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보다 가벼운 짐을 지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0. 깃털보다 가벼운 짐을 지세요) /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도시 빈민지역과 농어촌의 가난한 중고생들 가운데 68%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61%가 가출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부스러기선교회가 최근 선교회에 소속된 도시 빈민지역과 공단지역, 농촌지역의 25개 공부방에 다니는 초.중.고등학생 4백3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교생은 3백19명 중 1백8명(33%)과 92명(31%)이 각각 자살이나 가출을 생각한 적이 있는 반면, 중고생들은 1백36명 중 93명, 84명이 각각 자살과 가출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결혼적령 인구(남 26-30세 여 23-27세)의 남녀성비 불균형이 심화돼 2011년에는 여자 1백명당 남자가 1백25.1명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어, 현재 남자 중고생이 결혼할 때쯤이면 20%정도는 장가가기가 힘들어 진다고 합니다. 치열한 신부 쟁탈전이 벌어지고 중국 연변처녀, 베트남 처녀까지 외국으로부터 색시감을 데려오는 일도 비일비재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성 1명이 가임기간 동안 갖는 평균자녀수인 합계 출산율은 지난 70년 4.5명에서 80년 2.7명, 90년 1.6명 수준으로 계속 낮아져 왔으며 지난 95년에는 1.74명으로 다소 높아졌으나 2005년에는 1.71명으로 다시 낮아질 전망입니다. 출생아 수도 지난 70년 1백만7천명에서 80년 86만5천명,90년 65만7천명 등으로 낮아졌으며 앞으로도 소폭 감소세를 지속해 오는 2015년에는 59만 명에 그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노인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젊은 사람들이 작아져 그만큼 국가적으로 큰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설교가 비처(Beecher)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세 가지 고생을 한다. 일 하기 전에 실패할까 걱정하느라 고생이요, 일 하면서 수고하느라 고생이요, 일 끝나고 결과를 걱정하느라 고생이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각자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호이 코피온테스:oiJ kopiw’nte”)는 노동을 하여 피로를 느끼고 쇠약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을 해서 스스로 피곤에 지친 상태입니다. 언젠가 설문 조사한 것을 보니까 한국남자 40대가 세계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에 지친 상태입니다. 몸에 병이 들 정도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쉬지 않으면 병이 듭니다.
“무거운 짐진 자”(페포르티스메노이:pefortismevnoi)는 성경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화물의 짐, 뱃짐’을 의미합니다. 이 짐은 타인에 의해서 지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어른들도 무거운 짐이 있지만 학생들 또한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금요심야 예배드리고 나오면서 옆 건물 학원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밤 11-12시가 되었는데도 학원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빨리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학교를 가야합니다. 어른들이 너무 무거운 짐을 어른들이 지우게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짐은 율법과 유전의 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강조하여 지우게 했다고 예수님이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3:1-4).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수고하고 짐진 자 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초청하십니다. 마 11:25절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한 두 사람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주앙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온유한 사람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자꾸만 대들고 따지고 잘난 체 하면 제가 감당이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성격은 바뀌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아주 안 뀌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특히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람만 보면 얼굴이 빨개져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여자만 보면 얼굴이 빨개집니다. 아니 빨개지는 것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지금은 좀 얼굴이 두꺼워 졌나 봅니다. 이렇게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간혹 저도 모르게 그 옛날 성격이 마음속 깊이 있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안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분이 있다면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초대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단순히 예수님이 온유한 분이다.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으시려고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신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저처럼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신 분들은 무서운 사람을 보면 피해 다닙니다. 무서운 사람을 보면 무섭지요. 지금 자기 스스로 만든 일들 때문에 지쳐있는 사람들, 자기와 관계없이 짐을 지우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완강한 분이 나타나서 다그치면 도망갑니다. 여러분! 잘못하고 집 문 앞에서 망설이신 적이 있으시지요? 들어갈까 말까? 그 때 갑자기 누가 큰 소리를 지른다거나, 문을 콱 열고 나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지 않고 숨어버립니다. 그런데 온유한 아빠가 나오셔서 온유한 음성으로 “어서 와라. 잘 왔다.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데”라고 말하며 맡아 준다면 집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일로 지쳐있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차를 운전해 가면서 조금 천천히 가보세요? 앞 뒤, 양쪽에서 난리가 날겁니다. 조금 천천히 가는 것을 못 봐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지쳐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치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온유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라 온유할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좋아하는 사람하고 짝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신학기만 되면 제일 신경 쓰이는 것 중의 하나가 짝입니다. 짝 잘못 만나 보세요? 일년이 고생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남녀 공학을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 1,2,3반까지 있는데 1반은 남자 반이고, 2반은 여자 반입니다. 그럼 3반은? 남녀합반입니다. 여기 들어가는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불행하게도 남자 반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3반 남학생들이 부러웠습니다. 거기다 짝이라고 지저분하고 공부도 못하면 더 실망이지요.
29절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에는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짐승이나 노역자가 함께 메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하고 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멍에”(쥐고스:zugov”)라는 단어의 뜻은 원문으로 “짝짓기”입니다. 우리 주님과 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메면 그 짐이 무거울까요? 가벼울까요? 여러분! 학교에서 짝 한번 잘 만나도 일년이 기쁜 것입니다. 멍에를 벗어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짐을 다 내동뎅이치고 도망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짐을 지는데 예수님과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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