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석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2.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 / 본문 : 마6:24-27, 고전10:4

우리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주지만 소처럼 큰 눈만 깜박거리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아무리 좋은 말을 들려주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으며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집에서 살고 집에서 죽는 것입니다. 집은 곳 우리의 안식처요 가족이 있고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야구를 보면 홈에서 출발해서 홈으로 들어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이 있는 집, 홈에서 출발해서 홈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여행길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을 떠난 우리들은 잠시 죄악 때문에, 사단의 방해로 그 길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길을 다시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안내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설계를 해야합니다.
‘바둑’아시죠? 바둑은 집을 누가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게임의 승패가 나는 것입니다. 바둑판은 19*19줄의 361집입니다. 이 바둑판을 두고 인생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혼자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편이 그 집을 그대로 짓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상대편도 집을 확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싸움을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고수일수록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해 하지 않고 바둑판을 크게 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은 인생을 설계해야 합니다. 설계를 할 때는 넓은 마음으로 전체를 보고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설계를 잘해서 집이 지어져 가는 분도 있을 것이고 이미 다 지어서 그 집을 활용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집이 잘못되어 다시 지을 필요가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집을 지은 사람의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나는 기초가 필요 없다. 바람 부는 대로 떠내려 갈 것이다’라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유형은 ‘나는 견고한 기초 위에 집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초가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초는 세상 학문, 물질, 명예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집을 설계하고 지었다면 부수고 다시 재건축을 하시기 바랍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기초가 잘못된 자기 집을 계속 짓는 사람입니다.

한 여객선이 심한 폭풍우로 항로를 잃고 헤매다가 어느 무인도에서 난파되었습니다. 승객들이 머리를 모아 아무리 의논을 해도 무인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난파된 배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몇 달 먹을 식량과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는 날까지 살아야 했기에 씨앗을 심기로 결정하고 땅을 팠습니다. 그런데 황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씨앗 뿌리는 것도 잊고 황금을 캐느라 온 무인도를 동분서주했습니다. 몇 달 후, 황금은 산더미같이 쌓였고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지쳤다. 그런데 설상가상을 식량까지 바닥났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이 씨앗을 뿌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들 모두 황금더미 옆에서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누런 황금 덩어리 쌓는 것이 살 길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미래를 위한 설계입니다.

집은 기초가 제일 중요합니다.
미국의 뉴욕과 호주의 시드니는 반석 위에 세워진 도시라면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아드리아 해의 물 속으로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거기엔 뉴욕이나 시드니 같은 기반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7:25)라고 하십니다. ‘반석’은 원어로 페트라(pevtran)입니다. 이 말은 바위, 암반을 말하며 천연요새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본문은 팔레스틴의 지형적인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팔레스틴은 건기 때에는 바짝 마른 땅도 우기(wadi)때에는 급류가 내려갑니다. 제가 작년에 캄보디아 갔을 때 선교사님이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통과 여러 가지 여건이 좋은 땅을 봐 두었는데 건기 때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니까 그 땅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집을 지으면 물 속에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우기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열대지방은 반드시 우기를 거치고 나야 땅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반석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4:11)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2:6-7)
이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 건축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침례교목사를 지낸 에드워드 모트(1797-1874)가 작곡한(찬송가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의 후렴에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서기를 소원하는 이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외모를 너무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집을 짓는 모든 사람은 외모에도 신경을 쓸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외모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속은 비어 있으면서 남에게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집을 보면 대문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속 있는 집은 굴뚝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 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겔13:14)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바로 이들은 기초를 반석위에 세우지 않고 담에 회칠을 해서 그럴듯하게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담도, 회칠한 자들도 없어졌습니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앙이어야지 남에게 보이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 때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나 외식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고 하셨습니다.

반석위가 아닌 집은 무너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7) 본문에는 접속사인 ‘그러므로, 역시, 마찬가지로’의 뜻이 있는 카이(kai;)가 무려 5회나 나옵니다. 우리말에 ‘업친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무너지는 것이 계속되기 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집은 안전검사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집은 하나님께서 짓도록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분에 의해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집도 준공검사를 받아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라에서 정한 안전한 기준에 따라 건물을 조사하고 사용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나님께서 잘 지었다는 승인해 주어야 합니다. 그 승인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비유적이지만 인 맞은, 도장을 찍어준 사람의 수와 도장의 내용까지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계7:4)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것이 있도다”(계14:1)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에 도장을 찍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 도장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을 쓴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집을 지었나?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기초 위에 집을 지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해 지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이유는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 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혹 이런 모습이 우리교육의 현재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지요?

여러분 우리의 집도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육체도 자신의 것으로만 알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앙교회는 우리만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 나아가 세계의 형제 자매들의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오래 전에 영국에 William Borden은 예일대학교에 입학을 한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중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은 그의 결정이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비웃었습니다. 좋은 가문,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자기를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중국에 가는 도중 애굽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병상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알렸습니다. 나는 ‘No reserve(남겨둔 것이 없다), No retreat(물러설 곳도 없다), No regret(후회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Borden은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견고한 터 위에 집을 짓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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