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바랄지어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27:7-14)

사람은 바라고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황금마차를 탄 왕자님을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로또 복권에 당첨 될 것을 기다리십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말씀하십니다. 여기 ‘바란다’는 말을 ‘기다린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은 이런 기다림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5-7)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라는 말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널리 울려 퍼지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마치 거지가 부자의 문턱에서 구걸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영어에는 웨이트(wai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주로 “기다린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또 다른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손님을 섬기는 사람을 웨이터(waiter)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고 궁핍해야 합니다. 마 5:3 산상복음의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가 주를 찾습니다. 세상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하고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 때 까마귀는 내어놓았는데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체 썩은 것이 많아서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내어놓았더니 다시 돌아왔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까마귀와 같으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비둘기 같이 주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2)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서 문을 두드립시다. 간절히 구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문 밖에서 기다린 사람 치고 빈손 들고 돌아간 경우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세요.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세요. 하나님께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꼭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배우려는 학생같이 기다려야 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영향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주님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제자가 되려면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인내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집요하게 욥을 추궁합니다. 그러나 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어떤 선교단체에서 선교사를 뽑기 위하여 새벽 3시에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선교사 지망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험관은 아침8시가 되서야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자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1번 문제, 빵집이라는 단어의 뜻을 말하시오.
2번 문제 2더하기 2는 얼마입니까? 그리고는 답안지를 제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응시자는 그것도 문제냐? 새벽 3시에 치르겠다고 하더니 8시에 나타나서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를 시험이라고 치르느냐? 면서 항의를 하고 나가버렸습니다.
시험을 다 치르고 시험관이 문제를 거두고 그런 문제를 낸 이유를 응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5가지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첫째는 극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른 시간 새벽3시에 나온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이긴 것입니다.
둘째는 시간약속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새벽 3시에 시험을 치른다 할 때 그 시간을 의심치 않고 지켰습니다.
셋째는 인내심에 대한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5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을 시험했는데 여기에 합격입니다.
넷째는 성격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도 화를 내지 않았으므로 합격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성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토록 유치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을 하는 것을 볼 때 인간성이 좋다는 것입니다. 위의 여러 가지는 선교사가 필히 갖추어야 할 자질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데 그 어떠한 시험도 유치한 일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감추인 보화의 밭을 자기 재산을 다 주고 사는 것처럼 해야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바라나이다.”(시 25:5)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롬 12:2)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여행자가 안내자의 인도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여행자는 가는 길이 초행이기 때문에 안내자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에 길을 잘못들 우려가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에 구찌 땅굴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미군을 끝까지 괴롭혔던 곳입니다. 이 굴에 들어갔는데요 땅 속에 가다가 갈래가 나옵니다. 이 때 안내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 가다가는 나오지도 못합니다. 땅 속의 굴이 얼마나 복잡하게 파지고 길고 깊은지 끝까지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안내자가 없으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갔습니다. 모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갔습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은 하늘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 자신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는 길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살아보고 사는 사람, 한 분도 안 계십니다. 하루 하루가 인생의 초행길입니다. 그러므로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길이 되신 주님을 기다리며 따라갈 때 잘못될 염려는 아주 없습니다.

“기다리라” 는 말씀에는 참으로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아이가 부모님을 기다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아무 부담감이 없이 부모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갖다 주리라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기다리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기저귀 안 사왔나, 우유 안 사왔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준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호는 “여호와 이레”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데는 회개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기다리는데는 담대해야 합니다. 비겁해서는 절대로 주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데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문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 얼굴 보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죄 지은 사람은 피해 다닙니다. 경찰 얼굴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뵙기를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피하거나 숨을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을 없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가 있어서 그럽니다.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만 있으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교회 안 나오시는 분들이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네… 무슨 문제가 있네 그럽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회개하지 못하도록 사단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가증한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기다립시다. 담대하게 기다립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 드러냅시다. 야고보 장로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담대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으로 구하지 마시고 담대한 마음, 확신을 가지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윌로우 크릭-빌 하이벌스 목사님은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독일 속담에 “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므로 영원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시게 되고 신비한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납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될 때 새로운 영적인 힘이 솟아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욥은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당한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심할 때일수록 주님 품에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부모가 자식을 때릴 때, 자식이 가슴에 안겨 들면 더 이상 때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계속 기다립시다. 원수가 아무리 공격을 가해도 겁내지 맙시다.

헬렌 켈러가 정상인들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사람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사람처럼 당신의 귀를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아무 것도 못 만지게 될 사람처럼 당신의 촉각을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사람처럼 꽃의 향기를 맡아보세요
우리에게 주신 기능들 아끼지 말고 사용합시다. 주를 위해 사용하세요.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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