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하는 교회(2)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7. 선교하는 교회(2)) / 본문 : 사도행전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성경에 481가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나를 따라오너라”(마 4:19),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2)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에게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 마 16:23, 막 9:25),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마 5:8)고 사단을 향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수도 옆에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야 하고 나오라면 나와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하신 것 모두가 그대로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연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 11:14)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바다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6-27)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명령어 중에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데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누구보다도 실천해야 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영국의 작가이며 기독교 변증에 강했던 루이스(C.S. Lewis)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제일 없애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옥의 개념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양쪽 다리가 거의 없는 장애인이 나왔습니다. 그 분은 길가에서 액세서리를 판매하는데 꼭 강아지를 함께 데리고 다니는 겁니다. 한번은 잠시 장애인 주인이 혼자 일을 보러 갔는데 그 강아지는 그 쪽을 한참을 바라보며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인이 나타나자 꼬리를 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장애인은 그 강아지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연을 묻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기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분들은 자기를 이용했다고 했습니다. 13살까지 다락방에서 다른 일도 못하고 혼자 지냈답니다. 그리고 지금 성인이 되어서 그 집에서 나왔는데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지금 함께 다니고 있는 강아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지만 강아지는 자신을 따라 어디든지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이 강아지 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명령을 성실히 따르는 주님의 일꾼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사람들이 묻는 것하고 예수님의 대답이 다르기 때문에 ‘동문서답’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땅문하답’입니다. 사람들은 땅의 것을 질문하고 예수님은 하늘의 일,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땅의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땅의 생각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본주의’라고 하고 하나님의 생각, 하늘의 생각을 ‘신본주의’라고 말합니다.

인본주의 자들이 만들어 낸 철학적인 나라가 공산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사람들의 생각대로 잘살기 위한 나라를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중국이 공산주의가 되면서 그 때 선교하던 존 메도우(John Meadow)선교사에게 공산군 장교하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네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100년 이상 일했으면서도 중국을 교화하지 못했소. 당신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있소. 그러나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에 들어 온 지 10년도 안 되지만 공산주의를 모르거나, 스탈린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선교사들이 100년 동안에 하지 못한 일을 우리는 10년만에 했으며 중국을 우리의 사상으로 물들여 놓았소.”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숨기고 있습니다. 거짓의 영이 있습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은행이 1950년대에 있었던 모택동의 경제개발계획인 ‘대약진운동’기간에 중국인 2천 7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는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처음에 명분은 다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한 것도 못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잘 살 수 없습니다.

피지(Fiji)섬이 처음에 무역의 길이 열렸을 때, 무신론자이며 인본주의자인 무역상이 그 섬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는 피지 섬의 추장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 집에 십자가와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선교사의 허튼 소리를 받아들이다니 참 부끄러운 일이군요.”
그 때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저기 큰 하얀 돌 보이십니까? 그 돌은 몇 년 전만 해도 사람의 머리를 쳐서 골을 꺼낼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또 저기 큰 화덕 보입니까? 저것은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 사람의 몸을 굽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당신 말대로 선교사의 허튼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의 머리는 깨지고 몸은 화덕 위에 구워져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인본주의 위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공산당은 만들지 못합니다. 헌법이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볼 때 미국은 인본주의에 물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이것 또한 인본주의를 만들어 냅니다. 미국이나 우리 나라는 공산주의 때문에 인본주의가 성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경제 블록을 만들면서 작은 나라와 작은 생산 시설, 농업은 모조리 망해가고 있습니다. 이 결과 세계는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상류층 20%사람들이 거의 모든 물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극빈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1.6%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빈부의 차이는 50배입니다. 지금도 한해에 굶어죽는 사람이 2천만 명이 넘습니다. 여러분! 이 숫자가 실감이 안 나시나본데 1.5초만에 한 명이 굶어죽는 것입니다. 이 숫자도 세계보건기구가 밝힌 열병, 합병증 등으로 죽은 것은 빠진 수치입니다.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이 누구의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의 지갑은 누구의 것입니까? 또 여러분의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아르헨티나 오르티스 목사님이 성도님들에게 집문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성도가 집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어떻게 할까 회의를 했습니다. 다시 돌려주면서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용권만 있습니다.”하고 돌려주었습니다.

