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독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4. 나의 감독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벧전2:18-25

‘감독’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은 운동경기일 것입니다. 어떤 경기이든 감독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기술을 가르쳐주는 코치는 부분적으로 모자라는 것을 보완시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특징을 알고 있어야 하며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 선수들을 격려하고 지켜보고, 지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감독을 잘 만나지 못하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좋은 감독은 좋은 선수를 찾아냅니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인이라면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 한국감독을 맡은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 감독의 역할로 4강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감독자의 역할처럼 원어의 ‘감독’ ejpivskopo”(에피스코포스)이라는 말은 “존중하다, 배려하다, 방문하다, 찾아내다, 소집하다, 징벌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직분과 역할로서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감독으로 표현하는 것 중의 제일 비중이 큰 것은 그분이 곧 감독자인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심판을 받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모라가 모세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르우벤지파 사람 3명(엘리압의 아들 다단, 아비람, 벨렛)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250명이나 가담되어 있었습니다. 반란의 이유는 당신 모세와 아론만 하나님이 선택한 자이며, 잘난 체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기도한 다음 “내일 아침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인들아 잘 들어라!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을 시켜서 성막에서 일하게 하신 것을 너희가 작은 일로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 레위 인들에게 이런 귀한 일을 맡기셨는데 어째서 너희가 제사장 직분까지 맡으려고 하느냐, 너희는 하나가 되어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시켜서 엘라압의 아들 세 명의 주동자를 불러오게 했으나 그들은 거절하며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를 비옥한 땅에서 이곳 광야에서 죽이려고 한 것도 부족하여 이제 우리의 왕까지 되려고 하시오. 당신은 우리를 비옥한 땅으로 인도하지 않았고 밭이나 포도원도 주지 않았소.” 그리고 고모라가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광채로 성막 입구에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이곳에서 떠나라 내가 이들을 당장 죽여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 엎드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시여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에게 노하십니까?”하고 애원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백성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천막에서 떠나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이 갈라져 이들은 산 채로 깊은 구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250명의 추종자도 “땅이 우리를 삼키려 한다”고 하며 도망하였습니다. 그 때 분향하던 불이 그들을 좇아 태워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감독자’는 이렇게 심판하시는 자로 방문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불순종하는 민족들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방문을 받을 것이며(렘6:15), 그들의 우상들은 방문의 날에 깨뜨려질 것이다.(사10:3)고 하십니다. 감독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심판주가 아닌 구원의 주님으로 만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독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으십니다.
창세기 18장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18:2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멸하시지 않겠다는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죽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10명씩 줄여나가며 하나님께 간구 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50명의 의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한꺼번에 적은 수의 의인을 말할 수 없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줄여나갑니다.
“사십오인을 찾으면”(28절)
“삼십인을 찾으시면”(30절)
“이십인을 찾으시면”(31절)
“십인을 찾으시면”(32절) 그 십인을 인하여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는 10인이 없었습니다. 결국 롯의 일행만 빠져나오고 그 성은 멸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지금의 의인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18:12-13)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씀해 주십니다. 목자를 잃어버렸던 이 양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나를 존중하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감독이 선수들을 다루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가끔 운동경기 감독들은 지나치게 선수들을 혹독하게, 그리고 개인적인 배려 없이, 경기만 생각한 나머지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독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 될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정상적인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무자격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의 학교에는 랍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이 누구인가에 따라 문하생이 있습니다. 유태인의 교육사상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아이들을 교육시켜 읽고 쓸 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기본교육은 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어떤 랍비에게 사사를 받았거나 문하생이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일정한 시험을 거친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님이 감독자로서 그들을 선택했습니다. 무명의 사람을 선수로 길러낸 것입니다.
요8:3-9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라고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하라고 하면 예수님은 사랑이 없고 여인을 죽인 사람으로 몰아갈 것이고, 놓아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유대인이라고 예수를 모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린아이로부터 하나씩 슬금슬금 사라지고 이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가까이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여자와는 상종치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이 만난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감독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6-27)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하루는 정원에 나가 보았더니 화단의 꽃과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임금은 참나무에게 왜 죽어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참나무는 멋진 전나무처럼 키도 크지 못한데 살아서 무엇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나무에게 넌 왜 죽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포도나무처럼 좋은 열매도 못 맺으니 죽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물었습니다. 포도나무도 장미처럼 꽃도 못 피우니 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제비꽃은 생생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비꽃에게 너는 왜 이렇게 힘있게 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비꽃은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 저를 여기에 심으신 것은 제가 이곳에 꼭 필요하기 때문임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키가 작고 예쁘지 않아도 제비꽃으로 열심히 피어서 임금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저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는 만족함이 없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까? 여러 가지 다른 축복은 제쳐 두고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주어진 삶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련하고 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심에 감사해서 살아갑니다.

애매한 고난을 참으십시오.
운동경기를 보면 가끔 선수들이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심판의 불공정 판결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안 선수들과 감독들은 심판에게 항의하며 경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입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한 때는 베드로 자신도 이러한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모닥불을 쬐고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는 그런 성숙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20)의 “아름아우나” cavri”(카리스)는 “은혜, 선물, 기쁨, 감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경기할 때 분통이 터지는 불합리한 판정에 참으면 사람들에게 잠시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라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카리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 응당한 기쁨, 선물의 은혜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 제일 처음 나타난 곳은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40)입니다. “은혜”가 바로 cavri”(카리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언제 주어지는지 아시겠습니까?
선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참고, 인내할 때입니다.

구전(口传)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만드는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본을 보인 감독이십니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고 하십니다. 어떠한 본을 보여주셨습니까?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채찍을 받으실 때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라고 했습니다. 이 법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본을 보이신 앞서가신 감독이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고아와 같이 버려진 목자 없는 양이 아닙니다.

감독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유치원의 어린아이들이 엄마가 없으면 재롱잔치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데 엄마가 없기 때문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에 들 수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 간절히 원하고 응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 까지도 세고 계신 분이며(마10:30) 또한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아니하도록 지켜주십니다(눅21:18).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경기에 임한 선수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감독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