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3.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 본문 : 눅 14: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은 영성에 있습니다. 영성 그러니까 마치 환상이나 꿈을 꾸고 거품을 토하면서 방언기도를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은 물질, 성공, 출세, 명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는 개신교 목회자와 비교해 볼 때 독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세상의 가치에 덜 얽매어 있습니다. 한 사회학자 연구에 따르면 직업인의 정직 윤리 수준 평가에서 신부가 1위, 승려가 3위, 목사는 5위로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도덕성에 있어서 신부나 승려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에 대한 평가는 교회에 대한 평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전국 감리교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영성, 도덕성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말로는 영성을 위치지만 실상은 영성을 잃어가고 세상 적인 가치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2005년 8월 25일에 인천 국제 공항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향하던 항공기가 이륙 한 지 10분만에 5살 난 ‘제시카’라는 여자 어린아이가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쳤고 승무원들이 달려왔습니다. 승무원들은 아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해열 좌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있는지 확인을 했더니 의사 단체가 탑승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10여분간의 소생술 끝에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그동안 딸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인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 재미교포 의사는 “기압 차이로 인해서 아이의 감기 증상이 갑자기 악화돼 고열과 경련이 발생했다”며 “아이가 LA까지 12시간의 비행을 견디기는 무리”라고 소견을 밝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기장은 곧 바로 회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항공기는 승용차가 아니기 때문에 회항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는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100t에 가까운 충격이 더해진다고 합니다. 항공기 안전을 위해 중량을 최대한 줄여야 하고, 이에 따라 모든 항공기는 공항에 이착륙할 수 있는 무게 제한이 있습니다.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에 투입되는 기종인 보잉 747의 최대 이륙 중량은 388.7t이지만 최대 착륙 중량은 285.7t이어서, 착륙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기장은 고심 끝에 항공유를 버리기로 하고 인천 앞 바다 부근에 있는 항공유 방출구역에 약 16만 8000파운드(약 72.6t)의 기름을 쏟아 부었습니다. 착륙무게를 맞춘 항공기는 인천 국제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는 대기 중이던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회복된 후 귀가했습니다. 그리고 항공기는 재급유 후에, 처음 출발 시간보다 3시간 늦게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향했습니다. 이 날 항공회사는 기름 값으로 4,000만원, 이착륙료, 연결 승객 관련 경비로 1,000만원 등 모두 5,000만원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한 생명은 5,000만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가던 비행기가 되돌아 온 것처럼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방향을 예수께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손실이 있어도 감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일러 주시는 참된 기독교의 가치관과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누가복음 14장 1절에서부터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바리새인들이 따라다니며 엿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창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주 민감하게 생각하는 안식일 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사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바리새인)과는 달라야 된 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초대했습니다. 무언중에 이들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저 아래 어느 한쪽에 앉아 계시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예수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까지는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잔치자리는 디귿 자 형태로 되어있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막 12:38, 39).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윗자리에서 보면 내려다 보게됩니다. 전체를 다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는 뉴스를 보다가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깜도 안 된다.” 자꾸만 그런 말을 하는데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국어 지식이 깊지는 못하지만 국어를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인데 이 말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통령 때문에 이 말을 그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알았습니다. 높은데 계시니까 “깜도 안되겠지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멀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보일랑 말랑해서 자연스럽게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높은 자리는 영적인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낮은 자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그 자리가 겸손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게 해 주며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과 지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으면 가난한 사람,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윗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은 낮은 자리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신 모습입니다.
집회서 10:12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데서 시작되고 사람의 마음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질 때 생긴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주님께서는 오만한 민족을 뿌리째 뽑아내시고 그 자리에 겸손한 자들을 심으신다”고 하셨으며 18절에서는 “오만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진정한 높고 낮음

본문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눅 18: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와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가 나옵니다. “낮아지고”(will be humbled, NIV)와 “높아지리라”(will be exalted, NIV)의 문장은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높고 낮아짐이 인간의 편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높아진 것이 아니며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낮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그리고 사울은 이 일 후에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여인들의 말을 듣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은 나누어 집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유다에는 20명의 왕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1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고, 유다에만 8명의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선한 왕으로 보는 유다 8대왕 요아스는 말년에 우상을 섬겼으며(대하 24:1-27), 10대왕 웃시야는 자기가 제단에 분향하려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대하 26:16-23). 왕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만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상좌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통전적 선교

통전적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에 응답하는 선교입니다. 통전적 선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처럼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가 무엇인지 PMI(무슬림이 사는 지역에서 사회 봉사하는 미국의 선교단체. www.pmi-usa.org)의 사이트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통전적 선교란 “복음의 말씀과 행위로 선언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만이 선교적 명령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모습을 예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선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의 축복과, 경제적 축복, 민주 자유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현재 에리트리아에는 목사와 성도들 포함하여 약 2천명이 불법 구금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작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4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올해) 9월 5일 미그치 하일레(33, 여) 자매가 웨아 군사훈련기지에 수감되어 가혹행위를 장기간 당한 끝에 사망했습니다. 하일레는 예수를 부정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여 장기간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었습니다.

우리가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출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남에게 다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뿐인 생명도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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