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아들 이삭(창세기 8)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14-15)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축복의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이제 인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 아담에게 기대했던 마음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축복입니다.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이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식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 배속에서 나왔어도 부모님 마음대로 안된 다는 것이 자식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고마운 아들이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우리가 자식 교육하면서 잘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에게 잘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됩니다. 자식은 부모를 따라 배웁니다. 자식에게 잘하려고 하지말고 위로 잘하시면 됩니다. 부모에게 잘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잘하시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4-5)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잘 보세요. 여러분! 아브라함에게는 지금 애굽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 뿐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려면 이스마엘로 시작해야 되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빠지게 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하고 말 그대로 동고동락을 함께 한 사이입니다. 사라가 없었다면 아브라함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사라와 같은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있는 겁니다. 하와 같은 여자가 있었기 때문에 아담이 된 겁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 말씀 속에서 이삭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고 했습니다. 무슨 사람만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한 사람입니다. 바로 구약에서는 이삭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이삭과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삭도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이 주신 아들입니다.

이삭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는 첫 자식이 이삭입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소돔 성을 위해서 간구합니다. 사실 이 사건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상황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간곡히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망해 가는 소돔 성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간구합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이삭을 약속 받았습니다. 사라는 웃었습니다. 이미 여인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한 말을 다시 봅시다. 본문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여자에게서 아이 낳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처음에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사라가 웃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속 웃음이 나왔습니다(창 18:12).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히 11:11)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웃음 때문에 이삭이 된 것은 아닙니다. 웃으며(와이츠하크) (와)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이며, (이츠하크)는 ‘웃다, 조롱하다, 놀다’라는 동사 (차하크)에서 온 칼형(Kal:기본형)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로서, ‘그가 웃다’라는 뜻인데 불신의 조소가 아니고 ‘기뻐서 웃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아브라함 나이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하신 첫 번 째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축복의 시작, 첫 열매가 이삭(이츠하크)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이름대로 웃으며 산 사람이 이츠하크 입니다.

히브리어로 이삭이 ‘이츠하크’입니다.
그런데 영어권으로 가서 이 사람들 발음을 못하니까 ‘아이작’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님이 ‘여호수아’인데 헬라어로 ‘예수스’라고 발음합니다.

히브리어로 ‘요한’이 ‘여호하난’인데 헬라어로 ‘요한네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어권으로 가서 ‘존’이 됩니다.
프랑스로 가서는 ‘짱’이 됩니다.
노르웨이나 북유럽으로 가서 ‘얀, 센’이 됩니다.
러시아는 ‘이반’이 됩니다.

발음들을 정확하게 못하니까 이렇게 말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 따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 갔다 오면 ‘에이멘’ 그러는데 ‘아멘’이 맞는 겁니다. 영어권의 사람이 a(헬라어 알파)를 a(에이)로 발음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원래 ‘아’를 잘 못합니다. 영어에는 단음으로는 ‘아’가 없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만큼 다 따라하는 언어가 없습니다.

