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감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9. 두 사람의 감사) / 본문 : 누가복음 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미국 교회가 만든 좋은 절기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각 나라에 전달될 때 생겨난 풍습과 같은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상황 화되었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벽기도입니다. 새벽기도를 교회가 정해놓고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조상들이 제단을 쌓던 풍습을 교회가 기도하게 만든 것입니다. 심방 제도도 만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는 심방을 정해놓고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가는 사람들이 점술가들은 정초에 찾아와 부적을 주며 일년축복을 빌어주는데 교회 목사가 안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찾아가 성경구절을 적어주고 축복해 주기 시작한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크리스마스 역시 상황 화된 날짜를 만들어 지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의 풍습을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좋게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절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좀더 상황 화되었다면 추수감사절은 추석에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미국식으로 오늘 지내게 되었습니다. 요즘 어떤 교회들은 상황 화하여 좀 일찍 지내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쨌든 1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추수감사절로 좀더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어 또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감사를 주님이 비교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은혜 받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의 감사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행 2:15, 3:1, 10:9).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 습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기도를 보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감사
11절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기의 기도를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감사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죄보다 내 죄가 없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교만입니다.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것은 바리새주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처음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려는 생각에서 구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제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배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 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는 자신들은 하나의 더러움도 없이 깨끗하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마태복음 19:20에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는 청년과 같습니다. 248개의 무엇을 하라는 적극적 계명과 365개의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치의 교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죄가 있다고 하는 고발성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교만을 하나님께 드러낸 것입니다.

2) 행위의 감사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의 두 번째 잘못은 금식을 자랑하고 십일조 드리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금식이, 십일조 드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를 자랑하고 강조하므로 그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나님께 자랑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것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즉 자신의 목숨도 주셨습니다. 어제 TV에 보니까 어떤 의사 분이 공항에서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는 분을 보고는 응급조치로 가슴을 누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분이 죽은 것입니다. 유가족들은 이 의사 분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의사가 이 때 응급조치를 잘못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려 보겠다고 노력한 것에 대한 칭찬은 고사하고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이분은 말을 잃었습니다. 바리새인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이와 같았습니다.

세리의 감사
바리새인들과 달리 세리들은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1) 겸손의 감사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기껏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이방인의 뜰이었을 겁니다. 그저 죄인이라는 생각 속에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조차가 죄스러웠을 것입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하고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백인 교회학교에 흑인 아이 하나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흑인이 백인교회에 다니려면 따가운 눈총이나 여러 가지 서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이 철없는 어린아이는 늘 좋은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그에게 “너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는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옵니다” 라고 정말 예쁜 대답을 했습니다.

2) 죄인의 감사
“…다만 가슴을 치며” 이 모습은 죄인으로서 통회 자복하는 기도입니다(23:48, 마11:19). “가슴을 치며”의 ‘치다’ 동사 (e[tupten:에튀프테)는 ‘주먹으로 치다, 심하게 때리다’로 미 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때리고 때리는 반복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저 죄인으로 자기 가슴을 칠 뿐입니다.

3) 불쌍히 여기옵소서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불쌍히 여기옵소서”는 ‘전정 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의 뜻으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관대한 처벌을 바라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몇 년 전에 천주교에서 “내 탓입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이것을 차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구호를 차 뒤쪽에 붙여 뒷사람에게 보이게 했습니다. 내 탓이면 내가 보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교회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교회 자랑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진짜 문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이 없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저는 고집이 있어서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않으면 도망가지 않고 서서 어머니가 때리는 매를 다 맞았습니다. 제 동생은 그저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던지 아니면 도망갑니다. 저는 빌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교만이요, 부모님을 아프게 한 잘못한 것인지 압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찬송가 356장 “성자의 귀한 몸”을 지은 사람은 로버트 로우어 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 찬송을 지은 것은 남북 전쟁으로 초토화 된 때였다고 합니다.
그가 전쟁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절망과 슬픔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그가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성자의 귀한 몸이라는 찬송입니다. 4절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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