경제의 양극화 현상은 선교에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귀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진국 사람들은 너무 배불러서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유럽 교회가 시들기 시작한 것은 GNP 2만 불이 넘기 시작하면서부터 랍니다.
세계는 중산층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산층이 없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나라의 경우만 보면 압니다. 물가상승률이 대폭의 증가세를 보인 지난 1998년, 우리 나라 범죄율 역시 큰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자살율 역시 같은 양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자살율은 외환위기 직후 30%까지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범죄율의 증가폭이 다시 꾸준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2003년 3.4%, 2004년에는 3.9% 증가했고 작년 통계가 아직 집계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그 증가폭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측합니다. 자살율 역시 지난 2002년 이후 매년 10%이상 늘어 외환위기 직후 8,569건이었던 건수가 지난 2004년, 11,523건까지 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본주의는 그것이 공산주의든 물질만능주의든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한국선교사가 13,000여명 해외에 파송되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선교사들이 서양 선교사들에 비해 일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국선교사들은 서양 선교사들에 비해 지원되는 선교비가 적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선교사들은 늘 기도합니다. 경제적인 선교비 모금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러시아에 처음 같을 때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고르바쵸프 구 소련 대통령하고 우리 나라 김영삼 대통령이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신라호텔 전경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러시아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우리 선교사들도 한국에 그런 별장 하나쯤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다차’(별장)라는 것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모스크바 같은 시내에서 공장 다니며 지내다가 봄과 여름이 오면 ‘다차’에 갑니다. 공산당이 시외에다가 가정마다 오두막 같은 집과 농토를 나누어 준 것입니다. 여기서 농사짓고 살다가 다시 겨울이 되면 시내 아파트로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님들 중에는 다차를 따라다니며 선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그저 우리를 잘 사는 사람으로 보아주니 선교하기 싶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IMF가 왔습니다. 그리고 한 선교사님이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카드를 주니까 카드를 받더니 그 카드를 구겨버리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망한 나라 카드는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선교사님은 그 때까지는 자신이 선교하는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이 선교하는 구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은 다시 기도하게 되었지요. 저는 그 때 인도에 선교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인도 뱅갈로르에 있는데 선교사님들하고 교육하려고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날 IMF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현지 신문은 아시아의 한 마리용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쓴 것입니다. 여자 선교사님들은 울기도 했습니다.

이런 한국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음을 전달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선교사님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가운데서 일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 먼저 매달리는 심정이 있습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해외에는 공관원들과 기업들에 나온 주재상사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에는 유학생들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사실은 선교사님들이 제일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물질로 선교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있지만 이 세상과 분리되도록 불러낸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의식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거룩함과 영성의 결여, 잃은 자에 대한 관심의 약화는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교회는 영적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르침과 사회활동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토저(Tozer)라는 분은 죽기 전에 이런 예언자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비참하게도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것의 수준 이하에 머물러 있다. 우리 생활에서 세속화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는 영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부터 멀어질 때 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구세군을 창설할 때 품었던 비전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대해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품었던 생각은 그의 구호에서 나타납니다. “영혼을 위해서라면 극한 상황까지라도 가자.”고 했습니다. 생명을 바쳐서라도 영혼 구원을 하자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의 ‘증인’은 mavrtu”(말튀스) ‘순교자’를 말합니다. 최후의 증인이란 순교의 정신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의 끝까지는 보이는 땅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e[scato”(에스카토스)는 ‘최후의, 마지막까지’의 뜻도 있습니다. 보이는 끝까지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할 수만 있다면…”인 것입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보고 가야합니다. 지금은 깨어 정신을 차릴 때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나타난 것 같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오직 기도할 것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우리의 이익만 쫓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성전 미문 에서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전했습니다. 우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이든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한가지 운동을 펼치기를 원합니다. 12시 정오가 되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5분 동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낮에 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은 하루 5번 정한 시간에 기도합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정해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기도할 제목은 4월 16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이 주일을 총동원 전도주일로 정합니다. 정오가 되면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전도 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4월 16일은 한 명이라도 초청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찬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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