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3) – 환경과 가르침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3. 좋은 사람(3) – 환경과 가르침 ) / 본문 : 눅 19:47-48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미얀마의 전설에 어떤 토기장이가 한 세탁소가 번창하는 것을 시기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세탁소 주인이 사업을 못하게 하려고 황제를 설득하여 왕실의 검은 코끼리를 희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습니다. 세탁소 주인은 황제에게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큰그릇이 필요하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토기장이에게 그 그릇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토기장이는 황급히 커다란 그릇을 만들어 세탁소 주인에게 배달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그릇은 곧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계속 다른 그릇을 만들었지만 코끼리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을 망치려고 한 그 계략 때문에 결국 망하게 된 것은 토기장이 자신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기심이 별로 해롭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에 덮여 보이지 않는 불씨 같아서 끝내 큰불을 일으키고 자신을 파괴합니다. 당신은 요즘 누군가를 향한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는지요?

좋은 사람이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스스로 올라가셔서 7일간의 일정을 보내십니다.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신 곳은 예루살렘성전이었습니다. 45-46절에 보면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바꿔주는 사람, 제사에 필요한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 언급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직접 운영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협조와 묵인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다.”고 책망 하셨습니다. 책망만 하시고 마치신 것이 아니라 본문에 보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일반적인 상황으로 보면 예수님이 지금 한가하게 사람들 가르치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한참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입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의 제사를 주관하는 최고의 사람입니다. 서기관은 성전의 서기로서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는 따를 사람이 없는 율법에 관한 한 최고의 지식층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된 백성의 두목들은 산헤드린의 70인 장로회의로 당시 이스라엘의 임시정부와 같은 기관이며 최고의 입법기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와 함께 하는 군중을 빼 놓고는 당시의 모든 권력층과 지식층이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르치시는 일에 몰두하신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의 기간을 가르치시는 사역에 몰두하셨습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결에 따라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시냇물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반대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친 물결을 헤치며 위로 올라갑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세상의 조류에 따라 떠내려가는 자들이 아니라 거친 물결을 헤치며 위로 올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무려 14장에 걸쳐 길게 소개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의 이야기를 형들에게 하여 형들의 미움 받아, 형들은 구덩이에 넣어 죽이려고 했지만 르우벤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족속의 장사꾼들에게 팔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집승 들이 찢어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에게 그가 입고 있던 옷을 가져다 줍니다. 아버지 야곱은 옷을 찢으며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창37:34). 요셉은 아버지에게 인사도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관계없이 종으로 팔려갑니다. 종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요. 종은 자신의 인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속된 말로 표현하면 이런 개 같은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자기의 입장을 비관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가 박탈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배신 당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인 것입니다. 상단에 끼어 애굽으로 내려가는 요셉의 처지를 생각해 보세요. 기막힌 것 아닙니까? 자기가 원하던 일도, 가고싶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팔려 가는 종일 뿐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 팔려갑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총무가 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만 요셉에게 눈길을 보냅니다. 그리고 같이 자자고 보챕니다. 얼마니 끈질기게 요셉을 유혹하는지 창 39:10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여기에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굴뚝에서 연기날 일은 하지도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불의한 환경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악에게 기회를 제공할 빌미를 주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웁니다. 강제로 겁간코자 했다고 하며 요셉의 옷을 강제로 찢고 소리를 지릅니다(창39:14). 이 일로 요셉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에게 또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누명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바로의 신하 두 사람이 갇혀있을 때 그들의 꿈을 해석하여 그가 바로에게 돌아갔을 때 바로가 꿈을 꾼 것을 해몽하기 위해서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요셉의 그의 형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난 뒤에 하는 말입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고 했습니다. 요셉에게는 꽁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이 처한 환경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형들이 팔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룟유다에 의해서 요셉이 팔렸던 것처럼 은 30에 팔리지만 지금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실 때에는 예수님이 팔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잡아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월절이 다가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원문은 “ejxekrevmato(에크레마토) aujtou’(아우투) ajkouvwn(아쿠온)”입니다.
