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8-15)

교회 오다보면 어머님들이 아이들의 세 발 자전거를 손에 잡고 가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 세 발 자전거에는 아이들이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되어있고 어머니가 뒤에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길게 손잡이가 있습니다. 한 3살쯤 되는 아이들이 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페달을 밟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운전도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뒤에서 어머님들이 밀어주고 방향을 잡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마치 세 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인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뒤에서 하나님이 다 인도하시고 밀어주셔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 발 자전거 타고 가는 어린아이들 보니까요 모두가 제 딴에는 열심히 페달을 밟더라구요.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페달 밟지 않고 발 띠고 가는 아이는 제가 보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밟는 거예요. 나름대로 운전도 합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밀어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짝사랑 하셨어요. 이제 내가 응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떻게 믿음 생활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자녀를 기르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생활 해야 됩니다. 교육해야 합니다. 세상 교육에만 맡겨두지 마세요. 사람이 버립니다. 제가 러시아 중국, 아시아 다른 나라들도 다녀보았는데 어떤 선교사님들이 아이들 교육하는데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우니까 국제학교(사립학교)를 못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나라 국립학교에 보냅니다. 한번은 러시아 선교사님 아들이 학교에 다녀오더니 레닌이 왜 나쁜 사람이냐고 따집니다. 공산당 교육을 받은 겁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돈 많이 들어가는 학교만 보낸다고 잘 가르친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제일 좋은 교육은 부모님의 교육입니다. 가정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세요. 학원 보내서는 몇 시간씩 교육하게 하고, 학교에서 하루종일 교육하도록 맡겨두면서 왜 집에서는 아무 교육하지 않습니까? 학원 한시간 줄이고 집에서 한시간 성경 교육하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없이는 자신도 없고 자녀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한번 따라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나도 없고, 가정도 없고 자녀도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믿습니까?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오늘날 우리처럼 신약성경이 있고 예수님의 구속사업이 완결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은 겁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오늘 날 우리에게 들려진 독생자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었다면 그가 어떻게 했을까요? 어떤 순종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세례요한의 고백을 봅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했을 것입니다.
이 때는 심지어는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기도 전입니다. 당연히 출애굽시대의 기적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안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할 태세입니다. 오직 하나님에 죽고 하나님에 사는 것입니다. 그에게 다른 삶은 없어요. 온전한 순종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시작하는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적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시작을 누구로 하느냐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 조카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함께 복을 받았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조카 롯이 축복을 받은 것은 모두가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옆에만 있어도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아 주면 그에게도 함께 복을 줍니다. 그런데 롯은 이 복이 어떻게 해서 왔는지를 모릅니다. 그냥 사는 잘 살게되었다고 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페달을 밟아서 자전거가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물질이 많아지니까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절대 아는 사람과도 동업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조카하고 하면 안됩니다. 망하면 서로 책임 전가하여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잘되면 더 큰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하려면 꼭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정불화가 일어나고 싸우면서 살 수 없으니까 이 넓은 땅에서, 우리가 가진 이 땅에서 네가 갖고 싶은 땅을 선택하여 가지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롯은 어디를 선택했습니까? 소돔 성을 선택했습니다.

