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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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16-17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히 11:23-25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사람은 태어난다고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곧 그 사람이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녀의 교육에 힘을 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차이를 산 자와 죽은 자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은 가르치는 대로 됩니다. 그렇다고 기능을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은 아닙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가르치는 것이 참된 교육입니다. 아들 둘만 있으면 부모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고, 아들 하나만 있으면 부모는 골방에서 죽고, 딸 하나만 있으면 설거지를 하다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 가르친 자녀 때문에 부모가 당할 일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마귀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가르치라” 고 한 캐서린 부스의 권면 속에서 우리시대에 필요한 교육의 종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절벽 아래 구급차가 되기보다 절벽 위의 울타리가 되겠다.” 가정사역을 하는 송길원 목사님 부부의 (사) 하이패밀리 평생교육원 모토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아마 소 잃고 외양간 고칠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돕는 배필

창세기 1,2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가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된 것은 교만이었습니다. 이 교만은 감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교만으로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은 교만 그 자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다’, ‘돌이켰다’, ‘회복했다’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 모든 말은 인간이 하나님께 죄 짓기 전으로 돌아가야만 참된 회개요, 회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했던 이 교만이 그대로 존재하니까 여자가 남편을 가정의 리더로 인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대항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남자들은 짓누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여자들은 여성 해방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여성 해방운동은 평등을 주장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바로 이 평등을 주장합니다. “난 빨래했으니까 넌 청소해.” 이런 식입니다. 평등만으로는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90을 주고 10일 받을 때도 있고 그 반대가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 이란 단어는 ‘에젤’이라는 말입니다. ‘에젤’은 시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도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돕는 자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라 능력이 많은 자입니다. 아내가 능력이 없어서 남편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존경하는 마음이 아내에게 없다면 그 가정의 행복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내를 통해서 남편을 도와 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남편을 사모하라” 고 했습니다. “hq;WvT]”(테슈카)인데 ‘손을 뻗치다’ 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사모하는 것은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도와 주는 것은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힘들고 지칠 때 손을 잡아주세요. 남편에게 달려드는 손이 아니라 남편을 감싸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아내의 손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돕는 배필의 손입니다.
둘째,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신약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고 하십니다. 가정목회자로 활동하시는 송길원 목사님과 김향숙 사모님이 계십니다. 남편은 정리 정돈을 잘하는 성격이고 완벽주의자입니다. 사모님은 그렇지 않으셨답니다. 싸울 때는 남편에게 ‘송성질’ 이라고 부르고 남편은 ‘김고집’ 이라고 불렀습니다. 남편이 너무 자상해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너무 쫀쫀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고집을 꺽지 못했고 남편은 성질을 콘트롤하지 못했습니다. 가정법원에서 이혼서류를 가져왔는데, 남편이 그러자고 해서 충격을 받고 남편은 그 길로 집을 나갔답니다. 사나 이혼을 하나 고통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네 고집을 꺽어라.” “네가 변해라” 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가정사역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나를 다스리도록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남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남편은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의 남편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의 남편

아버지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가정에서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집니다.
본문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라고 하셨습니다. 아내들이야 남편이 자기 말만 들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내의 말만 듣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지 않고 아내의 말을 먼저 들을 때 사단이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은 마치 자기의 고집이 하나님의 뜻인 양 밀어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가 세우는 것보다 세워주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1978년에 미국의 한 대학 연구원이 2년에 걸쳐 5-7살의 아이들에게 “텔레비전과 아빠 중에서 뭐가 더 좋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이중에 44%의 어린이가 아빠 대신 텔레비전을 뽑았습니다. 미국에서 이 정도이면 요즘 한국에서 “컴퓨터와 아빠를 선택하라.” 면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가정에서 잃어버린 남편의 자리를 찾아줄 수 있는 건 바로 아내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하느냐 마느냐는 아내의 말 한마디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맨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가정에서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 4:4-6)
한때 강남에서 유행한 말이 있습니다. “치맛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바짓바람을 이길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들의 착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만이 자녀를 잘 양육한다는 착각입니다. 저는 기러기 아빠들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까지 자녀를 생각하고 결정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가르치겠다.”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믿음만은 전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모세 가족

