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칼 힐티’가 쓴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 보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22세 때 자기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물질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폐단을 기독교 정신으로 극복해 왔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그것이 없거나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개똥 철학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대학가에서 신학교에서 조차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학생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처럼 크고 화려하게 돈 많이 버는 것이 마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시사 잡지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했는데(2006년) 그 중에 1위는 여성 토크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어림잡아서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보육원을 방문하여서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날 수십 억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의 이런 영향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녀는 혼혈아로 태어나서 가난과 아픔 속에 자랐지만 혼자 공부하면서 성경의 모세를 통해서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윈프리의 네 가지 인생철학이 나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여러분, 사명이 무엇일까요?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4:19에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페이산테스:충동, 설득)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을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고 했습니다. 죽을 뻔한 것입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을 돌로 친 사람들은 이제 이만하면 죽겠구나 생각하고 갔다가 버린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3-28에서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 정도로 쓰러질 바울이 아닙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다음 목적지 더베로 향했습니다.

사명은 삶에 열정을 일으킵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한가합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사명은 우리의 사람을 다할 때까지 열정을 일으킵니다. 사명이 절실해 질수록 마음이 열정으로 타오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하나님도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와 우주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뜨거운 구원의 열정입니다. 성령도 불처럼 역사 합니다. 성령은 비전의 영이요 열정의 영이십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가운데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누구나 열정의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리빙스턴이 한번은 아주 무서운 짐승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졸도를 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 보니까 몸에 발톱자국만 몇 개 나있고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왜 살고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사명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일할 수 있을 때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명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내가 사명을 받지 않고는 이 말씀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본문 19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최후에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제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슨 시험 봐서 되는 일이라면 저 같은 사람은 참 큰일입니다. 기억력은 바닥을 치지요, 몸으로 하는 운동 못하지요 뭐 하나 자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제자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뽑을 때 하시는 말씀은 그냥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순종이예요. 순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뭐 그렇게 이유가 많고 핑계가 많으면 안됩니다. 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믿음입니다. 믿으니까 따라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삶을 내가 인도하는 것보다 그분이 인도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제자가 제자를 만든다.” 내가 제자를 삼으려고 하지 않아도 제자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제자가 되지 못했다면 제자는 만들 수 없습니다. 본문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지켜야 제자가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제자 삼지 못하는 것은 찬송가(256장:눈을 들어 하늘보라)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라고 탄식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생명수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라.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명령입니다. 누구의 명령입니까?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거절할 수 있는 명령이 있고,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제자들과 늘 함께 하면서 3년 반 동안 삶으로 보여준 모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여기에 구체적으로 세 가지 명령형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는 “가라”는 것입니다. 원문에 ‘가서’는 “poreuqevnte”:포류덴테스”로 “가라”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제일과거 분사형인데 “지속적으로 나아감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poreuvomai:포류오마이” ‘나아가다, 횡단하다’에서 온 말입니다. 또 이 말은 “parapikrasmov”:파라피그라스모스”에서 나왔는데 이 뜻은 “격분, 성남, 도전”을 뜻하는 말입니다.
두째는 “oumaqhteuvsate:마데튜사테”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baptivzonte”:벺티스트”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새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원문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어 사이에 “ou+’n:운”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이제, 때”를 말합니다. 원문의 단어 순서대로 연결하면 “가라 이제 제자를 만들러”가 됩니다. 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사명 받은 사람의 가는 모습은 힘이 있습니다. 정열이 있습니다. 눈이 살아 있습니다. 가는 이유는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유명한 설교가인 Caryle Marney)이 경찰 훈련을 받은 개를 사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아이들의 야구공이 날아와 유리창을 깼습니다. 화가난 목사님은 “Go toschool : 학교 운동장에 가서 놀아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개가 서너 번 문에 뛰어 오르더니, 안 열어주니까 넓은 유리창으로 돌격하여 나아가 공을 물고 왔다는 것입니다. “Go to:가라” 라는 말을 알아듣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나간 이 개는 자신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울산에 살던 분이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개는 영리해서 입에다 돈을 물려주면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사왔습니다. 주인은 여느 때와 같이 개 잎에다 돈을 물려주었습니다. 이 개는 고기를 사오라는 것으로 알고 고기를 사러갔습니다. 오디로 갔겠습니까? 주인은 그만 서울로 이사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개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입니다. 이 개는 경부 고속도로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언제나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의미 없이 지내고 있나?”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의미 없이 태어나고 목적 없이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미쳐 발견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야를 넓혀 주시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국회는 세계적인 석학 아인슈타인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이유는 “대통령을 할만한 인물은 많이 있으나 물리학을 가르칠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장 벤그리온도 어느 날 갑자기 수상직을 사임했습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사유를 묻습니다. 그는 “키브츠 농장에서 일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수상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으나 땅콩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하였습니다. 이 이사야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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