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40. 부활의 믿음) / 본문 : 고전 15:12-20

“12 (eij:만일-원문에 있음-앞절 전파하는 것이 헛됨을 말함)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eij:만일-원문에 있음)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a[ra:아라-의문의 여지없이,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은 2008년 부활절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재물포항에 예수 복음을 들고 첫발을 디딘 날입니다. 불과 123년 전입니다. 123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는 약 5만여 교회와 1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약 18,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23년 전 이 땅에 처음 발을 내 디딘 아펜젤러 선교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기도를 하고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 참석 차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선박충돌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온지 17년만입니다. 그는 비록 17년의 짧은 기간동안에 이 땅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이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어느 날 헬렌켈러는 “가장 불쌍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련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옛 성인의 말에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 아무 문제없이 아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비전의 종교입니다. 소망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을 다 말하고도 결국은 다 같은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53: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주님을 믿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예수의 부활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가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안 오시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나보고 똑똑히 보고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믿음의 기초입니다(고전 15:12-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십니다. ‘만일’ 이라는 단어가 짧은 글 속에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13, 14, 15, 16, 19절). ‘만일(eij:에이)는 조건문으로 앞 절에서 제시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 이 곧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임을 말합니다. 원문에 이 단어는 7번이 나타나며 17절에도 들어있습니다. 또한 12-19절까지 모든 절에 나오는데 18절만 안나옵니다. 그러나 18절은 ‘또한’ 이라는 단어가 대신 나옵니다. 이 단어는 ‘a[ra:아라’ 인데 “의문의 여지없이, 진실로”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일’이라는 말을 더 강조한 단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문의 ‘다시 살아나셨다’는 에게게르타이(ejghvgertai)는 완료 시제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 이미 성취된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에이)’ 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지닌 절대성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에 빠져 사망한 자들로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삶이 인생의 전부라면, 세상에서 부활 신앙을 갖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는 없는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 나의 부활(고전 15:20-28).
부활은 모든 믿는 자에게 소망입니다. 앞서 ‘만일’ 이라는 단어로 있을 수 없는 일을 가정하던 사도 바울은 이제(20절) ‘그러나’ 라는 단어로 앞서 거론한 모든 가정을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중에 맨 처음 살아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앞서 가정한 모든 것은 한꺼번에 힘을 잃고 맙니다.
본문 20절 ‘그러나 이제(Nuni; de;:뉘니 데)’ 로 ‘뉘니’는 ‘지금 당장’ 데는 ‘그리고’입니다. ‘Nuni;:뉘니’는 nu’n(뉜)은 ‘현재’인데 뉘니는 바로 현재를 강조하기 연장형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뉘니’를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오늘 그 사실을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간증>
부활은 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분들이 말하는 것은

1) 가사설(假死說)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고 운명 후 로마 군인이 옆구리에 창을 절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죽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무덤에 장사한 것입니다. 로마 병정도 죽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시체를 내어 준 것이고, 제자들 역시 예수의 죽음이 확인되어 흩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2) 도거설(盜去說)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해 가고는 돈을 주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훔쳐 갔으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과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찾아갔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는데 어떻게 접근했겠습니까? 나아가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부활의 주님을 증거 했겠습니까? 도리어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훔쳐 갔다고 거짓 증거 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외에 환상설과 유령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야고보 외에도 500명이나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기독교회가 세상에 끼친 영향으로도 증거하고도 남으며, 교회확장과 박해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변하며,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볼테르는 50년 후에는 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하면서 무신론과 성경을 반박하는 책을 많이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50년 후에 교회는 없어지기는커녕, 신기하게도 그 무신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소가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가 되었고, 마루에서 천장까지 성경책으로 꽉 찼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1) 역사적 사실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들의 말은 대개가 확인이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내가 다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역사적으로 그 시대에 살고있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미 확인한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6.25를 체험한 분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마리아가 무덤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여인들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거짓말을 시키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10번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부활을 부정하려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모든 말씀을 부정해야 되고,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들의 이야기를 부정해야 되고, 제자들의 경험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같이 바울 사도의 부활의 증거를 부정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2) 증거들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이야기들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들어있습니다(마28장, 막16장, 눅24장, 요20장). 복음서 기자마다 특징 있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과 천사가 증거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증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10여 차례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3) 오감에 의지하여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오감이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도 이제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안 끼면 여러분들이 다 안보입니다. 지금 안경을 꼈지만 다 안보입니다. 멀리 보이는 안경을 끼면 가까이에 있는 글씨가 안보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보이는 안경을 낀 것입니다. 눈은 너무 멀리 있어도 안보이고, 너무 가까이에 있어도 안 보이고, 너무 캄캄해도 안보이고, 너무 밝아도 안보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다른 감각기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청년이 결혼을 하루 앞두고 약혼자가 수영을 하다가 익사를 합니다. 이 사람은 정신이 돌게 됩니다. 강팍해지고. 하늘을 원망하고. 욕하고 인생을 비관하고. 되는 대로 파괴하고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캐나다로 가게 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구주고. 왕으로 영접한 이 사람은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절망하고 서럽던 것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새로운 용기가 넘치는 새로운 능력이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지은 찬송가가. 우리가 많이 부르는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모든 괴롬 우리 주님께 맡기세…” 맡길 곳이 없어서. 맡을 자가 없어서. 몸부림을 치다가. 주님께 맡기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새롭게 할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짐을 져주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토벤도 몸은 병들고 정신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겉잡을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렸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많이 하고. 새 사람이 되어 변화 받았습니다. 이 때 지은 노래가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D단조 작품125 ‘합창’ 입니다. ‘환희’ 놀라운 변화를 경험해서 만든 노래입니다. 교향곡 최초로 합창을 도입한 곡입니다. 4악장에는 합창이 들어가는데 가사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따왔습니다. 우리 찬송가의 13장에 일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찾아보세요. 작곡자 1824년 베토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베토벤은 완전히 귀머거리였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단지 음악적인 감각으로만 작곡한 곡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베토벤의 최대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곡입니다. 인류 역사에 이런 장엄하고 멋있는 곡이 없습니다. 이 곡은 2003년 세계 국제기관인 유네스코에서 음악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대의 명 걸작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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