도 착각했잖아요.” 하는 것입니다. 사모가 따라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저만 완전히 망신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