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예수님의 생애(12. 예배) / 요 4:20-26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배드릴 때, 목사가 설교할 때만 되면 성경책 보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보도 잘 봅니다.
예배시간에 괜히 뭐 잊어버리고 오신 분처럼 안절부절못하다 화장실을 가는지 들락날락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분이 없습니다만 …
빚 받을 사람은 돈 꾸어준 사람을 찾습니다. 부모를 잊어버린 아이는 부모님을 찾습니다. 자식을 잊어버린 부모는 자식을 찾습니다. 하나님도 찾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23절 하반 절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멘. 오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으시고, 만나실 것을 믿습니다. 지금 추석이 되어서 집에 가는 사람을 찾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찾으신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 같습니까? 적다는 것 같습니까? 얼마 안되기 때문에 찾으시는 것입니다.
“찾으신다”는 동사 ‘제테오’는 ‘원한다, 요구한다’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있다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요즘 우리 예배를 보면 시간상으로는 1시간 가량을 드립니다. 예배 시간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있으라고 하면 몸이 뒤틀리고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가 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예배의 장소)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지난주 말씀드린 것을 기억해 보셔야 합니다. 처음에 한 대화는 ‘생수’이야기 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대화한 것이 ‘남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여인은 ‘예배’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19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이에 반목이 깊었던 예배장소 문제에 대해서 이 여인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선지자라면 이 문제를 알고, 선지자다운 답변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춘천에 가면 한림대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일본어 교수 ‘사이토 아케미’교수가 있는데 이분이 쓴 「아케미 교수의 한국견문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겪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중반쯤 가면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드디어 들이닥친 그 질문’이라는 소 제목이 있습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사람에게 이 질문을 꼭 한번은 받게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름 아닌 ‘선생님,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였습니다. 아케미교수는 이 질문을 언젠가는 받게될 것을 염려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이 책 처음부터 흐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질문을 받게된 것입니다. 아케미교수는 ’이 날이 올 것을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 눈치 빠른 여학생이 “잠깐 기다려!” 했지만 “조용해 봐. 지금 선생님께 중요한 질문을 했으니까”라고 남학생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아케미교수는 “옛날에 매우 유감스러운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인들이 저지른 행위의 책임은 중대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무슨 판에 박힌 말처럼 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꼭 질문을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으로서 유대인 선지자를 만났으니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이것은 준비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생수’에서 ‘남편’으로 그리고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스룹바벨이 이끄는 예루살렘재건에 참여하지 못하고(스 4:1-6, 느 4:1-2), 아브라함과 이삭이 제사를 드렸던 곳이며, 모세가 제일먼저 제단을 세우고 희생을 드렸다고 생각하는 그리심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세워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곳은 모리아 산이며(창 22:2), 모세가 제단을 쌓은 곳은 에발 산(신 27:4)으로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억지를 쓰고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그리심산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에 성전이 건축된 것은 B.C. 322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알트(Alt)라는 학자는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출현하기 직전인 페르시아시대 말기 B.C. 4세기 중엽에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예루살렘성전과 그리심산의 성전 갈등은 2백여 년 계속되다가 B.C. 129년 요한 힐카누스가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자 그 감정이 절정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전이 없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땅 없는 서러움이나 마찬가지로 예배할 곳이 없다는 것은 큰 서러움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의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는 말은 ‘우리들은 예배드릴 곳도 없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당신들끼리 예배드리니까 좋습니까?’하고 비꼬는 감정이 섞인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에 근거를 두고 이 장소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습니다(대하 6:5, 7:12, 시 78:68).
이렇게 하나의 성전을 강조한 이유는
① 이방 나라의 우상숭배 풍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② 12지파로 분할된 이스라엘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③ 다윗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다윗 왕통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에 성전이 있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감정석인 질문에 대해서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장소를 무시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새로운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이 말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것은 예루살렘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의 장소에 있는 성전을 지켜야 했다면 예수님이 멸망을 예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법궤를 지키셨던 것처럼 보호하셨을 것입니다.

알고 예배하라(예배의 대상)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예수님은 장소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하셨지만 예배의 대상에 대해서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의 대상입니다. 누구에게 예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있었습니다. 어렴풋이 하나님을 믿고 있고 모세 오경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이들은 분명 이방신과 혼합되어 있었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나님을 말하는 용어가 많이 있는데 보통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천상(天上)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님”의 사상과 함께 여러 용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겨레신문에 개신교인이 말하는 하나님은 문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사용된 것이고 하느님이 맞는 것이라는 기사가 나와 제가 신문사에 항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글을 써주면 내주겠다고 해서 하나님이 틀리지 않는 것이라고 독자투고란에 나온 일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 하느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단어들과 달리 하나님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의 ‘우리는’ 유대인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예배의 유일한 대상임을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이라는 것과
②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 완성자시라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예배의 방법)
23, 24절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원어에 ejn pneuvmati kai; ajlhqeiva/:(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를 직역하면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엔’은 …안에 라는 뜻이고 전치사 ‘카이’는 영과 진리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즉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말합니다. 왜 “영과 진정으로”예배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2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이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번역된 “프뉴마”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여러 영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을 표현할 때 관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하나님은 소멸하는 분이심이니라”(히 12:29)가 그렇습니다.
예배하면 뺄 수 없는 단골 성경이야기가 있지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만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를 물리치셨나요. 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을 가졌기 때문에, 양을 제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나요! 아닙니다. 그런 말을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인의 예배가 실패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제물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신의 신앙적 자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문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육체를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의 량, 돈의 액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양과 액수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금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냥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진리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했는데 첫째는 지능, 둘째는 지식, 셋째는 기술, 넷째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우리의 태도가 93%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는 어디서, 얼마나 큰 예배당에서, 얼마나 많은 헌금을 드리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느냐는 문제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영으로”예배드리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때
예수님은 23절에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도 25절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고,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속죄의 예배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내 죄를 대속해서 양을 죽이는 것은 속죄의 상징은 될지 모르지만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뻐서 뛰었습니다. 물길러 왔다가 다 잊어버렸습니다.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9절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예수님은 사마리에서 이틀을 지내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 8:14)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을 기억하시면서 성령을 사마리아에 보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잘 드려지면 모든 것이 잘됩니다. 그러나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고 잘못되면 모든 것이 안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일단은 되는 것 같이 보이는 것도 가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사람, 원망을 듣고 있는 사람이 “영으로서 진리로서”예배드리기 어렵습니다. 저도 가끔 부부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부부싸움하고 예배드릴 때 있잖아요.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화목의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학교에서 헌금할 시간이면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실을 주일 학교 선생님이 발견하고 한 번은 그 어린 학생에게 ‘너는 왜 헌금시간이면 헌금을 드리지 않고 기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은 ‘선생님 저는 헌금 드릴 돈이 없어 그 대신에 저의 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소년은 성장해서 목사가 되어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와서 사역한 언더우드입니다.

주앙교회에 오신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주앙교회의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함께 예수그리스도가 구속해 주신 그 은혜로서 이와 같이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꿈에서도 여러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찾으셨고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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