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랑

예수님은 누구 신가?(10. 나의 신랑) / 본문 : 사54:4-10

우리는 결혼하는 것을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말합니다. 영어의 ‘wed(결혼하다)’는 우리와 달리 ‘약속한다, 서약한다’의 뜻입니다. 남녀간에 부부가 되는 것을 약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징표로 결혼반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은 단순한 남녀가 만나서 한평생 살기로 약속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시집’이란 남편만이 아니라 ‘남편의 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집간다’는 것은 한 남자와 살러간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족(시집)과 살려고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장가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가’는 ‘장인 장모의 집(처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구려 때는 남자가 아내를 얻으려면 먼저 처가에 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첫 아이를 낳게 되면 비로소 색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우리의 결혼이란 1대 1의 결합이기도 하지만 한 집안과 자신이 들어가 결합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구약본문에서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5절)고 하십니다. 그리고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십니다.
제가 조카 결혼식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주례를 하시는 분이 저희 집안을 말하면서 ‘명문가의 집안과 결혼하게 된 신부는…’이라고 할 때 사실 우리집안 사람은 그 말에 어리둥절 했습니다. 우리 집안이 명문가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희와 반대로 명문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표된 이야기에 따르면 미국부자 중에 3대를 이어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명문가는 부자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집안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경우는 신랑, 신부보다도 집안을 따지게 마련입니다. 명문가일수록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왕자 또는 공주와의 사랑과 결혼을 꿈속에서처럼 그려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꿈보다 더 나은 실제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님의 일가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비유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적인 말씀에 담긴 뜻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남편 되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가끔 지나치게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집안의 연인과 사랑을 하다 결혼 때가 되어 박대를 당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우리사회에서 이 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가족과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인도에 같을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인도에는 아직도 카스트(계급) 사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남자 집안의 신분이 낮은 하층 계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브라만 계급의 상류층 여자였습니다. 여자 집안 쪽에서 당연히 반대를 하고 남자에게 경고를 보냈습니다.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겠지요? 그리고 그 남자는 얼마 있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이와 같이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다 죽음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니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사 54:4)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부터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단칸방이지만 따뜻한 아랫목에서 편안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하찮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갖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중죄인이나 받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해외여행이나 해외에서 사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국가나 민족적으로 차별이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별 없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고 신부로 부르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남편으로 비유할 때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한 것을 성경은 간음으로 묘사했습니다(대하21:11, 겔6:9, 호4:12).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사 54:6) 본문의 ‘부르시되’(&a;r;q]:케라아크)는 ‘드러내다, 외치다, 선언하다’로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하는 것 보아서 결정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신부로서 큰 소리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완료형으로 이미 결정 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인생론에 관한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서운 맹수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도망치다가 마침내 낭떠러지 절벽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그 절벽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한참을 떨어져 내려가는데 칡넝쿨 같은 줄에 걸렸습니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위에는 들소가 으르렁거리고 있으며, 절벽 아래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사적으로 그 칡넝쿨을 잡고 있는데 바위틈에서 희고 까만 들쥐가 나와서 그 뿌리를 교대로 깔아 먹고 있습니다.
불안과 초조와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앞에 무엇인가 간헐적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위 벌집에서 꿀이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혀를 내어서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순간의 즐거움을 통하여 그 고통을 잊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서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간절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종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 그 시대를 향한 복음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 소리가 나타나는 현장의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려야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영원한 자비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죄로 인해서 얼굴을 잠시 가리우셨습니다. 즉 못 본 척 하셨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불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넘치는 진노’와 ‘영원한 자비’를 대조하여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넘치는 진노에서 영원한 자비를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비’(dseje:헷쎄드)는 ‘아름다운’과 ‘책망’의 뜻이 함께 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는 못 본체 하시지 않고 사랑의 매를 필요하면 때리시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생아가 아닙니다.

미국 유머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미국인이 6․25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산길을 걷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남자는 나귀를 타고 그 아내는 뒤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인은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레이디 퍼스트의 예의도 모르시오? 여자를 저렇게 학대하다니….’
그러자 그 군자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풍속이오!’
그런데 그 미국인이 6․25 직후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그와 정반대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산길이었지만 이번엔 여자가 앞에서 나귀를 타고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조심성 있게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미국인이 신기하게 생각하며 ‘여보시오, 그동안 풍속이 변했구료.’
그러나 그 군자는 옛날과 똑같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쟁통에 지뢰가 사방에 묻혀있기 때문에 아내를 이렇게 앞세우고 가는 거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부려먹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우리와 함께 하시며 살리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에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8)라고 ‘구속자’라고 수식어가 붙은 것은 메시야의 구속사역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약성경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광과 회복에 대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의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삼위일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16-19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기억해 보십시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사마리아의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세상 적인 남편으로만 보십니까? 처음에는 약간 그런 의미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씀은 영적인 남편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 나의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축복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셨으며 에베소서 1: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로 더욱 우리를 감동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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