“ejxekrevmato(에크레마토)”는 말하는 자의 입술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kremavnnumi(크레만뉘미)” 매달리다의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는 것입니다. “ajkouvwn(아쿠온) 들으므로”는 성경에서 13번 나오는데 복음서에만 9번나옵니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4번은 나오는데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와 나머지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나옵니다.
(마 13:20, 22, 23)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ajkouvwn(아쿠온)”은 그냥 ‘말씀’ 하고는 다릅니다. 이 것은 이미 들었다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들은 상태를 말합니다. 못 들었다고 할 수 없는, 부정이 불가능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말씀을 직접 들은 이 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의 씨가 분명히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키우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창세기 1:2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빛이 지어지고 천지가 지어지기 전의 그 모습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석 가들은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카오스의 세계’ 즉, 무질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우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카오스, 즉 무질서에서 우주가 지어졌는데 이 무질서를 수습하는 첫 번째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빛을 지었습니다. 이 빛이 드러나자 무질서가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의 이 빛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보아야 됩니다. 첫째, 생명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생명의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밝음입니다. 우주에 흑암이 물러가고 밝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잘 연상해 보면 마치 연극의 막이 열리는 한 장면과도 같은데 여기에 교육의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후진국인 나라들에 가서 선교사님들하고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만일 이 땅에 미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사람의 문제요, 교육입니다.
태국에 가면 방콕 신공항이 1년 전에 새로 지어졌습니다. 규모로 보면 인천공항보다 두 배 이상이 크답니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에 와서 공항 직원들이 연수도 받았답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새로 만든 공항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옛날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는 인천공항의 시스템도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공항도 최신 시설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전문가들이 분석을 했습니다. 결과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만큼 처리를 못하는 겁니다. 환경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육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거두는 일입니다. 가르침의 사역이 없으면 혼돈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가르침이 없으면 무질서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 물질을 모으는 증권 잘 사는 방법과 잘 파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 세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첫 번째가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성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육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육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악랄한 북한의 공산정권이 왜 무너지지 않고 있느냐? 그 중에 하나가 강력한 교육입니다. 소위 말하는 당원교육입니다, 아주 철저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5호 담당 비서관을 둡니다. 다섯 가구씩 묶어서 가르치는 비서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구를 한 주간에 세 번씩 모아서 공산당원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떤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를 다 점검합니다. 이런 점 조직 교육과 철저한 수직적 당원교육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죽은 지가 14년이 되었지만 김일성 어록이나 주체사상이 그대로 학습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그대로 국민들 앞에 신으로 등장합니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교육이 북한 땅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제일 오락가락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육문제입니다. 어쩌면 교육제도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여기에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교육을 해도 역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육을 많이 시켰는데 자기 도그마에 도취되는 사람들을 많이 키웠다는 것입니다. ‘도그마’ 라는 말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은데 현 정부(노무현)가 들어서고 많이 들었던 말이 ‘코드’ 라는 말입니다. 코드가 도그마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공산체제도 하나의 도그마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많이 했는데 사람을 키워놓고 보니까 도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드가 안 맞으면 안 됩니다. 코드는 영어로 보면 전기코드가 아닙니다. 이념, 체제, 체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주 쓸모 없는 사람으로 형성되어버린 모습이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도그마에 취해 버린 사람, 제 잘났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자기 교회식 도취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ejxekrevmato(에크레마토)” 예수님의 입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육은 성장과정에서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끼쳐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자녀가 집을 나설 때 한국의 부모들은 “얘야, 누구한테도 지면 안 돼, 또는 때리고는 와도 매맞고 들어오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반면 일본의 부모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고, 미국의 부모들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 없는 하나님은 있어도 하나님 없는 나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배운답니다. 우리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결정하고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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