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0.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 본문 : 요한복음 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의사는 자기의 온 정성과 마음과 실력을 다해서 환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골치 아프고 손을 떼고 싶거나 돕고 싶지 않은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잔소리 많은 환자라고 합니다. “내 병은 내가 압니다”라고 말하는 환자지요. 진찰 결과라든가, 처방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다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이런 환자는 ‘차라리 당신이 의사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대하기 싫다고 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미안한 말씀 입니다마는 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린아이를 가르쳐 만사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러면 이렇게 된다, 또는 공식에 의해서 모든 것을 따지는 그런 체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하면, 이것 먹으면 낫느냐, 이렇게 하면 꼭 낫느냐, 왜 그러느냐,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합니다. 치료라는 것이 1+1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살고 죽고가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따지니까 의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환자입니다.
세 번째 환자는 조급한 마음을 가진 환자입니다. 예를 들어 약을 투여하고 나서 적어도 몇 일이 지나서야 효과가 납니다. 그런데 약을 한 봉지 먹고는 왜 안낫느냐, 아침에 치료받고는 저녁에 왜 안낫느냐,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프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만나면 아주 골치 아프고 ‘빨리 다른 데로 가라’하고 싶답니다.
우리의 교육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할 줄을 모르고, 믿음이 없고, 만사를 조급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의사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골치 아파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런 사람 만나면 골치 아파하실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증거를 대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해도 믿음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20세기 영적거장으로 알려진 영국의 C.S. 루이스 목사에게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느냐고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목사님께 질문하며 다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루이스 목사는 퉁명스럽게 “성경을 보세요.”라는 말만 했습니다. 오늘 주앙교회에 오신 여러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사실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부활할 것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제자들인데도 십자가 사건 이후 한곳에 모여서 문을 굳게 닫고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을 후회하는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잡히면 나도 십자가에 달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이 들면 생각이 마비되고 도피심이 생겨 방문을 닫고 숨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력해 집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오직 예수님만이 한 것입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버섯나물을 먹고 복통이 나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어느 날 80세의 석가모니가 숲 속에 있는 춘다라는 대장장이 집에 갔는데 그가 준 버섯나물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죽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가죽끈이 끊어지고 수레바퀴가 무너지는 도다. 모든 인생들이 가는 길을 나도 이제 마침내 가는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계로는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살아 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공자는 죽었습니다. 당연히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리길 “철학은 죽는 연습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의 문제에 통달한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 꾼 것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가면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평강을 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부활의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강을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디를 가나 참 평강과 안식이 없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 관계를 끊는다고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은 말씀하십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만이 두려움 문제를 해결 받고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믿는 자에게 이사하는 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복된 순간이 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이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 되든지 우주의 쓰레기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우주의 영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변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 떠는 제자들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이제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믿음과 신앙은 단순히 나 자신의 평안을 얻은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다른 성인들과 다른 것은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이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배워서, 또는 깨달아서, 아니면 도를 닦아서 흔히 세상이 말하는 성인이 되신 분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 이셨습니다. 메시야 이셨던 것입니다(요 3:34, 5:36, 6:57, 8:42, 17:3).
예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세상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아 세상에 나아가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는 연약한 제자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나가 선교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인간을 처음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생령을 불어넣으신 장면과 같습니다(창 1:27-28).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도 능력 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문자 적으로만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없습니다. 죄 사할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막 2:6, 10). 그러나 우리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그 죄는 그대로 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기 때문에 죄를 사해주는 역할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이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 부활의 육체를 다시 입고 살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초, 중, 고등학생들에게 모스크바에 있는 무신론 박물관을 견학시켰습니다. 한 안내인이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종교의 해악을 증명하도록 고안된 전시품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 인간이 동물로 진화했나를 설명하는 그림들, 끔찍한 종교 재판 장면 등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내인이 오래된 십자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학생들, 옛날엔 사람들이 무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을 죄에서 구해주려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무식했던 거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함 받고 예수가 부활했던 것처럼 자기들도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서 영원히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고 가르쳤답니다.”
열두 살 된 소녀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동무, 제가 잘못한 일들 때문에 늘 마음이 늘 괴로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 때문에 우시곤 했구요. 전 아버지를 속이고, 학교에선 부정 행위를 했어요. 전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다 벗어날 수 있을까 적정하고 있었어요. 전 죽는 게 무서워요. 전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관속에 눕게 되고 모든 게 다 끝장 날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전 살고 싶어요.” 소녀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우리 조상들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똑똑해서 죄에 짓눌려 살고, 천국을 놓치는 것 보단 어리석더라도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게 더 좋아요. 전, 선생님 동무가 제게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질께요.”(-하나님 구두는 누가 닦아 주나요? / 리차드 범브람트)라고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서 완전한 승리를 했다고 믿어지십니까? 그 승리가 믿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도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말 승리자처럼 생활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노예처럼 생활합니까?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세요.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지게를 져 보았습니다. 가녀린 어깨에 지게를 지고, 고사리 같은 손에 지겟작대기를 들고 콩나물 같은 두 다리를 발발 떨면서 산길과 논둑을 걸어 다녔습니다. 힘들고 더워서 나무그늘 밑에 지게를 내려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시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수고와 짐은 지게의 짐과 달라서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고 누가 대신 져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짐이 힘겨워 남의 짐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그 어떤 성인군자도 다른 인생의 짐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평안과 부활의 승리는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대신해서 져 주신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도 죽음에서 승리했습니다. 정복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승리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제발 패배자처럼 죽을 인상쓰지 말고, 승리자처럼 당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에게 돈으로, 지식으로, 건강으로, 자식의 성공으로, 무엇으로 도전해오더라도 웃고 넘기십시오. 우리는 그런 것과 싸울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스파링 상대도 안됩니다.
올림픽 금메달 딴 사람은 동네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작은 경기에서 1등 2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습다는 얘기죠.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예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 땅에서 돈 몇 푼 더 벌고 덜 벌고 그런 것에 얽매일 것 없습니다. 공부 좀 잘하고 못하는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물 좀 잘났고 못났고 그런 것에서 신경 접으세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명령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를 받고 떠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 우리가 기웃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나의 일이요, 나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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