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서 하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0-26)

원래부터 마귀는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간질하고 나누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직접 오셨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나누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게 하소서” 이런 기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프란시스 종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시기함으로서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프란시스가 잠시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프란시스가 돌아왔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형제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때 많은 형제들이 종규(宗規)의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프란시스는 결론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없다면 종규를 바꾸든 규율을 바꾸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형제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뿐이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엡 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본문 20-22절에 보면 헬라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당시에 헬라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헬라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은혜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신앙도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씩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이 계신곳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먼저 빌립에게 청했습니다. 빌립은 아마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못 드리고 안드레에게 먼저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고민 끝에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룻기 1장 16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이방 여린 룻은 시모인 나오미를 따라오겠다는 신앙적인 고백을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유대인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 된다고 하나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 성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가 됩니다.

예수를 따르라

본문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은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부터 16장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계속 나오는 강조점이 하나 있습니다. ‘나(예수)’입니다. “나를 따르라”,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나를 섬기고자 하느냐 나를 따르라”,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느냐 나를 따르라 내가 곧 길이니라” 예수께서 자기에게 주목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마다 나를 따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것을 주목하지 마십시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목하십시오. 예수 있는 곳에 무엇이 있길래 주께서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계시는 거기에 우리도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환경을 보면 우리가 관광을 갈만한 매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마 8:20) 여러분이 예수님이 사시는 곳이 얼마나 신기한 지 가 보고 싶습니까? 볼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십시오. 그 분이 나실 때 마굿간의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거기에는 화려함과 찬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집에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화려한 집에서 하신 것이 아니라 들로 산으로 회당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셨는데 예수님이 찾아간 곳은 고관이나 부자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창기와 세리와 버림받은 사람들, 고난에 처한 사람들, 유대인들이 멸시한 그 사람들을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계신 곳에 우리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설악산에 단풍놀이를 가신 분들이 귀신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창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설악산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예수가 계신 그 장소는 환경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으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생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접받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곳에 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꼭 있어야 될 그 자리에 주님은 가십니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그 자리에 가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그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와의 충돌을 일으키는 사람들

이기적인 믿음은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만 잘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위와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험보는 때가 되어서 그런지 텔레비전에 보면 유난히 갓바위 부처가 자꾸만 나옵니다. 그것이 부산 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쪽 사람들에게 더 효험이 있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 잘되게 해 달라고 비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시험 철에 입시 생을 위한 특별 기도회 같은 것 안 합니다. 노력한 만큼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더 좁게 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과도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마저도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대목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하러 길을 가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불쌍한 소경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말하기를 “주여, 이것이 본인이 죄가 많아 소경이 된 것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두고 유대인들이 반응하기를 그 소경을 보고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모와 소경 되었던 자에게 가서 따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요한복음 9장 25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떴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일으켜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로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독선입니다. 지독한 민족주의적 독선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세계인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중병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자기교회적이라는 것입니다. 연합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도 한 명을 놓고 빼앗아 가듯이 잡아채 갑니다. 세상 사업하는 사람들과 같이 경쟁자적 입장입니다. 이웃 교회와 하나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 속에서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습니까? 교단보다 신학교출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예수와 하나가 되려면

본문 24-25절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의 개념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은 부부입니다. 부부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을 살고도 하나가 안된 부부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것은 목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미워하는”(misw’n:미세온)은 동사 현재형입니다. 따라하십시다. “내가 살면 예수가 죽고, 내가 죽으면 예수가 산다”

한국 땅에는 성령의 역사도 강하지만 또한 마귀의 역사도 강합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많은 곳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싸움을 하기 이전에 하나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인들은 전쟁에 졌다는 생각 때문에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맡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계속해서 분열되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한 독일신학자가 스위스를 떠나서 자기 조국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라는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독일인들을 향해서 가는 곳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된 자들입니다. 서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좀 더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쥐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일어나십시다.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됨을 외쳤습니다. 모두가 그 말에 동감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손에 손을 쥔 힘을 더 쥐었습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고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쓰러진 조국을 건설했습니다. 결국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88년 올림픽에서 불렀던 노래가 ‘손에 손잡고’였습니다. 가족이 손을 잡아봅시다. 성도가 손을 잡아봅시다. 교회가 손을 잡아봅시다. 하나님과 손을 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