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2)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2010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했던 북한 축구대표팀이 귀국 후 ‘대논쟁’ 이라는 형식의 사상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은 이번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에 0대 7로 지는 등 3전 전패를 기록해 16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지난 7월2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월드컵에 참가한 축구선수들을 놓고 사상투쟁 회의가 있었습니다. 선수들과 평양체육대학, 김일성종합대학, 김형직사범대학 체육학부 학생 400여명이 참석해 비공개로 열렸다합니다. 감독과 일부 선수는 무사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산주의가 성경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공산주의는 용서가 없습니다. 절대 용서 안 합니다. 자기들이 다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용서의 부탁만 받았습니다. 우리는 값지 못할 것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공산주의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다 심판합니다.

우리가 왜 남을 용서해야 됩니까?

1)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바울서신 중에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의 가정에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치면서 돈도 많이 훔쳐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수종들고 있었는데, 바울은 빌레몬의 종을 자기가 데리고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려는 마음에서 빌레몬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노예 법은 아주 가혹해서 주인이 노예에 대해서 무제한의 권력을 가졌고 노예의 생사권 까지도 주인이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잘못 때문에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한 노예의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도망친 죄가 있었고, 게다가 주인의 돈을 훔쳐 가지고 도망쳤으니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절대 절명의 가련한 노예를 용서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용서의 복음입니다. 죽게 된 종 오네시모를 살리고자 한 서신서입니다.

2) 나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기도문 다음에 나오는 두 절입니다. 주님이 기도를 가르친 후에 제일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용서입니다.
본문의 14절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이고 15절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와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14절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용서에는 용서할 것 즉 본문에는 “과실”이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가 나옵니다. 이 과실을 용서해야 됩니다. ‘과실(paravptwma:피랍토마)’로 ‘범죄, 과오, 실책’을 말합니다. 같은 단어를 막 11:25에서는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혐의, 허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한 편에 치우침’ 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 28:14, 수 1:7, 왕하 22:2)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 한편으로 치우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재판이 공정하지 못한 것은 한편으로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통사고로 10년을 넘게 싸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경찰관이 한편으로 치우쳐 처음부터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불리해 집니다. 이렇게 치우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다 치우쳤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지나친 여당도 야당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롬 4:25에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후 5:19, 골 2:13에서는 모두 우리의 죄에 대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용서 받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용서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3)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눅 17:5절을 보면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제자들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랍비들도 죄 지은 사람을 세 번 용서하라고 가르쳤고, 또 사실 한 번도 용서하기도 힘든데 하루에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니,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현재 갖고 있는 적은 믿음으로는 도저히 목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할까 봐 조심하려면 신경이 다 끊어져 버릴 것 같고, 또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려면 엄청난 양의 믿음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다른 복음서에는 그냥 나무라고만 되어 있는데 누가는 이 나무가 뽕나무라고 밝혀줍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몹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뿌리 뽑히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저도 어려서 뽕나무하고 인연이 많습니다. 이 팔도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부러진 것입니다. 뽕나무 뽑아보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뽕나무 뿌리가 뽑히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32 에서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용서의 복음입니다. 빌레몬서가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한 복음이었다면 성경은 오늘날 우리를 살리기 위한 복음서입니다(마 5:44, 마 18:35, 엡 4:32 , 골 3:13, 벧전 3:8-9)

여름밤의 극장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전설의 고향입니다. 전설의 고향은 다 백발백중 귀신이 나타납니다. 부부사이가 별로 안 좋은 분은 좀 보세요? 밤이 깊으면 더 무섭습니다. 거기다 비가 부슬부슬 오면 더 섬뜻합니다. 우리나라 전설의 고향에는 다 여자가 나타납니다. 서양 드랴큐라는 남자인데 우리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들은 다 누구입니까? 간단합니다. 한 이 맺힌 겁니다. 한이 맺혀 보복하려고 나타나는 겁니다. 원수 갚으러 오는 겁니다. 달려들어 보복하는 겁니다. 귀신이 나타나는 집을 폐가라 그러지 않습니다. 그 집을 흉가라고 그럽니다. 흉가면 망하는 겁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실 때도 축복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강도도 용서해 주고,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땔나무로 삼았습니다. 겨울이 되면 집에 장작을 많이 쌓아놓은 집은 겨울 준비를 잘한 집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산에 나무를 베어다 쌓아놓은 것이니 상당히 살림을 훼손한 겁니다. 이 나라에 무슨 자원이 있습니까?
1956년 미국인 시슬러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납니다. 시슬러 박사의 내한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에 자원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시슬러 박사는 같은 크기의 두 상자를 내밀었습니다. 한 상자 속에는 석탄이 들어 있었는데 4.5킬로와트의 전력을 다른 상자 속에는 우랴늄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1천 200만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2백 60만 배의 차이입니다. 이승만 대통은 놀라서 “우리도 이것을 가질 수 있겠소?” 시슬러 박사는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로 캐내는 자원입니다. 20년간 인재를 양성하면 가능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27명의 인재를 뽑아서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국민소득 400만 달러의 나라에서 수만 달러를 들여 유학시킨다는건 당시로서는 모험이었습니다. 그 후 딱 20년이 지난 1977년 고리 원자력 1호기를 세웠고 50년 후인 지금은 원자력의 대국이 되었습니다. 땅이 부족하고 자원이 부족하지만 시슬러 박사가 우리에게 원자력을 알려준 것처럼 우리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 10:32) 의인의 입술은 남에게 기쁨을 줍니다. 생명을 줍니다. 살게 합니다. 그러나 악인인 입은 남을 죽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원자력의 힘만이 아닙니다. 늦은 밤 촛불을 켜고 공부하던 우리 어린이들에게 밝은 세상을 주고 싶어서입니다. 한겨울이 와도 추위에 떨며 나무 한 짐 마련 못해 추위에 떨고 헐벗은 사람들이게 따뜻함을 주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도와주어도 어쩔 줄 모르며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도와주어도 불평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병이 있을 뿐 아니라 영적인 병이 있습니다. 영적인 병이 들면 여러 가지 증세가 나타나지만 그 중 가장 뚜렷한 증상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을 도덕적인 결함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적으로 볼 때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영적인 병이요, 죄악의 결과입니다. 로마서 1:21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 아니할 때 마음이 어두워져서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또 마음이 미련해져서 자기 분수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크신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도, 예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른 아홉 명의 문둥이를 한탄하고 슬퍼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살리는 책입니다.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도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우주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쏟으시고 생명을 버리심으로 의의 옷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그 밖의 행위는 모두 누더기 같은 옷입니다. 인간은 값을 주고 이 고귀한 옷을 살수가 없습니다.
태양의 빛을 값 주고 살 수 있습니까? 태양의 빛도 값 주고 못 사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영생과 의를 어떻게 값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모든 죄를 다 고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우리의 죄, 불의, 추악을 짊어지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창에 찔리셨습니다. 상처를 입으셨으며 고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해 고난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구원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용서도 중요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따로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다 됩니다.
본문 14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는 것이 곧 내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성결케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 해도 말씀을 사모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출석교인’은 될지언정 참된 신앙 인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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