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3. 주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 / 본문 : 누가복음 2:25-33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은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름가운데 하나입니다. 시므온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이름은 ‘시몬’입니다. 베드로의 별명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시므온이 나오는 곳은 레아가 낳은 야곱의 둘째 아들(창 29:33)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후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1절에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요 교사로서 니게르라고도 부르는(행 13:1)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시몬, 요한 만큼 이스라엘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름중의 하나입니다. 흔한 이름이다보니 어떤 학자들은 당시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이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회장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추측일 뿐 정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상의 어떤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냐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을 기다려온 시므온이 소개됩니다.
첫째,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소개될 때도 의인이요, 흠이 없고 계명과 규례대로 행했다(눅 1:6)고 했습니다. “의롭고”(divkaio”:디카이오스)는 “정의로운, 공정한, 흠 없는”이라는 뜻인데 한가지 더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적당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우리말에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기를 때, 아이가 하는 대로 놔두다보면 버릇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통제가 안됩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이들을 통제하다보면 반항을 하거나 힘이 없는 것을 알면 복종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반항아가 되든지 아니면 창의성이 떨어지고 시키는 것 외에는 알아서 잘 못하게 됩니다. 이러니 아이 키우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는 말이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몇 일전에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습니다. 때가 많이 나와도 저는 손으로만 때를 밉니다. 그런데 쉽게 해보려고 다른 사람이 다 사용하는 이태리타월로 오른쪽 다리와 팔뚝을 밀어봤습니다. 정말 잘 밀리더라구요. 그래서 재미도 있고 해서 살살 더 해봤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저는 지금 오른쪽 팔, 다리가 아픕니다. 너무 밀어서 그렇습니다. 때를 닦은 것이 아니라 살가죽을 벗긴 것 같습니다. 적당한 때는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부과에 사람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때를 너무 밀어서 생긴 것이 많답니다. 적당히 밀어야 합니다.
의롭다는 말에는 깨끗하다란 의미보다는 적절히, 공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을 잡는 중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위로”(prosdecovmeno”:파라클레시스)는 “간청, 애원”이라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주님을 간절히,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영감 받은 선지자 없이 침묵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런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간절이 사모했습니다. 에리미야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한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위로 받기 위해서는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조목사님 아들 조수아 하고 캄보디아에 갔었습니다. 24개월이 조금 안된 아이 입니다. 너무 어렸습니다. 낮선 외국에서 부모님이 안보이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접니다. 만일 나 까지 떨어지면 이 어린아이에게는 정말 큰일입니다. 그래서 바지가랑이 잡고 계속 울어댑니다. 6.25때 전쟁고아들 보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울고 또 울어도 부모가 오지 않습니다. 다 죽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세째,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이렇게 세 번 “성령”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시므온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므온은 26절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평생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면 살았습니다. 시므온의 소원이 하나 있다면 자신이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므온의 뜻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옹의 이야기
1928년 황금의 바리톤 목소리를 소유한 목사의 아들이었던 한 그리스도인 청년이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보험회사 세일즈 맨이 되었습니다. 우연히 방송국 공개홀에서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NBC방송국의 전속가수로 활약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그 앞에는 이제 돈과 인기가 보장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가 좋아하는 교회에서 그리고 복음집회에서 찬양할 기회가 날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그가 자기 집 응접실 피아노앞에 앉았을 때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여 10년을 애송해온 신앙시 한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 제 목소리, 제 존재, 제 젊음 모두 주를 위해서만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멜로디를 어머니가 애송하는 신앙시에 맞추어 작곡을 시작합니다.
이날 탄생한 찬송이 찬송가 102장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옹의 이야기입니다.
그후로 그는 전도자 빌리 그래함을 만나 그와 더불어 평생을 동역하며
찬양과 간증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 헌신하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존귀하고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96세인데 아직도 찬양사역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분이 시므온 같은 분 아니겠습니까?
“이제는”(Nu’n:뉜)으로 시작하는 시므온의 찬양은 일명 ‘시므온의 고별송(Nunc Dimittis), 이제는 떠나가게 한다’로 14세기동안에 걸쳐 즐겨 찬송가로 부르고 기도문으로 낭독해 왔습니다.
시므온은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에서 자신과 하나님을 분명히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재(despovth”:데스포테스)”로 불렀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주(퀴리오스)”와 함께 사용되는 “주인, 주권자, 절대자”를 말합니다. 신약에서 56회 사용되었는데 25번은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시므온 자신은 “종(dou’lo”:둘로스)”으로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제일 많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의미를 잘 모르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어떠한 경우라도 순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죽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주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의 노래 본문 30-32절 함께 읽겠습니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노래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을 보았사오니”입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역사를 본 것입니다.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이 구체화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일어날 구원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역이 어린 아기 예수를 본 시므온은 알았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갓난아기이지만 예수를 본 시므온은 즐겁고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이 완성된 시대에 살아갑니다.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한 것입니다.
“…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선민 사상으로 가득 찬 유대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시므온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기 예수는 장차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을 위한 구원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강도해서 말합니다. “만민, 이방”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도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입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과 혈통에게 제한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추이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피부가 검거나 희다고 해서 빛이 골라 비추지는 않습니다.
로마의 시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합니다.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되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은 진흙 속의 진주 같아서 진흙과 함께 있을지라도 주위 환경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칼 막스 이야기
오래 전(1830년대) 어느 날 독일 트리에(Trier)에 살던 유대인 소년이 그의 법률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유대인인데 왜 유대인 회당에 안가고 교회(독일 루터교회)에 나가요?’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신앙적인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외면(왕따) 당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본래 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랍비였습니다.
그의 큰아버지도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감각이 빠르고 세상 이치에 밝았던 이 소년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개신 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의 경험이 없었던 그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런 신앙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었습니다.
나이 6살에 유아세례를 받게 했지만 그것이 이 소년을 믿음의 아들로 자라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라던 이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 1847년 그는 엥겔스라는 사람과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칼 막스(Karl Marx)입니다.
결과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만일 이 소년이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교회 안에서 자라나고
교회를 출입하며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배우지도 못하고 믿음을 지키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예비하여 비추시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면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희망이 없던 인류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 흑암 과도 같았던 이 땅에 한줄기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과 대가를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학문을 배워 전진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땀을 흘려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은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랑은 주어도 주어도 부족한 것이고, 다 주고도 또 부족한 것이 없나 뒤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악은 악으로이길 수 없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증오를 낫습니다. 주님의 방법이 옳습니다. 사랑으로만 우리의 문제가 치유될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비춰주시는 빛입니다. 모두 이 빛으로 나오시며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