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예수님의 생애(9.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 누가복음 5:4-11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어느 목사님이 중국 북경에 가서 성도들을 방문했습니다. 가정예배 처소였는데,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외부에서 온 사람은 절대로 설교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어서서 말하면 설교요, 앉아서 말하면 좌담이 되어 외부에서 온 사람도 앉아서 말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좌담식으로 앉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말씀 더하라는 회중의 권유에 따라 두 시간이나 설교를 했답니다. 이야기가 끝나 경청하던 청년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칩니다.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접수합니다.” 공산당이 교양 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적으로 접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 명령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고기가 어디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깊은데”있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잡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어부들의 심정이란, 하루종일 땀흘려 일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경험을 하신 분들은 이해합니다. 허무하고 허탈한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금도 저에게 하시는 말이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오다가 돌을 차면서 왔는데 하필이면 그게 앞집 가게 유리에 맞아 쨍그랑 깨졌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를 알았기 때문에 가만히 계셨습니다. 차라리 혼을 내주면 좋은데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 없이 집에 왔는데 저녁에 어머님이 일 다녀오시면서 하루 품삯을 그 아주머니에게 주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생각하시면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부들은 밤새도록 고기잡이하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깊은데로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지금 고기들은 아침이 되어서 깊은 데로 몰려있습니다. 이곳에 어망을 내리면 됩니다.
여러분 밑천 없는 분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시려면 어디를 가시면 되는지 아십니까? 돈이 굴러다니는데 가시면 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시장입니다. 시장에 가면 돈이 돕니다. 지금 시장은 또 형편이 다른가 봅니다. 즉 기회가 있는 곳에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일이 있는 곳에 가야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사회가 역동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평만 합니다. 이건 아직 이렇고 저건 저래서 불만이고, 그러나 기회를 보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다 되어있으면 내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직 부족한 것이 있는 곳 그곳에 내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깊은 곳입니다.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르기 싫었을 것입니다. 어망을 깨끗하게 했는데 이제 더 헛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다 고기잡이는 밤이 제일이지 이제 아침에는 적격이 아니다, 또 적당인 깊이가 제격이지 깊은 곳은 아니다, 고기잡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목수의 말을 듣다니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이와 같이 불합리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 순종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베드로는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합니다.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안 해도 예수님은 지금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안 해도 될 말을 합니다. 이 말속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들이 한시간도 아니고 그것도 밤 세도록 잡았는데 얻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나가 고기를 잡아본들 잡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적 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한들 얻을 것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바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사는 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철학이다라고 말합니다. 다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누군가의 철학을 이어받거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사람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론, 환경에 영항을 받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책일 질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축복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배경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의지하였습니다.
신석구 목사는 어떤 장로와 길을 가던 도중에 자신의 목회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장로님, 신바닥의 진리를 아십니까? 이 신바닥은 주인이 가자 하는 대로 순종만 합니다. 자갈길로 가자면 가고, 가시밭길도 지나가고, 더러운 오물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불평불만 없이 따라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목사나 장로는 자기 주장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의 길은 바로 순종의 길입니다.

가득 차는 육신적 축복(6-7절) – 축복
순종은 항상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삼상 15:22) 하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노하우(KNOW-HOW)만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인도의 성자 선다 싱이 네팔지방의 산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길동무가 한 사람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들이 추위와 눈보라를 헤치며 한참 가니 인적도 없는 외진 산비탈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싱이 동행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틀림없이 죽고 말 거요.’
동행인은 펄쩍 뛰었습니다.
