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스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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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주) 아래 본문은 실제의 설교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내용상의 차이가 아니라 글과 문장의 차이입니다.
즉 아래 내용을 숙지하되 설교는 본문 중심으로 자유롭게 선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 여호와에 대한 신앙
스바냐는 자기보다 약 40년에서 외쳤던 이사야(740-681)에게서 많은 교훈을 얻은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절대 주권에 대한 신념이나, 남은 자의 사상 등은 이사야 예언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는데, 스바냐서 에서도 유사한 사상적 흐름이 발견됩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예언에서 크게 영향 받았다 할지라도, 스바냐의 예언은 이사야의 예언과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연대적인 차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언의 강조 점에 대한 차이입니다.

즉 스바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지하여 유다와 열방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스바냐는 개인적인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였는데, 이는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리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자만을 고치는 길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훗날 신학자들은 스바냐에게는 청교주의자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Patersom). 그만큼 스바냐는 ‘칼빈’(Calvin)의 청교도적 생활 요구의 원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바냐는 후대에 ‘칼빈주의’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강조한 면에서 ‘칼빈’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합니다.

2. 심판 선포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여호와의 성결과 관련시켰습니다. 곧 여호와의 성결이란 그의 완전한 도덕적 순수성이 그의 초월적 존귀성과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성결에 있어서 도덕적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점은 아모스가 지적한 바다(암 4:2). 즉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정의와 의를 요구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암 5:24). 그러나 성결의 문제와 심판을 동시에 취급하고 강조한 예언자는 이사야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라고 했으며, 성결과 의를 영원히 결합시켰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결과 의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사 1:2, 4-6, 11-15). 이러한 심판은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암 5:18-20) 선포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에서는 이 ‘여호와의 날’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사 2:6-22). 이러한 사상은 스바냐에게서 심판의 절정으로 나타납니다. 학자들은 이로 인해 ‘구약성경에서 가장 지독한 책’(Smith)이라고 부르며, ‘스바냐의 사상이 너무 심판으로 기울어져 있다’(Sellin)고도 합니다.
그만큼 스바냐의 심판 선포는 아모스나 이사야의 심판 선포보다 보다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즉 “모든 것이 파괴되고 시들고 타 버렸다. 초목 위에 한 방울의 이슬도 없고 새들의 노래도 들을 수 없으며, 한 송이 꽃도 볼 수 없고, 어디에나 불이 이글이글 타고 연기가 자욱하며, 어둡고 침침하고, 집은 파괴되고, 궁궐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스바냐의 심판 선포는 아모스나 이사야와 다르고, 나훔이나 하박국 선지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넓은 폭까지 세밀하게 다루었습니다.
즉 스바냐의 심판 선포는 전 세계적인 심판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주요 관심은 유다 였지만, 그가 본 하나님은 유다와 세계 만국과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분이시며, 특히 도덕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방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을 미워하고, 적대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의 심판 선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도 다른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으며, 이방인들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스바냐의 예언은 범세계적이고, 철저하고, 최종적인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3. 남은 자 사상
이사야와 스바냐의 남은 자 사상은 사실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나 범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즉 아모스는 ‘요셉의 남은 자’라고 말함으로써 북 이스라엘을 지칭하였습니다(암 5:15). 또한 아모스는 그들이 여호와의 은총을 입어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범위에 있어서조차 이스라엘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사야는 유다의 단순한 잔존 이상의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작은 아들의 이름을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의 ‘스알야숩’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사야는 초기 예언에서부터 남은 자 사상에 대한 소망을 품었으며, 아들의 이름을 미래의 불운에 대한 표적과 예표로 삼았습니다(사 8:18). 이러한 사상은 또한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즉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의심할지 모르지만 포로 후의 히브리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범세계적으로 남은 자들이 살아남아 순결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사 8:16, 28:16). 이 점에 있어서 이사야는 아모스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은 자 사상에 대한 범세계적인 소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냐의 예언 가운데서 남은 자 사상은 마지못해 선포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즉 이사야는 심판 사상과 남은 자 사상을 연속시켜서 심판을 하나님의 은혜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심판을 강조한 나머지 사랑을 생각지 않았으며, 이사야보다는 아모스에게 치우친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 사상에 치우친 예언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남은 자 사상을 말할 때에도 심판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였으며, 구원을 받을 남은 자라 할지라도 불로 받는 것과 같은 구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스바냐의 예언은 다분히 윤리적이란 점이 드러납니다.

