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위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5. 목숨을 위하여 ) / 본문 : 마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무디는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R. C. Savage)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지식보다 뜨거운 무지가 훨씬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알고 있는 것은 실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믿음이란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목숨을 구하는 일입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전 9:4)고 했습니다.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경시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아직도 내 생명이 나의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나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질문하나 하지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입니다. 운동은 왜 합니까? 건강은 왜 지키려고 합니까? 모두가 목숨을 위한 것입니다. 밥을 왜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 목숨 때문에 먹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오늘 본문의 “목숨을 위하여”(th’/ yuch’/ uJmw’n:테 퓌스케 휘몬)의 ‘퓌스케’는 육체적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퓌스케’는 죽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퓌스케(목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염려해야 하는 것이 ‘퓌시케(목숨)’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한 것이고, 몸이 의복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은 목숨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의복은 몸을 위하여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본문 26절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귀하다(diafevrw:디아페로)”는 “다르다, 구분된다, 지탱해 나가다”의 뜻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귀합니까?
1) 26절 “공중의 새”가 유사한 본문인 누가복음 12:24에서는 ‘까마귀’로 나옵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반적인 생명체인 하늘의 새를 말합니다.
2) 28절 “들의 백합화”(30절 들풀도)는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마석초등학교 교가 가사 중에 “천마산 푸른 정기 몸에 지니고 북한강 맑은 물에 덕을 닦아서 튼튼하게 자라는 마석 어린이…” 그런데 제가 다닐 때는 “북한강 맑은 물에”가 아니라 “배롱내 맑은 물에” 였습니다. 그곳에서 목욕도 하고 물장구치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제가 중학교 갔을 때쯤 주변에 목장이 많이 들어와 똥물이 되다 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롱내 맑은 물이 아니라 배롱내 똥물이 되었다고 했는데 언제 “북한강 맑은 물로” 바뀌었네요. 그런데 그렇게 오염되던 그 때 천마산과 배롱내 주변에 돼지, 닭, 오리를 많이 키우던 농장들이 있었습니다. 이 돼지와 오리들이 더러운 물을 먹는 것을 보고 “만약 사람이 저렇게 돼지나 오리들처럼 더러운 물을 먹고산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돼지나 오리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돼지와 오리를 기르십니다. 들의 백합화 들풀도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사무실에 있는 난과 화초 몇 개는 제가 벌써 죽였습니다. 겨울이 되면 온도 조절이 안돼서 죽입니다. 그런데 들의 풀은 아무리 겨울이 되어도 얼어죽지 않습니다. 다시 봄이 되면 생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대충 생각하고 넘어가는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본문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의 “보라(ejmblevyate:엠브렙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 보라”는 뜻입니다.
본문 27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의 “생각하여 보라(katamanqavnw:카타만다노)”는 ‘카나’라는 말은 철저하게, ‘만다노’라는 말은 ‘배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에게도,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사업하고 실패하고, 아무 생각 없이 도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의 삶을 대자연 속에 비쳐보며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칼타고의 한니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애꾸눈이었습니다. 어느 날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화가는 열심히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자신을 한눈 없는 병신으로 그려 놓은 것을 보고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며칠 후 다른 화가를 불러 다시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전의 죽은 화가 얘기를 들은 이 화가는 아주 온전한 두 눈을 가진 한니발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내가 눈이 하나인데 어찌 두 눈을 그렸느냐”며 그도 죽여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다른 화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그리면 살아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화가는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한니발은 애꾸눈이 가려진 자신의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보고 아주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업이 안되고, 가정적으로 불행하고, 실패와 시련으로 인생의 앞길이 모두 막혀 있는 것만 같아도 바로 그 다음에, 또 아주 가까운 곳에 행복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염려하지 않는 것을’ 입니다.
“염려(merimnavw:메림나오)”의 어근은 “분열되다, 나뉘다”의 ‘메리조’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음식을 위하여, 의복을 위하여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하여 정말 고민해야할 ‘퓌스케(목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염려하지 않게 됩니까?
본문 30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면서 믿음을 가지기를 촉구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다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가 보지 못할 때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다 볼 수 있어서 믿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 순종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마 10:19) 라고 하셨습니다.
1943년 봄 김세홍 목사는 교회인가를 얻기 위해 중국 금주성 반산형공서를 방문하였는데, 경무과 특무고장 구로다(흑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높습니까? ‘아마데라쓰오오미가미’가 높습니까? 속에 있는 대로 안심하고 대답하시오.” 그러나 답변을 잘못하다가는 불경죄로 구속당할 판이었습니다. 이 때 김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마치 국민학생에게 묻기를 아버지가 더 높으냐? 학교 선생이 더 높으냐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집에서는 아버지가 높고 학교에서는 선생이 높지요. 그와 같이 ‘아마데라쓰오오미가미’는 일본의 신이고 여호와하나님은 기독교인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26절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본문 30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본문 32절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본문 33절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퓌스케(목숨)’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믿음뿐입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이 초라해 집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마지막으로 기억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들풀도 하나님이 다 기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염려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딱 한가지가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또한 목숨이 살아있는 한 해야할 일입니다.
본문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순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야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보면 모두가 첫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안 받으십니다. 자식도 첫 자식을 바쳐야 하고, 양도 처음에 태어난 것을 바쳐야 하고, 곡식도 첫 것을 드려야 합니다(출23:19, 레2:14, 4:21). 첫 월급타면 어떻게 해야 합니다. 부모님 속옷을 먼저 사드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가인은 그 제물이 첫 것이라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저 유명한 ‘앤드류 보나’라는 사람은 세 가지 중요한 인생의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드리기 전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째는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떠한 책도 읽지 않는다.

여러분! 이제 우리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시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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