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 28:30)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사람은 자기가 본 것, 생각하는 것 외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주간 두 가지 하고만 지냈습니다. 성경과 컴퓨터입니다. 컴퓨터로 성경타자 치고 예전에 번역한다고 하던 것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에 무슨 예화 같은 것 기대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힘써 여호와를 아시기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출애굽기 26장은 37절까지 있습니다. 성막 만드는 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8장은 43절까지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성막 만드는 법보다 제사장의 옷 짓는 방법이 더 많이 기록된 것은 그만큼 비중이 많다는 말입니다. 성막이 있지만 이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사람, 제사장이 없으면 성막 자체가 필요가 없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중보의 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고 하셨습니다.
모든 만남은 상호 작용입니다. 한쪽의 노력으로만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오셔야 가능하고 사람 쪽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막이 필요했고 제사장이 있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어디까지 와 계시겠다는 것이냐 하면 성막의 지성소까지는 와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성소만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대단한 일입니다.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중대 사건은 이 땅에 없습니다. 아무리 큰 뉴스라고 해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뉴스보다 더 큰 뉴스는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도 강조하고 동시에 인간의 책임도 강조합니다. 어느 한쪽 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결코 합리화 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이 두 주장은 지식으로 머리로 풀기가 어렵습니다. 가슴을 다가가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 실존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논리를 주장하고 신뢰하는 과학자들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다는 자체가 이러한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일단 거리와 공간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찾아가서 만날 수 없는 분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있는 사막 한가운데 장막까지 오신다는 것은 분명 희망의 메시지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과 인간 쪽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99.9%, 아니 그 이상은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머지 조금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과연 인간이 하나님을 장막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성공할 것인가? 그 대답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방울을 달아 그 소리로 제사장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알았습니다(출 28:34-35). 이 제사장 옷을 입어야 죽지 않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28:43)

출애굽기 28장은 1-43절까지 제사장 옷 만드는 법이 나오는데 이중에 제일 많이 할애한 부분이 ‘판결 흉패’입니다. 15-30절까지 나옵니다. 16절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사장 옷의 정 중앙에 한 뼘의 크기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해서 달아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출애굽기 28장 17절-20절까지 한 줄에 세 개의 보석을 붙여야 합니다. 이렇게 네 줄에 걸쳐 보석을 12개를 붙여야 합니다.
제사장 옷 한 가운데 이런 보석이 붙여 있으니 가히 이 옷의 값어치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옷의 값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옷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만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만화 가운데 투명 인간이 나옵니다. 그런데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옷을 입으면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겁니다. 이런 옷이 실제 존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제사장의 옷은 그와 비할 데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이 흉패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 곧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29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재판하시고 판결을 내려주시며 제사장을 통해서 신정을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억울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솔로몬은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전 3:16)고 했습니다. 사람은 의인이 없습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바르게 세워보고자 인간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판결 흉패’에는 16개의 보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두 개의 중요한 것이 들어갑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 28:30)고 하셨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돌인지 철인지 다듬어진 또 다른 물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용도는 정확하게 나와있습니다.
우림(!yriWa)은 ‘빛’을 뜻하는 ‘우르’에서 나왔습니다. ‘우르’의 복수형으로 ‘빛들’이 됩니다.
둠밈(!yMiTu)은 ‘온전함’을 뜻하는 툼의 복수형으로 ‘완전함’이란 의미입니다.

‘우림’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의 알파벳 첫 자인 알-렢(a)이며 둠딤은 마지막 글자 타-우(T)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개념으로 말하면 우림과 둠밈은 알파오 오매가라는 뜻입니다. 처음과 나중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인지를 묻는 장면에서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민 27:21)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삼상 28:6)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에 누가 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느헤미야는 “총독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제사장 옷에 붙여진 우림과 둠밈의 역할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방법이요 신호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빛을 내어 하나님의 판결의 여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빛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떻게 됩니까? 히브리식 표현으로는 우림과 둠밈이지만 헬라식 표현으로 하면 ‘참 빛’입니다.

본문의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참 빛이다. 이 세상 사람 모두를 비춘다”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고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참 빛을 보았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본 것입니다. 알렢과 타우,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십니다.
그분은 이사야를 통해서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 62:1) 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단한 것을 안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알아낸 것은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전 7:26)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여자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이 아담 이후에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중국의 가장 훌륭한 왕을 이야기 할 때 요와 순을 듭니다. 요가 나라를 물려줄 때 다른 사람처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순에게 자기 딸을 주어 여자 다스리는 솜씨를 보고 그 다음에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고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큽니다. 여자 하나를 다스릴 줄 모르면서 천하를 다스리기 어렵다는 뜻도 되고 여자 한 사람 거느리는 것이 천하를 거느리는 것만큼 어렵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구약의 장막과 성소가 아닌 우림과 둠이 아닌 스스로 우림과 둠밈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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