이삭의 삶은 한마디로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 삽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다 양보하고 삽니다. 자기 부인 누이라고 속이는 것까지 따라합니다(창 26:7:그랄에서 불레셋왕 아비멜렉에게). 그래서 어쩌면 이삭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적게 기록되었습니다. 사실 평온한 삶을 산 사람은 아무 할말이 없습니다. 너무 간증거리가 많은 사람보다는 나는 간증할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평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에 보면 이 세상 사람이 900년 이상을 살 때 에녹은 365세에 하나님께 들려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승천 사건입니다. 그런데 에녹에 대해서 한마디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라고 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로 유명해진 철학자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미 4000년 전에 이것을 끝낸 사람입니다.
“. 생산은 인간의 참된 욕구에 부응해야 하며 경제체제의 요구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 사람과 자연 사이에는 착취가 아닌 협력에 기초한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 적대감은 연대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 모든 사회적 제도의 최고 목표는 인간의 복지를 가져오고 인간의 고통을 저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가 노력해야 할 방향은 소비의 극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복지를 증진하는 합리적 소비이다.
. 개인은 사회생활에 능동적 동기로 참여해야 한다. – 소유냐 존재냐 본문 중에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면 자신의 존재를 모릅니다.
“인간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할 것 인가이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중국에서 선교한 김연석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중국 공산주의 한 사람들이 돈 벌줄 모르니까 가축을 한 300리 길가면 세 배 는 더 받는 겁니다. 추럭 빌리면 되고 해서 말하고 마을 사람들하고 가축을 팔고 돌아오는데 중간에 깡패 만나서 6대의 차를 세웠습니다. 돈을 달라고 하는데 어떡할까요? 그래서 집사님 들이 되어 가지고 성경도 안 보았냐고 하면서 주면 되지 않냐고 그러니까 얼마를 줄까요, 그냥 다 주라고, 하여 다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분명히 선교사하고 깡패하고 짜고 우리 것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빈털터리로 가는데, 뒤에서 지프차가 따라와 겁을 내고 있는데 뒷문 열더니 돈 자루 다 내려놓고 가더라는 겁니다.
기분 나빠서 못 받겠다고 하고 가더랍니다. 이렇게 선 듯 다 주는 것은 기분 나빠서 못 받겠다고 하고 던져 버렸습니다. 돈을 세어 보니까 아까보다 많다는 겁니다. 가서 도로 주라고해서 같다 주니까 깡패가 가져가라고, 나도 좋은 일 좀 하려고 하는데 가져가라고 해서 가져왔답니다.
돌아와서 상해대학 총장까지 지낸 분이 땅에 폭삭 엎드리면서 내가 가룟유다라고 내가 선생님을 의심했으니 저를 좀 밟아 주리고, 몇 일 있다 깡패 대장이 와서 아무리 선생님 무술에 고수 같은데 언제 한번 가르쳐 달라고 왔답니다. 자네 정성을 보이게, 그래서 깡패를 회개시켰답니다.

이삭은 싸우는 적이 없습니다. 다 주니까 싸움이 안되지요. 우물 파서 자기내 것이라고 우기니까 그럼 가지라고 하고 다른데 가서 또 파는 겁니다. 또 오면 또 주고 다시 팝니다. 다 줍니다. 바보 같은 이삭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바보 같습니까?

이삭은 보기 드문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아브라함이고 아들이 야곱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사람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버지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식도 솔로몬으로 이어가지만 솔로몬의 말년은 타락했습니다. 간혹 농담 삼아 다윗이 하나님께 우리아의 아내를 간통한 사건을 말하면서 다윗도 바람을 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갑니다. 다윗은 여러분! 사실 이 사건으로 인생 끝난 겁니다. 자기아들 다 죽었지요, 자기 생명 단축되지요, 하나님의 일을 못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습니다.

성경에서 이삭은 다섯 가지 관점에서 나타납니다.

첫째, 아브라함 100세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입니다. 약속의 아들입니다.
둘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따라가 순종한 사건입니다(창 22장).
셋째, 아내 리브가를 맞이하는 장면입니다(창 24:1-67).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아내를 얻음
넷째,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그랄에 거주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우물을 판 사건입니다(창 26장).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5)
다섯째, 리브가에 의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입니다(창 27장). 이것이 이삭의 5대 사건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로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아들입니다. 순종의 아들입니다. 축복의 계보를 잇는 첫 번째 아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첫 번째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 산상복음의 8복을 잘 보면 이삭의 장점과 그대로 닮았습니다. 축복은 언제나 일관성이 있게 다가옵니다. 엉뚱한 짓 하면서 벼락맞듯이 롯또복권 당첨되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5)고 했습니다. 내가 먼저 가야 가는 것이고 내가 먼저 해야 종들도 따라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철저하게 아브라함을 따라 산 사람입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