 

답글
  • 윤혜숙말하길

    이영제목사님, 스바냐 1장1절로 18절 말씀, 2장 1절로 3절 말씀 가지고 대언하신 말씀 “여호와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이 말씀 받고 감격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목사님 말씀마다 직접 노트에 적어가며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바냐 1:1 부터 말씀을 일일이 적었습니다. 이 스바냐서를 들어서 설교하신 목사님은 요 근래에는 없었지않았나 생각됩니다. 환난날에 숨기시는 자들 중에 저도 포함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즘은 찬양을 부르며 온 천지가 캄캄한 날에도 찬송부르고 말씀을 부르짖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몇 주일째 찬송을 대체 눈으로 안보고 외워서 부르려합니다. 어릴 때부터 부른 찬송은 저절로 외워졌지만, 요즘은 새찬송으로 가사를 다 바꿔버렸더군요. 성경 구절 외우기는 훨씬 힘듭니다. 자꾸 적기는 합니다. 설교 들을때 언제나 열심히 적는 습관이 있습니다. 적어도 안보면 잊어버리는데, 안적으면 더 많이 잊으버리니까요. 신실하신 이영제목사님의 성경말씀을 전적으로 대언하시는 설교는 너무나 귀중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많이 생각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대꼬챙이 같이 똑 바르신 분이셨는데, 그런 모습을 이영제목사님 설교하심 듣고, 설교 본문을 택하심 보고, 전하시는 요점을 들으며 소천하신 제 아버지 생각이 왜 이렇게도 많이 나던지요.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요즘 대개의 목사님들이 교인들만 많이 끌어모으려고 말씀 전할 때도, 본문 선택할 때도 사탕발림 설교를 많이 하여서 안타깝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친교 장소나 다름없이 되버리고, 또한 그런 얕은 설교만 항상 들으면 성도들의 신앙증진에 별 도움이 못되겠지요. 이 시대의 악습에 굽히지않으시고 진정 하나님의 깊은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영제목사님은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종이십니다. 이제는 이목사님의 말씀증거, 열심히 듣고 공부하며 마음판에 새겨서 험한 세상 풍파 잘 헤쳐나가야되겠습니다. 사실상 교회를 섬겨도 그냥 세상적으로 흘러가는 목회자(기름부은 종이라해도..) 와 제직들과 성도들 사이에서 신앙노선이 맞지않아 갈등도 많이 했지만, 되도록이면 표를 내지않고 …이목사님 말씀처럼…오직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로 예배드리고 헌신 봉사하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목사님들 중에 고집이 세신 분들이 많아서 잘못된 고집을 부릴 때도…이제는 알겠습니다~ 하고 묵언으로 침묵으로 나갑니다. 세상 방법으로 숫자가 많은 곳이 이긴다고 모두 거기에 휩쓸려가버리니…혼자 고립되가 너무나 쉬운 열악하고 연약한 현 시대의 교회의 모습, 목회자의 모습, 제직의 모습,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아프지만 많이 참습니다. 이미 바른 대로 말씀드리고 바른 대로 나가다가(성경말씀)… 저를 내몰리게하고… 이상하게 흘러가다가 마지막엔 오년간 풍지박살난 교회를 하나님은 저를 다시 세우셔서 다시 새롭게 재정비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신앙노선이 좀 다른 목사님이라 비록 교인수는 증가한다해도 그 방법들이 하나님앞에 결코 옳지않음을 알지만…모든 일은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인도하여주셨음으로 제 믿음이 이런 환난을 거치며 더욱 더 깊고 높고 튼튼해짐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교회에서의 직분은 집사입니다. 윤혜숙집사. 수년전부터 평신도 사역자의 길을 걸으려고 기도하며 주변의 문제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가 심방 예배를 드리고 위로합니다. 저는 말씀은 선포하지않고 말씀봉독을 하고 찬송과 뜨거운 중보기도로 위로합니다. 제가 하고싶은 일이 바로 평신도로서 할 수 있는 선교사의 일이였습니다. 저는 어디 선교사로서 임명도 받은 곳도 제가 속한 선교회도 없습니다. 혼자 스스로 해보고저 하나님만 믿고 나아갑니다. 앞으로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만… 한국이면 바로 시작할 수 있으나…여기에는 없어서 못합니다. 그래서 일전에 이주민 선교사역훈련 코스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말씀듣고 배우며 새겨서 나아가 말씀증거할 수 있는 이영제목사님을 만났습니다.매 주일 이목사님 말씀 대언, 귀하게 듣겠습니다. 왜 그런지 처음부터 영적으로 목사님께로 끌어들이는 강한 힘을 느꼈습니다. 이영제목사님께 저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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