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7-21)

한국컴퓨터선교회(KCM)에서 인터넷 서버를 몇 대 운영하는데 그 중에 윈도우 서버가 2대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NHN(네이버) 보안관제팀에서 우리 서버가 자기네 서버를 공격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나는 공격한 적이 없는데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윈도우는 바이러스와 해킹에 취약합니다. 그런데 그 약한 이유가 있어요. 최신 버전으로 계속 업데이트 해야 되는데 하지 않은 겁니다. 가만있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관리를 해야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이러스가 틈타고 해커가 쳐들어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늘 엎드려야 되요.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종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공격합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 드려야 합니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바로 사탄이 틈탑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화재의 근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주 의리 좋게 살아가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암탉이 문제였습니다. 한쪽 집의 닭이 다른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주머니가 알을 찾으러 갑니다. “집에 있어? 우리 닭이 여기서 알을 낳았어. 알 가지러 왔어.” 그랬더니 그 집 아줌마가 “아니야. 조금 전에 운 것은 우리 닭이야.” 그럽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 닭이 여기에 왔는데.” “얘가 왜 이래?” 이러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얘, 너 왜 그래. 우리 닭이라니까?”, “아니야, 우리 꺼야” “얘 미쳤어?”, “뭐 미쳤다구?” 이러면서 발전하는 거예요. 말이 격해지기 시작하고 욕이 나옵니다. 과거에 의리가 다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다음날은 남편끼리 싸웁니다. 남편들이 싸우고 있을 때 여자가 막 말하니까 이웃의 남편이 손을 들어 쳤어요. 왜? 말이 안 되니까 손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에도 절대로 부인들이 말 많이 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주먹 올라갑니다.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빗자루를 던집니다. 물건이 날아갑니다. 그랬더니 옆집 아줌마가 확 불을 질러버렸어요. 한 시간만에 두 집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18-20절 사이에서 무려 다섯 차례나 화목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화목” 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카탈랏소라는 말입니다. 카타(아래로)라는 말과 알랏소(이전에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다)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화목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바꾸고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에는 “하나님 저 하나님과 화목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하나님과 화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물 드리는 것 보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2:42-47 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고 기도했습니다. 서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심지어는) 45절에 보면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로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으로 끝마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합니다. 로마 황제인 네로는 64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로마 광장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와 최고의 학자로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바울을 죽임으로 기독교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씨는 바위를 뚫게 만들었고 카타콤이라는 동굴을 만들어 지하로 숨게 했습니다. 카타콤은 공동묘지에 만들어진 지하 땅굴입니다. 무덤도 무섭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했습니다.

이 때 그 박해의 앞장에 서 있던 디도(Titus)의 뒤를 이어 도미티안(Domitian, A.D. 81-)이 황제에 올랐습니다. 도미티안은 처음에는 선악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는 듯한 통치를 하다가 나중에는 악행을 일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도 결국 자신을 신이라고 호칭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신전들에 무수한 자신의 신상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그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는데, 그의 사촌의 아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를 죽였습니다. 200여 년 후의 유세비우스는 도미티안을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에 둘째가는 자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는 A. D. 96년 9월 18일에 그의 아내를 포함한 일단의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A .D. 107년에 순교한 익나티우스는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서 40년을 섬기다가 트라얀(Trajan) 황제의 로마 신들을 경배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로마로 후송되어 콜로세움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흥미 거리로 지켜보는 가운데 쇠사슬에 매여 사나운 두 마리의 사자들에 의해서 물려 찢기며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70세가 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순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3세기의 신학자 터툴리안은(Tertullian, A.D. 160-225)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박해는 기독교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 사람이 순교를 당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이를 본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시저와 그리스도가 투우장에서 만나 그리스도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 ‘갈레리우스(Galerius)의 칙령 선포’ 가 내려졌습니다. 무려 초대교회로부터 3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311년 4월 갈레리우스는 어떤 이유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박해의 손길을 접고, “국가 기강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가(Constantine, A.D. 274-337)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 다리를 사이에 두고 그의 적인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의 군대는 상대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쟁 전날 밤 그는 꿈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리글자(크스, 십자가)를 보면서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를 신탁으로 생각한 그는 병사들의 헬멧과 방패에 그 기호를 그려 넣고 마침내 312년 10월 28일 운명의 전투에 나아가서 승리하게 됩니다.
