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디 있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이 시점이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데는 그냥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의 용서하시겠다는 싸인이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에게 이 기회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은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하와와 맛있게 먹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니까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부끄러움은 창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올 수 없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기회를 주시려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들어간 아담은 변명 일색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절)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담의 대답이 12절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께 이렇게 변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인류 역사상 제일 한심한 대답입니다. 자기가 다스려야할 책임을 망각한 대답입니다. 가인에게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동생을 죽이기 직전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고 하셨습니다. 죄는 사탄은 너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에게 죄는 자꾸만 더 범죄 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자꾸만 다가오십니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죄를 어떻게 다스립니까? 자기 힘으로는 안됩니다. 자기 마음으로는 안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백기들고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은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습니다. 부모님 때부터 살아온 곳입니다.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든 곳입니다. 생활의 터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우르땅은 에덴 동산이 있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다음 구절에서 나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호렙산 까지 갑니다. 거기에 떨기나무가 있는데 불이 붙은 겁니다. 불은 불인데 나무는 타지 않는 겁니다. 모세는 신기하여 그 나무 있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택민이(2살)가 지난번 텔레비전 뒤로 가 보더라구요. 아마 사람이 나오는데 뒤에 뭐가 있지 않나 확인한 것 같습니다. 모세가 불꽃은 있는데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다가가자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라고 대답합니다.

아담과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만 돌아가면 되는데 그 때에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면 되는데 그들은 변명만 하다가 기회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다가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은혜를 입었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이 먼저 훌륭한 일을 했다든가 통회하고 회개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회개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순종하고 간 것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회개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도 자기 공로로 남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셨을 때에 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다고 한 것만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오기만 하면 이미 회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 회개된 것이며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르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예수님께 잘 보여서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에 높은 자리에나 앉겠다고 따라다녔습니다. 빛이 와야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지 어둠이 어둠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즉 나의 힘만으로는 죄를 가인에게 주셨던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는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여러분은 “내 맞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기르셨기 때문에 존재합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아니면 말도 안됩니다. 제가 하나님의 것이라니요? 마치 아담과 가인처럼 반문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4)고 하셨습니다.
다시 모세를 부르실 때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출 3:4)라고 했습니다. 모세를 하나님이 알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살인하고 도망 와서 양치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살인자야! 너를 심판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세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세야 모세야 이름을 부르셨을 뿐입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보고자 할 때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5)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러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십니다. 범죄 하여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시간적으로는 2011년 2월 27일에 있습니다. 장소 적으로 대한민국 경기도 산본의 주앙교회에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은 그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이 세상을 좀더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야 됩니다. 돈에 관심이 있는지? 아파트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야 됩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자 가인은 그 원인을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안색이 변하고 씩씩대기만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고 하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하니까 그냥 따라할 수도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자기의 양 중에서 첫 새끼로 제일 살지고 좋은 양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선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에서 빌립과 베드로가 전도할 때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행 8:21)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돈도 아니며 많은 배움도, 머리도 아닙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고 했습니다.
다윗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아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몬드 베이유(Simone Weil)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탕자에게 아버지 집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아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았다면 집에 돌아갈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새겨야할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아들이 있을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것은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때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마음을 열고 돌아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하나님의 한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받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의 초청에 아멘으로 나아오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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