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6. 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 본문 : 요6:35-51

여러분들 중에는 애완동물이나 난이나 분재, 꽃 같은 식물을 키우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먹이를 주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고 내버려두면 얼마 안 가서 죽게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절)고 하나님께서 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그리고 자꾸 잊어버려서 애완동물이나 식물을 못 키웁니다. 제게 맡겨진 것이 있다면 얼마 못 가서 죽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반드시 우리를 말씀하신 대로 살리십니다.
저는 먼저의 설교에서 생명이신 예수님과 부활의 예수님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부활은 우리도 예수와 같이 살아날 수 있다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죽은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고, 우리의 생명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날에 만일 육체적으로 잠들어(죽어) 있다면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게 되고 잠들지 않았다면 주님과 같이 하나님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날이 되기 이전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때까지 먹고 마실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디베랴에서 떡과 고기를 축사하신 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고 그곳에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을 찾아보았으나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러 배를 타고 좀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버나움이 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무리들은 이제 예수님을 만났으니 지난번 베풀어주신 것처럼 떡과 물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축복을 또 한번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를 원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표적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체적인 배를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늘 예수님과 사람사이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표적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30절)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1절)고 했습니다. 이 질문으로 보아 그들은 계속해서 만나와 같은 떡을 지속적으로 먹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32절)의 대답으로 보아 무리들은 모세가 만나를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는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오늘 말씀의 제목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5절)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입니다(33, 41절).
만나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38절).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었다는 육신 적인 것만을 기억하고 수군거렸습니다(42절). 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십니까? 그것은 이 땅의 것으로는 우리를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신령한 것이 아니고는 우리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1:9),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전도서 기자는 이미 해 아래서의 헛됨을 독백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일 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제일먼저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주 구약의 에녹, 엘리야 같은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하늘에 올라간 자는 아니었다. 이 뜻은 단순한 하늘에 올라간 자의 의미보다는 부활의 첫 열매되심을 증거 한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뜻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만나만 먹으면 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출16:35)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린 떡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생명에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보통 밤을 세끼를 먹습니다. 하루만 굶으면 금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난리가 아닙니다. 육체를 위해서 영양분이 필요하다고, 장에서 속이 비었다는 신호이지요.

예전에 가난했던 시절 어떤 주일학교 학생이 교회에 처음 나왔는데, 식사할 때 기도하고 밥 먹으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을 듣고는 집에 가서 기도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하나님 어디계신지 모르지만 함께 드입시더”하고 혹시 어디선가 하나님이시라는 분이 나타나 금방 다 먹어버릴 것 같아서 단숨에 밤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나 살아있는 모든 동식물에게는 양식이 떨어지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굶주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를 위한 양식을 부정하거나 결코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진짜 관심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양식의 예표였습니다. 육체가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도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산(생명) 떡을 먹으면 영생합니다.
본문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32절) ou(우) “아니”는 문장 전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levgw”(레고) “말하다”의 다음에 ou\n(운)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떡은 모세가 준 것도 아니지만 그 앞에 나타나는 ou\n(운)은 그것은 “참 떡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광야에서 주신 만나는 그들의 육체를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살리는 생명의 떡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고 하시자 하늘에서 ‘만나’같이 내려오는 양식을 생각한 사람들은 실망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자신의 사업이 안되면 금방 실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이 노력하지 않고 있는데 좋은 수험점수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 땅의 축복을 잔뜩 기대했다가 자기의 생각처럼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들처럼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수군수군 거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3-44절) 여러분 지금 축복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얼른 생각하면 급한 것이야 지금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다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 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강아지 똥은 쓸쓸하게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봄이 한창인 어느 날, 그 강아지 똥 위에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강아지 똥이 민들레가 자라도록 거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할 화목 제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흘려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는 예수 안에 거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절) mevnw(메노) “거하다, 거주하다, 남아있다”의 이 말은 요한의 주요 신학적인 주제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삼위일체교리가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고”(요14:10), 성령님이 예수님에 “거하며”(요1:32),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도 그들 안에 “거합니다”(요6:56, 요15:4, 참고 요일2:6, 27, 28, 요일4:12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은 단순한 영적 교감의 수준을 넘어 본질상 하나가 되는 영적 교통함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주하고 내가 예수께 거주함”을 말하는 것은 예수와 함께 살아있는 상태임을 말합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현은 신, 구약에서는 많이 발견됩니다만(수3:10, 삼상17:26, 삼상25:26, 왕하19:4, 사37:4, 렘10:10, 마16:16, 마26:63, 롬9:26, 고후3:3, 딤전4:10, 히3:12, 히9:14, 히10:31, 히12:22, 계10:6) “살아계신 아버지”(57절)라는 표현은 본 절이 유일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샘터라는 잡지에 있던 글입니다(저는 엄호섭님의 ‘우리에 들지 않은 양’에서 옮겼습니다).
글의 제목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어느 중년 여인이 유복자를 낳아 너무 귀하게 키웠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 아들의 모습에서 먼저가신 남편의 추억을 느끼며 겨울밤을 외롭지 않게 보내곤 했습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여 하루종일 아들만 쳐다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들은 친구가 생기고 등하교 길에 “엄마”라는 목소리로 집에 돌아왔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학교에서 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는 어머니의 모든 꿈을 산산이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삶의 의미도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도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에게 긴장감 마저 주었습니다.
며칠 후 이상한 일이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복 차림의 어머니 한 분이 복잡한 횡단 보도에서 등교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개구쟁이 어린이들이 모두 길을 건넌 후 확인하고 피켓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손에 든 교통 통제용 피켓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무엇이 무슨 힘이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이 여인의 눈에 눈물을 머금게 했겠습니까? 이 여인은 아들이 죽어 한 맺힌 그 삶을 포기했어야 했는데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삶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사의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살아 계신 아버지”품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안에 거하여 이와 같은 위로와 영생의 축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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