소돔성은 비옥합니다. 소돔성은 넓습니다. 아주 평야입니다. 좋은 땅입니다. 도시입니다. 여리고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이니까 바로 그 옆이니까 얼마나 잘 살겠어요? 그래서 이 롯은 소돔 성으로 향했어요. 롯은 오늘날로 말하면 부동산의 귀재입니다. 아주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요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벌고 어디에서 무슨 손해가 일어나고 이해관계 너무너무 잘 아는 박사입니다. 그래서 소돔 성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소돔성에 한 면만 보았지 다른 면을 보지 않았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죄가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쪽으로는 풍요로웠지 만, 온갖 범죄가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많았지만은 하나님이 떠난 것을 몰랐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많았지만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 세상을 다 살고 보면 부자로 산 것도 권력을 가지고 산 것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가 떠난 후에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한 부자가 떠난 후에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얼마를 남기고 갔습니까?” 변호사는 짤막하게 “다 남기고 가셨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은 재산을 남기고 가는 것을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경건한 영향력을 남기고 가는 것을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경제적인 것은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예루살렘 건물도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이면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마저 주님께 자랑합니다. “예수님 저 큰돌들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말하자면 이집트가 대단하지요. 그 웅장한 피라밋들을 보세요.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겁니까? 무엇을 위한 겁니까? 죽은 자들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이 땅에서 33년이란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를 남겨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부끄럽게 여기던 그 십자가가 제일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왜요?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베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헌신예배에 초청 받아 다녀오시고 오히려 자신이 그 교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오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사회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로도 유명합니다. 저는 그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식사하면서 그 교회 장로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사회적으로도 덕망 있는 분으로 큰 회사를 운영하시면서 학교에 강의도 나가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매주 토요일 교회에 오셔서 담임목사님과 젊은 교역자들의 구두를 모아 깨끗이 닦아주신 답니다. 그리고 사무실 화장실까지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신답니다. 그래서 모든 분들이 그 장로님을 존경하고 교회가 잘 성장해 가고 있답니다. 아들 같은 교역자들의 구두를 닦아주시면서 기도하실 그 장로님만 생각해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장로님이 계시니 교회가 민족과 열방을 위해 쓰임 받고 부흥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겸손에는 놀라운 감동과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선택권을 롯에게 넘겼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바보 같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물질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롯과의 평안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기까지 인도하여 축복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면 그곳이 곳 축복의 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4절에는 말씀합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사방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좁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작은 분이 아닙니다. 사방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널려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온 세계를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보았습니다.
몽골인의 평균 시력은 4.0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사는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이 온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합니다. 멀리서 말이 달려오며 먼지를 일으킵니다. 우리 눈으로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먼지 구름만 보고 그들은 “삼촌이 돼지 두 마리 잡아온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육의 눈이 밝은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보다 더 영적이어야 합니다. 영의 눈이 밝아 하나님의 비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0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그랬습니다. 롯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좋은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사람이 선택한 것은 물질이 풍요로운 소돔이었습니다. 사람이 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곳이었습니다(13절).
노아의 홍수 이전에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악할 뿐입니다. 롯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달랐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봅니다. 사람의 눈에는 버려진 곳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달랐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는 것은 다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은 뭐든 잘 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아브람의 절대적 순종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99세가 되어서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 17:1)고 하시면서 언약을 맺고 이제 큰아버지(아브람)라고 하지 않고 앞으로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아브라함)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7:4-5).

러시아가 미국에 알래스카를 사라고 제안하였습니다. 미국은 러시아에 200만 달러를 주고 알래스카를 샀습니다. 그 때 의회에서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바라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지금은 알래스카가 미국의 모든 주 가운데 가장 부유한 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미국 상원 담당 목사를 지낸 리처드 하버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먼 곳에 갔다가 저녁 무렵에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집이 있는 워싱턴 시로 돌아오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워싱턴 시 상공을 선회하며 착륙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문득 자신의 교회를 볼 수 있나 싶어 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교회 건물이 그리 크지 않아서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백악관, 국방성, 조지 워싱턴 대학, 아동 병원 같은 큰 건물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물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에 갑자기 성도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성도, 국방성에서 일하는 성도, 아동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는 성도, 대학 교직원으로 있는 성도를 생각하면서 그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다. 내 교회는 이 도시 전체다. 좁은 예배당 안이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들이 일하는 삶의 현장 전체가 내 교회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하고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건물에 갇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넓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60년 말부터 여의도로 갔습니다(1973년 8월 19일 최초예배드림).
그 당시 여의도는 단지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로 이용되는 땅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의도는 황폐한 섬으로서,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도 없었습니다.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고 여의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강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금란교회는 망우리 공동묘지아래 있는 교회입니다. 모두가 그곳은 교회의 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홍도 목사님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켰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상가교회 목회에 여러 번 실패하고 고향인 강원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강원도에 갈 것 같으면 이제 마지막으로 서울 명일동에 그 당시 버스종점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안내양들에게 전도하고 교회를 하자고 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 12:8, 13:4)
마므레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8)

여러분! 전쟁을 사람이 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허락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 심판이 사람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죄가 있는 곳에는 심판이 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이 사람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하나님 앞에 깨어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교사에 보면 “제36회 총회는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개회벽두부터 소란이 일다가 급기야는 경찰이 동원되어 진압이 되고 총회는 유회가 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6. 25전쟁이 터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교회도 정치인들도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중년 신사가 웨이터에게 말합니다. “여기 술 깨는 좋은 거 좀 가지고 와봐.” 웨이터는 “네 알겠습니다. 여기 계산서 있습니다”하고 계산서를 가지고 왔더랍니다.

한 때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회사 면접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앞에 사람이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누굽니까?” “과거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당신은 UFO가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 면접관이 묻습니다. “산업혁명이 언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까?” “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대답을 잘 했기 때문에 면접관도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보냈습니다. 그가 나오자마자 사오정이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가지고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의 질문이 달랐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면접관이 기가 막혀서, “당신 바보 아니야!”했더니 “과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이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소?” 물었더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더랍니다. 세상에서 바보중의 바보는, 문제도 모르고 답만 외우는 사람입니다.
곤충연구가로 유명한 파브르가 날벌레를 연구하다가 그들의 미련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날벌레들은 앞에 무엇이 있으면 죽자사자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기운이 빠지고 굶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는 겁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얼마든지 먹을 것이 있는데도 그걸 보지 못하고, 열심히 엉뚱한 것만 따라 다니다가 굶어 죽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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