콘스탄틴은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후에 313년에 밀라노에 돌아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 칙령은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택하고 예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으며, 기독교회의 재산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몰수된 모든 재산을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기독교는 다섯 개의 교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언제 핍박이 있었는지 평화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570년에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출생합니다. 그가 성장하면서 보니까 기독교가 싸워도 너무 싸우는 거예요. 이 싸움에 신물을 느낀 마호메트는 이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다른 나라말로 번역도 할 수 없지만 절대 토론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오직 절대적 순종만을 강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사람취급을 안 합니다. 그냥 남자들의 소유물로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재산입니다. 기독교가 싸움을 하는 동안 이슬람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954년에 올가(Princess Olga) 공주가 세례를 받고, 988년에는 키예프(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의 왕 블라디미르(Prince Vladimir)가 콘스탄티노플 교구에서 나온 선교사에게 자진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 신하들과 귀족들에게도 세례를 받게 합니다. 북서쪽을 향해 많은 귀족을 포함시키면서 성장합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이슬람에 의해 무참하게 정복당한 후에도 러시아 정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589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허락으로 러시아 정교회가 독립교구로 허락을 받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도 약 400여 년이 지나 정교회 사제와 일부 계급층이 부를 독차지하자 1917년 2월 세계 여성의 날을 계기로 당시 러시아의 수도 빼째르부르그(레닌 그라드)에 여성들이 빵을 달라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러시아의 군대는 시민을 향하여 발포하였는데, 발포를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혁명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시켰습니다. 결국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었고 이 때부터 레닌주의(공산주의)가 부상합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부패하자 공산주의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도 처음부터(선교초기) 나누어져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장로교 안에서 싸움이 붙었습니다. 얼마나 싸웠는지요 누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이단입니다. 어떤 때는 신학적인 논쟁도 아닙니다. 이권 다툼에 이단사상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이에 가라지가 또 나옵니다. 싸우는 거 보기 싫으니까 이 사람은 아주 모든 종교를 통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통일교 안에 다 집어넣습니다. 한국교회가 싸우는 틈을 노리고 통일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되지 못하는 틈을 타고 모든 가라지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사탄이 좋아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그 당시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기사가 나옵니다.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 구브로, 살라미 등을 방문하며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5:36 이하를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견해 차이로 다투고 갈라서게 됩니다. 그 후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다녔고, 바나바는 바나바 나름대로 전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다시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기회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때를 회상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는 인내와 오래참음, 예의가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1을 보면 “14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바나바와 화해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캐나다에 사는 어떤 남자는 26년 전에 결혼해 26세 된 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중매한 사람을 욕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유는 중매를 잘못해 지금 함께 사는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6년 동안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온 그 남자는 교회 집사라고 합니다. 한 평생을 불화로 산 사람입니다.
미국에 있는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인생에 실패한 사람 1만 명을 대상으로 그 원인을 조사한 결과 85%가 원만치 못한 인간관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편가르고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인생도 실패합니다.
또한 교회는 평화시대일수록 안주하면 안됩니다. 일을 해야 되요. 힘이 남아도니까 싸우는 겁니다. 교회가 일을 해야 합니다. 선교해야 합니다. 일을 안 하니까 싸우는 겁니다. 무슨 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게 무슨 벼슬입니까? 교회에 왜 물질이 남습니까? 그거 남겨놓으니까 싸우는 겁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화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목할 수 있는 방법 하나만 말씀드립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세우면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방법으로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화목하는 것을 간청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싸우면 서로 다 망합니다. 화목해야 됩니다. 화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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