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예레미야 애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예레미야 애가의 명칭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자기가 저술한 책에 제목을 붙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후일에 다른 사람들이 그 내용을 보고 합당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히브리성경의 원 제목은 1, 2, 4장에 나오는 첫 단어인 ‘에카’를 따라 ‘에카’라고 불렀습니다.
‘에카’는 “아!, 어찌하여!”라는 비통함과 놀라움을 뜻하는 감탄사입니다. 우리 성경의 ‘예레미야 애가’라고 사용하는 것은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을 따른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한 시대
예레미야는 B.C. 640년경 예루살렘 동북방 2마일 지점에 있는 아나돗에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B.C. 626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렘1:2). 그때 그의 나이는 20세도 안 되는 젊은 나이였으며 내성적이며 소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신학적 특징
애가를 성경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책으로 보고, 죽은 여인의 넋을 애도하듯, 예루살렘 멸망과 민족의 파탄을 애도하는 공동체의 만가(輓歌)로 신학적 테마를 정한 것을 획기적인 일입니다. 이 새로운 신학적 테마에 대한 일치는 ‘차일즈’(Childs)의 ‘애가 신학’이란 말을 낳게 했고, 또 ‘크라우스’(Kraus)는 ‘비탄시’ 또는 ‘탄식시’라는 새로운 문학 유형을 발견해 내기도 했습니다. 즉 ‘크라우스’는 본서를 ‘제의적 탄식 의전’이라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형성된 ‘파괴된 성소를 위한 탄식시’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본서를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해체를 깊은 비탄적 명상으로 표현해 낸 비극시의 극치라고 했습니다. 또 ‘고트발트’(N. Gottwald)는 이 책에서 보복과 보상의 교리에 대한 신명기적인 신앙과 비참한 역사적 실제 사이의 긴장이 나타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애가의 저자는 멸망의 원인이 하나님의 분노에 있고, 그 분노를 유발시킨 원인이 백성들의 죄에 있다는 예언자 신학의 맥락에서 예루살렘 함락은 역사적 귀결로 마땅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서의 삶의 자리 문제와 관련하여 ‘알브렉트슨’(Albrektson)은 ‘거룩한 예루살렘’은 결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특수한 종교적 개념들과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실제적 상황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인의 고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애가의 삶의 자리가 이스라엘의 후대 생활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만큼 그 중요성은 더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B.C. 586년에 멸망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참상을 슬퍼하는 시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가 한 때는 모든 나라의 수도 중에서 으뜸가던 예루살렘의 현재의 비 참이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 지은 결과라는 것을 솔직 하 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저자 예레미야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구원하여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5편(장)의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장은 전통적인 만가(輓歌:elegy)이고
마지막 5장은 기도시입니다. 1-4장까지는 답관체(각 연의 첫 자가 히브리 알파벳순으로 하여, ‘알렢, 베트, 기멜, 달렏, 헤-, 와우, 자인, 헤트, 테트, 요드, 캎, 라멛, 멤, 눈-,사멬, 아인, 페, 싸데, 코프, 레쉬, 신, 쉰, 타우’까지 마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로 배열되어 각 장이 22연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1, 2, 4장이 22절로 3장은 66절로 되어있습니다. 글자 하나로 세 절씩 만들었기 때문에 66절이 되어있습니다.
5장은 22연(장)으로 되어있지만 답관체 형식은 아닙니다(이러한 답관체 형식은 시편 119편을 연상시키는 시편 119편의 경우 한 연이 8번씩 배체되어 있다). 이러한 답관체 형식을 아크로스틱(Acrostic)시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각 장의 절수가 히브리어의 가나다 글자 수인 22절로 되어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멸망당하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모습을 애도하는 비통한 감정이 녹아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보고 비탄해 하는 감정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 1: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죄악에 물든 유다 백성을 그나마 소망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를 부단히 전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모함과 핍박이었습니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애 3:14)고 말합니다. 선지자란 온갖 압박과 모욕 속에서도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삶이고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숭배를 했을 때 주어지는 황폐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원리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은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원칙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으로 나타난 교훈들을 통해서 경고를 받고 더욱더 여호와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특히 현대 교회가 이 메시지를 들어야할 합니다.

 

성경에도 예레미야 애가말고도 더러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참 슬픈 노래가 많은 민족중의 하나입니다. ‘아리랑’도 슬픈 노래입니다.
보통 새가 소리를 내면 보통은 노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애하기 위해서 소리를 낼 때가 제일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그 소리를 들을 때 ‘새가 운다’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슬프면 다 슬프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슬픈 노래가 인류 역사상 예레미야 애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애굽에 귀향 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까
40년 이상을 말씀을 전하고 성문입구에서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렘 7:1-7) 하는데 그 성전이 어떻게 될지 예레미야는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고도 들을 때 들어야 합니다. 시간 지나가면 끝입니다.

그리고 이미 렘 18:13-17에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렘 18:16) 예언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돌아와 직접 보니까 기가막하는 겁니다.

지금은 세계에 너무 범죄가 만연되어서 무딘 상태에서 어떤 죄를 지어도 자극을 받지 않는 상태에 처해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좀더 강력한 자극이 필요한데 바로 이 메시지가 그런 자극입니다. 여러분! 손톱 밑에 가시가 얼마나 아픕니까? 그 작은 상처에도 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무디어 졌습니까? 예레미야 애가를 통해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런 메시지를 받고 여호와께 나와야하겠습니다. 절망 중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이상 망하지 않습니다.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볼 때 대단해 보여도 하나님을 떠나면 끝나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갑시다. 하나님만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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