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렘 32:6-15)

지난 수요일 제가 택배 두 개 5천 원에 보내야 하는데 200원이 모자라 정집사님께 200원 빌려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낮에 우리 집사람이 왔길래 우체국에 우편물 하나 보낼 것이 있어서 돈 좀 있으면 주고 가라고 했더니 지금 막 은행 들려서 오는 길인데 마지막 2만원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이너스 통장인 것 아시죠? 하고 돈 만원 주고 가버렸습니다. 우리 집사람에게는 참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혼자 생각해보면 올해도 참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남겨놓는 것 없이 다 쓰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할 일 다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사가 돈 남겨 놓아서 뭐합니까? 나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니 감사합니다. 2010년도 한 해에도 너무 감사할 제목이 많습니다.

성도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양입니다. 양은 늑대처럼 사납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능정도 하나씩은 있답니다. 뿔이 있던지,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던지, 눈이 좋던지, 냄새를 잘 맡든지… 그런데 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딱 하나 있는 것은 귀로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고 목자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는 양이었고, 우리도 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안 듣고 졸다가 가시면 우리 목사님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그럼 그렇지 목사님이 현실을 보시는구나! 역시 투자할 곳은 땅 뿐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 23:5-2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땅을 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지내기 위해서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땅을 살 때, 헷 족속은 그냥 묘실을 사용해도 된다고 합니다.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창 23:6-7)라고 했습니다. 12절에도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아브라함에게 그냥 좋은 땅을 골라 쓰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몸을 두 번씩이나 굽히고 겸손하게 대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물됨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겸손하게 그 땅의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땅 값 사백 세겔을 주고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사서 사라를 이곳에 장사했습니다.
이 땅에 사라, 아브라함,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야곱과 레아도 이곳에 장사되었습니다(창 49:30-31).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되어 야곱이 거기서 죽었지만 요셉에게 유언하기를 가나안 땅, 바로 아브라함이 묻힌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고 요셉은 그 유지를 받들어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장사지냅니다(창 50:11).
땅을 산 목적은 투기가 아닙니다. 장사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다윗도 땅을 샀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군사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에 노하사 “…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삼하 24:15)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갓 선지자를 통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바로 이 땅이 예루살렘의 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땅을 쌌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두 그냥 가지라고 했지만 돈을 지불하고 땅을 샀습니다. 값을 치르고 차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도 땅을 삽니다.
예레미야의 사촌인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땅을 사라고 합니다. 하나멜은 참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다른 족속에게 팔 수 없습니다. 자기 족속만이 땅을 매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분배해준 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파 사람에게는 팔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촌인 하나멜에게 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은 이미 바벨론 군대가 포위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졌기 때문에 이미 가치가 없었습니다. 망해 가는 나라의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은 십 팔 세겔을 주고 당시의 법에 따라 정확하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그리고 14절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마지막 1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지만 반드시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예레미야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남북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면서 국내 은행 고객들 사이에서도 “전쟁나면 은행에 맡긴 내 돈은 어떻게 되나”라는 걱정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은행들은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천재지변 등을 대비해 마련해 놓은 비상대책(컨틴전시 플랜)에 따라 위기대응에 나설 수 있어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중은행 IT기획부장은 “해외 백업을 검토했지만 국내와 똑같은 시스템을 해외에 두고 관리하는데 비용부담이 커서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전면전 상황에서는 고객 정보를 완벽히 지켜낼 대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은행에 저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의 선지자들이란 사생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합니다. 호세아는 창녀 고멜과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도망가려고 시도했지만 자기의 뜻대로 안됩니다. 결국 니느웨로 갑니다.
이사야가 활동한 시대는 앗수르의 침략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몹시 곤욕을 당하는 때이었습니다. 이미 주전 840년 예후 왕 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 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사야가 아직 젊은 시절인 734년에 앗수르는 북왕국으로 부터 많은 포로를 붙잡아 가고 북왕국은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수 년 후에 앗수르는 남왕국 유다에 침입하여 46개의 성을 파괴하였고 20만 명을 포로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에 관한 예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일 암흑 시대에 제일 밝은 빛을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당장 돈주고 산 땅은 이미 바벨론의 소유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으로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바보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보 같습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좌절의 짙은 구름을 뚫고 비취는 소망의 빛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가짜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렘 23:17) 할 때에 비록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마치 공증하듯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만 절대적인 절망이 아닙니다. 민족과 개인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아무리 북한이, 중국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러시아가 일본이 있어도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사로잡혀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개인과 나라의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6)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 4:8-10) 인간의 절망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 하실 장소가 됩니다. 인간의 힘이 존재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절망적인 곳에는 하나님의 힘이 역사 하는 곳이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개의치 않으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형틀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주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부활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입니다.

바로가 꿈 꾼 것을 요셉이 풀어줄 때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8) 자신이 애굽으로 형제들이 팔았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이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원망만 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버리고 가는 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을 사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으로 산 것도 이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바울과 이들 일행보다 오늘날 더 영광스럽게 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만물의 찌꺼기”는 마치 공해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쓰고 남은 쓰레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는 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버립니다. 우리가 비록 그러한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에바다, 우리의 영이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