‘미쳤소? 우리도 죽을지 모르는 판에 어떻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단 말이오’
그는 화까지 내면서 혼자 서둘러 떠나버렸습니다. 싱은 할 수 없이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파는 갈수록 심해지고 기운은 떨어져갔으나 이를 악물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등에 업힌 사람도 싱의 따뜻한 체온으로 얼었던 몸이 녹으며 차츰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가자 마을이 나왔습니다. 희망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눈 속에 얼어죽은 시체 하나가 발에 걸렸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동행이었습니다. 이 판국에 누구를 돕느냐고 서둘러 간 사람은 얼어죽고, 죽어가던 사람을 업고 간 싱은 살게 된 것입니다.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우리 모두 그들처럼 혹한 속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앞길은 전혀 보이지 않고 너나없이 불안과 절망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기심의 만연입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어떻게 남을 돕느냐는 동행인 같은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녹여주고 생기를 넣어줄 수 있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서로의 체온입니다. 싱과 쓰러졌던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나누면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그것은 사랑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어렵지만 자신을 잘 살피면 그 중에서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걸 다같이 주고받으면 어떤 역경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던졌을 때 놀랍게도 엄청난 물고기가 잡혀 올라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 그들이 와서 고기를 퍼담는데 두 배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경험하는 바지만 어려울 때 도움 청하기는 쉬워도 넘칠 때 도움을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밤새도록 고생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어떻게 고기를 잡았습니까?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은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고기를 자기 혼자 가져도 누구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다른 배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의 마음, 동역하는 마음, 도움을 청하는 마음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혼자서 하면 매우 힘이 들지만 누가 옆에서 조금만 거들어 주어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를 위대한 인물로 성장시키는 비결이요 또한 상대편을 위대한 인물로 함께 자라게 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협력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7절까지는 이세상의 육신의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축복 받는 것이 이 세상의 것으로 끝난다면 그야말로 허무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 중에는 그래도 좋으니 돈벼락이나 한고 죽으면 소원이 없고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안타까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돈 한번 벌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의 고난에 대해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제 고향이 경기도 마석인데 그곳에 당시 서울에서 등산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갈증이 나고 물이 귀하여 아이스 통에 하드(아이스께끼)를 넣은 통을 가지고 천마산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산은 해발 812m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드 값을 배 이상 불러도 잘 팔립니다. 그렇게 돈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는 뒷전입니다. 어떻게 학교 빨리 마치고 돈벌러 가느냐 하는 것이 제 고민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자 마자 달려가 도매로 빵을 구하고 그 빵을 경춘선 기차에 올라가 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홍익회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아무나 팔면 되는 것으로 알고 빵을 팔다 홍익회 아저씨들한테 혼나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탄광에 가면 돈을 번다기에 친구를 꼬셔서 강원도 황지 탄광촌에까지 갔었습니다. 더 할까요? 이 정도만 말씀드리면 저도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도 봄날의 햇빛이 따스하게 내려 쬐듯이 어느새 예수님이 제 마음에 들어오시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드렸던 고백이 저의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 회개의 고백
고기가 많이 잡힘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9절 하반). “놀라고(담보스)”는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말문이 막히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어부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밤새도록 잡아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한배에 실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배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축복해 주시면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고기만 잡고 놀랐으면 되었지 베드로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갑자기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마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율법사, 랍비들, 산헤드린공의회 회원 정도가 되면 죄인과 함께 있지 못하겠다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유대인들도 죄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돌로 치려고 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위해서 죄인의 세상에,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취하리라(10절) – 예수님의 약속
베드로만 놀란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이 동업하는 야고보, 요한도 놀랐습니다. 놀라서 떨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진정시키십니다. 오히려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보다 더 돌란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을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라고는 잡아보지도 않으시고 목수 일만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넘치도록 많은 고기를 잡고 놀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기를 잡았던 것과 같이 사람들을 사로잡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절) – 제자됨
저는 솔직히 이 상황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흔히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따라가서 어떻게 할까?, 지금 저 많이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하고?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강력한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배와 고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아멘
더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서 한 가족과 같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여 선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같이 하시는 분 가운데 한국인 아가씨가 한 분 있는데, 킴 윅스라는 맹인 아가씨입니다.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예수를 믿고 놀라운 간증을 갖게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간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1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순종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것은 주님의 영원한 명령입니다. 이 부름에 우리모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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