히 11:23-25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시대가 어려워서 가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물질문화가 가정을 등한시하는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다 가정을 버린다면 이 세상에 몇 가정이 남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 가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모세 가족입니다.
모세가 출생 할 때 이집트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멘호렙 2세라는 설도 있고, 람세스 2세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 파라오(바로)는 유대인의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서 압박정책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강제 노동(출 1:11)과 히브리 산파들을 이용한 남아 살해 명령입니다(출 1:16). 그런데 여기서 일개 산파가 감히 파라오의 명령을 어길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파라오는 “태양신 라(Ra)가 지상의 보물로 아끼는 이집트를 수호하도록 특별히 점지한 아들이라는 것” 입니다. 말하자만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그 또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은 신의 명령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출 1:17) 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파라오가 안 통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더 먼저, 더 높은 곳에 계셨습니다.
모세 또한 이런 산파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아이입니다. 여기에는 어머니 요게벳이 있습니다. 요게벳의 ‘요’(Jo)자는 여호와를 뜻하는 말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또한 믿음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히 파라오의 명령을 어기고 아들을 석달이나 키울 만큼 담대한 여인입니다. 어머니말고 또 누이가 나옵니다. 이름은 ‘미리암(뜻:높이운 자)’ 입니다. 남자아이를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울음소리도 나지 않게 하면서 방안에서만 석달을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누이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출 2:3) 마침내 갈대 상자를 구해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속에 동생을 담아 나일 강으로 향할 때, 누이의 가슴은 미어지고 애달파, 극도의 불안과 긴장 상태에 있어야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이의 태도는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출 2:4) 라고 나옵니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없이는 이렇게 행동을 못하지요. 요게벳은 당시 이집트 풍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매월 초가 되면 귀족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나일강으로 목욕 마실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모녀의 행동은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진 계획아래 타이밍을 노린 것입니다. 이리하여 바로의 딸에게 모세가 발견됩니다(출 2:5).
이후 성경은 4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장성한 모세의 이야기를 숨 가쁘게 진행시킵니다.
그리고 미리암이 나타난 곳은 출 15:20-21 “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늘 모세의 주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보고만 있었겠습니다. 그들이 40년의 세월 동안 무엇을 했겠습니까?

거북이네 식구가 10년 만에 온가족 소풍을 떠났습니다. 워낙 걸음이 느린 터라 거북이 가족은 7년 먹을 양식을 준비해서 떠났습니다. 2년 정도 지났을까 가다가 시장해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아뿔싸! 양념 통을 하나도 안 가져왔던 것입니다. 양념 없이 먹으면 너무 맛없다며 누군가 집에 가서 가져오기로 했지만 아무도 2년 동안 온 길을 다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왕복 4년이 걸릴 테니까. 결국은 임무는 막내 거북이한테까지 미뤄졌고 막내 거북이는 투덜투덜하며 당부합니다. “나 돌아올 때까지 절대 먹지 마, 약속해!” 모두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막내 거북은 길을 떠났고 가족들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1년이 가고, 2년, 3년이 가고 4년, 5년이 되도록 막내 거북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배고픔을 참다 못한 할아버지 거북이가 더는 못 참겠다며 먼저 먹고 살짝 뒤집어 놓겠다며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나무 뒤에서 막내 거북이 뛰쳐나오며 하는 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날 기다리지 않을 줄 알았다고. 약속을 안 지켰으니 나도 양념 가지러 안 갈 거야.” 순간 포착을 위해 계속 참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것도 5년씩이나 ….”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믿음을 지키고 전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가정은 업다구요. 그러나 행복한 가정은 있답니다.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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