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찌 할꼬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6-39)

스위스는 명품 시계를 잘 만드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그에 따른 일화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시계가 귀하고 시계에 태엽을 감아 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 가서 시계를 풀어놓고 나왔답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 그 시계를 잊어버린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그곳에 시계가 있더랍니다. 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그 시계가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인이 올 때까지 태엽을 주고 나가고 다른 사람도 와서 태엽을 감아주고 나갔던 것입니다.
시계가 가고 있었던 것은, 시계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기 욕심으로 가져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꺼이 자기를 지킨 결과입니다. 욕심을 가지지 않은 결과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도 않고 호랑이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방법이 좋고 수단이 좋아도 과학도 아니고 경영도 아닙니다. 요행입니다. 요행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 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두려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 심어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많이 거두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간단합니다. 많이 심으세요.

어느 여 목사님이 ‘축복, 기적, 치유전도집회’ 라는 제목으로 모 신문에 광고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고민하고 계십니까? 와 보라!! 여기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곳에선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스로 아래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비만, 체형관리, 영적문제, 불치의 질병, 모든 뼈 문제, 신경계통, 사시교정, 내적치유, 얼굴모양, 가계 저주의 치유, 말씀, 방언, 통변, 예언, 투시, 악성 아토피질환, 영 분별, 근이양증, 각종 암병, 기타 질병 등...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사업문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우리 모두가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과, 외과, 소아과, 성형외과, 안과, 정신과 등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이중에 한 두 가지만 한다면 모르겠는데 너무 많아요? 다 한다니까 믿을 수가 없어요. 요즘 음식점도요 한 두 가지만 맛깔스럽게 해야지 너무 여러 가지 메뉴를 만들어 팔면 전문적이지 못해서 안 갑니다. 우리 또한 이 광고 내용처럼, 다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도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많이 심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짜 욕심은 심지 않는데서 거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 위조품과 상표가 없는 상품, 거짓 처방전을 가려내는 비결은 ‘진짜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속는 이유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지 못해서입니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보는 눈, 듣는 귀’(신 29:4)라고 말합니다.

본문 36절에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스라엘 온 집’ 은 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온 집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뜻을 전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속썩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못을 박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사를 핍박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가슴에 못 박는 것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예수 믿는 다고 말하는, 교회 다닌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범죄 피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문의 제목이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이렇게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저는 구두에 광을 잘 안냅니다 만은 오히려 너무 번쩍이면 창피해서 다시 문질러 광을 좀 죽입니다. 광을 내기 좋아하는 분들이 만든 말이겠지만 ‘삐까번쩍’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에 ‘피카피카’란 말이 있는데 번쩍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도 ‘모찌떡’과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삐까는 일본어고 번쩍인다는 말은 한국말입니다. 광택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외제 구두약을 수입하려던 한 회사가 구두닦이를 통해서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광내는데는 국산 구두약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국산 구두약은 광을 내기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외제 구두약은 광보다는 가죽을 보호하는데 신경을 쓴 약이라는 것입니다. 이 회사는 광택내기만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선호에 밀려 결국 수입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삐까번쩍 내 인생에 광내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36절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을 외모로만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광내는데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끌어 안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 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못 자국을 보시며 뼈저린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때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14절부터 36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주님”이 나옵니다. 너희는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요한 일서 2:16절에도 마찬가지이고, 로마서 5-6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하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영원한 생명으로 이미 창조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인정했습니다. 마음에 찔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찔려야 합니다. 찔려야 회개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찔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습니다.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남편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못을 박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됩니까?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기도하여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가진 것입니다. 리브가는 배속의 두 아이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이삭이 알았습니다.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아이들 둘이 리브가 뱃속에서 싸우는데 남편인 이삭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삭이 이 일로 하나님을 찾아가 물은 것입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모를 때 첫째 기도하세요. 그리고 둘째 본문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그랬습니다. 사도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지금 이런 찔림이 누구로 인하여 생겼습니까? 베드로의 설교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도들과 베드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실컷 설교했는데 듣기는 여기서 듣고 상담은 어디 다른데 가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작은 교회가 좋다는 게 뭡니까? 언제든지 목사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활용하세요? 이 좋은 장점을 이용하세요. 큰 교회 다니면 쉽지 않잖아요?
“어찌할꼬”(Tiv:티)인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본문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Tiv: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예수님이 알려주신 말씀들입니다. 본문과 직접 관계가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이렇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들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이 좋아집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에도 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Tiv:티’가 있는 마태복음 서두에 몇 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성경 전제에서 445개의 이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입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은 딸려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몇 일 전에 TV 시트콤에서 본 것인데요 빵집을 하는데 이벤트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짜에 맞추어 빵을 많이 주문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골탕을 먹이려고 날짜를 다르게 알려주었습니다. 행사당일이 되었는데 빵이 오지 않는 거예요. 빵집 어머니인가요 이런 말을 합니다. “빵집에 빵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 빵집에 빵이 없으면 빵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혹 내가 용서 못하면 주님을 기억하세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너희가 너희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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